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구단주의 일 (4)
구단 역사상 첫 챔스 4강 진출을 확정한 순간,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선덜랜드 구단주, 초대형 비행선 띄워.]
경기 다음 날에는, 4강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특별 주문한 초대형 비행선이 시티 오브 선덜랜드 상공에 떠올랐다.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챔스 4강 진출’이 선명하게 쓰인 비행선이다.
물론 비행선은 구단 자산은 아니었고, 구단주의 개인적 구매였다.
“어··· 영국은 비행선 못 만드나? 굳이 네덜란드에 주문해야 할 정도야?”
비행선을 올려다보며 브렌든이 혼잣말처럼 묻자, 옆에서 핫도그 사내가 히죽거렸다.
“대륙에서 오는 게 중요했을 거야. 그래야 어딘가를 ‘지나올 수’ 있으니까.”
선덜랜드가 유로파 우승 직후 곧바로 공항에서부터 카퍼레이드를 실시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뉴캐슬어폰타인을 향해 카퍼레이드를 하는 건 도발이지만, 지나가는 길이라는 명분이 있으면 용인되는 것처럼, 비행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암스테르담과 시티 오브 선덜랜드를 잇는 항로에는 미들즈브러가 존재한다.
“전에 말 나왔잖아. 뉴캐슬만 라이벌이고, 보로는 안중에도 없는 거냐고. 보로도 소중한 라이벌이니까 잘 챙겨야지.”
물론 더비 관계에서 ‘소중한 라이벌’이란, 자신들이 이긴 다음 놀려먹을 상대라는 뜻과 동의어로 쓰인다.
브렌든이 낄낄거리는 찰나, 이번엔 옆에서 수잔이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트레블도 노릴 수 있지 않아요?"
리그와 챔스, FA컵을 동시에 우승하는 ‘트레블’은 축구 클럽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대기록이었다. 그리고 선덜랜드는 아직, 산술적으로 트레블을 꿈꿀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리그에서는 여전히 무패로 2위를 질주하고 있으며 FA컵에서도 4강 진출을 확정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번에 챔스 4강 진출이 더해진 것이다.
물론 선덜랜드 구단 측에서는 ‘트레블’ 가능성에 대해서는 딱 잘라 선을 그었지만, 이럴 때 행복회로를 돌리는 게 팬의 자세다.
“감독 첫해에 트레블? 정말 역대급이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맥주집 사장의 입은 귀에 걸렸다. 이루기 어려운 목표라는 걸 알면서도, 상상만 해도 좋은 모양이다. 유모차 안에서 크리스도 기운차게 선덜랜드 시즌권을 흔들어댔다.
유일하게 침착한 사람은 마일즈였다.
“정말로 해낸다면 좋겠지만, 너무 설레발치지 말자.”
마일즈를 바라보는 브라더스의 눈빛에 존경심이 피었다.
“역시 마일즈 씨는 신중하군. 팀이 가장 힘든 시기를 직접 겪었기 때문인가.”
“그렇기도 하고, 예전에 십몇 년 전 EFL컵 결승전 때 우승한다고 설레발치다 떨어져서 그럴 거야.”
“브렌든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나?”
“이유는 묻지 말고.”
사실은 당시까지만 해도 열성 뉴캐슬 팬이던 브렌든이, 마일즈를 엄청나게 조롱했기 때문이었지만, 밝힐 수는 없는 이유다.
아무튼, 선덜랜드 분위기는 최상이었고, 선덜랜드 팬들의 분위기 또한 최상이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앨리스의 메시지였다. 수잔이 재빨리 읽었다.
“좋은 소식이 또 있다는데요··· 우리 유소년팀이 FA 유스컵 4강전에서 승리했대요!”
* * *
선덜랜드 U-15는 리버풀 U-15와 U-15 FA 유스컵에서 격돌했고, 서로 일곱 골을 주고받는 난타전 끝에 4-3으로 승리하며 결승 진출을 확정했다.
다만, 선덜랜드 유소년 주장 짐의 표정은 썩 밝지는 않았다.
포지션 특성상 실점이 기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세 골을 내주었으니, 골키퍼로서는 최악의 경기를 한 셈이다. 비록 팀을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있지만, 어른들이 보기엔 불만을 눈치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유소년 감독 벤자민과 잔디 관리인 리지가 짐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는 사이, 리버풀 유스의 주전 스트라이커 마이클이 움직임을 보였다.
“착각하지 마. 너한테 진 게 아니니까.”
지나치게 전형적인 대사라 착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그만, 주위 시선이 잔뜩 쏠리고 말았다. 심지어 관중석의 클라라조차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네가 아니라, 테오빨이라고. 테오빨.”
마이클의 퉁명스러운 이야기에, 짐이 피식 웃었다.
“알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반쯤은 짐 특유의 조숙함에서 비롯한 어른스러운 대처였지만, 절반쯤은 진심이었다. 짐의 재능에 가장 불만족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고, 같은 팀의 테오가 자신보다 몇 배는 나은 재능의 소유자임도 알고 있었기에.
하퍼나 리델처럼, 혹은 은퇴한 페르난데스처럼 되기를 늘 꿈꾸면서도, 선덜랜드 1군의 골마우스를 지킬 기회가 자신에게 오지 않을 가능성도 이해할 만큼, 짐은 충분히 조숙한 소년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한 소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팀이 이긴 걸로 만족해.”
“빌어먹을,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가 되냐?”
투덜거리며, 마이클이 축구공을 내밀었다.
“축구공? 나 주는 거야?”
“눈치 더럽게 없네. 사인!”
마치 맡겨둔 물건을 요구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선언하는 마이클을 향해, 짐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 아직 사인 연습 중이거든.”
사실 사인 연습은 거의 끝났지만, 만일 마이클에게 먼저 사인해줄 경우 클라라가 도끼눈을 뜰 게 뻔했다. 선덜랜드 유스팀의 소녀 팬을 자처하는 클라라가 오늘도 관중석에서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내는 중임을 짐은 알고 있었다.
“야, 네 사인이 누가 필요해! 주장 사인!”
짐은 대답 대신 자신의 왼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 매달린 주장 완장을 바라보던 마이클이 가슴을 쳤다.
“잭 선수 사인 말야! 너희 1군 팀 주장!”
그제야 마이클의 요구를 이해한 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잠깐 기다려. 우리 1군은 지금 훈련 중이거든.”
* * *
같은 시각,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1군 훈련장에서는 선덜랜드 1군 선수들의 훈련이 한창이었다.
오후 세션에서는 팀을 셋으로 나누어 연습하는 중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붉은 옷과 흰 옷, 두 팀의 대결이었는데, 중간에 노란 조끼가 끼어들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노란 조끼는 항상 공을 가진 쪽을 지원한다는 독특한 규칙 때문이다. 덕분에 훈련 중에 꽤 복잡한 상황이 자주 펼쳐지면서, 고도의 판단력을 요구받게 되었다.
잭으로서는 눈이 핑핑 돌 만큼 복잡한 게임이었는데, 막상 구단주 남매는 훈련을 처음 보고 이해했다는 모양이었다.
“아, 노란 옷이 깍두기구나.”
라는 식으로. 선덜랜드 선수들 중에 ‘깍두기’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역시 투자의 신은 특별한가보다.’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 죄송합니다.”
패스가 아슬아슬하게 잭의 앞을 스치고 사이드라인 밖을 빠져나갔다. 돌아보자 해리슨이 미안한 표정으로 한 손을 들었다.
잭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미스였어.”
솔직히 말하자면, 노란 조끼가 자기 편이 되었는지도 조금 전까지는 몰랐다. 요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공이나 판세까지 지켜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래 잭은 요니와 줄곧 선의의 라이벌이었지만, 이제는 슬슬 스스로 직감할 정도의 기량 차이가 났다. 특히 최근의 요니는, 메시의 가세로 더 날뛰는 모양이다.
축구의 신이 발하는 특유의 존재감, 나이를 먹은 지금도 변함없이 강력한 온더볼 능력과 패싱 센스는, 오프더볼과 축구 지능을 무기로 삼는 요니와 아주 궁합이 좋았다.
물론 메시의 나이를 고려하면 오랫동안 함께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뒤에는 아마 해리슨이 메시의 역할을 메울 것임을 잭은 직감했다. 혹은 요즘, 아카데미에서 천재로 이름 높은 테오가 올라오거나.
‘그때까지 나는, 선덜랜드의 주장으로 뛸 수 있을까.’
장담하기 어려웠다.
페르난데스나 메시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해왔지만, 한 명은 골키퍼이고 다른 한 명은 축구 역사상 최고 자리를 다투는 대선수라서 잭과의 차이는 역력했다.
“표정이 많이 어두운데. 집중해.”
요니의 지적에 잭은 다시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요니에게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백팀의 스로인이 노란 조끼를 입은 해리슨에게 전해졌다. 곧바로 해리슨이 공을 길게 배급했다. 특유의 날카로운 패스가 홍팀 진영에 날아들었다.
동시에, 요니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잭의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나이스 패스.”
자신이 놓쳤던 것과 같은 종류의 패스를 완벽하게 받아낸 요니를, 잭은 필사적으로 추격했다. 하지만 따라잡지는 못했다. 차이가 온전히 다 좁혀지기 전에, 요니가 그대로 슛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백팀의 득점을 알리는 짧은 휘슬에, 잭의 발이 멈췄다.
그는 물끄러미, 축구 선수치고는 조금 왜소한 요니의 등을 응시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쭉 함께하던 친구의 뒷모습은 익숙했지만, 조금 낯설게 보이기도 했다.
줄곧 나란히 있다고 생각했던 요니의 등에서,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시큰거려서, 잭은 그만 당황했다.
‘이건, 정말로 좋은 일인데···.’
예전에 톰슨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잭 자신은 선수로서의 자긍심보다 팀에 대한 애정이 훨씬 큰 타입이라고. 스스로도 동의했다. 팀이 강해지는 건 항상 좋은 일이고, 요니의 실력 향상은 팀의 성적과 직결된다.
그런데 어째서 가슴이 시리도록 아픈지를 모르겠어서, 잭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어깨에 손길이 느껴졌다. 마침 톰슨이었다.
“끝나고 잠깐 보자.”
* * *
훈련을 마치고, 잭이 바 블랙캣츠에 도착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느 때처럼 훈련장 주변에 몰려든 팬들에게 사인을 해 주느라 지체된 것이다. 특히 이번에는 조금 특수한 팬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버풀 유소년 팀의 주전 스트라이커, 마이클이 그 장본인이었다.
“유니폼에 사인받는 게 예의인 건 아는데, 낮에 선덜랜드와 맞붙는 처지라 준비 못 했습니다. 괜찮으시면 공에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 잭은 흔쾌히 사인을 해 주었다. 입장상 이기라고 응원하지는 못하겠지만, 좋은 선수가 되면 좋겠다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잭은, 톰슨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리 오랜 시간까지는 아니었지만.
“늦어서 죄송함다. 제가 블랙캣츠에서 만나자고 해 놓고···.”
톰슨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그나저나 조금은 성장한 모양이군. 지난번처럼 클럽하우스 로비에서 보자고 할 줄 알았더니.”
“저도 이제 선수 생활 오래했슴다. 전에 알려주신 거 아님까? 클럽하우스 로비는 언제 누가 지나다닐지 모르는 곳이니, 비밀 이야기는 바 블랙캣츠가 훨씬 낫다고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톰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잭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 늦었다고 그냥 가시는 검까?”
“그렇다기보다는···.”
얼버무리는 톰슨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오늘은 내가 용건이 있었거든.”
홱 하고 고개를 돌린 잭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잠시 후 잭이 이를 드러내고 톰슨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톰슨 선수, 배신하신 검까!?”
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지는 풍경에, 내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쩐지 고민이 많은 것 같다고 들었거든. 그래서 부른 거야. 선수와 상담하는 것도 구단주의 일이거든.”
정확히는 1군 팀 단장의 일이겠지만, 우리 팀에서는 내 역할이다.
잭이 얼굴을 붉혔다.
“고민은 아무것도 없슴다. 팀은 강해지고 있슴다. 팬분들도 기뻐하심다.”
“잭, 나는 우리 1군 연습을 모니터링하고 있어.”
“······.”
“무엇보다,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네가 발을 멈추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잭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썩 효과적인 시도는 아니었다. 반대쪽에는 톰슨이 있었기에.
“저도 사람임다. 가끔은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나쁠 때도 있슴다.”
“그럼 메디컬 팀을 부를까?”
나는 머뭇거리는 잭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감정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비록 프로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아카데미 시절, 내 곁에는 항상 헨도가 있었다. 그리고 브라이언 또한 나보다 먼저 프로가 되었다. 혼자만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에,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잭도 당시의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가 벽을 마주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잭의 가치는 3부 리그에서는 독보적이었고, 챔피언십은 물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충분히 활약할 정도였지만, 최상위권 팀의 핵심이 되기에는 부족했으니.
팀을 챔스에 데려가기 위해 나는 잭의 가치보다 더 높은 숫자의 재능을 데려와야 했다.
그렇게 몇 시즌이 지나자, 어느새 선덜랜드의 주장은 우리 베스트 일레븐 중 가장 숫자가 낮은 선수가 되어 있었다.
이런 날이 올 걸 알면서도 나는, 그를 주장으로 세웠다. 가슴의 엠블럼을 위해, 팬들을 위해 끝까지 싸울 선수라고 믿었기 때문에.
잭은 가장 위대하지는 않지만, 가장 헌신적인 선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기에 구단주로서의 나는, 이 청년을 팀의 주장으로 삼은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설령 그가 재능이라는 이름의 장벽에 마주해 고개를 떨구는 순간이 오더라도.
만일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그가 벽을 넘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구단주의 가장 중요한 일은 팀을 강하게 만드는 거니까.
그리고 팀을 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은,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 활짝 피워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