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벽을 넘기 위해 (3)
“···오늘 오후에는 마침 뉴캐슬 유스와의 경기가 있죠? 지역 라이벌, 절대로 질 수 없는 더비 매치인데요.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역 라이벌과의 더비 매치는, 한국인인 우리에게 한일전이 주는 의미와 비슷하다.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도 질 수 없는 사이라는 뜻이지. 오죽하면 이곳 사람들 중에는, 위어타인 더비라고 이름 순서를 바꿔 부르는 경우도 흔하다.
앨리스의 질문에 대해, 짐은 깔끔하게 답변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더비 매치에 대한 팬들의 기대는 잘 알거든요. 저도 선덜랜드 출신이라서요.”
“기대하겠습니다. 저도 선덜랜드 사람이고, 팬이니까요!
그렇게 인터뷰 마무리가 마무리되는 동안,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 년씩 펜대 굴려 먹고 산 프로 기자들을 봐서 그런지, 앨리스의 인터뷰 솜씨는 썩 전문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앨리스가 경험이 부족한 아마추어고, 이제 겨우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린 소녀라는 점을 고려하면 재능은 확실해 보인다.
이마의 숫자는 40, 축구단 스태프로서는 정말로 파격적인 숫자다··· 샐리가 50이니까.
자타가 공인하는 전술 천재이자, 역사상 세 명뿐인 A급 라이센스 시험 만점인 샐리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앨리스의 40이 얼마나 파격적인 숫자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잔디 컨디션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잔디관리인 리지의 가치가 15, CS팀 부팀장 에이미가 10에 그칠 정도니까.
동시에, 앨리스의 보직이 고민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앨리스가 리지보다 잔디를 두 배쯤 잘 깎거나, 에이미보다 몇 배 뛰어난 CS 요원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리지와 에이미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고급에 속하는 인재들이다.
즉, 몸값이 40에 달하는 앨리스의 가치는, 적어도 CS팀이나 잔디 관리인으로 붙지는 않았다는 뜻이 된다.
분석팀이나 프레스팀이라면 어떨까?
분석팀이라면 샐리에 버금가는 수치이고, 프레스팀이라면 애니를 능가하는 가치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앨리스가 장차 샐리와 비슷한 분석 능력을 갖거나, 애니보다 훨씬 더 심금을 울리는 기사를 쓸 수 있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40이 붙는 이유는···.
“제너럴리스트겠구나.”
축구판 돌아가는 사정을 두루두루 알고, 축구단의 여러 업무에 대해 일정 이상의 지식을 갖는 타입. 전반적인 팀 운영을 맡길 수 있는 인재로, 구체적으로는 첼시의 마리나 같은 재능을 타고난 거겠지.
지금은 햇병아리지만, 앞으로 경력이 쌓이고 실력이 붙으면 단장, 혹은 그 보좌를 맡을 수 있는 인재다.
우리 팀에서라면 써먹을 만한 보직은···.
“응? 오빠, 갑자기 왜 나를 보는데?”
무심코 내 시선이 희주에게 쏠린 모양이다. 뭐, 그렇다고 내가 당장 희주를 귀가시키고 앨리스를 쓰겠다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희주의 업무 능력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기도 하거니와, 앨리스가 희주를 대체하는 건 여러 의미에서 불가능하거든.
일단 희주 밑에서 일을 배우게 시키는 것도 방법이긴 하겠지만, 못된 버릇이 옮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앨리스 정도의 달변가가 저주의 혀를 장착하면, 선덜랜드는 끝장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희주와 앨리스는 무조건 격리해야 한다. 앨리스는 당분간 다양한 보직을 거쳐, 유소년 육성단장 페르난데스의 보좌로 쓰는 게 좋겠다고 내심 결론을 지었다.
앨리스가 자신의 가치에 걸맞게 활약하려면 앞으로 몇 년이 걸리겠지만, 벌써부터 설레발칠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스태프에게 붙는 숫자 40은 그만큼 파격적인 몸값이다.
똑같은 숫자가 붙은 선수는, 진로를 걱정해야 할 정도인데도.
자연히 내 시선이 짐에게 향하고 만다.
이마의 숫자 40. 이제 챔스에 나가는 우리 팀의 주전 골키퍼가 되기에는 부족한 숫자가 함께 눈에 들어왔다.
타고난 재능 이외의 모든 면에서 완벽한 소년 골키퍼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리고 시큰한 기분이 들었다.
짐이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안다. 처음엔 프로를 그만두게 하자던 페르난데스조차, 요즘은 열렬한 응원을 보낼 정도로.
나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능의 크기가 바뀌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 정도였으니.
한편으로, 벽을 넘기 위해 이 소년이 겪어야 할 고난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구단주님.”
내 시선을 느낀 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조언해주실 부분이 있으십니까?”
“아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그렇게만 말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이야기가 길어진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짐을 붙잡고 영양 섭취부터 훈련에 대해 두루 말참견하는 중이었고, 특히 오버 트레이닝은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때 얼굴 주변만 이상하게 흐려 보이면 꼭 감독과 메디컬 팀에게 이야기해. 알았지?”
내 무릎이 깨지기 직전, 며칠간 벌어졌던 일이다. 이상하게 내 얼굴만 흐릿해 보였다.
재능의 벽을 넘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는 짐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서, 신신당부를 했다. 다만 무릎이 깨지니 어쩌니 하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유소년에게 말하기는 너무 불길하고, 또 무거운 주제니까.
짐이 곧바로 대답했다.
“네, 구단주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나, 훈련장 스탠드로 돌아갔다.
이후, 뉴캐슬 유스가 도착하면서, 우리 유소년 팀도 경기 준비에 나섰다.
경기는 보기 드문 진풍경의 연속이었다.
짐을 응원하러 온 클라라의 심기가 오늘따라 무척 불편해 보였다. 아마 인터뷰를 끝낸 앨리스가 짐에게 기념 투샷을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저, 평소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우리 유소년 주장이 쩔쩔매는 모습이 퍽 재미있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리고 경기는, 의외로 고전했다. 선제골을 내주는 데 이어, 추가골까지 내주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패배하지는 않았다.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도 질 수 없는 타인위어 더비의 법칙은, 유소년 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기 때문에.
두 골을 내준 다음에도 골키퍼 짐은 흔들림 없이 팀을 독려했다. 그리고 우리 유소년들은 주장의 독려에 최선의 플레이로 보답했다.
후반에 세 골을 몰아 넣으며, 우리 유소년 팀은 가까스로 3-2, 한 골 차이의 승리를 따냈다.
[선덜랜드 U 3 - 2 - 뉴캐슬 U]
* * *
경기가 끝난 후, 뉴캐슬 유소년 팀 스트라이커, 레이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아, 소문으로 듣던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요.”
짐을 바라보는 레이튼의 시선에는 우월감이 가득했다. 전반에만 두 골이나 빼앗았기 때문일 것이다.
뉴캐슬 유소년 감독의 표정도 밝았다.
“아니, 소문으로 듣던 정도라고 생각해야지. 투자의 신이 애지중지 키우는 선수니까··· 물론, 네가 그만큼 대단한 거고.”
“흐응.”
뉴캐슬 유소년 감독이 벤자민과 악수하고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레이튼은 계속 짐을 흘끗거리며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 명백히 깔보는 태도다.
짐은 반응하지 않았지만, 대신 테오와 바르카가 쌍으로 발끈했다.
“너. 우리 주장한테 사과해.”
“맞아! 사과해.”
레이튼은, 테오의 사과 요구에 대해서는 고의로 무시했다. 두 골을 따낸 정도로 으스대기엔, 테오가 너무 강력한 상대이기 때문이겠지··· 비록 오늘은 체력 문제로 결장했지만, 유소년 리그 전반기에 테오는 뉴캐슬 상대로 무려 5인 돌파 득점을 선물해준 적이 있다.
그래서 레이튼은 바르카에게만 대꾸했다.
“경기에 나오고 나서나 이야기해.”
“그럼 너도 이기고 나서 이야기해.”
“야, 너는 유소년 선수 등록도 안 되어 있지? 그러면 그냥 축구 팬인 거잖아? 어딜 선수한테 까불···.”
“네, 다음 패배자.”
다시 말하지만, 더비 라이벌 상대로는 가위바위보도 질 수 없단 말이지. 입씨름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래도 바르카는 장차 좋은 선수가 될 것 같은 확신이 든다.
애초에 바르카는 이마의 가치부터가 높기도 하고.
한편, 도발의 목표가 되었던 짐은 아무런 대응도 없이 줄곧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얼핏 보면 모든 감정이 죽어 버린 게 아니냐고 착각할 정도로.
하지만 나는 안다. 이미 정리를 마친 짐이, 아직 골키퍼 장갑을 벗지 않은 이유를.
화가 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지만, 동료들 앞에서 드러내지는 않으려는 것이다. 저 아이는 팀의 주장이자 골키퍼니까.
스탠드 옆에서, 앨리스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페르난데스 선수와 닮았네요. 실점할 때마다, 페르난데스 선수도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페르난데스가 주장이던 시절의 선덜랜드는, 실점에 동요하지 않는 끈끈한 팀으로 거듭났다.
잭이 주장을 맡은 지금까지도 역경에 강한 팀이라는 컬러는 유지되고 있지만, 느낌 자체는 분명히 다르다. 굳이 비유하자면, 요즘은 ‘감히 너희가 우리 팬들에게 한 방 먹여 놓고도 무사히 돌아갈 줄 알아?’에 가깝다.
주장의 태도가, 팀의 선수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그만큼 큰 법이다.
우리 유소년 팀은,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까?
짐이 천천히 돌아섰다.
“너희들이 세 골 뽑아주지 않았으면, 오늘은 나 때문에 꼼짝없이 질 뻔했다. 고마워.”
자연스럽게 실점은 자기 책임으로, 승리는 동료들의 공으로 돌리는 모습에 유소년 선수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무슨 소리야. 주장이 구해준 경기가 벌써 몇 개인데.”
“솔직히 선제골 먹었을 땐 눈앞이 깜깜했지만··· 그래도 역시 승리의 여신이 있으면 지지는 않는구나.”
승리의 여신 이야기에 희주는 어째서인지 멋대로 가슴을 펴고 우쭐거렸지만, 미안한데 그거 네 이야기 아니야. 애초에 너는 부두술사고, 네 나이면 쟤들 눈에는 그냥 아줌마라고.
어디까지나 클라라 이야기겠지. 클라라를 위해 뛰기 시작한 이래, 우리 유소년 팀은 아직 진 적이 없다고 하니까.
“자, 그럼 주장! 클라라 바래다주고 올 거지? 우리는 먼저 분석실에서 영상 보고 있을게.”
“그래.”
담담한 미소로 돌아서는 짐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눈을 비볐다.
“잠깐 안경 좀 내놔 봐.”
“응? 도수 없는 건데 괜찮아?”
예전에 한 번 경험했던 것처럼, 짐의 이마의 숫자가 이상할 정도로 흐릿하게 보였다. 읽을 수 없을 만큼. 영상이었다면, 누군가 고의로 화면을 뭉개 버렸다고 의심했을 정도다.
잠시 후, 희주가 안경을 내밀었다. 유능한 비서 코스프레를 할 때 종종 쓰는 물건이다. 그 안경 너머로 짐의 이마를 바라보자, 숫자는 어느새 다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선명함을 되찾았다.
“착각이었나···.”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쩌면, 짐에게 무언가 일어나려는 건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세차게 뛰기 시작한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나는 서두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짐은 어린 선수다. 해가 바뀌면서 겨우 열다섯이 되는.
이번 여름부터는 FA 유스컵에서도 뛸 수 있게 되지만, 그래도 프로 계약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 있다.
느긋하게, 절대로 망가뜨리지 않도록, 하지만 확실하게. 그렇게 저 아이가 벽을 넘게 할 수 있다면.
[모든 노력이 보상받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너는 꼭 프로가 되어야만 해.]
문득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예전,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내던 시절, 애니의 이야기가.
“프로가 되어야만 해.”
저 아이를 선덜랜드의 프로로 만들 수 있다면, 분명히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만 같았다. 팀에게, 저 아이를 응원하는 팬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종종 선수 시절의 꿈을 꾸는 나에게도 분명 의미 있는 성과가 되겠지.
선덜랜드 유스팀에서 9번을 달던 한국인 소년이, 사실 전혀 가능성 없는 일에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렇게 웃으며 말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