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78화 (278/422)

278화 I owe you (3)

우리의 챔스 8강 상대가 유베로 확정되면서, 팬들의 반응도 뜨거워졌다.

대부분은 슈퍼컵에서의 굴욕을 시원하게 갚아주길 바란다는 반응이었지만, 하필이면 이번 시즌 시작부터 맞대결에서 패배한 상대와 마주해서 찝찝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 하퍼가 온라인 팬미팅에서 그러지 않았나? 유베하고는 꼭 4강에서 만나고. 복수하고 싶다고 했었지.

ㄴ 맞아. 그 소리는 다시 말하면 8강에서는 만나기 싫다는 뜻이 되는데···.

ㄴ 귀신같이 만났네.

“이로써 하퍼 씨야말로 진정한 부두술사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SNS 반응을 모니터링해서 가져온 희주가 명랑한 목소리를 내자, 하퍼는 짐짓 배신감이 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감기는 옮기면 낫는다는 속설이 있던데, 저한테 옮기신 거 아닙니까?”

대답 대신 희주는 기분 좋다는 듯 키득거렸고, 나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속설처럼 옮기고 나았으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구단주 비서라는 신분상, 희주는 조추첨마다 저주를 뿜어낼 가능성이 다분하니까. 그에 비하면, 하퍼 정도는 팀에 저주를 걸 기회가 드물다.

“아무것도 안 옮겼을 겁니다. 그러니 하퍼 선수도 빨리 복귀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구단주님. 그런데 혹시··· 괜찮으시면 분석팀을 불러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자 재빨리 희주가 끼어들었다.

“하퍼 선수의 재활관리에 대해서는 제가 전권을 위임받고 있는데요. 저한테 말씀하세요.”

희주는 요즘, 우리 분석실이나 메디컬 팀의 소견을 로열 병원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루벤이나 포터가 전화로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막상 시켜 보니 희주의 조율 능력이 의외로 뛰어나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물론 희주는 변함없이 의사를 들볶는 것도 잊지 않기 때문에, 당근과 채찍을 혼자서 휘두를 수 있는 인재라는 평가를 들었다··· 신기한 일이다. 희주에게 의학 지식을 따로 교육한 기억은 없는데.

아무튼, 희주의 태도는 보기보다 퍽 단호했지만, 하퍼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가 실점했을 때···.”

“잠깐만요, 잠깐만요. 과거를 자책하는 건 재활에 좋지 않은 마인드죠. 자칫하면 입스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자책하려는 게 아니라···.”

“갑자기 축구 말고 다른 게 하고 싶어지는 것도 아니죠? 창업하겠다거나.”

희주의 눈동자가 나를 흘끗 바라보았고, 하퍼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꼭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유베의 7번에 대해서요.”

유베의 7번은 과거, 축구의 신과 축구계를 양분한 라이벌이 은퇴할 때까지 쓰던 번호다. 지금은 그 후계자로 통하는 젊은 선수 알렉이 쓰고 있다.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움직임에 위화감이 있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세트피스를 빼앗긴 뒤였습니다··· 그리고 실점했죠.”

하퍼의 진지한 표정에, 희주가 한발 물러섰다. 자기가 멋대로 판단해서 가로막을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요즘 축구 보는 눈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희주는 아직 축구를 잘 아는 편은 아니다. 팀 차원의 움직임이나 전술적 판단이라면 모를까, 선수들의 플레이 디테일을 알 리는 없다.

그사이 하퍼는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리델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는 틀림없이 저보다 좋은 골키퍼가 되겠지요. 다만, 미리 대비할 수 있는 것은 대비하는 게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분석팀에게는, 알렉의 움직임을 더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전하겠습니다. 우리의 실점 전후로요.”

“감사합니다, 구단주님.”

하퍼는 진심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고, 얼굴 한구석에는 뿌듯한 보람도 떠올랐다. 나는 그런 하퍼에게 미소를 보냈지만, 희주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아니, 뭘 벌써 다 해냈다는 표정 하고 있어요? 오늘치 재활 프로그램은 아직 하지도 않았더구만.”

하퍼는 아직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병실에서 보내다 보면 근육이 여러모로 쇠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구단에서는 로열 병원과 협력해, 하퍼가 입원한 동안 할 수 있는 재활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희주의 단호한 지시에 병원 관계자가 하퍼를 데려가려는 것을, 나는 잠깐 제지했다··· 연행 멈춰 느낌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혹시 어떤 부분의 위화감인지 기억합니까?”

잠시 생각하던 하퍼가 대답했다.

“프리킥을 내주기 직전, 이고르가 완벽하게 역동작에 걸렸었습니다. 직후의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날, 에디도 역동작에 걸렸던가요?”

“아뇨. 에디는 그날 다른 선수를 마크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병원 측에서 하퍼를 재활실로 데려갔다. 희주가 우리 메디컬 팀에서 준비한 트레이닝 내용을 전달하는 사이,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토마스? 우리, 세리에 경기 데이터도 수집하고 있죠?”

[물론입니다. 구단주님.]

“그럼 슈퍼컵에서 우리가 알렉에게··· 그러니까 7번 말하는 겁니다. 그 선수에게 실점했을 때와, 비슷한 장면을 모조리 찾아서 정리해줄 수 있겠습니까?”

[문제없습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정리가 되는 대로 구단주실로 올려보내면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지시였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시원한 대답이 돌아와서, 무척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축구에 대한 통찰력은 없지만, 토마스는 데이터 그 자체는 누구보다 완벽하게 다루는 인재다.

“병원에서 보죠. 분석팀장도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리에 한 시간, 이동하는 시간도 있으니 그 정도면 하퍼의 오늘 훈련도 끝나겠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에디의 영상도 같이 정리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어느 시즌의 영상을 정리하면 되겠습니까?]

“20시즌입니다.”

[그때 에디는 우리 선수가 아니었는데요?]

아주 살짝 당황하기 시작한 토마스를 향해, 나는 낮게 덧붙였다.

“그래서입니다.”

* * *

그때, 유베의 7번 알렉 역시 선덜랜드의 경기 영상을 보고 있었다.

“내 매치업 상대는 이번에도 4번이려나? 5번도 꽤 재미있는 센터백 같던데.”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다른 선수에게 향하고 만다. 자신과 똑같은 번호를 달고 있는, 선덜랜드의 7번에게로.

한때 세계 축구계를 호령하던 블라우그라나의 10번은, 등번호도, 유니폼도 바뀐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포스를 과시하는 중이었다. 비록 서로의 포지션 특성상 맞대결은 없겠지만, 이번 챔스 8강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될 선수임은 틀림없었다.

알렉은 천천히 자신의 거실 벽에 시선을 돌렸다. 평소에 그가 몸에 걸치는 유베의 7번 유니폼이 걸려 있었지만, 마킹된 이름만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7. Ronaldo]

축구의 신이 세계를 상징하는 10번이던 것과 마찬가지로, 축구계의 7번이었던 남자의 유니폼이다.

알렉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유베의 7번이 되었던 사내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는지를.

이미 선수로서의 전성기가 지난 나이에 합류했는데도 오랜 기간 기량을 유지해왔다. 타고난 재능은 물론, 철저한 자기 관리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아누 씨는 정말로 철저했었지. 나는 처음엔, 인조인간이나 로봇인 줄 알았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런 호날두조차 나이를 이기지는 못했다. 따라서 알렉은, 축구의 신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었다.

세상에서는 둘이 세계 축구계를 지배했다고 평하는데, 최근에는 축구의 신이 훨씬 나은 선수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알렉의 생각으로는, 천만의 말씀이다.

‘크리스티아누 씨는 챔스의 신이었단 말이지.’

7번 등번호 외에도, 알렉은 호날두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물려받았다. 플레이 스타일부터 훈련 방식, 철저한 자기관리와 승부욕까지.

그런 알렉에게 있어, 호날두의 라이벌이던 사내, 축구의 신은 자신에게도 숙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88848을, 챔스의 신에게 비비겠다고?’

이번에 선덜랜드와 함께 메시를 8강에서 탈락시킨다면, 좋은 증명이 될 것이다. 선덜랜드의 7번은 호날두에 미치지 못하는 선수이며, 특히 챔스에서는 비교도 안 된다고.

유벤투스의 7번, 그 후계자라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숙명이라고 믿으며, 알렉은 조용히 결의를 다졌다.

* * *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유벤투스 대 선덜랜드]

유베의 홈 알리안츠 스타디움에 도착한 직후, 희주가 작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니, 여기도 알리안츠야? 뮌헨도 알리안츠라면서?”

“거긴 아레나, 여긴 스타디움이거든.”

“아니, 그런 소소한 디테일을 누가 신경 쓴다고.”

“네가 평소에 그랬잖아. 다 똑같은 백 같아도 디테일이 다르다면서.”

자업자득이란 이런 거다. 희주가 입을 꾹 다물었고, 알리안츠 스타디움의 익스클루시브 박스에는 평화로운 정적이 찾아왔다.

부루퉁한 여동생을 달랠 겸 슬쩍 덧붙였다.

“정 불편하면 자세를··· 아니, 공식 명칭으로 부르면 돼. 유에파는 명명권 계약을 인정 안 하거든. 일단, 오늘은 챔스니까.”

“알았어. 근데 오빠, 우리는 리그에서도 챔스에서도 전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지?”

“뭐, 그렇지. 명명권을 내가 샀거든.”

구단이 리미트리스 SM&C에 명명권을 팔았고, 곧바로 내가 되샀다. 그 과정에서 경기장 이름이 몇 시간 정도 ‘리미트리스 아레나’였던 적이 있다.

아니, ‘리미트리스 스타디움’이었던가? 기억이 안 난다. 어차피 하루 쓰고 말 이름이라 대충 지었거든.

아무튼 ‘헷갈리면 정식 명칭으로 불러도 된다.’는 내 이야기에 기분이 풀린 희주는, 경기장 여기저기를 신나게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최신 경기장치고는 조금 작네. 역시 촌이라서 그런가?”

“토리노가 촌이라고?”

무시무시한 소리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토리노가 촌이면, 우리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어··· 차마 내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엄청 작은데? 이 정도면 사만 석 아니야? 우리는 오빠가 인수하기 전에도 거의 오만 석 썼잖아.”

“이 경기장은 교통이 썩 좋은 편이 아니거든.”

시티 오브 선덜랜드 도심 한가운데 축구장을 지어버린 우리와는 접근성 차이가 조금 난다. 대신 토리노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라, 티켓파워 대비 수익성은 괜찮겠지.

“그나저나 갑부 오라버님. SNS 보니까 우리가 오늘 무승부를 노릴 게 뻔하므로, 4강 진출의 행방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갈릴 거라고 하던데···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는데, 이를 긍정으로 받아들인 희주가 신나게 SNS 반응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 원정 다득점이 폐지되었으니까 피차 원정에서 무리할 필요는 없지.

ㄴ 특히 선덜랜드는 유명한 홈 깡패니까, 유베는 당연히 오늘 득점하고 2차전을 무승부로 틀어막으려 들 거임.

“···그걸 아는 우리 선덜랜드는 오늘 무승부를 노리고, 2차전에서 승리를 노릴 거라고 하더라.”

희주의 이야기에,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팀이면 몰라도, 유베 상대로 그러면 바보지. 이탈리아 축구는 탄탄한 수비로 정평이 나 있거든.”

대답을 들은 희주가 입을 금붕어처럼 뻐끔거린다. 독순술을 따로 배우진 않았지만 꼭 ‘아탈란타’라고 하는 것 같아서, 재빨리 부연했다.

“아탈란타 같은 변종도 있지만, 어떤 의미로는 그들 또한 지극히 이탈리아스러운 팀이야. 어설픈 공격으로는 세리에의 수비를 뚫지 못하거든.”

“그 말씀은···.”

“작정하고 잠그려 드는 유베는 엄청나게 귀찮은 상대가 될 거야. 유베는 이탈리아의 여자친구로 불릴 정도니까. ”

“그런데 하필 원정 다득점이 폐지된 거네. 으으, 귀찮겠다.”

자기들 홈에서 한 골 넣고, 이후 끝까지 잠그려 드는 이탈리아 팀의 모습을 떠올린 희주가 몸서리를 쳐서, 나는 낮게 웃었다.

“아니지. 다행이라고 해야지. 오늘은 유베 홈인데, 유베는 아직 득점 안 했거든.”

“아! 오늘은 아직 못 잠그겠구나!”

뒤늦게 내 말뜻을 알아차린 희주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지만, 잠시 후 그 웃음 위에는 다른 감정이 얹혔다.

“내 생각엔,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은데? 우릴 슈퍼컵에서 준우승시킨 답례로, 홈하고 어웨이 모두에서 이기겠다는 속셈이··· 오빠, 왜 웃어?”

“아니, 남매가 맞긴 맞구나 싶어서.”

순순히 인정하자, 희주가 키득거렸다.

“헤헷.”

사실은 희주 말대로다. 기본적으로, 빚은 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거든. 투자업계 출신이다 보니, 부채에는 특히 민감하기도 하고.

슈퍼컵의 빚도, 선수들의 부담감도 이번 기회에 시원하게 털어버리고 싶었다. 기왕 터는 김에 상대도 좀 털고.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1, 2차전 모두 승리할 것을 주문했고, 브라이언과 샐리는 내 요구에 쌍수를 들며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은···.

잠시 후 선수 입장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푸른 피치 위에, 천천히 걸어 나오는 우리 선수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자신감이 넘쳤고 투지 또한 대단해서, 마치 선언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돌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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