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왼팔에 매달린 긍지 (5)
맨시티와의 리그 맞대결에서 패배하면서, 분명히 우리 팀에는 상처가 생겼다.
- 리그 무패가 날아갔으니, 팀의 사기도 흔들리겠지?
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축제 열렸다던데.
댓글 아래에는 사진도 붙었다. 축제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경기장에 내걸린 플래카드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부터 맨시티는 아스널의 형제다]
무패라는 키워드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스널은 리그에서 마지막으로 무패 시즌을 보낸 팀이라서, ‘무패’ 키워드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팀이었다.
그런 만큼 리그 막바지까지 지켜온 무패 시즌을 날려버린 우리의 상실감 또한 클 거라는 예상이 많았다.
- 이대로라면 2위 자리도 위험하지 않음?
ㄴ 우승 못 할 거면 2위나 3위나··· 챔스권만 지키면 됨. 문제는 와르르 무너져서 4위까지 내주는 거임.
외부의 우려와는 달리, 정작 우리 팀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은 평소와 똑같았다. 비결은 역시, 아직 시즌이 안 끝났다며 동료들을 독려하는 주장의 존재감이다.
“컨디션 좋은가 봐? 얼마 전엔 발이 무거운 것 같더니.”
“저는 항상 컨디션 좋슴다.”
브라이언과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잭을,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응시했다.
180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흐릿하게 변했던 짐의 이마와 달리, 너무나도 선명한 숫자를 본 순간 가슴이 시큰거린다. 어젯밤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취해 하소연하던 잭의 목소리가 기억나서, 더더욱.
그런데도 저 청년은 틀림없이 선덜랜드의 주장이다. 그 팔에 매달린 완장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 때문에.
* * *
훈련이 끝난 직후, 톰슨이 잭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찔러 넣었다.
“다 들었다. 어제 술 퍼먹고 뻗었다면서.”
“거짓말임다.”
“다 들었는데?”
톰슨이 단호하게 선언하자, 잭이 슬쩍 눈동자를 돌렸다.
“전에 해주신 말씀이 거짓말이라는 검다. 바 블랙캣츠 스태프는 비밀을 엄수한다고, 밀담하기 좋다고 하시지 않았슴까?”
“바텐더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니야. 사실 더 간단한 해답이 있는데.”
“그러고 보니 클럽하우스에서 깼슴다. 어제 클럽하우스에서 잤던 놈들··· 요니, 이 자식!”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선덜랜드 주장의 모습은 사냥개라는 본인의 별명에 퍽 어울리는 것이라, 톰슨을 피식 웃음 짓게 만들었다.
“정답이지만, 보통은 동행자를 의심하지 않나?”
“단순한 소거법임다. 구단주님은 그러실 분 아님다.”
“썬이 들으면 좋아하겠군. 그나저나, 다음부터 술은 잘 골라라. 어제처럼 아무거나 퍼마시지 말고.”
술에는 조예가 있는 톰슨은 곧바로 잭을 바 블랙캣츠로 연행했고, ‘마실 만한’ 칵테일 몇 개의 이름을 거론했다. 도수가 적절하면서도 ‘술맛’이 나서, 술이 약한 사람이 무심코 과음하지 않을 만한 적절한 추천이었지만, 정작 잭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그냥, 앞으로 안 마시면 되는 거 아님까? 저 이제 술 생각 별로 없슴다.”
“···그랬으면 좋겠다만.”
톰슨의 표정은 미묘했다. 덕분에 곧, 잭의 표정도 미묘해졌다. 눈앞의 사내가 선덜랜드의 여러 프로들 중에서 가장 자기관리에 철저한 타입임을 알기에.
그런데 동시에 톰슨은 바 블랙캣츠의 단골이기도 하다. 물론 나름대로 자신의 주량을 관리하고 있지만, 자기관리만 생각하면 애초에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게 낫다.
잭이 보낸 무언의 질문에, 톰슨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자신의 기량에 실망했을 때,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그런 날 술 한잔에 혼자서 털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정신 건강에 좋다는 뜻임까. 이해할 것 같슴다.”
“뭐, 너는 친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기 좀 그렇잖냐. 그러니 바에 신세 지는 거지.”
톰슨의 친구는 이희성과 브라이언인데, 어느 쪽이든 경기를 망친 선수가 하소연하기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나마 브라이언이 코치일 때는 나았지만, 올 시즌부터는 감독이 되면서 셋이서 술 마시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술에 털어버리라는 검까.”
톰슨이 대신 주문해준 칵테일을 잭은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아직 입에 술을 댈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너는 나보다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영광임다. 정진하겠슴다.”
“어··· 미안한데 칭찬은 아니야. 나보다 좋은 선수라는 뜻은, 어디까지나 나와 비교되는 선수라는 소리니까.”
“톰슨 씨는 아주 좋은 선수라고 생각함다.”
“그랬으면 팀을 옮기지 않았겠지.”
톰슨의 표정에 진지함이 돌아왔다.
“언젠가는, 팀에 어울리지 않는 선수가 되는 날이 올 거다. 선수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이 팀이라면, 그 시기가 훨씬 빨리 찾아올지도 몰라.”
“······.”
톰슨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잭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선덜랜드는 이제 챔스 4강을 치르는 강팀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강팀일 것이다. 스쿼드는 젊은 편이고 감독은 아예 어린 축에 드니까. 구단주의 재력이 마를 가능성이 없고,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그러므로 이 팀의 전성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잭은 자신의 기량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기 충분하다고 믿었지만, 앞으로 팀이 계속 성장한다면···.
“너는 끝까지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었으면 좋겠어. 다른 유니폼 입은 널 상상하면, 굉장히 어색할 것 같거든.”
“···감사함다.”
“그럼 천천히 머리 식히고. 뭐, 앞으로도 술 한잔이 필요한 날이 있을 거야. 다들 널 강심장이라고 믿으니까··· 혼자 털어내야겠지.”
“가끔 그런 생각 함다. 심장 같은 건 없었으면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슴다.”
“하지만 정말로 심장이 없는 인간은, 축구 같은 거 못 하지.”
“하긴, 그렇슴다. 축구 이전에, 살 수 없슴다.”
“내 말은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열정 이야기인데.”
“어···.”
잭은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고, 톰슨 또한 잭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대로 바를 빠져나가는 선택을 했다.
이윽고 바 블랙캣츠에는 과묵한 바텐더와 선덜랜드의 주장, 그리고 칵테일 한 잔만이 남았다.
톰슨이 먼저 자리에서 떠난 뒤에도, 잭은 자신의 술잔에 입을 대지는 않았다. 대신, 바에 올려놓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웠다. 팔에서 풀어낸 자신의 주장 완장을 움켜쥔 채.
잠시 후, 선덜랜드의 주장은 그 위에 천천히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마치 기도하듯이.
* * *
Let us pray for Sunderland football club and for our city.
“뭐 하냐.”
무심코 묻자 희주가 냉큼 대답했다.
“이거? 선덜랜드를 위한 기도라는데? 저주를 중화하는데 도움이 좀 되려나 싶어서.”
마음가짐은 기특하지만, 이제는 큰 소용이 없다.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상관없고, 남은 상대는 하나같이 만만하지 않다.
우선 맨시티. 불과 며칠 전, 리그에서는 아직 우리보다 위에 있음을 확실하게 증명한 강적이다.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신흥 강호로 발돋움하려는 우리에게는 롤모델이자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한 팀인데, 아직은 격차가 조금 난다.
최근 돈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한 파리도 만만찮다. 축구 강국 프랑스의 수도를 홈으로 쓴다는 점에서도 까다로운 상대다.
그리고 역사가 공인하는 챔스 최강자, 레알도 만만치 않은 상대다.
“결국 바르샤는 못 올라온 거구나.”
”이제 그 팀엔 축구의 신이 없으니까.”
우리한테 와 있지. 구단주가 된 이래 최대의 빅 사이닝이었다.
적지 않은 돈을 들였지만, 대신 굿즈만 팔아도 대충 본전은 찾을 기세고, 올 시즌의 성적은 덤이다. 아직 어리고 젊은 재능들을 키우는 데에도 도움을 받게 되겠지.
“어··· 그러면 굳이 기도할 필요 없는 거야? 그럼, 모처럼이니까 한 팀 정도 찍어 볼래? 내가 그 팀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외치면 되는 거잖아?”
저주받은 혀를 사용할 방법을 찾아낸 희주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네가 펠레급 혓바닥의 소유자라도, 그런 편법성 저주가 통하겠어? 현실적으로 최선은 희주 너를 입 다물게 하는 정도겠지.”
“오빠, 애초에 저주라는 개념부터가 별로 현실적이지 않아.”
어, 그건 그렇네.
한편 샐리와 브라이언의 반응은 우리와는 퍽 달랐다.
샐리는 하늘색 유니폼 레플리카를 대량으로 구매했고, 브라이언은 근사한 새 정장을 자기 사무실 벽에 걸었다. 알고 보니 맨시티 감독 펩이 즐겨 입는 정장과 같은 브랜드라고 한다.
챔스에서 시티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노골적인 니즈다.
“비서님!? 4강 상대로 맨시티를 뽑아 주세요. 무슨 공물을 준비하면 되는 건가요? 혹시 아일랜드 요리는 어떠세요?”
“4강전이 아니면 결승이라도 좋습니다, 레이디.”
우리 코칭스태프의 간절한 염원은 닿지 않았다. 맨시티는 우리와 다른 블록에 배정되었고, 복수전은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만 했다.
선덜랜드의 챔스 4강 상대는 레알이었다.
* * *
[챔피언스리그 4강, 레알 대 선덜랜드]
선덜랜드 선수단은 레알의 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향했고 팬들은 풋볼 스퀘어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모였다.
그리고 브라더스는 우드 부부의 자택에 집결했다.
“오늘은 뭔가 클래식한 느낌이 드는데.”
“아, 앨리스 양이 없어서 그런 거죠?”
앨리스는 이제 구단 직원이고, 지금처럼 경기가 있는 날에는 당연히 구단에 출근한다. 예전처럼 브라더스, 그리고 우드 부부와 함께 축구를 볼 기회는 이제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도 그런데, 상대가 레알이라서.”
“그러고 보니··· 썬이 구단주로 돌아온 다음, 가장 먼저 부른 팀들이 레알, 뮌헨, 바르샤였죠? 그렇게 들으니 확실히 클래식한 느낌이 드네요.”
뮌헨, 바르샤와는 프리시즌컵에서부터 몇 경기쯤 재회할 수 있었지만, 레알과는 줄곧 만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핫도그 사내가 턱을 쓸었다.
“이거··· 상대가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감이 오지 않네요.”
“왜, 요즘 레알 그저 그렇잖아. 지난 시즌엔 바르샤에 리그도 뺏겼고.”
브렌든의 반문에 핫도그 사내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그사이 마일즈가 대신 대답했다.
“아무래도 챔스의 레알은 부담스럽지. 괜히 최다우승팀이 아니잖나.”
“맞습니다. 일단 중원만 봐도 레알은 상대하기 편한 팀은 아니거든요.”
“지금이 몇 년도인데 언제 적 크카모 같은 소리를···.”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브렌든을 향해, 핫도그 사내가 짧게 지적했다.
“아직 크로스와 카세미루는 건재하니까 말이야.”
그때, 뒤에서 크리스의 빼액- 하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른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크리스는 축구 볼 때 한정으로 아주 얌전한 아기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울보다. 그리고 목소리가 굉장히 우렁찬 편이었다.
며칠간 크리스를 맡아준 적 있는 브렌든을 시작으로, 어른들이 질겁하기 시작했다.
“쪽쪽이, 쪽쪽이 줄까?”
“뚝! 아저씨가 모빌 사왔다?”
허둥지둥하는 남자들을 바라보던 아기 엄마, 수잔이 웃었다.
“그냥 조용히 응원이나 하라는 뜻 같은데요?”
* *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선 잭의 컨디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였다.
원래 고민은 여러 선택지를 가졌을 때 가장 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레알의 중원은 적어도 잭에게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상대에 해당된다.
노쇠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클래스를 보여주는 크로스와 카세미루는, 틀림없이 잭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미드필더였다.
레알의 중원에게, 잭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우위는 거의 없었다. 딱 두 가지를 제외하면.
엠블럼에 대한 충성과 왼팔에 매달린 긍지.
Guide us in our love, for our city and our club. For it is a love born out of passion.
선덜랜드를 위한 기도를 입 안에서 외우며, 잭은 천천히 센터서클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 완장과 엠블럼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타는 것처럼 화끈거리는 왼팔에서, 열기가 온몸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가득 메운 홈 팬들의 목소리조차 귀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잠시 후 휘슬이 울렸고, 선덜랜드의 주장은 거칠게 달려나갔다.
그 모습은 사냥개라는 그의 별명과 꼭 닮아 있었고, 동료들에게는 든든함을, 그리고 적에게는 압박감을 선사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아홉 개의 붉은 유니폼이 주장의 뒤를 따라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