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구단주의 일 (3)
풋볼 스퀘어에 사람을 가득 채울 방법을 찾으라는 질문은, 앨리스에게는 무척 까다롭게 느껴졌다. 왜냐면, 지금도 경기 날마다 수많은 팬들이 풋볼 스퀘어를 찾기 때문이었다.
학교 시험 문제였다면 ‘굳이 모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음. 풋볼 스퀘어는 이미 만원임.’이라고 서술했겠지만, 그녀는 이제 학생이 아닌 구단 직원이다.
“고민스러운 모양이네요.”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시의 의도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 프레스팀장 애니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왜냐면, 축구는 생필품이 아니기 때문이죠.”
“생필품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축구 안 본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는 뜻이죠··· 그런 표정 하지 말고요.”
애니의 지적에 앨리스는 조심스럽게 표정을 관리하려 노력했다.
“제가 무슨 이상한 표정이라도 지었나요?”
애니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고, 옆에서 아벨이 끼어들었다.
“정말로 사람이 축구 안 봐도 되나? 안 보면 죽지 않나? 같은 표정.”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거려서 앨리스는 황급히 손으로 뺨을 부채질했다.
“어···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이야기를 계속하죠. 우리 선덜랜드는 명실공히 타인위어 최고의 팀이고, 사람들은 옛 명문의 부활에 깊이 빠져 있어요. 하지만 몇 년 후에는 어떨까요?”
“몇 년 후···.”
“우리가 시티처럼, 매년 챔스에 나가는 게 일상인 팀이 된다면, 그때도 사람들은 열광해줄까요?”
앨리스는 잠시 침묵했다. 처음 들었을 때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질문의 의미를, 이제 이해했기 때문에.
약간 말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몇 달 전이었다면 그렇다고 대답했겠죠. 저는 이 구단을 사랑하는 팬이니까요. 그리고 제 주위에는 이 팀이 가장 힘들 때부터 응원해온 팬들이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선덜랜드와 같이 울고, 같이 웃을 거라고 확신해요.”
우드 부부, 그리고 브라더스의 모습을 떠올린 앨리스의 얼굴이 누그러졌지만, 잠깐이었다. 이내 표정을 고친 그녀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이제 선덜랜드 스태프니까요··· 네, 구단 직원이라면 계속 고민해야만 하겠네요.”
애니가 웃었다.
“좋은 출발이네요. 그렇다면, 한번 그 사람들과 의논해 보면 어떨까요?”
* * *
앨리스는 이틀 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얼핏 보기엔 꽤 두툼했지만, 대부분은 부연설명이나 참고자료였고 중요한 내용은 한 페이지로 요약해 두었다.
희주의 코멘트에 따르면, ‘대학생이었으면 학점 잘 받을’ 레포트다. 물론 앨리스는 이제 학생이 아니지만.
<이제부터의 모든 경기가, 팀의 역사가 됩니다>
앨리스의 보고서를 눈으로 훑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언론사에 기고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좋은 포인트를 짚었다 싶어서.
챔스에 처음 나온 우리 선덜랜드로서는, 당연히 8강에 온 것도 처음이다. 4강도, 결승도 전부 처음 치르는 이벤트가 된다.
그녀가 준비한 슬로건처럼, 모든 경기가 곧 팀의 역사다.
“팀의 역사라는 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덜랜드 클럽 박물관과 연계한다는 포인트도 훌륭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단주님. 지인에게 들었는데, 처음 클럽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더라고요.”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클럽 박물관에 들른 고객이 메가스토어를 방문할 경우, 구매 금액이 평소보다 훨씬 커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우리 클럽 박물관 제 5게이트의 별명은 ‘마계의 입구’일 정도다.
우리 클럽 박물관은, 팬들을 팀에 몰입시키기 위한 장치들로 점철된 공간이었다.
물론 거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스태프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스태프들은 이번 챔스 8강전과 클럽 박물관을 연계할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아마도 이런 게 팬과 직원의 차이겠지.
“좋은 착안점이었습니다. 아직 구단 일에 익숙하지 못할 텐데, 고생이 많았겠네요.”
“아닙니다··· 사실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해결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시간을 너무 끌면 2차전이 시작해 버리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는 문제점이 뭔지 곧바로 눈치챘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해결책도 이미 알고 있었다.
* * *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선덜랜드 대 유벤투스]
경기 당일, 우드 일가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앨리스의 부탁 때문이었다.
[로커 애비뉴 사거리를 지나서 와주실 수 있으세요?]
비록 앨리스가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마일즈와 수잔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아들 크리스와도 잘 지내는 데다가 축구에도 빠삭한 앨리스를, 마치 조카가 생긴 느낌으로 예뻐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고민은 크리스였다.
우드 가문의 장남은 축구 관전 중에는 놀라울 정도로 얌전하지만, 그 외의 모든 활동에서는 울보로 돌변하기 때문이었다. 마침 울음소리도 우렁찬 편이라, 외출을 앞둔 우드 부부의 근심거리였다.
“일단 로커 애비뉴는 경기장 가는 길이긴 한데, 크리스도 그렇게 생각해주려나?”
“어림도 없을걸요.”
“혹시 유모차에는 모빌 못 매다나?”
“선덜랜드 쪽쪽이를 물려 주면 뱉지는 않더라고요.”
그런 우여곡절 끝에 로커 애비뉴에 도착한 부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분 탓인지, 유모차의 크리스도 쪽쪽이를 떨어뜨릴 것만 같다.
[로커 파크, 1898 - 1997]
경기장 모양의 커다란 대형 패널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설명도 붙어 있었다.
[73년, 이 경기장에 FA컵 트로피를 가져온 선덜랜드가 바야흐로 첫 유럽 대회에 도전했습니다. 비록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이었습니다.]
“클럽 박물관에 있던 사진과 똑같아요! 크기는 훨씬 크지만요.”
그 옆에는 현수막이 걸렸다. [챔피언스리그로 가는 길]이라는 내용의.
마일즈가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설마, 도시 전체를 클럽 박물관으로 삼을 생각인 건가.”
챔피언스리그로 가는 길이라는 팻말처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로 향하는 길 곳곳에 비슷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리그 원 트로피를 힘차게 들어 올리는 페르난데스의 등신대 피규어, [부활의 시작]을 마주했을 때 우드 부부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고, [갖지 못했던 트로피] 앞에서는 부부가 나란히 얼굴을 붉혔다.
마일즈가, 수잔에게 프로포즈한 추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선수를 지키려고 일부러 퇴장당한 로저스의 등신대 앞에서는 부부가 함께 눈시울을 훔쳤고, 마침내 노장과 함께 유로파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주장 잭의 모습에서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보냈다.
그 박수 소리 위에, 아스라이 함성이 섞이기 시작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챔스 16강 크로스를 올리는 베넷과, 득점을 성공시키는 축구의 신의 조형물. 그 앞에 크레파스로 그린 빅 이어의 손그림까지.
[이제부터의 모든 경기가, 팀의 역사가 됩니다.]
어느새 부부의 곁은 붉은 물결로 가득했다. 선덜랜드 홈킷을 입은 사람들, 시티 오브 선덜랜드를 넘어 타인위어 곳곳에서 몰려온 팬들로 풋볼 스퀘어는 이미 만원이었다.
자꾸만 뭉클해지는 가슴을 억누르려 노력하면서, 부부는 천천히 유모차를 밀어 경기장에 진입했다. 기분 탓인지 크리스도 평소보다 훨씬 얌전했다.
세 가족의 머리 위에, 언제나처럼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This is Sunderland]
* * *
경기장의 함성은 마치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풋볼 스퀘어의 최고 방문 기록을 또 경신했다는데? 앨리스의 아이디어가 효과가 있었나 보네?”
“그런 셈이지.”
구단주의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좋은 감독을 데려오거나 알짜 선수를 영입하는 것부터, 각종 설비와 시설에 투자하는 것까지.
더 많은 관중이 경기장을 찾게 만드는 것 또한 구단주의 일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팬에게 외면당하는 순간 우리가 하는 스포츠는 그냥 공놀이가 되어 버릴 테니까.
“어쩐지 오빠가 신경 쓰는 것 같더라니, 똑똑한 애구나.”
뭐, 앨리스는 똑똑하긴 하지. 이마의 가치도 높고. 앞으로 키울 맛이 넘칠 스태프다. 다만, 희주가 눈치챘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웠다. 그래서 빤히 바라보자, 옆에서 여동생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보통은 바로 팀을 정해서 배속시키는데, 앨리스는 유독 이런저런 부서를 옮겨 다니면서 교육받잖아. 이번 보고서도 반쯤은 숙제였고.”
“숙제라고?”
시치미를 떼려고 했는데, 희주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아마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참고로 희주의 ‘숙제’ 검사는 주로 다미가 했다.
“이번에 도시 곳곳에 세운 등신대 피규어나 경기장 패널 말이야. 정말로 사흘 만에 뽑아냈을 리가 없잖아?”
뭐, 희주 말대로 미리 주문해 두긴 했다. 8강에서 바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사람을 키우는 것도 구단주의 일이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업무는 팀을 강하게 만드는 거겠죠, 갑부 오라버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은 업무 우선순위를 살짝 조정하고 싶은데.”
지금은, 축구를 볼 시간이거든.
잠시 후 선수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온다. 우리 홈 경기에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의 손을 잡고.
주장 잭을 필두로, 부주장 요니와 3주장 에디, 마르틴, 스티븐, 베넷··· 그리고 축구의 신의 모습도 보인다.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서.
“비기기만 하면, 4강 가는 거지?”
“맞아··· 비기고 끝낼 생각은 없지만.”
세상에는 틀림없이 원정 지옥으로 불리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원정 지옥들은, 특정한 팀에게는 좀 더 특별한 지옥으로 변모한다. 예컨대, 맨유에게 있어 안필드가 그런 것처럼.
우리의 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또한 마찬가지다. 원정팀의 지옥으로 이름 높은 경기장을 유벤투스에게 더 가혹하게 바꾸기 위해, 나도 약간의 준비를 했다··· 앨리스의 숙제와는 별개로.
풋볼 스퀘어 옆 대형 스크린에, 며칠간 슈퍼컵 영상을 계속 틀었다. 페널티킥을 거부한 마르틴과, 팀 전체가 함께한 결사적인 추격, 마침내 동점골에 환호하던 선수들의 모습을.
하늘 높이 떠오른 열한 번째 승부차기, 환호하며 달려오는 유벤투스 선수단을 배경 삼아, 두 손을 허리에 짚은 채 고개를 떨구는 하퍼··· 슈퍼컵 트로피에 입 맞추는 상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잭의 모습까지.
그 모든 풍경은, 챔스 8강 1차전의 승리만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마 선덜랜드 팬들도 동의할 것이다. 오늘이야말로, 진정으로 갚아주는 날이라고.
“달려!”
휘슬이 울리는 순간, 우리 선수단은 시작부터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 골의 리드를 지켜내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 * *
시작부터 맹공을 퍼붓는 선덜랜드 선수들을 바라보며, 샐리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걱정했는데요. 한 골 넣고 왔으니, 홈에선 그냥 잠그고 끝내자고 할까 봐서요.”
브라이언의 답변이 곧바로 돌아왔다.
“지금 잠그는 건 바보짓이지. 천하의 유베가 당황하는 꼴을 대체 언제 보겠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칠만 석 경기장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유럽에서 손꼽힐 대형 경기장으로, 유베의 홈, 알리안츠 스타디움보다도 훨씬 크다.
그 위에 풋볼 스퀘어의 팬들까지 더해지고 나면, 캄 노우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필적할 규모가 된다.
그 뜨거운 함성에는 틀림없이, 원정 팀 선수들을 당황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잔실수를 늘리거나 하는 식으로.
몰아치려면 지금이다.
“그렇다고 축구가, 목소리 큰 팀이 이기는 스포츠는 아니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 경기장의 분위기에도 익숙해질 것이고, 자기들의 축구를 할 수 있게 될 거야.”
잠그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는다고, 브라이언은 침착하게 선언했다.
경기는 실제로 그 흐름대로 흘렀다.
미친 듯 열광하는 팬들과, 비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사정없이 몰아치는 붉은 물결은 비안코네리 군단을 주춤거리게 했고, 프라하의 악마와 축구의 신은 당황한 수비진을 엉망으로 유린하며 선제골과 추가골을 뽑아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베는 젊은 에이스 알렉을 축으로 반격하며 만회 골까지 기록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3) 선덜랜드 2 - 1 유벤투스 (1)]
선덜랜드가, 챔스 4강 진출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를 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