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왼팔에 매달린 긍지 (2)
경기는 줄곧 일방적으로 흘렀다. 시티 유스는 선덜랜드 관계자의 생각보다도 훨씬 강력했기에. 그리고 주도권을 잃은 경기에서는, 언제나 골키퍼가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선덜랜드 관계자는 물론, 시티 관계자조차 오늘의 짐에게는 혀를 내둘렀다.
“이걸 막는다고!? 또!?”
그만큼, 오늘의 짐은 이 경기장의 누구보다 강력한 선수였고, 플레이는 분투라는 단어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지켜보던 선덜랜드 1군 주장, 잭의 가슴을 시큰하게 만들 정도로.
뿌듯하고 대견했으며 자랑스럽기까지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잭은 최근 자신의 실력에 벽을 느끼는 중이었기에.
[지킬 게 있는 선수는 강해지는 법이거든]
언젠가 페르난데스가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잭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단장님, 저도 강해지려면 연애를 해야 하는 검까?’
사실 축구선수는 보통 사람들보다 일찍 결혼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진로가 빨리 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잭은 아직 독신이고, 연애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팬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선덜랜드 팬이 아닌 사람을 좋아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팬들 중, 누구 한 사람을 특별하게 대할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잭 특유의 팬 서비스 정신을 이해해줄 여자가 세상에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선덜랜드의 주장인 동안에는, 아마도 계속 독신일 수밖에 없으리라고, 잭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짐과는 다르다. 짐과는.’
잭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서 응원하는 에이미 너머로, 클라라의 모습이 보였다. 짐의 여자친구로 알려진 소녀다.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만 봐도 짐에게 푹 빠져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짐이 클라라 쪽에 눈길을 보내지는 않았다. 사실 선수라면, 특히 골키퍼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CS 부팀장님이나 관리인님은 둘을 이어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긴 한데···.’
잭이 보기에, 적어도 지금의 짐은, 여자친구 앞이라서 강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잭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저 소년 골키퍼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 * *
옆자리에서, 페르난데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한때, 짐이 대성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기억합니다.”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에는 나도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축구를 할 수 있는 소년에게서 강제로 축구를 뺏고 싶지 않았기에 아카데미 입단은 허락했지만, 좋은 골키퍼가 될 거라고 믿지는 않았었다. 이마의 숫자만 봐도 한계는 뚜렷했고, 적어도 1부 리그에서 주전이 될 선수는 아니었다.
선덜랜드 이외의 팀이라면 어떻게 활약할지도 모르겠지만, 챔스권에서 뛸 우리의 골마우스를 맡기기는 어렵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저 아이가 선덜랜드의 1군 프로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다.
페르난데스도 나와 똑같은 기분이 된 것 같았다.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저 아이는 틀림없이 제 자랑입니다. 그리고 저렇게 노력하는 아이를 멋진 선수로 키워내지 못한다면, 제 부끄러움이 될 겁니다.”
“동감입니다.”
대답하면서, 나는 물끄러미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일방적인 공세를 퍼붓는 시티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짐의 모습을.
“단장님과 꼭 닮았네요. 아마, 단장님이 롤 모델이라 그런 것 같지만요.”
짐은 아카데미 입단 전부터 페르난데스와 하퍼의 플레이어 에스코트로 활동했다. 페르난데스를 본인의 롤 모델로 삼았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정작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제 스페셜 영상을 닮은 거겠죠. 좋은 모습만 기억했을 테니까요. 그리고 짐은, 꼭 저만 닮은 건 아닙니다.”
페르난데스의 이야기에,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하퍼의 플레이도, 리델의 플레이도 따라 하려고 노력하고 있겠죠.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 세컨볼을 보내는 플레이는 리델과 비슷하고, 세이빙 자세는 하퍼 그 자체니까요.”
물론, 아무리 봐도 짐이 가장 많이 닮은 선수는 페르난데스다. 골마우스 앞에 굳건히 서서, 목소리를 높이며 동료를 독려하는 모습이 똑같았으니까.
페르난데스가 웃었다.
“리지 관리인은, 짐은 구단주님과 닮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보기엔, 짐은 잭과도 닮았습니다.”
“잭이요?”
예상 밖의 이름에 내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페르난데스가 곧바로 부연했다.
“저 아이는 선덜랜드의 유소년 주장이기도 하니까요.”
하긴, 그렇게 들으니 닮은 구석이 있다. 불리한 전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끝까지 저항하는 투지는 분명히 잭과 똑같았으니.
지금 골마우스를 지키는 소년은, 틀림없이 선덜랜드의 주장이었다.
그래서일까?
Loyal through and through.
어쩐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팬들이라고는 얼마 없이, 양 팀 관계자들만 가득한 경기장인데도.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 * *
아스라이 들리는 함성의 위치를, 잭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경기 영상, 풋볼 스퀘어에 나가고 있는 검까?”
“그럴 거예요.”
잭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팬들을 사랑하는 CS 부팀장, 에이미가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짐이 팔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언젠가 잭 자신이 했던 동작, 팬들에게 함성을 요구하는 제스처였다. 그에 호응해, 풋볼 스퀘어에서 울리기 시작한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짐의 왼팔에 매달린 선덜랜드의 주장 완장이, 잭의 시야에 들어왔다.
크기 이외의 모든 면이 1군 팀의 완장과 똑같은 유소년 주장 완장을 본 순간, 잭은 자신의 왼팔에서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오늘 그는 평상복 차림이었고 자신의 주장 완장은 가져오지 않았는데도.
누군가는 저 완장을 단순한 천쪼가리로 취급한다. 누군가는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내던지거나 발로 차기도 한다.
하지만 저 캡틴 마크는, 누군가에게는 공을 차는 이유이자 선수로 뛰는 증명이 되기도 한다.
[함성이 그치게 하지 마라]
1군 주장 완장을 물려받은 날 페르난데스가 해준 이야기, 언젠가 잭이 다음 주장에게 완장과 함께 전해줄 조언을, 유소년팀 주장은 이미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이겼으면 좋겠슴다.”
I know I am. I’m sure I am.
짐은 틀림없이 지키는 중이었다. 자신이 매일같이 지키려고 했던 것을, 주장의 왼팔에 매달린 긍지를.
그래서 잭은,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지킬 게 있는 선수는 강해진다는 걸, 증명해 줬음 좋겠슴다.”
그때였다.
“안 돼!”
에이미의 비명과, 맨시티의 스트라이커 모리스의 침투는 동시였다.
포백라인 뒤에서 패스를 확보했지만,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시티에게는 완벽한 득점 찬스였고, 선덜랜드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잭조차 안타깝게 입술을 깨물 정도로.
하지만 짐은 마지막까지 침착했다.
어느새 절묘한 타이밍으로 달려나온 선덜랜드의 골키퍼가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상대에게 슛을 시도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플레이였다.
“달려!”
변성기가 지났지만, 그래도 아직은 약간 앳된 티가 남은 소년 골키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짐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선방도 그랬던 것처럼, 일어나는 동작 또한 반사적이었다.
잠시 후, 짐은 공을 걷어차는 대신 곧바로 집어던졌다. 얼마나 연습했는지 한 팔 스로잉인데도 마치 총알처럼 날아갔다.
오른쪽 측면에서 줄곧 기다리던 테오에게로. 오늘 경기에서 선덜랜드가 맞이한, 가장 좋은 찬스였다.
“카운터···!”
오른발로 공을 받은 테오가 왼발로 공을 옮긴다. 어느새 스핀을 걸어 두었는지, 공은 테오의 왼발에 마치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트래핑하는 순간의 빈틈을 노리려던 시티 수비수가 그대로 제쳐졌다.
다음 순간, 테오가 돌격했다.
일방적인 공세를 퍼붓던 시티의 뒷공간은 비어 있었다. 하늘색 유니폼의 유소년들이 필사적으로 복귀했지만, 소용없었다.
진형이 흐트러진 상태로는, 이미 U-15 선수들 중에서는 영국 최고의 재능으로 꼽히는 테오의 질주를 막지 못한다.
순식간에 시티 선수 두 명이 더 제쳐졌다.
“카운터!”
이후에 펼쳐질 플레이를, 잭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수비 셋을 돌파한 테오는 박스 안쪽에서 기다리던 동료에게 전진 패스를 보낼 것이다. 결정적인 찬스를 막아내기 위해 맨시티 골키퍼가 전진하겠지만, 선덜랜드 공격수는 골키퍼를 상대하는 리스크를 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테오가 여전히 달려오는 중이기에.
구단주가 바뀐 첫 번째 시즌, 그와 요니가 선보였던 플레이다.
잠시 후 선덜랜드 공격수가 골키퍼를 피해 아크 정면으로 짧은 패스를 보냈고, 한 박자 늦게 침투하던 테오가 그대로 공을 걷어차 시티의 네트를 흔들었다.
[선덜랜드 U 1 - 0 맨시티 U]
주먹을 불끈 움켜쥐는 잭의 곁에서 에이미가 환호했다.
“멋진 플레이네요! 아마···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죠?”
“그렇슴다. 팬들에게 보여주려던 건데··· 어째 쟤들이 기억하고 있었나 봄다.”
“그럼, 목적을 달성한 거네요, 캡틴.”
에이미가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저 아이들은 선덜랜드의 팬이기도 하잖아요?”
* * *
사실 득점 이후에도 경기 시간은 꽤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테오의 득점은 그대로 결승골이 되었다. 유소년 경기는 아무래도 프로 경기보다 흐름을 훨씬 잘 타는 편이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몰아치고도 소득은커녕 역습을 당한 맨시티 유소년들의 멘탈이 완전히 바스러진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맨시티 유소년들의 멘탈이 유독 약하다거나, 우리 유소년들의 정신력이 남다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오늘은 U-15 경기고, 아이들은 원래 멘탈을 다잡기 쉽지 않다.
만일 우리가 먼저 실점했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트로피의 주인 또한 바뀌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 경기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짐이었다. 골키퍼로서 시티의 맹공을 버텨내는 것은 물론, 주장답게 동료들의 사기를 지켜냈으니.
“나이스 세이브.”
최고의 선방이었고, 팀에게는 구원이었다.
그리고 내게도.
잠시 후 스태프들이 척척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디 위에는 곧바로 단상이 설치되었고, 그 앞에는 트로피가 놓였다.
U-15 FA 유스컵의 트로피는 성인용보다 살짝 작게 만들어졌고, 무게도 가벼웠다. 다른 재질로 만든 것인지, 속이 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볍다.
아직 어린 U-15 선수들이 마음껏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성인용 트로피와 같았다. 디자인도, 표면의 반짝임도. 이번 시즌 잉글랜드 최고의 팀이었다는 상징성도 똑같다.
그래서일까.
단상에 선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랑스러움에 가슴을 폈고, 얼굴 한구석에선 조바심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트로피에 달려들고 싶은 충동 때문인지,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트로피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트로피를 만질 권리는 팀의 주장에게 있기에.
우리 선덜랜드는 그런 규율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한 팀이다. 그리고 1군 선수들이 규율을 지키는 모습은, 아직 어린 유소년들에게도 모범이 되었을 것이다.
“꼭 마시멜로 실험 같네.”
어느새 익스클루시브 컨테이너를 빠져나온 희주가 뿌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마침내 짐이 트로피 앞에 섰다.
짐은 조심스럽게,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듯 트로피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힘차게 머리 위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트로피를 흔들고, 발을 구른다. 그 동작이 스물다섯 명의 유소년들에게 퍼져 나간다.
[FC 선덜랜드 U-15팀, FA유스컵 우승!]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경기장을 찾은 브라이언이 눈물을 훔쳤고, 요니는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줄곧 경기를 지켜보던 잭의 눈시울도 붉었다.
하긴, 팀의 유소년 출신이라면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긴 하다. 우리가 몸담았던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가, 명실상부하게 영국 최고를 차지한 순간이니까.
어쩐지 또다시 시야가 뿌옇게 변해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트로피를 들고 있는 우리 유소년 주장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는 걸.
이마의 숫자는 여전히 알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먹칠이라도 해서 뭉개 버린 것처럼 거뭇한 덩어리로 보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검은 덩어리가 하나 늘어 있었다.
세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