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벽을 넘기 위해 (2)
뮌헨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두면서, 8강 진출은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의 2차전에서 판가름 나게 되었다.
원정 무승부는 절대 나쁜 성과가 아니었기에 우리 선수들의 기세는 드높았고, 특히 베넷의 플레이는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정규 훈련 세션이 끝나고, 분석실에 코칭스태프가 모두 모였을 때에도 베넷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원래 좋은 선수였지만, 최근 훈련에서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데뷔골이 긍정적인 기능을 한 게 아닐까요?”
“아마 복잡한 관계 때문이겠지.”
“복잡한 관계?”
“선수끼리의 라이벌리티는 의외로 오래가거든요.”
이번에 노스이스트 저널의 특집 기사 덕분에, 베넷의 사연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덕분에 이번에 베넷이 뮌헨 상대로, 그것도 뤼카 앞에서 득점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선수로서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샐리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죄송해요. 머리로는 알겠는데, 감이 잘 오지 않네요.”
“아니, 자랑하던 공감능력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여자들 공감능력 좋다면서?”
브라이언이 답답한 듯 가슴을 쳤지만, 별수 없다. 그녀는 선출이 아니니까. 이윽고 샐리와 함께 분석실 트리오를 이루는, 루벤과 토마스가 차례로 눈을 깜빡거렸다.
“감독님, 그나마 샐리 쟤··· 아니, 분석팀장님이 저희들 중에선 가장 선수 입장에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팀장님은 프로 선수의 딸이니까요.”
다시 말하면, 자기들은 샐리보다도 더 공감이 안 간다는 의미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내가 살짝 고민하는 사이, 브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자, 다들 살면서 좌절 같은 거 해 봤을 거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루벤은 A급 라이센스 시험에서 샐리에게 졌잖아?”
“채점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그랬죠.”
“예전부터 계속 졌다고 상상해 봐. 레벨 1, 레벨 2, 그리고 B급에서도.”
그러자 루벤의 얼굴이 구겨졌고, 잠시 후에는 두 손이 머리를 감쌌다. 상상력이 얼마나 좋은지, 급기야 자기 앞의 물건을 주섬주섬 누런 종이박스에 담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기껏 데려온 부팀장이 퇴직할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아까운 일인데, 퇴직 사유가 지나치게 뛰어난 상상력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라면 곤란하다.
나는 곧바로 희주에게 눈짓을 보냈고, 희주는 조용히 루벤의 손에서 종이박스를 빼앗았다.
브라이언이 웃었다.
“가만있어 봐. 아직 포기하긴 이르니까··· 그러다가 P급에서 드라마틱하게 벽을 넘는 거지.”
“역전승이군요. 뭐, 짜릿하긴 하겠군요.”
옆에서 토마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유가 이해가 되네요··· 그런데 설명하신 취지라면, 샐리 팀장님은 벽이 없지 않습니까?”
“응? 무슨 소리야. 여기 있잖아.”
자기 가슴팍을 손으로 가리키는 브라이언을 고의로 무시하면서, 샐리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네, 저도 이제 이해했어요. 자신감이 한참 붙겠네요.”
“우리가 8강에 나가면 더 붙을 겁니다.”
베넷이 뤼카보다 나쁜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비력이라면 센터백을 볼 수도 있는 뤼카가 낫겠지만, 공격력은 당연히 전문 풀백 베넷이 뛰어나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누가 더 나은 선수인지는···.
뭐, 다음 주에 정해지겠지. 나는 당연히 내 눈과, 내 선수를 믿고 있지만.
“선수 육성도 생각보다 힘드네요. 스무 살 중반인 베넷 같은 선수조차 라이벌리티를 신경 쓸 줄은 몰랐어요.”
샐리의 하소연에, 나는 미소로 답했다.
“뭐, 우리는 이미 지켜봤잖아요. 몇 년 전까지 세계 축구계를 양분해온 두 사람의 존재를.”
“축구의 신. 그리고 신의 라이벌 말씀이군요.”
만일 둘 중 누군가가 없었다면, 서로 지금의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돌렸다 싶으면 어느새 옆에 따라붙는 경쟁자의 존재는, 축구의 신에게 강렬한 동기부여를 제공했을 테니.
샐리의 얼굴에 평소와 똑같은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해했어요. 그렇다면 16강 2차전에서는 베넷 중심의 전술을 짜야겠네요. 마침 선수의 폼도 좋고, 동기부여도 최상이고, 이기면 베넷이 한 꺼풀 벗을 기회가 될 테니까요.”
“네. 하지만 그걸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하면 상대에게 읽힐 테니까요. 뮌헨 감독 나겔스만은 전술 천재잖아요?“
내 이야기에 브라이언이 무심코 인상을 썼다. 잠시 후 주위에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감독님께도 좋은 벽이 생긴 것 같은데요?”
* * *
한편 모로코의 축구 신동, 바르카를 마주한 샘 노인은 곤혹스러운 기분을 맛봐야 했다.
“나는 선덜랜드 관계자란다. 로저스 영감하고도 잘 알고.”
바르카를 좀 데려와 달라는 로저스의 부탁을 들었을 때, 샘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홀로 아들을 키워낸 사내였고, 자식 부부 없이 손녀딸을 키워 보기도 했다. 애를 다루는 경력을 따지면 선덜랜드의 전, 현직 관계자 중에서도 으뜸간다고 자부했다.
부탁을 들은 시점에서, 샘의 유일한 불만은 로저스가 은퇴하면 같이 드라이브나 다니자던 약속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바르카는, 샘의 예상과는 퍽 다른 소년이었다.
“요즘 애들을 너무 우습게 보시는 거 아닌가요? 아빠 친구다, 엄마 아는 사람이다, 그런 거는 20년 전에나 통하는 낡은 수법이죠.”
바르카의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고, 샘과 거리를 유지한 채 좀처럼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늙은 몸에 호락호락 붙잡히진 않겠지.’
샘의 노구로, 열 살짜리 소년을 붙잡기는 쉽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가 축구 신동 소리를 듣는 유망주라면 더욱.
“그러니까···.”
“맛있는 거 사 줄게도 안 통해요! 저 여기 와서 맛있는 거 많이 먹었거든요?”
“거참.”
샘이 혀를 차자마자, 바르카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도와주세요!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무서운 사람이 절 잡아가려고 해요!”
바르카의 외침에 곧바로 선덜랜드 관계자가 달려나왔다. 잠시 후 바르카는 뽀르르 달려가, 관계자의 등 뒤에 숨어 버렸다.
샘에게는 다행히도, 관계자는 잘 아는 사이였다··· 그의 손녀딸이었으니. 정말로 다행인지는 확신하기 어려웠지만.
상황을 파악한 리지의 눈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감히 선덜랜드 유소년 선수를 납치하려는 수상한 사람! 태양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 죄송해요. 할아버지.”
“됐다.”
입맛을 다시는 샘과 리지를 번갈아 흘끗거리며, 바르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라고요? 관리인님 할아버지세요?”
“응, 저분은 무서운 사람은 맞지만! 수상하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잘했어. 앞으로도 처음 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
“네, 관리인님! 로저스 할아버지한테 배웠어요!”
샘은 혀를 찼다.
‘몹쓸 영감쟁이 같으니라고! 자기가 데리러 와도 될 걸 굳이 나보고 시키는 게 영 이상하다 싶더니만··· 이 애를 시험해 보려던 거였구만.’
필요한 절차임은 이해하고 있었다. 이곳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모로코 소년 바르카에게는 이역만리 타국이니까.
구단 관계자가 항상 따라붙어 보호하지만, 그래도 납치, 유괴 같은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래서··· 정말로 저 데리러 오셨다고요?”
그제야 리지의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나오는 바르카를 향해, 샘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오늘은 아카데미 참관하는 날이니까. 혹시 운이 좋으면 훈련에 낄 수도 있을 게다.”
“정말요? 신난다!”
소년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했고, 친구들이 잔뜩 있어서 좋다는 감정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리지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샘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 미소를 지었다.
‘요 녀석, 눈빛 봐라.’
아직 어리지만, 바르카의 눈빛은 틀림없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것과 비슷했다. 축구 재능 하나만으로 이 자리까지 온 모로코 소년에게, 영국 클럽의 유소년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 혹은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우리 애들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텐데.’
* * *
바르카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이, 이게 뭐야!?”
무리도 아니다. 테오의 저 플레이를 처음 봤을 땐, 나도 숨 쉬는 걸 잊을 뻔했으니.
사포라는 개인기 자체는 유소년 선수라면 대부분 쓸 수 있다. 하지만 실전에서 상대를 세워두고 성공할 수 있느냐고 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심지어 테오의 사포에는, 상대의 시선이 위로 올라가는 순간 그대로 띄우던 공을 아래로 내려찍는 변형 동작이 있다··· 저 기술은 솔직히 나도 자신 없다.
“다시, 다시 해 봐. 응?”
자신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는 바르카를 향해, 테오가 키득거렸다.
“그야 어렵지 않지만 똑같은 플레이는 재미없지 않아? 새로운 거 보여줄까?”
“다른 게 있어?”
“예를 들면··· 이런 거?”
테오는 그대로 공을 몰아 바르카의 옆을 지났고, 어째서인지 역동작에 걸린 바르카는 저항하지 못했다.
입을 쩍 벌리는 바르카를 향해 테오가 웃었다.
“너, 잘하네?”
지켜보던 희주가 살짝 인상을 썼다.
“뭐야, 테오 쟤 지금 사람 놀리는 거야?”
“그렇지는 않을걸.”
바르카 상대로, 테오는 미묘한 숄더 페이크를 여러 차례 넣었고, 무릎도 조금 반대쪽으로 열어 보였다.
어지간한 유소년이라면 테오가 뭘 하는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묘한 움직임이었으니, 이 경우는 페인트에 걸렸다는 것 자체가 실력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고, 잠시 후 바르카가 테오와 똑같은 플레이를 우리 유소년들 상대로 시도할 때는 더 흐뭇해졌다.
그사이 유소년 감독 벤자민이 희주를 위해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자 희주는 만족했지만, 그 만족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부 오라버님? 천재 유소년들 보면서 입 찢어지는 기분은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쟤들이 챔스에서 뮌헨을 잡아줄 것도 아니잖아? 주말에 리그 경기 뛰어줄 것도 아니고.”
“뭐, 그야 그렇지.”
두 경기 모두 만만치 않다. 8강행을 놓고 결판을 벌여야 하는 챔스 16강 2차전은 말할 것도 없고, 주말의 리그 경기도 만만하지 않았다. 챔스 일정 때문에, 우리는 이번 주말에 로테이션을 돌려야 하는 핸디캡이 있거든.
“그럼 구단주님은 지금이라도 1군 훈련을 참관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나는 1군 감독이 아니거든.”
“전술은 브라이언 씨가 더 잘 짜니까 개입 안 한다는 뜻이야?”
“뭐, 그렇지··· 나는 내 할 일부터 잘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
“오빠 할 일? 축구 보는 거?”
어, 솔깃한데? 하루 종일 축구만 보면서 사는 건 내 오랜 꿈이거든. 내 표정을 살피던 희주가 몸서리를 쳤다.
“농담이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고. 뭐, 나도 알아. 구단주의 일은 팀을 강하게 만드는 거지? 여기서 유소년 관찰하는 게 무슨 상관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기다려 봐. 슬슬 올 때가 되었거든.”
잠시 후 발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선덜랜드 데일리 인턴 기자, 앨리스입니다!”
숫자 40이 선명한 우수한 스태프 후보를, 앞으로 팀에서 써먹을지가 내 일이다.
아, 그 전에 채용부터 마무리하고.
* * *
앨리스의 목에 걸린 취재진 신분증을 응시하던 테오가 불쑥 물었다.
“누나, 인턴이 뭐야?”
“인턴, 인턴.”
테오와 바르카의 질문 세례에 시달리던 앨리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음, 인턴은···.”
물론, 간단한 비유는 있다. 정식 기자가 1군의 프로 선수라고 치면, 인턴은 유소년 선수와 비슷한 개념일 테니.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열 살짜리 꼬마들에게 설명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다만, 앨리스는 그 비유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너희들 같은 거야 라고 말하자니, 어쩐지 비꼬는 것 같아서 어른스럽지 못하잖아?’
이제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앨리스에게, ‘어른스럽다’는 키워드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앨리스를 곤경에서 구한 것은, 유소년팀 주장 짐이었다.
“저희 애들이 실례했습니다··· 너희들, 계속 손님께 버릇없이 굴 거야?”
나이 차이가 좀 나는데도, 짐의 눈높이는 벌써부터 앨리스보다 살짝 높았다. 일단 키만 봐서는 장차 골키퍼가 되기 충분할 정도였다.
아직 얼굴은 소년답게 앳되지만, 체격은 좋았다. 아마도 매일 단련하기 때문일 거라고, 앨리스는 생각했다.
‘예전에 봤을 땐 얘도 그냥 꼬마였는데.’
선덜랜드 팬들에게, 짐은 꽤 유명한 존재였다. 지역 팬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정도이며, 앨리스 정도의 찐팬이면 어릴 때 모습도 기억한다.
앨리스는 짐의 성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테오와 바르카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저 누나가 예뻐서 반한 거지? 다 알아.”
까불거리는 테오를 따라, 바르카가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맞아. 예뻐서 반한 거야.”
“클라라한테 다 이를 거야.”
“이를 거야.”
“···하지 마라.”
짐의 눈이 순간적으로 사납게 반짝였다. 주장의 위엄에 마침내 시끄럽던 유소년들이 조용해지는 모습을 보며, 앨리스가 키득거렸다.
“역시 사랑의 힘···.”
“흠, 흠. 기자님?”
“농담입니다. 선덜랜드 유소년팀의 주장은 역시 대단하네요.”
“감사합니다. 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의젓하게 대답하는 짐을 바라보며, 앨리스 또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정통성과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을 자랑하는 소년 골키퍼는, 선덜랜드 팬의 자랑거리였기에.
그래서 앨리스는 끝내 눈치채지는 못했다. 눈앞의 소년이 매일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