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왼팔에 매달린 긍지 (3)
단상에서 짐은 얼마간 트로피를 든 채 포효했다. 아직 어려서 어설픈 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제법 멋들어진 트로피 세레머니였다. 영상은 물론, 사진으로 남겨도 꽤 기념이 될 만큼.
짐의 옆에서 날뛰는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기쁨이 넘친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런데도 다들, 처음에 선 자리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열다섯 살 이하의 아이들임을 고려하면, 기적에 가까운 자제력이었다.
“이런 게 주장의 통솔력이겠죠?”
의젓한 짐의 모습을 바라보던 축구 관계자들의 눈에 선망이 어렸다.
“리더십 좀 봐. 타고났네. 터가 좋은가 봐?”
우리 선덜랜드 출신들 중에 좋은 주장이 많긴 하다. 짐은 물론, 잭의 리더십도 정평이 나 있다. 그리고 좀 더 윗세대로 올라가면 리버풀에게 챔스와 리그를 한 번씩 안겨준 주장, 헨도도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출신이다.
나중에 주장 연수 코스 같은 걸 만들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다른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선덜랜드 구단주는 진짜 복도 많다. 저런 유망주를 그냥 주웠네.”
이쯤 되면 선망이 아니라 질투 같아서 일부 스태프가 발끈했지만, 나는 오히려 우리 스태프들을 눈짓으로 제지했다.
이제 와서 뭐라고 떠들어도 오늘 경기의 승자는 우리거든.
그래서 우리 스태프들은 조용히 침묵했지만, 오히려 언론사 기자들끼리 가벼운 언쟁을 벌였다.
“듣자니 저 소년은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입단 전엔 그냥 아마추어 축구 클럽에서 뛰었다던데요. 여기저기 찔러도 받아주는 팀이 없었다든가 뭐라든가···.”
“그러고 보니. 일부 ‘전문가’께서는, 짐은 그냥 조숙한 골키퍼고, 재능 자체는 별 볼 일 없다던데··· 혹시 견해에 변함없으실까요?”
노스이스트 저널과 선덜랜드 데일리의 협공에 신문 기자 한 명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나는 짐의 재능을 의심했던 ‘전문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 경기 보고도 생각이 안 바뀌면, 눈에 문제가 있는 거죠.”
* * *
기념촬영을 마친 짐은 동료들에게 트로피를 넘겼고, 다른 아이들이 차례차례 트로피를 들도록 유도했다. 주전은 말할 것도 없지만 후보들도 빼놓지는 않았다.
팀의 주장다운, 참으로 바람직한 모습을 얼마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더니, 누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니 희주다.
“왜?”
“꼭 성불할 것 같은 표정이라서. 누가 보면 트레블이라도 한 줄 알 거야.”
“내가 그랬나?”
“지금도 아주 입 찢어지는데··· 그렇게 좋아?”
“그렇지, 뭐.”
따지고 보면 모든 구단주에게 좋은 일이다. 키우는 유소년이 유망하다는 증거니까. 혹시 맨시티가 우승했으면 만수르도 똑같이 환호했을걸?
선수의 가치를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내게는 더 좋은 일이다. 짐의 가치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 같지만, 일단 세 자리를 찍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설령 간신히 백을 채웠다 치더라도 프리미어리그 1군 선수로서는 손색이 없을 테니.
원래부터 짐은 재능 이외의 모든 조건을 갖춘 선수였다. 지역 토박이고, 팀에 충성하고, 리더십을 겸비한 골키퍼인데, 그런데도 이제 겨우 열네 살이다.
당장은 하퍼가 있다. 그리고 리델이 앞으로 십 년은 버텨줄 것이다. 이후에는 짐이 스물넷이 될 테니, 앞으로 선덜랜드는 최소 20년은 골키퍼 걱정이 없는 팀이 된다.
그러니 신이 안 날 수가 있겠냐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년 짐의 피나는 노력이 보답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쁘다.
아무래도 나는, 짐에게 과거의 나를 비춰보게 되거든.
옆에서 희주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물론 기쁜데, 조금은 기분이 이상해.”
“왜 또.”
“짐이 잘됐으면 좋겠지만, 예전의 오빠는 할 수 없었던 걸 짐이 해내는 게 배 아픈 뭐 그런 복잡한 여자의 마음생김인데··· 왜 오빠는 그런 것도 몰라?”
미안하지만 그런 건 영원히 알고 싶지 않다.
옆에서 리지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도 팬으로서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만족해요. 썬에게는 썬이 없었지만, 짐에게는 썬이 있으니까요.”
“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서운할 일이 아니었네!”
희주와 리지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멋대로 주고받는 사이, 나는 줄곧 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담한 미소로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는 선덜랜드의 유소년 주장을.
그 위에, 낯익은 얼굴이 겹치는 것 같다. 십수 년 전,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보던 소년의 얼굴이.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고맙다.”
내 도전이 헛된 게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줘서.
그렇게 혼잣말하며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리려 했다.
우연하게도 그 순간 짐과, 그리고 과거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 또한 웃고 있었던 것 같다.
* * *
분석실에 모인 1군 코칭스태프들 또한 가벼운 흥분 상태였다.
“조짐이 좋은데요. 결승전 상대는 시티였죠?”
“맞습니다. 전초전에서의 승리 느낌이었죠. 물론 유소년과 1군은 다르지만요.”
샐리와 토마스의 이야기에, 루벤이 재빨리 말참견을 했다.
“아주 다르지는 않아. 요즘은 아카데미에서 1군 팀의 주 전술을 따라 하는 게 트렌드거든.”
선덜랜드 유스도 마찬가지다.
이번 유스컵 결승에서 굳이 ‘잭과 요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재현한 이유는, 그것이 1군 팀의 공격 전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공격 전술 중에서 굳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른 이유는 유소년 대부분이 JJ 듀오의 팬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사실은 샐리 또한 아주 잘 아는 사실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그녀와 브라이언이 직접 설계한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샐리가 우아한 손길로 스크린에 5년 전 리그 원에서의 박싱데이 경기를 띄웠고, 그곳에서 이번에 선덜랜드 유소년이 사용한 루트와 거울처럼 똑같은 공격 패턴을 발견한 루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델랍이 폭소했다.
“샐리 분석팀장하고 전술 이야기 해 봤자 본전도 못 찾아. 감독님이면 모를까, 나머지는 대화가 성립 안 될걸.”
“그럼 감독님 모셔올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토마스가 루벤에게 붙들렸다.
“감독님은 바쁘셔. 구단주님 면담 중이니까.”
“아, 네.”
잠시 후, 샐리가 몇 번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우리 이야기나 하죠. 이제 곧 2연전을 치르게 되잖아요? ···루벤 부팀장.”
굳이 ‘부팀장’이라는 직함을 언급한 효과가 있었는지, 루벤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팀장님. 목요일엔 첼시와의 FA컵 4강 경기가 있고, 주말에는 리그 경기가 있습니다. 맨시티 원정이죠.”
선덜랜드 임직원, 특히 코칭스태프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분석실 멤버들이 굳이 꺼낸 이유는 명백했다.
이번 2연전에, 얼마나 투자해야 할지를 판단하려는 것이었다.
올 시즌 선덜랜드의 최우선 목표는 챔스다. 물론 일부 팬들은 트레블을 바라는 중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아직 선덜랜드는 세 가지 트로피 중 하나를 선택해서 도전해야 하는 팀이었다.
그래서 FA컵에 대해서는 사실, 이미 미련을 버린 상태였다.
첼시는 강팀이고, 웸블리의 첼시는 더 강력한 팀이 된다. 혹시 결승전이라면 그래도 한번 총력을 다해 보겠지만, 4강부터 힘 빼기엔 다른 대회가 너무 소중하다.
문제는 주말의 맨시티전이다.
현재 맨시티와 선덜랜드는 각각 리그 1, 2위에 올라 있었다. 승점 차이는 5점으로, 한번 뒤집어볼 희망은 있는 상태였다.
루벤과 델랍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맞대결에서 이긴다면 승점 차이는 2점이 되죠. 그 경우에도 여전히 우리는 시티가 미끄러지기를 기다리는 처지겠지만···.”
“2점이면, 딱 1승이면 뒤집히는 차이야. 그리고 비록 우리가 시티보다 승점은 낮지만, 대신 우리는 아직 무패라는 점도 크지. 상대에게 압박하기 딱 좋거든.”
“대신 지면 8점 차니까, 우승 경쟁은 사실상 끝나겠군요.”
루벤의 이야기에, 건조한 웃음이 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분석실 막내 토마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차피 승점 5점 차이나, 8점 차이나 우승 못 하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무조건 주말 맨시티전에 올인하는 게 이득 아닌가요?”
“사기 문제 때문에.”
루벤이 딱 잘라 말했고, 샐리가 부연했다.
“리그에서 맨시티와의 맞대결에서 패배하면,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지게 되겠죠? 챔스에도 악영향이 올 거고요.”
“그, 그렇다면 그냥 맨시티 원정에서는 철통같이 지키며 무승부를 노리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리그는 최우선 목표가 아닌데요.”
토마스의 이야기에, 샐리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 강해요."
물론 선덜랜드가 아직 맨시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단판 승부에서는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장기 레이스에서는 제법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더독이 하는 것처럼 잔뜩 꼬리 내리는 축구를 할 수는 없다. 그러기엔, 지금의 선덜랜드는 너무 강팀이기에.
노골적으로 비기기만 하려는 시도는 팬들을 실망시키고, 선수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구단주님 허락을 구하는 거죠. 어디까지 투자해도 되는 건지···.”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샐리의 입꼬리에는, 희미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어떤 대답인지 이미 예상했다는 것처럼.
* * *
내가 바 블랙캣츠에 도착했을 때, 브라이언이 먼저 와 있었다. 언제나처럼, ‘마티니’ 라는 이름이 붙은 짙은 녹색의 무알콜 칵테일을 손에 들고서.
“오늘 우리 애들 이긴 다음 어지간히 흥분했나 봐? 네가 먼저 블랙캣츠로 불러낸 걸 보면.”
가볍게 놀리자, 브라이언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흥분이 안 될 수 없지. 우리는 이루지 못했던 것을 애들이 해낸 거니까.”
브라이언과 나는 유스컵 우승은커녕, 결승 근처에도 못 가봤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할 것이다. 우리가 뛰던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 강등권을 오가는 팀이었지만, 지금의 선덜랜드는 당당한 챔스권 팀이니까. 팀의 위상이 달라지면, 데려올 수 있는 유소년의 질도 바뀐다.
머리로는 나도 브라이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유스컵 트로피만 생각하면 자꾸 입꼬리가 멋대로 움직인다. 아무래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아들들인 모양이다.
그렇기에 나는 브라이언의 용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말 맨시티전에 올인해보고 싶어졌어?”
“브로!? 어떻게 알았어!?”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놀란 브라이언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차분해졌다. 하지만 대신, 이번에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투자의 신이라더니··· 혹시 초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이 보이는 건 아니겠지!?”
아깝다. 초능력까진 대충 맞는데, 보이는 건 사람의 가치란 말이지. 정말로 남의 마음을 읽는다면 투자의 신이 아니라 도박의 신 같은 걸 하지 않았을까? 프로 포커 플레이어 같은 거.
아무튼, 브라이언이 진정하기를 기다린 나는 조용히 비결을 밝혔다.
“너는 워커홀릭이야. 그런 네가, 빅클럽과의 경기가 둘이나 다가온 이럴 때 블랙캣츠에 술이나 마시러 올 리 없지.”
요즘 들어 우리가 블랙캣츠에 셋이 함께 모이지 못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 드링크까지 퍼마시며 야근하는 감독을 불러내서 같이 술이나 마시자고 덤빌 구단주가 어딨겠어?
만일 그런 취향이었다면 나는 투자의 신이 아니라 다른 신이 되었을 거다··· 솔직히 그건 등신이지.
“따라서 네 용건은 결국 경기 이야기야. 지금도 야근 중일 샐리나 루벤, 델랍 같은 스태프에게도 떳떳한 명분이어야 할 테니··· 결론은 한번 제대로 싸워 보고 싶다는 것만 남지."
그러자 브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브로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까먹고 있었네. 그래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번 맨시티전 말인데···.”
“싸워 봐.”
그러자 브라이언은 한 방 맞았다는 듯한 시선을 내게 보냈다.
“왜? 허락받으러 온 거 아니었어?”
“사실은 반신반의했어. 델랍 코치는 허락보다 용서가 편하다고 말했거든.”
“그런 건 나중에 장가가서 네 배우자한테 하고.”
그러자 브라이언은 희희낙락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걸쭉한 녹색 칵테일을 반쯤 남겨둔 채 분석실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직, 맨시티에게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경기장이 에티하드라면 더더욱.
지금이라면 아마 4대 6 정도로 우리가 불리하지 않을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전력으로 싸워 보라는 허가를 내렸다.
이기면 당연히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만일 지더라도 일부 스태프의 우려처럼 챔스에 악영향을 주진 않을 거라 믿기 때문에.
나는 우리 선수들의 정신력을, 내 은사가 키워낸 팀을 신뢰하고 있다. 패배는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이번에 나는, 한 가지를 더 믿게 되었다.
선덜랜드의 주장 완장이 가진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