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77화 (277/422)

277화 I owe you (2)

런던 튜브의 특집 기사가 아니더라도, 선덜랜드 스태프들은 이미 민감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만일 하퍼가 복귀하기 전에 리델이 아웃될 경우, 선덜랜드의 이번 시즌은 사실상 끝이나 마찬가지임을.

그래서 선덜랜드는, 리델의 컨디션 관리에 대해서는 평소보다 더욱 신중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근육의 피로를 면밀하게 체크하고, 감독이 직접 스태프들에게 컨디션을 확인받는 식으로.

“리델의 컨디션은?”

“아주 좋습니다.”

루벤이 내민 보고서를 훑어본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좋은데, 정기적으로 심리상담도 받게 해. 투지만이 멘탈을 구성하는 요소는 아니니까.”

선수에게는 물론 상대를 찢어버리겠다는 투지가 최우선이다. 피가 끓는 열정, 지느니 죽겠다는 승부욕도 무척이나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평정심 또한 중요한 요소다. 특히 골키퍼라면 더욱 그렇다.

부상당한 하퍼를 대신해 뛴다는 긍지는, 리델에게 평소 이상의 투지와 승부욕을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평정심을 잃게 할 가능성 또한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FA컵도 이겼으니, 변함없이 대회 3개를 소화해야 해. 필드 플레이어들의 컨디션 관리도 더 신경 써주고.”

감독의 지시에, 루벤은 결의를 새롭게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메디컬 팀에서만 선수 컨디션을 관리했지만, 최근에는 분석실에서도 협력하고 있었다. 훈련과 경기에서 쌓는 선수의 각종 데이터를 기초로 삼고, 컨디션과 전술을 밀접하게 연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선수단 전체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와중에, 리델에 대해서는 더욱 체계적인 관리를 하고, 선덜랜드 로열 병원에 입원한 하퍼의 재활까지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폭증한 업무량에 시달리던 루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아니, 비서님이 그··· 그러니까···.”

구단주 비서 이희주를 향해, 루벤은 복잡한 시선을 보냈다.

상대는 구단주의 여동생이다. 비서로서는 유능하지만, 스포츠 생리학 같은 것을 알 리는 없다. 의사를 들볶는 솜씨라면 천하일품이지만, 하퍼의 재활에는 썩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상대의 출신을 고려하면 그녀를 축알못··· 아니, 재활알못이라고 깔 수는 없다.

‘혹시 샐리였다면 또 모르지만, 나는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남자다. 눈치라는 게 있지.’

그런데도 구단주 비서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맡겨 주세요. 완벽하게 해낼 수 있어요. 미덥지 않으면 시험해 보셔도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아무튼 구단주 비서의 사무처리 능력 자체는 FC선덜랜드에서 가장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좋은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자기 오빠를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틀림없이 비범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워낙에 기억력이 좋으니 하다못해 암기 정도는 완벽하게 해내겠지. 아무튼 투자의 신이라 불리는 사내의 여동생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루벤은 조심스럽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그때마다 척척 대답이 돌아와서 놀랐다.

“재활 쪽은 언제 배우셨습니까?”

“오래전에요. 많이 늦었지만.”

“아뇨. 늦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만.”

구단주 비서는 젊다.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이니, 원한다면 학위를 딸 수도 있을 것이다. 학비 정도는 이 남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 그런데도 이희주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자기는 너무 늦었다면서.

“이런 지식이 가장 필요했을 때, 저는 초딩이었어요.”

“Cho-ding?”

“대충, 아주 어렸다는 뜻으로 넘어가죠.”

루벤은 간신히 의미를 깨달았다. 선덜랜드의 구단주는 물론 투자의 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축구계에서는 부상으로 꿈을 접은 유소년 선수로 더욱 유명하다.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었네요. 루벤 부팀장님, 이 정도면 일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루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과연, 선덜랜드의 젊은 골키퍼는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런던 튜브의 특집 기사에, 케이팝 보이그룹 드림스케이프의 리더가 인상을 썼다.

“뭐? 젊은 골키퍼가 어째? 당연히 버틸 수 있지. 지금 우리 리델을 뭘로 보고!”

리더의 격한 반응에, 드림스케이프 멤버들의 시선이 쏠렸다.

잠시 후, 상황을 파악한 멤버들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아갔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우선 막내 올리버. 운동 선수 출신으로, 초등학생 때는 화랑대기에 출전했던 전력이 있는 축구 소년이다. 선덜랜드의 단골 팬으로 유명한데, 좀 더 정확히는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의 팬에 가까웠다.

그리고 댄스 전문 멤버, EWD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거기 골키퍼는 별로 안 젊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 리더 형보다도 연상이잖아?”

“시끄러워.”

졸지에 나이로 공격당한 리더가 볼멘소리를 내는 사이, 옆에서는 막내 올리버가 재빨리 설명을 시작했다.

“주전 골키퍼가 부상당했거든. 그래서 세컨 키퍼가 대신 출전 중이야.”

“부상?”

“정말 대단한 투혼이었지. 그러니까···.”

이윽고, 올리버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팀을 위해 부상을 감춘 채 끝까지 경기를 소화한 하퍼의 이야기와, 그리고 바톤을 넘겨받아 기염을 토하는 리델의 사연을.

리더는 새삼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EWD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그러다 괜히 일 키우지 말고, 다쳤으면 다쳤다고 빨리빨리 말하는 게 낫지 않나?”

“너는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잖아. 너도 예전에 똑같이 굴었으면서.”

“뭐, 나름대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인데. 예전에 매니저 형한테 엄청 혼났으니까.”

EWD는 예전에 한 번, 무대에서 세게 넘어진 적이 있다. 소나기 때문에 바닥이 살짝 젖어 있었던 게 원인이었다. 그때 발목을 다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끝까지 스케줄을 소화했었다.

당연하게도 이후 다른 멤버들도, 리더도, 매니저도 아주 난리를 쳤지만, 정작 본인은 ‘무대에서 다치는 건 댄스가수의 숙명’이라며 웃어넘겼다.

“너, 그럴 때 보면 완전 체육계더라. 정작 운동하다 온 애는 따로 있는데.”

“형이야말로 그때 볼만했는데. 얼굴은 나만 보고 있었는데, 정작 허리 아래쪽은 신나게 스텝 밟더구만. 무슨 자본주의 하체와 인본주의 상체의 대립도 아니고.”

“시끄러워. 그거야말로 댄스가수의 숙명이야.”

볼멘소리를 내는 리더에게서 시선을 떼며, EWD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튼, 팀을 위해서··· 부상을 감추고 뛰었단 말이지.”

EWD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하자, 리더와 올리버의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

“뭐 해?”

“아, 그런 선수라면 유니폼이라도 한 벌 팔아 주려고.”

그러자 리더가 곧바로 참견을 시작했다. 드림스케이프 멤버들 사이에서는 이미 악명 높은 시어머니 모드다.

“세 벌 사, 세 벌.”

“아니, 유니폼을 세 벌 사서 뭐 하게?”

“덕질하려면 세 세트가 기본이지. 포교용, 소장용, 실사용 삼위일체 몰라? 아니구나. 여섯 벌 사라. 홈 킷하고 어웨이 킷이 따로 있으니까.”

옆에서 올리버가 재빨리 끼어든다.

“써드 킷도 있어. 그러니까 총 아홉 장.”

“하아, 이 도른자들 진짜.”

인상을 쓰면서도, EWD의 손은 유니폼 아홉 장 주문을 넣고 말았다. 12번, 하퍼의 마킹이 들어간 유니폼을.

“뭐, 유럽 투어 중 하루쯤은 축구 볼 날이 있겠지. 선덜랜드 말고 다른 팀 경기 보자고 했다간, 형하고 올리버가 쌍으로 난리 칠 게 뻔하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EWD는 몰랐다. 세상에는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장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뭐? 배송비가 무료? 배대지 안 찍어도 된다고? 아니, 이렇게 팔아서 선덜랜드는 뭐가 남긴 하나?”

EWD의 의문에, 올리버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팬이 남는다던데?”

사실 그 밖에도 남는 게 있다. 예를 들면 구단주의 막대한 자금력 같은. 하지만 그런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기에, EWD는 부러움에 입맛만 다셨다.

“야, 그 대사는 나중에 우리 사장님도 좀 알려드리자.”

* * *

챔피언스 리그 8강 조추첨을 앞두고, 주요 스태프들이 브리핑 룸에 모였다.

희주가 조금 슬픈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네요. 어··· 그냥 알아서 처신 잘해라, 이런 건가요?”

본인이 부두술사임을 명백히 자각하면서, 일단 뭔가 공물부터 내놓으라는 뉘앙스의 발언이다··· 오늘은 공물 따위는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지만.

리지가 재빨리 대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물론 핑계였다. 잔디 관리인이라는 특성상 활동량이 많은 리지는, 기본적으로 군살과는 거리가 먼 체형의 소유자였다. 만일 리지에게 정말로 다이어트가 필요할 정도면, 희주는 당장 금식에 들어가야겠지.

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팔뚝 아래쪽을 반대편 손으로 집어서 확인했다.

“하긴 요즘 너무 잘 먹어서 살짝 고민이었죠. 좋네요, 다이어트.”

사실, 희주의 다이어트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정말로 다이어트가 필요하면, 먹여서 응원하는 게 친남매의 정이니까.

오늘 ‘공물’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는 굳이 부두술사의 입을 틀어막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별리그에서는 그래도 죽음의 조를 피하고 싶다든가 하는 니즈가 있었고, 16강전까지는 만날 수 있는 상대의 클래스가 천차만별이라 추첨운이 필요했다. 하지만 8강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옆에서 브라이언도 곧바로 말참견을 했다.

“이제 어느 팀을 만나도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다들 힘든 팀이고, 우승을 원한다면 누구를 만나든 때려잡아야 하는 게 맞고요.”

브라이언의 말처럼 이제 누구를 만나도 똑같이 힘들고, 딱히 피하고 싶은 상대도 없다. 이제부터 만나는 상대는, 전부 우리가 잡아내야 할 적이다.

굳이 따지자면, 꼭 만나고 싶은 상대 정도는 있지만.

“수상한데··· 아무래도 절대로 손해 안 보는 사람이 뭔가 계략을 꾸미는 느낌이야.”

희주가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흘끗거리기 시작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버텼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 추첨자가 [선덜랜드] 가 적힌 종이를 뽑았을 때쯤, 희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응시했다.

“뭐, 누구와 만나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이번 시즌에 졌던 상대는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긴 해요. 그만큼 까다롭다는 뜻이니까요.”

기다리던 답변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동시에, 추첨자가 천천히 흰 종이를 추가로 들어 올렸다.

[유벤투스]

본의 아니게 저주를 또 한 번 작렬시킨 희주가 살짝 인상을 썼지만, 나머지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환호했다.

* * *

선덜랜드 클럽하우스 선수 기숙사, 리델의 방.

선덜랜드의 외국인 선수들이 종종 그렇게 하는 것처럼, 리델 또한 클럽하우스에 눌러살았다. 숙소의 비품 수준은 어지간한 오성 호텔급이었고, 구단 스태프가 매일 깨끗하게 청소하고 관리해 주기 때문이다.

‘훈련장이 아주, 아주 가깝다는 것도 장점이겠지.’

이런데도 공짜라, 선수에 따라서는 ‘안 살면 손해’라고 잘라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육성단장 페르난데스나 톰슨 같은 베테랑들은 ‘장가가긴 틀린 놈들’이라며 핀잔을 줬지만.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리델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마침 챔스 8강 추첨이 한창이었다.

[선덜랜드]

화면 속의 추첨자를 응시하며, 리델은 기도처럼 속삭였다.

‘제발, 빚을 갚을 기회를 줘.’

그의 속삭임에 응답하듯, 추첨자가 [유벤투스]를 뽑았다.

브리핑 룸에서 스태프들이 일제히 환호했던 순간이지만, 리델은 침착했다. 주먹 한 번 움켜쥐지 않았을 만큼. 원래 선덜랜드의 골키퍼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세차게 뛰는 심장만은 어쩔 수 없어서, 리델은 고개를 돌려 현관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문 안쪽에 걸려 있는 유벤투스의 유니폼을.

슈퍼컵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단체로 주문했던 물건이었다. 선덜랜드에 돌아온 이후에는 마킹까지 박아 넣었다. ‘슈퍼컵 챔피언’이라는 문구를.

[그때마다 오늘을 생각할 거야. 나한테는,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다고.]

리델은 그날 뛰지 못했지만, 분한 감정만은 다른 선수들과 똑같았다. 그 또한 선덜랜드의 일원이었으니.

‘그리고··· 나는 갚아야 할 게 더 있어.’

리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벤투스의 유니폼 옆에 걸린 선덜랜드의 골키퍼 킷을 바라보았다.

No 12, 하퍼.

하퍼의 병실에서 손을 맞잡았던 날, 메가스토어에서 그가 직접 구매한 물건이다.

갚아야 할 것이 아주 많았다.

세심하게 컨디션을 살펴 주는 스태프의 노고를, 처음으로 연속 출전을 경험하는 자신에게 걸리는 부담을 줄이려는 수비진의 분투를.

그리고 창밖에 보이는 훈련장에서, 어느새 하나둘씩 자율 연습을 재개한 공격진의 열정을.

“나, 갚는다, 빚.”

“그냥 I. O. U라고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이쯤 되면 컨셉 아닐까?”

마르틴의 딱딱한 발음에 해리슨의 조용한 음성이, 요니의 웃음소리가 화음처럼 섞이고, 그 위에 공 차는 소리가 덮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을 갚고 싶다고 다짐하며, 리델은 천천히 주먹에 힘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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