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84화 (284/422)

284화 왼팔에 매달린 긍지 (1)

[그대들에겐 그 어느 우승컵보다도 위대하고 빛나는 주장이 있지 않은가? - 프란츠 베켄바워]

일단 자릿세 느낌으로 술을 세 잔 시켰지만, 잭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톰슨이 입맛을 다셨다.

“무알콜이라 마셔도 상관없을 텐데?”

“괜찮슴다. 사양하겠슴다. 저는 애초에 술 좋아하지 않슴다.”

“어··· 관리하기 편하겠다.”

톰슨이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아무래도 애주가인데도 몸 관리 때문에 무알콜 칵테일 한 잔으로 제약을 건 톰슨으로서는, 애초에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잭이 부럽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톰슨은 이내 평상시의 표정을 되찾았다.

“썬이 너를 주장으로 정했다는 걸 잊지 말고.”

그 이야기, 잭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말해보라는 의미의 시선을 보냈는데도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안 마시겠다’라던 칵테일 한 모금을 넘긴 다음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전부터 궁금했슴다. 지금은 더함다. 왜 요니가 아니라 제가 주장인지··· 혹시, 제가 로컬 보이라서 고르신 검까?”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맞아. 정통성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거든··· 단, 비교대상이 요니라면, 적어도 나는 네 정통성에 크게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 대답에 톰슨의 얼굴은 어두워졌지만, 오히려 잭의 얼굴은 펴졌다.

“물론임다. 요니도 선덜랜드의 아들이잖슴까?”

“하긴, 너희 어머님은 요니를 큰아들이라고 하더라.”

“아, 그건 좀··· 요니보다 제가 형임다.”

“생일은 요니가 빠르다면서?”

“어머니께서 낳으신 시점이 기준이니까, 당연히 제가 형인 검다. 절 먼저 낳고 나중에 요니를 아들로 여기신 것 아님까?”

그러자 이번엔 톰슨이 끼어들었다.

“그 논리대로면, 만약에 너희 어머님이 나를 아들로 삼으시면···.”

“막내야, 반갑다.”

“농담할 기력은 있으니 다행이다.”

환하게 웃는 잭과, 얼굴이 구겨진 톰슨을 나란히 보는 기분은 꽤 참신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너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선수야. 물론 그건 요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네.”

“팀에 끈기와 헌신을, 열정을 더해줄 거라고 믿었어. 어느 누구보다 팀의 엠블럼을 위해 뛰어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너를 주장으로 고른 거야.”

“물론임다.”

“그렇다면 증명해 봐. 오늘처럼 기죽은 모습 함부로 드러내지 말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알겠슴다.”

고개를 끄덕이는 잭의 얼굴은, 내가 알던 선덜랜드의 주장다웠다.

그리고 잭을 돌려보낸 다음, 나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

직업을 완전히 바꾸는 경우를 제외하면, 내 눈에 보이는 숫자가 바뀐 사례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짐이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이마의 숫자가 희미해지고, 가끔은 번져 보인다. 요즘은 숫자를 아예 읽을 수 없을 때가 많다.

만약에 짐의 가치가 변하려는 거라면? 그 소년이 정말로 벽을 넘으려는 거라면? 그렇다면 잭이나 다른 선수도 가능하지 않을까?

“사실, 잭 스스로는 저렇게 말하지만··· 잭은 절대로 나쁜 선수가 아니야. 요니보다 훨씬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고, 발이 빨라. 체력도 활동량도 압도적이고.”

그렇다면 왜, 짐의 글자는 흐려진 것일까? 그리고 왜, 잭의 글자는 선명한 것일까? 대체 짐과 잭의 차이는 뭘까?

선덜랜드 유소년 팀이 최고의 주장을 가졌다는 소문은 파다하다. 이번, 우리 유스팀이 U-15 FA 유스컵 결승에 진출하는 데에도, 짐의 영향력이 컸다고 들었다.

하지만 잭 또한, 주장으로서는 최고의 인재다. 좋은 주장인지의 여부는 둘의 차이가 될 수 없다.

“아마, 잭은 전성기의 나보다 나은 선수가 될 거야.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챔스 결승전에 뛰어본 선수고···.”

짐은 클라라 사건을 계기로 정신적으로 성장했다. 원래부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숙하던 소년은, 이제는 정말로 노련한 골키퍼처럼 듬직하다.

그래서인 걸까? 시련을 극복해서?

“썬, 듣고 있냐?”

톰슨이 내 눈앞에서 손을 휘적휘적 흔들기 시작했다. 정신이 조금 사나워서,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듣고 있어.”

동시에 나는, 이마의 숫자에 대한 고민을 머릿속 한구석에 밀어넣었다. 짐과 잭이 뭐가 다른지에 대해서도. 그런 고민은 정말로 짐이 벽을 넘는 걸 본 다음에 하는 게 맞을 테니까.

* * *

같은 시각, 자신의 집 정원에서 짐은 느릿한 걸음으로 벽 앞에 섰다.

벽은 마치 클라이밍 연습장처럼 울퉁불퉁한 돌출물이 붙어 있었다. 불규칙 바운드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바닥에는 훈련장에 흔히들 쓰는 인조 잔디를 깔아, 좌우로 몸을 날릴 수 있게 준비했다.

벽에 공을 집어 던진 다음, 짐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가까스로 손끝에 걸리는 공을,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밀어냈다.

‘하퍼 선수는 더 빨랐어.’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오기 전부터 선덜랜드의 넘버원이던 골키퍼, 하퍼가 얼마나 동물적인 선방 능력의 소유자인지.

자세를 바로잡은 짐이, 다시 벽에 공을 집어 던졌다.

‘리델 선수는 쳐낼 때, 각도까지 신경 썼지.’

믿고 쓰는 독일산 골키퍼라는 농담처럼, 독일에는 우수한 골키퍼가 넘친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의 소유자인 리델은, 이번 8강전 두 경기에서 천하의 유베에 딱 한 골만을 내주며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다.

자신이 그들에 미치지 못함을 알지만, 그래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팀의 골키퍼이자 주장이고, 동료들은 아직 프로가 되지 못한 어린 선수들이다. 주장의 동요에 대해서는, 1군 선수들보다도 훨씬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그러니, 연습할 수밖에 없다고 짐은 생각했다. 자신보다 먼저 골대를 지켰던 위대한 골키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서.

그렇게 땀을 흠뻑 흘리도록 혼자 연습한 다음엔, 잠들기 전까지 방에서 축구 채널 방송을 보는 것이 짐의 일과였다.

마침 오늘은 U-15 FA 유스컵 결승 프리뷰였다. 해설에는 전직 선수 출신 펀딧, 네빌과 캐러거가 나섰다.

[남아야 할 팀이 결승에 남았다는 느낌인데?]

[그렇지. 시설부터 선수단의 장래성까지··· 정말로 남아야 할 팀이 남았지. 맨시티와 선덜랜드니까.]

[그냥 돈 많은 팀이라고 해, 제이미. 유소년 시설 투자에는 FFP도 없으니까.]

방송을 본 짐은 무심코 발끈할 뻔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반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훈련 덕분이었고, 나머지 반은 캐러거가 곧바로 부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자네 친정팀이 못 올라와서 삐진 건 알겠는데, 일반적으로 유소년 시설에 돈을 쓰는 건 미덕이야. 사실 자네들도 유소년 시절엔 그 영감님의 아이들로 불리며 찬사받지 않았나?]

[뭐 그렇긴 하지.]

잠시 후 펀딧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실 유스컵은 반쯤은 아마추어 경기지. 팀 운영은 프로 클럽이 하지만, 뛰는 선수들은 아직 프로가 아니니까.]

[맞아. 하지만 다시 말하면 프로가 될 수 있을지 판단할 만큼 중요한 경기이기도 해. 리그에서 이름난 선수라면 누구나 FA 유스컵에서 우승한 기록이 있거든.]

둘의 이야기를 기다렸다는 듯, 화면에는 결승에 오른 두 팀의 주목할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덜랜드에서는 역시 테오가 가장 먼저였고, 다음은 짐 자신이었다.

[아무리 봐도 테오야말로 동갑내기들 중 최고의 재능이지. 그 축구의 신이 점찍었다는 소문이 돌고, 투자의 신이 손수 영입했을 만큼.]

[짐 하워드도 아주 견실해. 리더십도 좋고··· 선덜랜드가 주장 하나는 잘 키우는 모양인데.]

캐러거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선덜랜드 출신 헨도가 캐러거의 친정팀 리버풀의 주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캐러거의 친정팀은 짐의 관심사는 아니다.

[하긴, 짐은 소속 클럽에서도 유소년 주장이고, 연령별 대표팀에서도 줄곧 주장이니까 보장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군. 확실히 좋은 골키퍼야. 장차 삼사자 군단의 수문장이 되겠지.]

‘전혀 그렇지 않아.’

자신에 대한 칭찬을 흘려넘기는 사이, 방송은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시티 선수들 차례였다.

[물론 시티의 모리스도 아주 무섭지. 다음 세대를 짊어질 강력한 스트라이커잖아?]

‘정말 세던데.’

유소년 리그에서도 몇 번 격돌했고 연령별 대표로도 함께했기에, 짐은 모리스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모리스는 요즘은 정말로 보기 드문 정통파 스트라이커로, 힘과 속도, 높이를 겸비한 선수였다. 아직 어린 선수라 완성도는 부족하지만, 굳이 비슷한 타입을 프로에서 찾자면··· 속도를 갖춘 바스티아노에 해당하는 선수다.

그와 맞대결할 생각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짐은 재빨리 골키퍼 장갑을 꺼내 착용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겁먹었어?]

클라라의 메시지였다.

[아니.]

[이상하다. 장갑을 낀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지?’

메시지를 읽고 나서, 답장을 보내기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지만, 짐이 알 도리는 없다. 그래서 짐은 그저 짧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짐의 표정이 바뀐다.

[맞아. 장갑 꼈어. 하지만 무서운 건 아니야. 기대로 손이 떨려서야.]

실력 차이는 역력하지만, 노력이 뒤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환경은 말할 것도 없다. 맨시티의 에티하드 캠퍼스는 물론 호화롭기로 유명한 훈련장이지만, 요즘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과 모리스의 격차는, 전적으로 타고난 재능의 영향일 것이다.

[그렇구나! 기대해도 괜찮아? 이번엔 사인해 줄 거야?]

[이기면.]

짤막하게 대답하면서, 짐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내가 이길 수만 있다면.’

근거는 조금도 없지만, 뭔가가 바뀔 것만 같았다.

* * *

[U-15 FA 유스컵 결승, 선덜랜드 대 맨시티]

경기 당일, 아침부터 직원들이 부산하다. 아무리 유소년 경기, 그것도 U-15 매치라지만, 그래도 결승이라는 빅매치를 치르기 위해서는 나름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쓸 수 있으면 간단했겠지만, 오늘 경기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서 열린다. 상대적으로 승패가 덜 중요한 U-15 매치의 특성이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부설 경기장 스탠드에 컨테이너를 들여다 놓으려는 스태프들을, 나는 인상을 쓰며 제지했다.

“지금 뭐 하는 겁··· 아니, 물을 필요도 없겠군요.”

순간 작년, 더스턴과 뉴캐슬이 치른 FA컵의 풍경이 오버랩된다. 당시 나는 더스턴을 응원하러 직접 방문했지만, 8부 리그 더스턴의 홈은 겨우 천 명 남짓한 경기장이라 귀빈석이 따로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더스턴은 급조한 상자에, 페인트로 큼직하게 익스클루시브 박스라고 썼다. 그들 나름의 성의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살짝 수치 플레이 느낌이 든다.

··· 지금 우리 직원들이 아카데미에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아마, 내가 경기를 지켜볼 예정이라서 그런 거겠지.

“비서님 지시인데요. 치울까요?”

“아뇨. 치울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1인석으로 해 주세요. 오늘, 희주는 거기서 혼자 경기를 볼 겁니다.”

단호하게 선언하고, 나는 스탠드석에서 적당히 골대가 잘 보이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 * *

경기는 시종일관 선덜랜드 유스팀의 열세였다. 이곳,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가 선덜랜드 유스의 홈임을 감안하면, 예상 밖의 결과였다.

경기장을 찾은 잭이 가볍게 혀를 차자, 먼저 와 있던 에이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별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시티 유스는 첼시 유스와 함께 유스컵의 절대 강자니까요.”

에이미의 말처럼, 유소년 팀 성적은 보통 구단의 재력에 비례하는 편이었다. 돈이 많으면 시설과 설비를 갖출 수 있고, 좋은 선수를 데려올 확률도 늘어나기에.

다만 유소년 무대에서는 프로처럼 활발히 선수가 이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투자와 성적 사이에는 몇 년의 시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에이미의 이야기 알면서도, 잭은 고의로 딴소리를 했다.

“하긴, 오늘은 팬이 꽤 적슴다. 선수들이 힘을 못 받을 검다.”

“U-18 경기가 아니라, U-15니까요. 경기장도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고요.”

오늘 관중은 대부분 양 팀 관계자나 선수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몇 안 되는 예외는 짐을 보러 온 클라라 정도였다.

“클라라 양 때문에 시티 애들이 열받은 것 같슴다. 솔로의 분노는 무서운 검다.”

“언제는 지켜야 할 게 있으면 강해진다고 하지 않았어요?”

에이미의 반론에, 잭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한 이야기 아님다. 페르난데스 단장님 말씀임다.”

유소년 육성단장 페르난데스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구단주와 함께 경기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마터면 구단주 비서의 수작으로 ‘익스클루시브 컨테이너’에 들어갈 뻔했지만, 중간에 구단주가 개입하면서 위기를 잘 넘겼다.

물론, 그런 사정까지는 알 리가 없는 잭은 부드러운 시선을 경기장에 돌렸다. 수세에 몰려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도, 점수를 내주지는 않는 선덜랜드 유소년들을 향해.

“그래도, 단장님 말씀이 사실이면 좋겠슴다.”

“저도요. 그렇게 되면 우리 애들이 이길 테니까요.”

자신의 후배들을 응시하던 잭의 시선이, 혼자 다른 유니폼을 입은 소년에게 향했다. 모두의 등 뒤에서 동료들을 독려하는 골키퍼, 짐 하워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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