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벽을 넘기 위해 (4)
짐을 반드시 선덜랜드에 어울리는 선수로 키우겠다는 목표도 중요했지만, 구단주로서의 본업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뮌헨과의 챔스 경기, 그리고 주말의 리그까지 일정이 매우 빡빡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축구 보는 건 관중의 일이지 구단주의 일이 아닌데···.”
“시끄러워.”
이죽거리는 희주를 무시하고, 나는 경기에 집중했다.
브렌트포드 원정에서, 우리는 모처럼 로테이션을 시행했다. 주전을 노리는 젊은 선수들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실제로 선수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사실상 준주전에 가까운 베리는 물론, 터너도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런 경기는 당연히 직접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더니, 희주가 웃었다.
“다른 구단주라면 물론 직접 지켜봐야겠지만, 오빠는 상관없잖아? 투자의 신은 절대로 영입에서 실패하지 않으니까, 베리와 터너도 대단한 선수가 될 게 뻔하잖아? 왜, 새삼스럽게 확인해보고 싶어졌어?”
“···확인할 필요는 없지.”
베리와 터너는 이마의 숫자를 보고 영입한 인재들이다. 여담으로, 짐과 달리 아주 선명하게 잘 보인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두 선수의 기량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선수를 위해서야. 자기 딴에는 공정히 평가받을 기회를 잡고 싶을 텐데, 정작 선발로 뛰는 경기에 구단 관계자가 빠지면 얼마나 힘 빠지겠어?”
“감독이 보고 있으면 충분한 거 아닌가···?”
“그걸론 부족하지. 물론 선수 기용은 감독의 몫이지만, 구단주는 선수를 팔아버리거나, 원치 않는 선수를 감독에게 안겨줄 수 있는 자리거든.”
물론 나는 그럴 생각이 없고, 브라이언 또한 내가 선수단 스쿼드를 엉망으로 휘저을 거라고 염려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늘에야 출전 기회를 잡은 일부 선수들에게는, 내가 경기를 보는지 안 보는지가 동기부여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 * *
오늘 가장 인상적인 선수는 역시 터너였다.
원래는 쓰기 까다로운 선수라는 인상이었다. 영입 당시의 터너는 크리그와 같은 골 사냥꾼 유형의 공격수로, 전술적인 용도가 제한적인 선수였으니.
이마의 가치는 크리그보다 훨씬 높았지만, 아직 어린 선수라서 기술적 완성도는 크리그에 미치지 못했었다.
크로아티아 임대를 다녀온 지금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주위와 재주 좋게 연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최전방의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축구를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는 희주의 눈에도 조금 다르게 보일 정도로.
“지금은 주위가 잘 보이나 봐! 예전에는, 내 눈엔 골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는데.”
“나름대로 성장한 거겠지. 임대 생활에서 배운 점도 많을 거고.”
아무리 오시예크가 우리와 사이가 좋은 구단이라지만, 그래도 임대는 임대다. 굴러온 돌에게 어시스트를 떠먹여 주지는 않았을 테니, 주위 선수들과 연동하는 법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혹은, 터너의 파트너가 8부 리거 시절부터 같이 뛰던 베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호흡이 잘 맞는 사이일 테니.
그때였다. 후방에 머무르던 톰슨의 패스가 전방으로 향한 것은.
평소의 로빙 스루가 아니라, 땅을 기는 듯한 그라운드 패스였다. 축구 팬들이 흔히 말하는, 대지를 가르는 패스다.
조금 센 패스가 수비를 등진 터너의 발에 닿은 순간, 공의 궤적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잠시 후 패스는 측면에서 파고들던 베리에게 전달되었다.
“나이스 패스!”
멋진 연계를 선보인 터너가 곧바로 몸을 돌려 침투에 가세하는 사이, 베리는 특유의 돌파를 선보였다.
마르틴처럼 예리하지도, 축구의 신처럼 유려하지도 않았다. 거칠고 둔탁한 드리블이지만, 그래도 속도와 박력은 일품이었다.
그렇게 브렌트포드 수비를 베어버린 베리가 옆으로 스루 패스를 넣었고, 뒤따라온 터너가 그대로 공을 힘차게 걷어찼다.
“그렇지!”
내가 주먹을 불끈 쥐는 사이, 옆에서 희주가 방방 뛰기 시작했다.
[브렌트포드 0 - 1 선덜랜드]
* * *
선제골 이후에도 베리와 터너는 맹활약을 펼쳤지만, 가장 활약한 선수는 의외로 골키퍼 하퍼였다. 물론 하퍼는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지만, 오늘의 활약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다시 말해, 브렌트포드의 반격이 그만큼 매서웠다. 최근 분석팀장이 잘렸다고 하더니, 사람 바꾼 티가 난다.
그런데도 점수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하퍼의 선방 쇼가 이어졌기 때문에.
순간, 나는 궁금해졌다.
그 아이··· 짐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 모습을 보고 있을까.
* * *
짐은 손에 땀을 쥐며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관람하는 중이었다.
눈에는 생기가 피어오르고, 목소리에는 열기가 가득 담겼다. 평소의 침착함은 찾아볼 수 없고, 나이에 어울리는 평범한 소년 축구 팬으로 보였다.
평소에는 절대로 내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동안은 주로 원정 경기는 분석실에서 지켜봤고, 홈 경기 관람도 유소년 동료들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동료 앞에서 흥분하지 않았던 선덜랜드의 골키퍼들처럼, 짐 또한 평소에는 차분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순수하게 축구 경기의 흥분을 즐길 수 있는 기회는 짐에게도 무척 소중한 순간이었다.
마침 좌석도 특등석이었다. 그렇다고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짐은 지금의 자리가 훨씬 고맙고 반가웠다.
골대 뒤쪽 자리였으니.
전반에는 골키퍼 하퍼에게 목소리가 닿는 곳이고, 후반에는 하퍼를 똑바로 마주볼 수 있는 자리다. 덤으로 상대 팀 골키퍼에게 야유를 퍼부어줄 수도 있는 소소한 특권도 허용된다.
골대 뒤에서, 짐은 마치 자신이 골마우스 앞에 선 것처럼 무심코 손을 좌우로 놀리고, 발을 수시로 움직이며 포즈를 취했다. 옆에서 클라라가 키득거리며 폰카를 들이미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저게 프로의 슛이구나.’
분하지만, 아직은 막을 수 없다. 매일 연습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날아드는 슛의 상당수는, 자신이 몸을 날려도 절대로 닿지 않는 코스에 향하고 있음을.
그때마다 짐의 눈앞에서 선덜랜드의 12번이 훨훨 날았고, 골네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지!’
처음 선덜랜드의 팬이 되었을 때, 짐은 하퍼의 팬이었다. 이후 레전드 골키퍼 페르난데스의 매력에 넘어가기도 했지만, 하퍼는 여전히 짐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다.
일반적으로 골키퍼의 맹활약은, 팬으로서는 미묘한 기분이 드는 장면이다. 그만큼 팀이 얻어맞았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하퍼의 활약은 짐에게 있어서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그날 분석팀을 갈아치운 홈팀 브렌트포드는 90분간 꽤 괜찮은 경기를 펼쳤다. 매일 전술 공부를 하는 짐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그래도 승리는 선덜랜드의 것이었다.
자랑스럽게 장갑 낀 손을 치켜드는 하퍼의 모습은, 공이 아니라 팀의 패배를 막는다는 골키퍼 그 자체였다.
“저런 선수가 되고 싶은 거지?”
클라라의 목소리가 옆에서 부드럽게 울렸다. 짐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목에 힘을 주었다.
“응. 저렇게 되고 싶어서, 축구를 계속하고 있어.”
* * *
“최고의 경기였어요! 역시 경기는 축구장에서 보는 게 제맛이죠.”
“그러게, 모처럼 원정까지 따라온 보람이 있었어.”
우드 부부가 서로를 마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팀의 승리도 물론 기분 좋았지만 내용도 만족스러웠다. 마일즈가 좋아하는 패스 앤 무브도, 수잔의 취향인 역습 장면도 여러 차례 나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부부를 가장 기쁘게 한 포인트는, 축구 관람 그 자체였다. 수잔의 임신, 그리고 초기 육아 문제로 경기 관람을 몇 달간 포기했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홈 경기는 직관하고 있지만, 아직 원정은 무리였다.
아무리 우드 부부가 축구라면 사족을 못 쓰는 진성 축덕이고, 크리스가 축구만 보면 얌전해지는 아기라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크리스를 데리고 원정에 따라올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런던까지 오는 길도 문제거니와, 경기장 진입도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축구장은 원정 팬에게 썩 친절한 공간이 아니다. 하물며 갓난아기를 마음 놓고 데려오는 경기장은 기껏해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정도일 것이다··· 뉴캐슬 팬들은 조금 다른 의견을 내겠지만.
그래서 원정 경기를 당분간 포기했던 두 사람에게, 이웃집 남자들이 손을 내밀었다. 자기들이 봐줄 테니 한 번쯤 다녀와도 된다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편한 아기가 어딨어? 축구만 보여주면 얌전해진다면서.]
브렌든의 호언장담에, 마일즈는 처음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는 축구 못 보여줄 때야. 축구를 24시간 내내 하는 건 아니잖나.]
[뭐가 문제야? 재방송 보면 되는데.]
브렌든의 이야기에, 이번에는 수잔이 조심스럽게 반론했다.
[예전 경기를 보는 거 자체는 괜찮은데, 자기가 한 번 봤던 경기를 다시 틀어주면 싫어하더라고요··· 말씀은 정말 고맙지만, 역시 아기는 부모가 있어야 해요.]
[아닙니다. 모처럼의 이야기를 없던 걸로 할 수는 없죠. 마일즈, 듣자니 선덜랜드 모빌을 한번 매달면 20분은 버틸 수 있다고 하던데··· 아서 이놈은 모태 블랙캣츠니까 30분은 얌전하지 않을까?]
[크리스라니까.]
[아무튼.]
브렌든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호의를 무시하기도 좀 그랬다. 다행히 크리스는 낯가림이 적었고, 특히 집에 자주 놀러오는 브렌든이나 빌리 노인을 꽤 따르는 편이었다.
집에 크리스와 브렌든만 두고 외출하는 식으로 여러 차례 실험까지 마친 끝에, 마침내 우드 부부는 염원하던 원정 경기 직관에 도전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
같은 시각, 마일즈의 자택에서는 브렌든과 빌리 노인이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선덜랜드 모빌은 실제로 크리스에게 아주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한번 눈앞에 매달면 3, 40분쯤은 얌전히 모빌만 보며 꺄륵거렸으니.
문제는, 크리스에게는 모빌이 일회용품이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아서 이놈은 재방송 더럽게 싫어한다고 했었죠?”
“그랬지··· 브렌든, 아무래도 모빌을 몇 개 더 주문해야겠어. 생김새가 다른 물건으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선덜랜드 메가스토어에는 무척 다양한 형태의 모빌이 비치되어 있었고, 배달도 해 주었다.
“아무래도 마일즈에게 밥이라도 얻어먹어야겠는데요··· 비싼 걸로.”
“챔스 보는 날, 리버뷰 브래서리에서 얻어먹어야 수지가 맞겠는걸.”
빌리의 이야기에 브렌든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금방이겠네요. 다음 주니까요.”
마치 다음 주가 챔스라는 이야기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크리스가 세차게 발버둥을 쳤다.
“꺄륵!”
* * *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선덜랜드 대 뮌헨]
경기장 주변은 물론, 도시 전체가 붉고 하얗게 물들었다. 뮌헨 선수들이 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도시 안에 들어오는 모든 길에서 선덜랜드의 엠블럼과 플래카드를 찾아볼 수 있었다.
[This is Sunderland]
[Real Red and White]
“자기들이 진짜라는데?”
“뭐, 원조라고 우기고 싶으면, 실컷 하라고 하죠. 우리보다 창단이 빠른 건 사실이니까요. 원하면 알리안츠에서 Rot & Weis 카드섹션도 내려주겠다고 해요. 우린 승리만 챙기면 됩니다.”
뤼카는 겉으로는 웃어넘겼지만, 마음속으로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사실, 모양새만 보면 얘들이 훨씬 진짜 같긴 해.’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정말로 축구밖에 모르는 인간들의 고장이다. 뮌헨에선 아무리 해도 고작 챔스 16강전부터 도시 전체가 적과 백으로 물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뮌헨은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로, 인구를 따지면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다섯 배에 달한다. 그러니 열기의 총량으로는 뮌헨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밀도는 선덜랜드의 압승이었다. 그리고 경기장 분위기에는 밀도가 훨씬 큰 영향을 준다.
‘이런 분위기면, 경기장도 참 지옥 같겠구만.’
뤼카의 얼굴이 무심코 찌푸려지자, 옆에서 곧바로 주의가 들어왔다.
“얼굴 펴. 처음 오는 것도 아니면서.”
노이어의 이야기에, 뤼카가 곧바로 반론했다.
“처음 오는 건데요. 이기러 오는 건요.”
이번 프리시즌컵 당시, 뮌헨은 돈을 벌러 이곳에 왔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에 넘어가, 폼을 끌어올리지 못한 상태로 선덜랜드에 불려왔다··· 뤼카 생각에는, 아무리 봐도 이기러 온 팀의 태도는 아니었다.
반면 당시의 선덜랜드는 훨씬 잘 준비된 팀이었다. 그들은 뮌헨을 엉망으로 두들겼고, 눈앞에서 새로 만든 트로피를 자랑스럽게 들어 올렸으며, 바르샤와 뮌헨을 차례로 꺾었다는 명예까지 가져갔다.
프리시즌의 왕이라는 칭호는 덤이었다.
‘줄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진데 말이지.’
오늘은 명예 이외의 것들이 잔뜩 걸려 있다. 챔스 8강 진출 티켓 같은 것들이.
혹자는 챔스에 처음 나오는 선덜랜드가 훨씬 간절하다고 평했지만, 뮌헨 선수들의 입장은 달랐다. 천하의 뮌헨이 고작 16강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조심하자. 선덜랜드는 홈에서 쉽게 지지 않는 팀으로 유명하니까. 그리고 이 경기장이 원정팀에게 얼마나 짜증 나는 곳인지는, 프리시즌 때 충분히 경험했잖아?”
“뭐, 그렇죠.”
대답하면서, 뤼카는 다짐했다. 오늘은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고.
그라운드 안에서, 그의 대각선 맞은편에 서 있을 오랜 친구 베넷을 생각하면 그 결심은 더욱 강해졌다. 호의를 가진 상대이기에, 오히려 더욱 질 수 없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장에 나선 직후에는, 살짝 자신이 꺾일 것만 같았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기억보다 훨씬 크고 뜨거운 칠만 명의 함성, 경기장 옆 풋볼 스퀘어를 가득 메운 목소리, 온 사방에서 펄럭이는 깃발과 플래카드는, 사람의 마음을 꺾는 효과가 충분했다.
‘투자의 신이라는 양반이,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괴물을 만들어 낸 것 같은데···.’
프리시즌컵에서의 함성은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세차게 울리는 함성, 온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하지 않으면 휘슬 소리조차 놓칠 것 같은 소음의 한복판에서 뤼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세차게 깃발이 휘날렸다.
[This is Sunderland]
챔스 16강 2차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