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벽을 넘기 위해 (1)
<축구는 위험을 수반한다. 위험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경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선 브라이언의 외침은 필사적이었다. 2차전의 득실 관리 같은 것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스티븐! 전진해! 브루노! 올라가서 받쳐 줘! 잭! 더 넓게!”
지시의 목적은 명확하다. 어디까지나 마르틴과 베넷을 자유롭게 날뛰게 하려는 것. 그를 위해 라이트백 브루노가 미드필더처럼 움직여 중원 싸움에 가담하고, 잭은 측면 수비를 지원하라는 지시다.
팀의 역량을 왼쪽 측면에 몰아버리는 감독의 지시에, 우리 왼쪽은 결사적인 돌파로 보답했다.
마르틴의 돌파는 맹렬했지만, 평소의 발재간은 선보이지 않았고 움직임은 간결했다. 어쩌면 개인기 쓸 시간조차 아깝다는 것처럼.
“한 명!”
특유의 플립 플랩 대신, 아웃프론트로 공을 그대로 밀어내고 이동한다. 패스 앤 무브. 그때마다 베넷이 따라붙어 짧은 패스를 되돌렸다.
평소 개인기를 활용한 단독 돌파에 치중하던 마르틴에게, 지금처럼 패스를 주고받으며 동료를 이용한 돌파는 신선한 장면이었다. 뮌헨의 수비를 현혹시키기에도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마르틴은 단숨에 뮌헨의 측면을 흔들며, 어태킹 써드까지 진입했다.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꺅!”
희주의 새된 비명과 동시에, 마르틴의 몸이 태클에 굴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없이 앞으로 흐른 공을 베넷이 곧바로 이어받았고, 주심이 곧바로 양손을 앞으로 뻗어 어드밴티지를 선언했다.
“아 진짜, 못 보겠어.”
희주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거린다. 원인은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레프트 윙포워드가 잔디 위를 구르는 장면은 희주에게는 트라우마일 테니.
나는 상대적으로 침착했다.
“괜찮아. 다치지 않았으니까.”
원래 팀의 드리블러는 누구보다 태클을 많이 당하는 포지션이라, 항상 나름의 대비를 하는 법이다. 태클을 당하는 순간 마르틴은 확실히 자신의 몸을 띄워 충격을 완화시켰다.
애초에 선수가 다칠 정도의 심한 파울이었다면, 저 위치에서 어드밴티지를 주지는 않는다. 대신 수비에게 곧바로 카드를 먹였겠지.
흘러나온 공을 확보한 베넷이 마침내 박스에 진입했다.
* * *
박스 안쪽에 파고들면서, 베넷은 슬쩍 곁눈질을 했다. 느릿한 동작으로 일어나는 마르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동료는 다치지 않았고, 바이털 에어리어까지 무사히 공을 가져왔다. 이제, 동료가 마무리하지 못한 마지막 한 걸음이 그의 몫으로 넘어왔다.
‘위치는 박스 안, 지키는 수비는 둘, 그리고 옆에는···.’
선덜랜드의 주전 스트라이커 바스티아노가 버티고 있으니, 실로 결정적인 찬스였다.
다만, 베넷의 앞을 가로막은 상대 역시 강력했다. 어지간해서는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철벽이었으니.
전성기가 지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뮌헨의 넘버원인 사내, 노이어와 그 앞을 지키는 자신의 오랜 라이벌, 뤼카의 모습을 노려보며 베넷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저 둘을 모두 뚫어낼 확률은 없겠지.’
베넷은 흔히 말하는 만능 레프트백으로, 준수한 드리블과 날카로운 킥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박스 안에서 활약하거나, 노이어와 뤼카를 모두 뚫어낼 정도의 공격력은 없다. 만일 그랬다면 진작에 포지션을 바꿨을 것이다.
다만 베넷은 영리하고 합리적인 선수다.
베넷은 신중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골키퍼가 각을 좁히러 뛰어나오지 못하도록, 그리고 복귀 중인 뮌헨의 수비에게 잡히지 않도록.
그렇게 골키퍼를 묶어둔 베넷은, 바스티아노에게 날카로운 패스를 보냈다. 자신이 직접 마무리하는 것보다 확률이 훨씬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책이었을까. 뮌헨의 골문 앞을 지키던 뤼카의 몸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마치 패스를 읽고 있었다는 것처럼.
“당연히 패스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우리, 호흡이 잘 맞는 것 같네.”
뤼카의 미소는 청량하다 못해 상큼할 정도였지만, 베넷에게는 절망이었다. 사이드라인 너머,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칠만 명 뮌헨 팬들의 환호와 갈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환호 속에서, 힘찬 목소리가 들린다.
“베넷! 잘했어! 계속, 계속 올라가! 요니, 마르틴 쪽으로 계속 공을 보내!”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미친 듯 팔을 흔들며 외치는 감독 브라이언을 보며, 베넷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 * *
한 차례의 반격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도, 우리는 조금도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여전히 공격은 주로 왼쪽에서 이루어졌다. 스티븐과 브루노가 있는 오른쪽보다, 마르틴과 베넷의 왼쪽 측면이 훨씬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가를 치러야 했다.
최종 수비라인에서는 에디와 이고르가 평소보다 넓은 범위를 책임져야 했고, 주장 잭의 헌신적인 측면 커버도 필요했다.
그런데도 레프트백이 수시로 올라가는 리스크를 지워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가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을 때마다, 뮌헨에게도 절호의 역습 찬스가 찾아왔다.
- 브라이언 또 명장병 도진 거 아님? 알리안츠에서 한 골 먹더니 바로 급발진하네?
- 그러게. 선덜랜드 같은 홈 깡패는 오늘 그냥 적당히 버티다가 2차전에서 잡아먹는 게 훨씬 낫지 않나?
알리안츠 아레나가 그 자체만으로도 홈팀의 힘이 되는 경기장인 것처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오늘은 추가 실점을 주지 않고 버티다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역전하는 게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홈 팬의 함성, 그 뜨거운 목소리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면서, 왜 굳이 이 경기장에서 무리하는 거냐고.
답은 간단하다. 홈에서만 이길 수 있는 팀은, 진지하게 챔스를 노릴 수 없기 때문이다.
16강부터 준결승까지는 언제나 홈 앤 어웨이, 다시 말해 절반은 원정 경기다. 게다가 결승은 기본적으로 중립 구장에서 펼쳐진다. 물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챔스 결승을 유치했지만, 그것은 두 시즌 뒤의 이야기가 된다.
두 시즌 뒤, 우리 홈에서 치르는 챔스 결승은 반드시 따내고 싶다. 팬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며, 내게도 무척 의미 있는 업적일 테니. 하지만, 선덜랜드의 첫 번째 챔스 트로피가 홈 버프빨이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우리는 그 이전에 빅 이어를 가져와야 한다.
팬들을 등에 업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무적불패의 경기장인 것처럼, 칠만 명이 집결한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뮌헨을 압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래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기를.
“달려.”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소리가, 거친 맥켐즈 사내들의 외침, 블랙캣츠의 함성이.
그 위에 내 목소리를 실었다.
* * *
“달려!”
핫도그 사내의 외침은, 몸집만큼 거대했다. 거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아무도 나무라지는 않았지만, 핫도그 사내는 제풀에 찔끔해 목을 움츠렸다.
“어··· 미안, 조심할게. 잘못하면 이웃집에서 민원 들어오겠다.”
정작 집주인 마일즈는 개의치 않고 외친다.
“더 크게 외쳐도 괜찮아··· 달려!”
“정말 괜찮아?”
이번엔 브렌든이 대신 대답했다.
“민원 넣을 이웃은, 다 여기 와 있어.”
브렌든은 물론 빌리 노인까지 합류했으니, 마일즈의 이웃은 죄다 몰려와 있긴 하다.
그 사실을 거론하자 핫도그 사내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고, 맥주집 사장은 심호흡까지 해 가면서 볼륨을 높였다.
“때려!”
“부숴버려!”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덜랜드는 결사적인 공격을 반복했고, 어느새 경기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꼭··· 우리 홈 경기 같네요. 우리가, 천하의 뮌헨을 가둬놓고 패고 있으니까요.”
수잔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빌리 노인이 눈을 깜빡였다.
“대충 듣긴 했는데, 저 독일 팀이 그렇게 센가?”
“분데스의 최강팀이에요.”
“그럼 다들, 정말로 잘 싸우고 있는 거구먼.”
“네.”
대답하면서도, 수잔과 빌리 노인을 제외한 나머지 팬들의 표정은 그렇게까지 밝지는 않았다.
관점에 따라서는 가둬놓고 패는 경기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뮌헨은 선덜랜드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지 않은 채 모조리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그 와중 가끔씩 날카로운 역습까지 해냈으니, 사실은 위태로운 장면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위기는, 베넷이 올라간 왼쪽에서 발생했다.
“평소 같으면 베넷을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쓰지는 않을 텐데.”
“별수 없죠. 아무 리스크 없이 뮌헨을 알리안츠에서 잡아낼 수 있는 팀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 리스크 때문에 우리가 먼저 깨질 것 같아서 하는 이야기지.”
선덜랜드의 왼쪽 측면에서, 또 한 번 뮌헨이 좋은 찬스를 맞이했다. 브렌든을 몸서리치게 만든 예리한 슈팅이, 필사적으로 몸을 날린 하퍼의 손끝에 걸렸다.
* * *
“아, 진짜 심장에···!”
희주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나는 목에 힘을 주었다.
“세컨볼 잡아!”
골문 앞에 힘없이 흘러나온 공을, 에디가 슬라이딩으로 걷어냈다. 그제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밀어넣었다.
하지만 오래 앉아있지는 못했다. 다시 손에 땀을 쥐는 국면이 펼쳐졌기에.
에디가 걷어낸 공 앞에 요니가 나타난 순간, 무릎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금, 최전방에는 바스티아노와 메시가 있다. 당연히 골을 노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뮌헨이 섣불리 역습에 나서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목적도 반쯤 섞여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철저히 마크당하는 중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 뮌헨의 수비에는 순간적인 공백이 있다.
또다시 무릎이 꿈틀거린다 싶은 순간, 요니가 왼쪽 측면에 전진 패스를 넣었다. 이미 전방에 올라가, 수비를 등진 채 공을 받아낼 준비를 하는 베넷과, 타이밍에 맞춰 안쪽으로 파고들려는 마르틴을 향해.
“때려.”
무심코 혼잣말이 나왔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구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서.
베넷은 신체조건만 따지면 센터백을 볼 수도 있는 선수고, 상대 풀백을 등지고 공을 따내기 충분한 파워의 소유자였다.
이제 패스를 받은 베넷이, 파고드는 마르틴을 향해 발뒤꿈치로 공을 다이렉트로 전달하면 결정적인 찬스가 나오겠지.
“바로 때려!”
그래서 외쳤다. 그 결정적인 찬스는 아마, 뮌헨 선수들의 눈에도 똑같이 보일 것이기에.
잠시 후 베넷이 패스를 그대로 뒤로 흘린 것과 동시에, 뮌헨의 뤼카가 마르틴을 추격했다. 미리 예상했다는 것처럼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이었다.
다만, 베넷의 패스는 마르틴에게 향하지는 않았다.
“···턴!?”
희주의 혼잣말을 효과음으로 삼아, 베넷이 몸을 돌렸다. 아주 매끄러운 동작은 아니었지만, 뮌헨의 수비를 현혹하기에는 충분했다.
순간적인 움직임에 뮌헨 수비진의 대응이 딱 한 걸음 늦었다. 빈 공간으로 흐른 공에 가장 먼저 도착한 선수는, 온전히 몸을 돌린 베넷이었다.
잠시 후, 철벽처럼 보이던 뮌헨의 골네트가 흔들렸다.
[뮌헨 1 - 1 선덜랜드]
어느새 나는 난간에 매달려, 스스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함성을 지르는 중이었다.
* * *
브라더스는 일제히 두 주먹을 움켜쥐었고, 빌리 노인은 뒤로 드러누우며 포효했다. 우드 부부가 서로 격하게 포옹하는 사이, 앨리스는 크리스의 요람에 매달려 환호했다.
[뮌헨 1 - 1 선덜랜드]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휘슬이 울렸다. 선덜랜드는, 원정에서 정말로 값진 무승부를 따낸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요. 이거, 베넷의 선덜랜드 첫 골인데요!”
감격해서 반쯤 울먹이기 시작한 앨리스를 향해, 크리스가 손을 기운차게 흔들었다.
“꺄아!”
“응, 괜찮아, 누나 안 울어.”
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앨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어른들 사이에서, 브렌든의 들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 오늘은 축배다! 밤새 달리···.”
“그 전에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극적인 동점골의 여운이 남아 있지만, 전반적으로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끊은 마일즈가, 앨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앨리스 양, 이렇게 원정을 나서면··· 보통 언제쯤 돌아오는지 알아?”
원래는 축구 팬이라도 쉽게 알 수 없는 정보였지만, 앨리스는 최근 선덜랜드 데일리와 일하는 중이기에 몇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내일 인터뷰 일정도 있고··· 주말에 바로 리그 경기니까, 독일에 오래 머무르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쿨다운은 필요할 테니까··· 네다섯 시간쯤 걸리지 않을까요?”
그러자 마일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응? 술 마시러?”
“아니.”
마일즈가 털어놓은 계획에 브라더스가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앨리스의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떠올랐다.
“그러면, 규모를 조금 키워 보는 건 어떠세요?”
* * *
선덜랜드에 돌아오는 길은 조용했다.
경기 종료 직후에는 풋볼 스퀘어 주변이 꽤 시끄러웠던 모양이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16강전, 그것도 겨우 1차전이 끝났을 뿐이고, 따지고 보면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분주하게 움직인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설관리팀 멤버들이다.
[This is Sunderland]
공항에서부터 시티 오브 선덜랜드로 향하는 길에 플래카드와 우리 엠블럼을 빽빽히 내걸었다. 원정에서 돌아오는 선수단에 대한 환영과, 일주일 후 이곳을 찾아올 뮌헨에 대한 대비를 겸한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붉은 물결 속에, 생소한 글자가 보였다. 옆에서 희주도 목소리를 높인다.
“어? 오빠, 저건 못 보던 건데?”
시설관리팀이 준비한 세련된 플래카드와 달리, 손으로 썼는지 글씨는 삐뚤빼뚤, 심지어 조금 번지고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자세히 보니 그런 플래카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글씨체가 각각 다른 걸 보니, 여러 사람이 참여한 모양이다.
[Real Red and White]
빈말로라도 잘 뽑은 현수막이라고는 할 수 없는 물건이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세상 어떤 플래카드보다 근사하게 보였다.
뮌헨 팬들이 알리안츠에서 보여준 카드 섹션에 대한 우리 팬들의 답이니까.
희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 우리 다음 주에 지면 큰일 나겠다.”
“그러게.”
대답하면서, 나는 절대 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팬들이 있는 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선덜랜드는 불패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