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76화 (276/422)

276화 I owe you (1)

<최선을 다하고도 우리가 패배했다면, 그건 우리가 더 성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디에고 시메오네>

하퍼의 부상은, 팀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선수가 다치길 원하는 팀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마는, 우리 선덜랜드의 선수 관리는 내가 보기에도 병적일 정도로 철저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부상 이슈를 겪지는 않았다.

비록 사소한 잔부상까지야 축구를 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한 달 넘는 부상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심지어 다친 선수가, 대체하기 어려운 골키퍼라고 하면 아무래도 감정적이 되고 만다.

덕분에 곳곳에서 과민 반응을 보였다. 견디다 못한 메디컬 팀장 버드가 구단주실을 찾아올 만큼.

“제 입으로 이렇게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사실 6주 부상이면 짧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는요.”

“동의합니다. 그만큼 우리 선수가 다치는 일이 드물다는 거겠지만요. 그래서 일부 스태프들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만.”

메디컬 팀에서 구단주실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면서, 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일단 희주가 아주 난리였다. 하퍼의 병실에 과일이며 병음료수를 잔뜩 밀어넣고, 수시로 의료진을 들볶았다. 그때마다 ‘선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거죠?’를 마치 인사말처럼 사용 중이니, 민원이 들어올 법도 하다.

희주가 저렇게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는 원인이 대충 짐작이 가긴 하는데··· 뭐, 원인제공자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단 말이지.

버드 팀장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 말은, 구단주님 지금 뭐 하고 계시냐는 겁니다만.”

“어··· 카탈로그 보는 중인데요.”

내용물은 병원이다. 미국 병원, 한국 병원, 찢어진··· 아니, 세계 각지의 병원들.

“카탈로그인 건 저도 압니다.”

잠시 망설이던 버드의 얼굴에 단호함이 돌아왔다. 몇 번 헛기침을 한 버드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현재 하퍼가 입원한 선덜랜드 로열 병원은 구단 제휴 병원이고, 특히 외과와 재활의학과는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훌륭한 병원입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투자하긴 했지만, 메디컬 팀장에게 직접 들으니 만족스럽다.

“다행이군요.”

“그러니까 다른 병원을 알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해외 병원이면 더 그렇고요. 아무리 전용기가 있다지만, 비행기로 이동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그냥 로열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낫습니다.”

“잠깐만요, 버드 팀장. 하퍼를 비행기로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병원을 인수한 다음 똑같은 설비를 갖추고, 그쪽 의료진을 데려오면···.”

그러자 버드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과도하다고요?”

쟤요. 희주요.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도 일단 염치라는 게 있다. 그게 나와 희주의 가장 큰 차이점이지. 그래서 나는 조용히 테이블 위의 병원 소개자료를 치웠다.

“구단주님께서는 그동안 최고의 설비와 최고의 인력을 갖춰 주셨습니다. 사고를 예방하지 못한 건 유감스럽지만, 이럴 때일수록 메디컬 팀의 실력을 보여드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버드의 눈빛에서 프로다운 자신감이 느껴졌다.

하퍼를 최대한 빠르게 회복시키겠다는, 그리고 남아 있는 리델까지 망가지지 않도록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나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믿고 맡기겠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사람을 썼으면 믿고 맡기는 게 당연한 일이고, 미덥지 못하면 쓰지 않는 게 맞으니까.

그런데도 잠깐 흔들렸던 건, 역시 부상이라는 키워드 때문이다. 우리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그라운드 위에 나동그라진 모습을 보면 감정적이 되고 마는 건, 내 나쁜 버릇이니까.

“그래도 의료 외적으로, 선수 사기에 도움이 될 만한 이벤트는 해도 되겠죠?”

“그런 거라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간신히 웃음기를 되찾은 버드가 구단주실을 빠져나갔고, 가까스로 냉정함을 되찾은 나는 조용히 희주 쪽에 시선을 돌렸다.

“알았어. 병원 사람들 그만 볶을게. 안 찾아가.”

“무슨 소리야. 너는 찾아가야지.”

그러자 희주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분 탓인지, 조금 전 버드의 표정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버드 씨하고 약속하지 않았어? 1분도 안 지나서 이렇게 통수를 칠 줄이야···.”

“통수 안 쳐. 내 말은 뭐냐면···.”

나는 간략하게 지시를 내렸고, 잠시 후 희주의 얼굴에도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 * *

하퍼가 빠진 훈련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당연하게도 리델이었다.

체력 훈련은 물론, 론도 같은 몸풀기에서도 움직임이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누가 봐도 기합이 들어간, 동기부여가 정말로 잘된 모습이었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관리인, 리지는 그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킬 게 있는 골키퍼는 정말로 강해진다고 하더니.’

선덜랜드의 골키퍼들은, 서로를 포지션 경쟁자가 아닌 소중한 동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전 페르난데스와 하퍼가 그랬고, 지금은 하퍼와 리델이 그렇다.

하퍼의 빈자리를 메우겠다는 리델의 투혼 넘치는 모습에, 지켜보는 리지뿐 아니라 주위의 다른 선수들도 뭉클해졌다··· 전술 훈련을 앞둔 리델이 골마우스 앞에 서기 직전까지는.

“쟤 지금 뭐 하는 거임?”

주장 잭의 어이없다는 목소리에, 리지는 황급히 상황을 파악했다. 리델이 옆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골대 뒤에 세운 참이었다.

보니까 하퍼의 사진이다. 리지가 곧바로 질색을 했다.

“아니, 불길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하퍼 씨와 함께 싸우겠다는 저의 의지를···.”

의지는 인정하지만, 아무리 봐도 영정 사진 느낌이 든다. 리지는 단호하게 사진을 몰수했다.

물론 그녀는 선수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는 일개 잔디관리인이지만, 잔디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면 액자 치우는 것쯤은 간단하다.

결국 액자는 훈련장 옆 벤치로 옮겨졌지만, 이번엔 주장 잭이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 더 좋은 생각이 났어. 스마트폰으로 하퍼 씨한테 영상통화 거는 거야.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우리 훈련에 함께하는 느낌으로···.”

두통을 느낀 리지가, 이번엔 무슨 명분을 내세울까 고민하는 사이, 다행히 요니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참신한 헛소리야. 창의력은 제발 빌드업할 때나 발휘해 봐.”

마침 주장의 폭주를 제지하기엔 무척 적절한 인재였다. 잭과 오랜 친구이자, 팀의 부주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리지는 내심 요니를 열렬히 응원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 정도 크기는 되어야 훈련에 함께하는 느낌이 들지.”

요니가 태블릿을 꺼내 가져왔기 때문이다. 덤으로 요니는 태블릿 앞에다가 ‘건강에 좋다’며 컴버랜드 소시지까지 올려놓으려 했다··· 정말로 제사상 느낌이 들어서 모두가 합심해서 제지했지만.

‘사이 좋은 것도 정도껏 해야지.’

다행히 영상통화는 하퍼와 연결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화면에는 하퍼 대신 구단주 비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미안해요. 지금은 하퍼 씨가 바쁘니까 나중에요!]

덕분에 태블릿에 대한 선수단의 관심이 단숨에 식었다. 잭과 요니는 포기하지 않고 ‘그럼, 나중에’를 외쳤지만, 어림도 없다. 소시지를 압수하는 김에 은근슬쩍 태블릿도 압수한 리지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썬. 이 팀은 이제··· 선수를 망가뜨리지 않는 팀이 되었으니까요.’

하퍼가 쓰러진 순간, 그녀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어릴 때의 광경이 오버랩되어서.

할아버지를 졸라 따라온 훈련장에서, 줄곧 동경하던 선덜랜드의 유소년 선수가 무릎을 감싸며 쓰러진 모습이 지금까지도 리지의 뇌리에 선명하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와는 달라요.’

메디컬 팀이 선수의 상태를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각종 장비에 더해, 전문 분석관까지 연계해 더욱 세심하게 살피는 중이다.

“요니, 왼발 스탭이 약해졌다. 즉시 메디컬 체크를 받도록. 나머지 선수들은 다음 훈련에 들어간다. 오늘 프로그램은 골대 네 개를 쓴다. 물론 공은 하나뿐이지만···.”

브라이언의 지시에, 리지는 재빠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13번 그라운드로 이동해 주세요!”

* * *

마일즈는 하퍼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듯 흘끔거렸다. 다행히 하퍼의 표정은 평온했고 혈색도 좋았다. 몸에 걸친 환자복을 제외한 어느 것도 환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마일즈가 하퍼의 병실에 방문한 것은 아니고, 영상이었다.

[선덜랜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 No 12. 하퍼]

선덜랜드 구단 측에서 준비한 일종의 깜짝 이벤트였다. 연속으로 5시즌 이상 시즌권을 유지한, 일명 ‘티타늄 시즌권’ 보유자 한정으로 실시했다.

‘구단에서 머리 참 잘 썼단 말이지.’

마일즈는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선덜랜드 충성팬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팀이 유럽대항전에 나가고 프리미어리그에 복귀하는 등 부활한 이후 유입된 세대의 팬들과, 강등되기 전부터 줄곧 지켜보던 팬으로.

5시즌 이상 시즌권을 보유한 팬들은, 당연히 후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들은, 팀의 어려운 시기를 함께한 하퍼 같은 선수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 팬들이었다.

그래서 명목은 일단 하퍼의 AMA였는데도, 어째 질문이 하나같이 살짝 비틀리기 시작했다.

- 리즈와의 승부차기가 아직도 기억나. 넌 정말 우리의 영웅이었어, 하퍼. 아··· 질문하라고? 나을 수 있지?

- 그냥 교체해달라고 하지 그랬어. 아니, 이유는 설명 안 해도 돼. 네 마음 다 알아. 그날 경기장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 질문은 뭐냐면···.

질문을 가장한 격려가 쏟아질 때마다, 하퍼는 조금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선덜랜드의 골키퍼는 하나같이 포커페이스가 특기라 그런지, 지금처럼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는 의외로 서툴다.

“선수 곤란하게··· 쯧쯧.”

마일즈가 혀를 찼다.

사실 마일즈보다 오랜 선덜랜드 팬은 흔하다. 하지만 그들 중 십수 년간 연속으로 시즌권을 구매한 팬은 아주 드물기에, 마일즈는 사실상 이런 자리에서는 거의 최고참에 가까운 팬이었다.

잠시 후 자신의 차례를 맞이한 마일즈는, 미리 준비해둔 품격 있는 질문을 던졌다.

“하퍼 선수, 챔스 4강에서는 누구와 만나고 싶습니까?”

하퍼가 결장할 가능성이 큰 8강에서는 당연히 이길 것을 전제로 깔며 팀을 응원하고, 4강전에서는 반드시 복귀하라는 팬의 소망을 담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퍽 완벽한 격려였다.

하퍼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챔스 8강까지 올라온 모든 팀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 점에서 보면 모두를 피하고 싶군요. 반대로 모든 팀에게 배울 점이 있으니, 그렇게 보면 모두를 만나고 싶고요.]

정석적인 멘트를 선보이던 하퍼에게서 천천히 미소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 한 팀을 고르라면, 이탈리아의 여자친구 이외에는 생각하기 힘들군요. 선덜랜드는, 그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요.]

팬서비스를 위해 표정을 관리하던 스타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선덜랜드 주전 골키퍼의 얼굴만이 남았다.

[유벤투스는 강적이지만, 우리도 그때보다 강해졌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갚아주고 싶군요. 그리고 저도, 부상 전보다 더 강인한 모습으로 여러분 곁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때까지 팀을 믿고 응원해주세요. 지금 저를 격려해주신 것처럼, 리델에게도 힘을 실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마일즈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시선을 달력에 향했다. 리델이 치르게 될 가장 가까운 경기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중에 치러질 FA컵 5라운드, 블랙풀전이었다.

* * *

런던 튜브의 막내 기자, 엘렌은 천천히 자신의 노트북을 열었다. 그러자 ‘네티즌들의 동향’을 체크한다는 명목으로 열어둔, SNS 화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 리델이 정말 잘할 수 있을까?

ㄴ 잘할 거야. 실력은 이미 몇 번이나 검증했잖아.

애써 잘할 거라고 독려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전체적으로는 불안감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퍼스트 키퍼를 잃은 상태로 시즌을 치르는 건, 선덜랜드가 처음 겪는 일이지.’

팀은 그야말로 외나무다리에 올랐고, 자신이 무너지면 그 뒤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젊은 골키퍼에게 끔찍한 부담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리델의 플레이는, 사람들의 우려와는 조금 달랐다.

블랙풀을 홈으로 불러들인 FA컵 5라운드에서, 리델은 완벽한 클린시트를 선보이며 팀을 다음 라운드에 데려갔다. 그러자 SNS의 여론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모습이, 엘렌에게는 참 재미있었다.

- 리델은 원래 컵 대회 전문이었어. 블랙풀 잡는 거야 당연하지. 문제는 리그야. 리그는 원래 하퍼가 대부분 전담했으니까.

그런 불안을 씻어내려는 듯, 리델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클린시트를 성공시켰다. 브라이튼 원정에서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하며, 선덜랜드를 31경기 무패로 이끌었다.

- 진짜 잘했는데, 브라이튼은 하위권이잖음?

ㄴ 빅 6 검증이 남긴 했지.

그런 불안은, 리델이 토트넘 상대로도 클린시트를 해낸 시점에서 완전히 잠잠해졌다.

선덜랜드는 리그 32라운드 동안 무패를 유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대기록에 한 걸음 더 다가섰고, 이제 리델을 의심하는 목소리는 SNS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키보드 위에서 엘렌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부상당한 동료를 대신한다는 동기부여와, 팀을 지킨다는 긍지 중 어느 것이 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덜랜드의 젊은 골키퍼가 기죽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유일하게 염려스러운 부분은]

타이핑을 멈추고, 엘렌은 잠시 망설였다.

진짜 염려스러운 부분은, 리델의 부상이었다.

이미 선덜랜드는 퍼스트 키퍼를 잃었다. 혹시 리델마저 실려 나가는 순간 선덜랜드의 시즌은 끝난다. 따라서, 부상을 감수한 허슬 플레이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공공연히 떠드는 것은, 자칫하면 상대 선수에게 리델을 들이받으라고 유도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표현을 고쳤다.

[최근의 경기가, 리델이 처음 경험하는 연속 출장이라는 것이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러모로 부담스러울 것이 틀림없다.]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내심 응원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기사 자체는 공정해야 한다.

<과연, 선덜랜드의 젊은 골키퍼는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파일 최상단에 제목을 입력한 다음, 엘렌은 그렇게 자신의 원고를 편집부에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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