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62화 (262/422)

262화 공을 차는 이유 (5)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크리그는 눈을 감으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선발이라고 통보받은 순간을.

선수 선발은 보통 경기 당일 한 시간 전까지 말해 두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간혹 예외도 존재한다. 이번 아탈란타전을 앞두고, 크리그의 선발만은 며칠 전부터 미리 공지되었다.

일과를 마치고, 감독 사무실에 불려온 크리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응? 어디 가려고?”

“감독님이 굳이 미리 부르시는 거 보니 저한테 아주 험한 임무를 맡기시려는 것 같아서요··· 사람 험하게 쓰시기로 유명하시잖아요.”

입맛을 다시는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크리그는 자신의 예상이 반쯤 맞았음을 확신했다.

“농담입니다. 그래서 뭡니까? 말씀만 하시죠. 어떤 역할이든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미끼 노릇도, 상대 수비에 균열을 내는 역할도··· 아니면, 포스트 플레이도요.”

세 가지 역할 모두 썩 자신은 없었지만, 팀이 원한다면 기쁘게 시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실 크리그는 다양한 역할 자체는 꾸준히 연습하는 중이었다.

아침마다 바스티아노, 그리고 베리와 함께 훈련하기 때문에 기회는 충분했다.

하지만 감독은 크리그에게 새로운 역할을 주문하지 않았다.

“아탈란타전에서 네가 할 플레이는, 네가 팀에서 가장 오래 해온 역할이야. 그러니까···.”

잠시 후 이어진 브라이언의 이야기는, 크리그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진심이십니까?”

“응. 너 말고는··· 그 역할을 맡길 사람이 없다.”

* * *

오늘 경기를 치르는 아탈란타의 홈, 게비스 스타디움에는 당연하게도 이미 리지가 다녀간 상태였다.

[태양의 위치는··· 21번 그라운드가 가장 비슷하겠구나.]

잔디의 느낌은 물론 경기장의 소음까지 녹음해서 재현했고, 검수까지 받았다. 물론 리지는 이탈리아어를 모르기 때문에 바스티아노가 함께 살폈다.

[어··· 이 목소리는 아탈란타 팬이 아니군요. 베로나 팬이 틀림없습니다.]

[그런가요? 경기장에서는 아탈란타 어쩌고 하던데요?]

[라이벌이니까요. 자세한 건 여성분께 들려드릴 만한 내용이 아니지만, 대충 나가 죽으라는 내용으로 넘기시면 됩니다.]

바스티아노의 설명에 리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요. 우리 관중석에서 뉴캐슬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의 느낌이라는 거죠?]

[네. 대충 비슷할 겁니다.]

대답하는 바스티아노의 단정한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에게 욕하면서 웃는 괴팍한 버릇이 있는지 잠시 의심하던 나와 리지는, 이탈리아 출신 미남 공격수의 고향이 베로나임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원하시면 아탈란타를 욕하는 버전의 이탈리아어 녹음, 아주 기막히게 뽑아 드릴 수 있는데요.]

바스티아노의 목소리는 농담처럼 가벼웠지만, 표정은 의외로 진지했다.

하긴, 그가 이탈리아에 머물던 시절 당했던 각종 폭언이나 욕설, 모욕은 정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모든 이탈리아가 그의 적으로 돌아섰을 정도였으니··· 받았던 만큼만 돌려줘도 상당할 것 같긴 하다.

잠시 나와 시선을 마주친 리지가, 재빨리 거절했다.

[사양하죠. 마음만 받겠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 오늘 경기장을 충실히 재현했기에, 선수들은 마치 우리 홈에서 싸우는 것처럼 능숙하고 편안한 움직임을 보였다.

볼 컨트롤은 훌륭했고 패스워크는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점수를 가져오는 거구나!”

희주가 명랑하게 외쳤다. 손에는 최고급 젤라또를 들고서.

“그 이전에 선행 작업이 있지.”

“아 참, 오늘은 아탈란타의 공격력을 억누르는 게 숙제였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희주는 젤라또 한 스푼을 추가로 퍼먹었다.

“음, 크리그 선수가 잘할 수 있으려나? 자신 없는 역할일 텐데.”

우리는 오늘, 크리그를 일종의 ‘디펜시브 포워드’로 이용해, 전방에서의 적극적인 압박을 주문했다.

의외로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은 이래 크리그가 가장 많이 시도했던 플레이였다. 그저 결과가 썩 좋지 못했을 뿐.

우리가 3부 리그에 머무르던 시절, 하부 리그 득점왕급 공격력을 가진 크리그를 억제하기 위해 라일 파커가 주문했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크리그는 두 시즌 내내 완벽하게 침묵했고, 라일 파커는 무사히 승격을 회피하며 태업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내가 구단을 인수하기 전까지.

어쩌면 전방 압박이나 연계 플레이는 크리그의 몸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는 그 플레이를 굳이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 * *

한편, 경기를 지켜보던 브라더스 사이에서는 슬슬 우려의 목소리가 흘렀다.

“이거, 괜히 명장병 도진 거 아닌가 모르겠네.”

“명장병?”

맥주집 사장의 질문에, 브렌든이 부연했다.

“그 왜, 챔스만 나가면 평소 안 하던 짓 하다가 알아서 자멸하는 감독들 있잖아.”

그러면서 브렌든은, 감독 몇 명의 이름을 거론했다. 리그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막상 토너먼트에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인물들을.

앨리스가 곧바로 부정했다.

“저는 그런 이야기는 결국 결과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결과론이라고?”

“네. 만일 리그에서 늘 쓰던 전술로 나갔다가 지면, 변화를 안 주니까 읽혀서 졌다고 까이잖아요?”

“하긴, 그건 그렇단 말이지.”

말문이 막힌 브렌든 대신, 이번엔 핫도그 사내가 끼어들었다.

“전술 변화는 좋다 이거야. 그런데 크리그에게 전방압박 시키는 건 좀···.”

“어머, 저는 이번 전술이 꽤 합리적으로 느껴지는걸요?”

“합리적이라고?”

“축구계에 전해지는 명언도 있잖아요? 그 어떤 천재 플레이메이커의 완벽한 패스보다, 그냥 역습 상황 한 방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이야기요.”

앨리스의 설명은 브라더스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공격수에게 전방압박을 시키는 이유는 당연히 상대의 후방 빌드업을 방해하려는 것이지만, 상대 진영에서 공을 빼앗는 데 성공하면 그대로 결정적인 찬스가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포지션 특성상 스트라이커인 크리그는 주로 상대 센터백을 상대하는데, 만일 전방압박에 성공한다면, 높은 확률로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앨리스의 설명에도 핫도그 사내는 만족하지 못했다.

“너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선덜랜드는 예전에 크리그에게 전방압박 시켰던 적이 있어. 그런데 당시 크리그는 골이라고는 거의 넣지 못했단 말이야··· 무슨 의미인지 알지?”

“···빼앗지 못했다는 뜻이죠. 압박에만 성공하면 곧바로 득점 찬스였을 테니까요. 크리그의 골 결정력을 고려하면, 하부 리그 시절엔 뺏기만 하면 백발백중이었을 거에요.”

“그렇지··· 다른 감독이면 몰라도, 브라이언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당시에도 스태프였으니까 알 텐데!”

핫도그 사내가 분통을 터트리는 사이, 마침 스크린에는 공을 돌리는 아탈란타 센터백을 향해 지체 없는 압박을 시도하는 크리그의 모습이 잡혔다.

확실히 크리그의 압박은, 중계로 보기에도 꽤 빈틈이 많고 동작이 엉성했다. 선덜랜드 중원에서 잭이나 요니, 톰슨이 보여주는 체계적인 압박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의외로 크리그의 압박에는 성과가 있었다. 비록 공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요령 좋게 아탈란타의 패스 방향을 제한해냈다. 압박의 원래 목적은 상대의 패스 루트를 줄이려는 것이니, 이만하면 꽤 훌륭한 성과인 셈이었다.

잠시 후, 앨리스가 눈을 빛냈다.

“저, 알았어요! 크리그에게 전방압박을 시키는 이유를!”

“나도 알아. 브라이언이 갑자기 명장병에···.”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앨리스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렸기 때문이었다.

“메시와 함께 나갔기 때문이에요!”

* * *

경기를 내려다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공을 뺏으라고 크리그에게 압박을 지시한 건 아니었는데.”

정말로 상대 센터백에게 공을 빼앗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면, 우리는 그냥 잭이나 요니를 최전방에 올렸을 것이다. 오늘 크리그가 최전방에서 적극적인 압박에 나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아탈란타는 유럽 최강의 창으로 통할 만큼 화끈한 공격력을 자랑하지만, 수비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비수가 공격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풀백의 공격 가담은 당연하지만, 이 팀은 센터백도 심심찮게 올라간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메시를 출전시켰다.

잘 알려진 것처럼, 메시는 주로 상대의 바이털 에어리어에 머무르는 선수다.

전성기의 활동량은 없지만, 여전히 한순간의 폭발력은 남아 있다. 어지간한 센터백 한 명 정도를 무력화하는 것은, 축구의 신에게는 너무 간단한 일이다.

즉, 어지간히 간 큰 감독이 아니면 항상 자기 진영에 선수를 두 명 이상 남겨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옆에서 크리그까지 빨빨거리며 압박에 가담하면 어떻게 될까?

아탈란타의 쓰리백 세 명이 모조리 후방에 머물렀고, 풀백의 오버래핑도 상당히 눈치 보면서 하고 있다··· 인원이 줄어드는 만큼, 그들이 자랑하는 특유의 조직적인 공격력 또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브라이언과 샐리가, 경기 전 장담했던 대로 아탈란타의 공격을 훌륭히 억제해낸 것이다.

“자, 이제 아탈란타는 어떻게 나오려나?”

수비수의 전진 없이 평범하게 중원 싸움을 거쳐 천천히 공을 전진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잭과 요니가 버티는 우리 선덜랜드 중원은 점유율 싸움에 아주 강한 편이었다.

그리고 롱 패스로 단숨에 중원을 건너뛰는 형태의 공격 전개를 시도할 경우, 에디와 이고르라는 거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철벽으로 이름 높은 수비진이 기다린다.

만일 내가 아탈란타 감독이었어도 고르기 힘들 만큼, 무척 고민스러운 선택이었는데, 문제는 축구에는 작전타임이 따로 없다는 점이었다.

크리그가 패스길 하나를 가로막은 상태에서, 아탈란타 센터백이 시도한 전진 패스를 요니가 곧바로 가로챘다.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우리 벤치에서는 브라이언이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잭, 올라가! 베리! 너도 달려! 역습이다!”

그 지시는, 이윽고 이탈리아까지 따라온 우리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에 묻혀 버리고 만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요니의 패스가 달려드는 잭에게, 다시 측면을 질주하는 베리에게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메시가 비스듬히 전진했다. 아탈란타 수비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교묘한 위치선정이었다.

축구의 신을 무시하는 것은, 아탈란타 센터백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후,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크리그에게 공이 전해졌다.

로빙 스루 패스, 남지중해의 푸른 하늘 아래에 살짝 뜬 공, 뛰어오르는 선덜랜드의 22번 스트라이커를, 나는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공을 차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양하다.

선덜랜드의 주장 잭이라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팬들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며, 마르틴이라면 ‘프로니까, 돈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곧 선덜랜드에 합류할 카메룬의 유망주 디아라는, 고향의 가족들을 위해 축구하고 싶다고 이미 말한 적이 있다.

크리그의 경우, 대답은 간단했다.

‘날, 축구선수로 남아있게 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압박 플레이에는 예나 지금이나 썩 자신이 없었다. 오늘은 비교적 잘 먹혔지만, 따지고 보면 아탈란타 감독의 허를 찌른 선덜랜드 코칭스태프의 전술적 승리였다.

옆에서,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과시하는 축구의 신도 빼놓을 수 없다. 메시가 없었다면, 크리그는 지금처럼 쉽게 마크를 따돌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선덜랜드를 챔스권으로 끌어올린 상황에서도, 그에게 변함없는 신뢰와, 선수로 뛸 기회를 주는 사내를 위해서···.

‘놓치지 않아.’

크리그의 발이, 마치 가위처럼 허공에서 교차했다.

시저스 킥이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하나둘씩 고개를 떨구기 시작한 홈 팬들의 침묵과, 선덜랜드 원정 팬의 뜨거운 환호 속에서, 크리그는 자랑스럽게 왼쪽 가슴의 엠블럼에 주먹을 올렸다.

* * *

“그리고 사소한 거지만, 의외의 징크스가 있더라.”

“응?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러시겠지. 내가 굳이 고오오급 이탈리아 젤라또를 조달한 이유가 뭐겠어. 부두술사 입 틀어막으려고 하는 거지.

물론, 혹시라도 희주가 다이어트한다고 하면 기쁜 마음으로 응원할 생각은 있긴 하다. 먹여서 응원하는 게 여동생을 대하는 바람직한 오빠의 자세거든.

물론 다이어트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희주가 젤라또를 무참히 전멸시키는 사이, 나는 낮게 덧붙였다.

“우리는, 크리그가 득점한 공식전에서 진 적이 없다더라고.”

신입 분석관 토마스의 보고였다.

“토마스 씨 엄청 혼났겠네! 샐리 씨는 징크스 같은 거 미신이라고 안 믿는 성격이잖아?”

“나름대로의 이유를 분석해내긴 하더라.”

크리그를 출전시키면 아무래도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상황에서도 득점 찬스를 만들어줄 정도라면 당연히 우리가 경기를 유리하게 풀어나갔다는 증거라는 게 샐리 버전의 해석이었다.

“음, 갑부 오라버님 버전의 해석은?”

“내 해석은 뻔하지 뭐. 중요한 건 결과라는 게 투자자의 마인드 아니겠어?”

결과적으로, 크리그의 징크스는 이어졌다. 그는 멀티골을 기록했고, 우리는 아탈란타 원정을 승리로 장식하며 챔스 16강 진출에 코앞까지 다가갔다.

[아탈란타 1 - 3 선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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