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왼팔에 매달린 긍지 (4)
브라이언은 줄곧 스코어보드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맨시티 4 - 3 선덜랜드]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수가 떠오르고, 또 사라졌다. 딱 한 점을 따라잡을 방법이라면 수천 가지를 떠들어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이유 또한 알고 있었다.
이미 끝난 경기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딱 일주일 전, 선덜랜드는 리그에서 2위였고, 챔스와 FA컵에서는 4강전에 진출한 상태였다. 곳곳에서 트레블을 운운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며칠 사이 판세가 달라졌다. 여전히 선덜랜드는 리그 2위 팀이지만, 1위와의 승점은 8점 차로 벌어졌다. 우승 경쟁은 사실상 끝났고, 2위 사수가 관건인 상황이었다. 언제 3위로 밀려날지 모르는 처지다.
FA컵 4강전을 반쯤 포기하면서까지 올인한 끝에 당한 패배 덕분에, 선덜랜드의 트레블 가능성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경기는 오직 챔스뿐이다.
“빌어먹을!”
경기를 다시 보니, 이길 수 있었던 방법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그래서 더욱 자기혐오가 강해지는 기분에, 브라이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감독실을 노크할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었기에, 브라이언은 반사적으로 리모컨에 손을 뻗었다.
화면이 꺼진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고 그래요? 꼭 못 볼 걸 보다 걸린 사람처럼.”
싸늘하게 웃는 샐리의 옆에서, 구단주 비서 이희주도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못 볼 걸 보고 있었던 거라도 괜찮아요. 성인이 성인물 보는 게 뭐 어때서. 영국은 그런 거 불법 아니잖아요?”
“···축구 봤습니다. 레이디. 그리고 여기는 제 직장입니다. 아무리 성인이라도, 직장에서는 좀 그렇죠.”
대답하면서, 브라이언은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려 노력했다. 구단주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구단주가 왔다는 이야기니까.
잠시 후 그의 오랜 친구,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이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언제나처럼 야식을 들고서.
“고개 들어. 아직 시즌 안 끝났어.”
“그거, 누가 한 말과 똑같은데.”
투덜거리면서도, 브라이언은 책상 위의 서류를 대충 치우고, 손님용 의자를 꺼내기 시작했다.
* * *
선덜랜드의 이번 맨시티 원정은, 경기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잔뜩 받는 매치였다. 리그 우승의 행방을 가를, 승점 6점짜리 경기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았다.
- 과연 선덜랜드가 역전 우승의 기회를 잡아낼 수 있을까?
ㄴ 경기장이 에티하드니까, 선덜랜드는 무모하게 굴지 말고 그냥 라인 내리고 버티는 게 맞지 않나? 이대로 무패로 끝내기만 해도 역대급 기록이잖아.
ㄴ 확실히 역대급이긴 하겠네. 리그 무패 준우승.
킥오프 전부터 그렇게 잔뜩 달아오를 정도였으니, 승패가 갈린 이후에는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SNS는 뜨거워졌고, 언론계 또한 발칵 뒤집혔다.
소형 일간지, 런던 튜브의 두 기자들 또한 머리를 맞대고 이번 경기를 되짚어보는 중이었다.
“감독으로서의 재능은 확실하고, 전술 센스는 역대급이지만··· 그래도 역시 아직은 ‘젊은 천재’인가.”
“네?”
“선덜랜드의 브라이언 말야.”
엘렌의 의문에, 선배 기자 랜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훈련도 독창적이고, 경기 운용은 말할 것도 없지. 단판 승부라면 이미 축구계 전체에서 손꼽히는 감독일 거야. 덕분에 토너먼트에서는 엄청나게 강했어. 첫 참가한 챔스에서 팀을 4강으로 이끌 만큼.”
랜던의 의견에, 엘렌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하긴, 브라이언 감독 체제로 바뀐 다음부터, 선덜랜드는 챔스에서 정말 굉장한 팀이 되었죠. 조별리그를 전승으로 통과했고, 토너먼트에서도 아직 패배가 없어요.”
올 시즌 선덜랜드가 세운 보기 드문 대기록을 지적하자, 랜던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야. 라데시마 레알조차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조별리그를 6승으로 통과하지도 못했었고, 토너먼트 무패도 아니었어.”
“그렇다면 올 시즌의 선덜랜드는 그 시즌의 레알 이상이라는···!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엘렌은 슬슬, 랜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굳이 조별리그에서 전승할 이유는 없다. 이미 선덜랜드는 일찍부터 토너먼트행을 확정한 상태였다. 그러니 다른 팀이었으면 진작에 로테이션을 돌렸을 것이다. 적어도, 이미 조 1위까지 확정한 6경기에서는 더욱.
하지만 선덜랜드는 조별 마지막 경기에서도 보란 듯 승리했었다.
“브라이언은 힘 빼기에 익숙한 감독은 아니야. 이번 2연전에 바로 그 약점이 드러난 거겠지. 덕분에 시끄럽잖아?”
“확실히 시끄럽긴 하네요.”
엘렌은 모니터에 띄워 두었던 SNS의 반응을 천천히 읽었다.
“도박의 폐해, 과투자, 패가망신···.”
“패가망신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뭐, 결과적으로는 FA컵 4강전이 같이 날아가 버렸지. 아무튼 그런 논조로 적당히 기사 내면 되지 않겠어?”
찌라시나 루머는 단호하게 응징하지만, 선덜랜드는 정상적인 축구 기사에는 절대로 시비를 걸지 않는다. 그러니 이번에 리그에 과투자한 선덜랜드의 전략은 실패였다는 뉘앙스의 기사를 쓰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엘렌의 손은 줄곧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왜, 미심쩍은 점이라도 있어?”
“네··· 선덜랜드 구단주는 바로 그 투자의 신이잖아요?”
“맞아, 투자의 신이지. 다시 말하자면 축구의 신은 아니야. 모든 경기에 이기는 건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랜던을 향해, 엘렌이 눈을 빛냈다.
“네, 경기의 승패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죠. 하지만, 맨시티전에 올인하기로 한 그 판단만 두고 보면 어떨까요?”
그러자 비로소 랜던의 목소리도 진지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 판단은 감독 혼자 하진 않았겠군. 선덜랜드 구단주는 구단 운영에 꽤 깊게 관여한다던데.”
“맞아요. 그러니까 하는 이야기죠.”
잠시 숨을 고른 엘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투자의 신에게, ‘과투자’라는 단어가 성립할 수 있는 걸까요?”
* * *
희주가 부지런히 치킨을 늘어놓고, 샐리가 맥주 캔을 따는 사이, 나와 브라이언은 계속 스크린을 응시했다.
“이때 분위기 참 좋았는데···.”
비록 맨시티에 선제골을 내주었지만, 우리는 딱 3분 만에 동점을 만들었고, 5분 후에는 추가골까지 뽑아냈다. 두 골 모두 축구의 신, 메시가 관여했다.
“진 경기를 굳이 실드 치려는 건 아니고, 전술적으로는 우리가 좋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전반전은요.”
아일랜드의 자랑으로 통하는 흑맥주를 홀짝거리며, 아일랜드의 미녀 전술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게다가 이 경기는 리델의 플레이도 아주 좋았고요.”
샐리의 설명에, 희주가 어깨를 움츠렸다.
“리델은 4실점인데요···.”
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샐리가 먼저 이야기했다.
“다득점 경기는 두 팀이 서로 합의하기 전에는 불가능해요. 합의라는 표현을 쓰면 꼭 짜고 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요즘 축구는 수비 전술의 발전이 극한에 이르렀고, 이제 작정하고 잠그면 뚫기 쉽지 않다. 설령 하위권 팀이더라도, 아예 승패를 도외시하고 추가 실점만 피하겠다는 식으로 내려앉으면 잘해야 한두 골이 고작이다.
다득점 경기는 잠그지 않는 팀 사이에서만 나온다. 우리와 맨시티처럼 충분히 강한 팀들 사이에서, 혹은 토너먼트의 단판 승부라 잠그는 의미가 없을 때다.
“애초에 리델에게 과부하가 걸릴 상태였잖아. FA컵에, 리그까지 전부 소화해야 했으니까.”
하퍼의 부상은 거의 나았지만, 경기 감각이 떨어졌기 때문에 당장 실전에 투입하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물며 첼시와 맨시티라는 강팀과의 2연전이었으니, 리델 혼자 골마우스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하퍼도 다시 출전하겠지만.
샐리와 내 설명에 희주는 이해한 것처럼 치킨을 뜯었지만, 브라이언의 표정은 어두웠다.
“종합적으로는 내 실책이지. 무모하게 괜히 이기지도 못할 경기에서 주전 대부분을 소모한···.”
“상관없어. 소득은 있었거든.”
우리가 챔스 4강에 오른 것처럼, 맨시티 또한 그렇다. 추첨은 아직이지만.
맨시티는 우리의 4강 상대, 혹은 결승 상대일 수도 있는 팀이었다.
“어느 정도 간격인지 재보고 싶었어. 결과는 딱 한 골 차이였지. 졌지만, 큰 격차는 아닌 것 같은데.”
당분간 리그에서, 그들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맨시티를 만나기 전까지 무패였지만, 승점은 그들이 더 높았다.
관점에 따라서는 팀의 체급 차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 리그에서는 아직 넘어서기 어려운 상대다.
하지만, 단판 승부라면···.
“챔스에서는 아마 해볼 만할 것 같은데.”
시티와의 리그 경기를 치르기 전에는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상대의 홈 에티하드에서, 후반 인저리타임까지 3 - 3으로 끌고 가던 우리의 실력을. 전반에는 전술 싸움에서 상대에게 우위를 점했던 코칭스태프의 능력을.
그리고, 결승골을 허용한 직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웠던 우리 선수들의 멘탈을.
그중에서도 가장 투지가 넘쳤던 선수는, 당연하게도 우리 선덜랜드의 주장이었다.
[고개 들어! 아직 휘슬 안 울렸다!]
홈 팬들의 함성으로 뒤덮인 에티하드에서, 유독 선명하게 들리던 목소리, 중계 카메라에 잡힐 정도로 쩌렁쩌렁 외치며 공을 주워 들고, 하프라인으로 달리는 선덜랜드의 주장을 스크린 너머로 응시하면서, 나는 천천히 덧붙였다.
“처음엔, 챔스에서 한번 돌풍을 일으켜볼 정도는 될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지금은 진지하게 챔스를 노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자 샐리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하긴, 빅 이어까지 딱 세 경기 남았죠. 리그 우승은 반쯤 물 건너갔고··· 최선을 다해 싸운 결과니까 미련도 없고요. 선수들 생각은 살짝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주장이 잘해주고 있을 테니까요.”
돌아오는 버스에서 잭은 쉼 없이 동료들을 격려했고, 팬들에게 선언했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고, 선덜랜드는 계속 싸울 거라고.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블랙캣츠에서 뵐 수 있을까요?]
메시지의 주인공은, 바로 그 주장 잭이었다.
* * *
“킥 연습을 더 하고 싶슴다. PK는 괜찮은데···.”
“프리킥은 약한 것 같다고?”
선수를 쳐서 되묻자, 잭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구단주님은 혹시 초능력자임까!?”
“비슷한 셈 치자.”
초능력자는 맞지만, 독심술이나 예지력은 없다. 그저 오늘의 잭은, 똑같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을 뿐이다.
선덜랜드의 캡틴은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설명과 똑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주량이 형편없다는 점에서. 잭의 이성은 칵테일 딱 두 잔째에 완전히 별나라에 가버렸다.
“저는 열네 살 어린애만도 못한 놈임다. 짐이라면 이렇게 술주정을 부리지는 않았을 검다.”
“술주정이라는 자각은 있으니 다행이네. 그리고 짐은 아직 미성년자니까, 당연히 술주정을 부릴 리 없지.”
“저는 미성년자만도 못한 놈임다. 그 아이는 끄떡없었잖슴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냥 참는 거겠지.”
짐이 매일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나는 안다. 골키퍼라면 누구나 끔찍하게 싫어하는 실점의 기억부터 장래에 대한 불안, 갖지 못한 재능에 대한 아쉬움까지 다양한 감정에 흔들려왔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짐의 가치가 변하는 순간 함께 있었지만, 그건 짐 자신은 아직 모를 일이니까.
짐은 그저, 동료들 앞에서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잭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될 수 있···.”
잭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바 테이블 위에 고꾸라졌다. 잠시 후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인사불성이 된 것 같다.
바텐더에게 눈짓을 보내, 잭을 클럽하우스의 숙소로 옮겨 줄 스태프를 부르도록 지시한 다음,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면···.
“너는 이미 좋은 선수이고, 최고의 주장이거든.”
가끔 나는 궁금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어째서 잭의 가치가 겨우 180인지.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월드컵 결승전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했다. 선덜랜드의 주장이라는 긍지가 더해진 잭의 멘탈은 더할 나위 없이 탄탄하다.
패배가 아무렇지도 않은 선수는 없다. 잭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투지 넘치는 선수라는 설명은, 승부욕이 강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그런데도 잭은 팬과 동료 앞에서는 줄곧 주장답게 행동했다. 그 후유증으로 구단에 돌아오자마자 칵테일 두 잔에 무너졌지만.
멘탈을 떠나, 선수로서의 실력도 출중하다. 무한의 스태미너와 빠른 발, 이타적인 성격··· 그것만으로도 미드필더의 활력소가 되어줄 수 있는 선수인데, 축구 지능도 손색이 없다.
···이런 선수의 가치가 백팔십억이라고?
사람 보는 눈에는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나는 바로 이 안목 하나로 투자의 신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가끔씩 내 눈을 의심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나는 물끄러미, 정신을 잃은 잭의 이마를 내려다보았다.
그 숫자는, 짐과 달리 아주 선명했다.
그것이 정도(正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