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가장 고전적인 (1)
<베르나베우의 90분은 아주 길다 - 후안 고메스 곤잘레스>
“분석실에서 경기를 보라고요?”
지시를 처음 들었을 때, 앨리스는 무심코 반문하고 말았다.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신입사원 포지션을 선점하려는 평소의 노력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왜, 싫어?”
“아뇨. 싫지는 않지만요.”
상사 애니의 질문에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사실 썩 유쾌한 심정은 아니었다. 앨리스는 선덜랜드 경기일이면 유니폼 레플리카를 걸치고 출근할 정도로, 아직 팬의 마음을 유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고 팬의 입장에서 경기는 당연히 직관이 최고지만, 여의치 않다면 풋볼 스퀘어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초대형 스크린을 원했다.
우드 부부의 자택도 무척이나 끌리는 관람 장소다. 옆자리의 다른 팬들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이 소리 지르는 열기야말로 앨리스가 생각하는 축구의 가장 큰 재미였기에.
분석실에는 팬들의 열기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냉정함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축구팬이던 앨리스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심지어 분석실의 주인, 샐리와 루벤, 토마스는 스페인에 가버렸으니 혼자 경기를 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상사의 지시는 절대적이고, 특히 신입사원에게는 더욱 그렇다.
결국 앨리스는 노트북을 집어든 채 터덜터덜 분석실로 향했다. 등 뒤의 하트 마킹이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 인턴 누나?”
먼저 분석실에 와 있던 테오와 시선이 마주치자, 앨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인턴 누나도 축구 보러 왔어요? 저도 그래요. 감독님이 그러셨거든요. 이번 경기는 꼭 분석실에서 보라고요!”
그때 딱-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고, 테오가 울상이 되었다.
“인턴 누나라니 버릇없게··· 죄송합니다 스태프님.”
꿀밤 한 방으로 테오를 제압한 선덜랜드 유소년 주장, 짐이 의젓하게 인사했다. 그 말처럼, 이제 인턴은 아닌 앨리스가 미소로 화답했다.
확실히 축구를 보기에는 혼자보다 셋이 훨씬 낫다. 테오는 살짝 산만하지만, 그래도 혼자 경기를 보는 적막함보다는 산만함이 훨씬 반갑다.
게다가 앨리스는 우드 부부의 집에서 크리스와도 종종 어울리는 만큼, 어린애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나저나, 감독님이 직접 여기서 축구 보라고 지시할 정도면 꽤 기대받는 모양이네?”
그러자 짐과 테오가 앨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말씀대로라면 스태프님이야말로···.”
“선수와 스태프는 다르지. 나는 홍보 기사 쓰러 온 거야. 솔직히 풋볼 스퀘어에 갔으면, 기사고 뭐고 정신 못 차리지 않았을까?”
“하긴, 유니폼을 챙겨오실 정도니까요.”
짐의 지적에, 앨리스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럼, 응원하면서 볼까?”
잠시 후 분석실의 소유가 바뀌었다. 반쯤 앨리스의 것으로.
그녀의 상사 애니나 클라크, 아벨은 전부 프레스룸에 있었고, 분석실 주인들이 스페인에 가버린 탓에 앨리스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던 탓이다.
We're Black Cats supporters.
Loyal through and through.
물론 짐도 어릴 때부터 선덜랜드의 팬이긴 했지만, 나이 차이에서 오는 바이브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앨리스는 근본 있는 충성팬 우드 부부나, 축구라면 죽고 못 사는 브라더스와 친분을 나누는 사이라 열정적이고 거친 응원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소년들이 잠시 서로 얼굴을 마주봤을 정도로.
“있잖아. 주장. 혹시 클라라도 주장 없는 데서는 이럴까?”
“···나도 몰라.”
다행히 경기 흐름은 좋았다. 앨리스의 응원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위축될까봐 걱정했는데, 괜찮아 보여.’
화면 너머에 보이는, 선덜랜드 선수들의 움직임은 활발했다. 자신들이 뛰는 경기장이 천하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라는 사실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저 경기장에서 버티기는 어려울 텐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수용인원은 팔만 명이 넘는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넘어선 압도적인 규모다. 그렇게 거대한 경기장이 오늘도 레알의 흰 유니폼으로 가득 들어선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옆자리의 짐도 한마디 했을 정도로.
“베르나베우에서 맞불 놓는 팀은 세상에 별로 없을 텐데요.”
“하긴, 누가 빅클럽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레알은 무조건 1순위에 들어가 있을 테니.”
“네, 저 팀이 빅클럽이 아니라면, 세상엔 빅클럽이 없어요.”
축구계에서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가졌고, 세계에서 가장 팬이 많은 구단인데, 심지어 부유하기까지 하다. 레알의 하얀 유니폼을 동경하는 축구 선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그렇기에 레알의 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주눅 들지 않는 선수는 아주, 아주 드물었다.
다만, 그 드문 선수를 선덜랜드는 여러 명 갖고 있었다. 앨리스의 열기로 들뜬 눈이, 화면 너머의 선덜랜드의 주장을 응시했다.
잭은 신인 시절부터, 자기를 갖고 싶으면 엠블럼에 펜쇼 모뉴먼트와 위어마우스 브릿지를 넣으라는 패기 넘치는 발언을 날리며 유명해진 선수다. 새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중압감에 위축될 리 없다.
‘그리고 주장이 건재하면, 팀의 사기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지··· 며칠 전 바로 요 꼬마들이 증명한 거잖아?’
앨리스는 슬쩍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그곳에는, 어느새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만큼 축구에 몰입하는 소년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상하다? 캡틴은 오늘 오른쪽 메짤라로 나갔어. 평소엔 왼쪽이었을 텐데.”
“우측 전방을 뒷받침하기 위한 거겠지.”
그들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마침 카메라가 선덜랜드의 우측 전방을 비췄다.
그곳에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뛴다는 사실에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또 하나의 선수가 서 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이 엘 클라시코에서 뛰어본 선수가.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사내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으으. 여기 진짜··· 좀 그렇네.”
희주가 몸을 떨었다. 무리도 아니다. 이 경기장을 찾는 원정 팀 관계자는 전부 압박감에 짓눌리는 게 정상이니까.
그만큼 이곳,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강대한 경기장이었다.
나도 매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개축하며 키웠지만, 그래도 아직은 칠만 석 규모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규모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아마 올 시즌에는 격차가 좀 더 벌어질 것이다. 레알은 현재 이 경기장을 개축하는 중이니까.
스크린 외벽에 레이저를 쏴서 구단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획은 아주 훌륭해 보인다. 우리도 다음 시즌에 따라 할까 싶을 정도로··· 그냥 베끼는 건 창조성이 없으니, 슬슬 홀로그램을 쏴 볼까 싶은데.
“오빠는 의외로 태연하네? 2차전이 우리 홈이라 그래?”
“그렇다기보다는, 우리 선수들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아서 그런 건데.”
“···정말로?”
희주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반 팽팽하게 시작했던 경기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레알에 주도권을 내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내가 보기엔 아직 괜찮다. 아직 우리 선수들은 조직력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이제 맞불은 쉽게 놓지 못하지만, 대신 수비 블록이 지켜지고 있다. 레알의 연고지 라이벌이 특기로 삼는 두 줄 수비가. 로저스 감독 시절부터 역점을 두고 갈고 닦았던 플레이다.
이후 레알은 약 20분간 우리를 신명나게 두들겼고 우리는 그야말로 악착같은 수비로 버티며 일종의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릴 때까지는.
잭의 안면을 강타한 공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관중석에서도 피가 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여서 희주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고, 나는 그만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 * *
얼굴을 축구공이 강타한 순간, 잭은 눈앞에 별이 부서져 내린다고 생각했고,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다른 기억들도 떠올렸다.
[저분들, 지금 안 나가고 뭐 하시는 검까?]
처음 레알을 홈으로 불러들였던 프리시즌 때의 경기다. 그날, 패배에도 불구하고 기립박수를 보내던 선덜랜드 팬들의 모습이, 아직도 잭의 눈앞에 선명하다.
어째서 그 일을 떠올렸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상대가 똑같이 레알이라서 그렇겠지만···.
‘그때와는 달라.’
그날, 잭은 안면으로 공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았고, 인상적인 투지라며 유니폼을 바꾸자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정작 잭 본인은 그날 경기를 줄곧 부끄러워하는 중이었다. 경기는 세 골 차로 패배했고 잭은 파트너 요니와 함께 줄곧 선덜랜드 진영에 머무르며 수비에 급급해야 했으니.
그 시절의 선덜랜드는 투지가 느껴진다는 것만으로도, 가능성만 보여주어도 박수를 받을 수 있는 팀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선덜랜드는 챔스 4강 팀이고, 이 자리에 오는 길에는 뮌헨과 유베를 물리쳤다.
따라서 지금의 선덜랜드에 필요한 것은 투지가 아닌 실력이며, 팀에 가져다주어야 할 플레이는 안면 블로킹이 아닌 승리다.
입안 가득 퍼지는 비릿한 쇠냄새에 아랑곳하지 않고, 잭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앞에 보이는 공을 힘차게 걷어찼다.
“카운터-!”
* * *
축구의 신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소리에 섞인 소음은 친숙하면서도 격렬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그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다.
데뷔부터 전성기까지 그는 줄곧 레알의 최대 라이벌 팀 바르샤의 에이스로 뛰었고, 흔히 세계가 멈추는 90분이라고 부르는 더비 매치, 엘 클라시코에서도 수도 없이 출전했다.
그는 아직도, 역사상 엘 클라시코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린 선수다. 디 스테파노보다, 라울보다, 푸스카스보다 많은 골을 넣었으니, 레알 팬들이라면 진저리가 날 만 하다.
그리고 이제 선수 생활의 황혼을 맞은 그는, 새 소속팀의 유니폼을 입고 또다시 챔스 4강이라는 큰 무대에서 레알의 적이 되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원수나 마찬가지겠지.’
그런데도 원한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카운터를 외치는 소리가. 흘끗 돌아보자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동료들을 독려하는 주장 잭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축구의 신은 가슴이 세차게 뛴다고 느꼈다.
변함없이 굳건한 흰색 유니폼의 벽 사이로,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잔디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루트, 득점으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길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반사적으로 그의 발이 잔디를 박차 뒤로 밀어낸다.
다음 순간, 공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워낙에 절묘한 타이밍의 패스였기에 연습이었으면 엄지를 치켜세우고 칭찬했겠지만, 지금은 실전이다.
그래서 그는, 그저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마흔 번도 넘게 싸웠던 무대에서 늘 해왔던 일을.
수비를 찢어버리고 골을 만들고, 이곳의 팬들에게 침묵과 정적을 선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때로는 탄식이, 때로는 욕설이 터져나오곤 했다.
지금처럼.
웅성거리는 홈 팬들, 어디선가 울리는 절규, 막으라거나 잡으라는 외침 속에는, 틀림없이 한 골을 원하는 원정 팬의 목소리도 섞여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친정팀 바르샤 팬들도 경기를 보러 왔을지도 모른다. 단 한 줌이겠지만.
그래서 축구의 신은, 그렇게 했다.
한구석에 불긋한 게 묻은 공을 받아냈다. 발 대신 손이었다면 쓰다듬는 거라고 착각했을 만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동시에 스핀을 걸어 트래핑 직후를 노리던 레알 수비수 한 명을 따돌렸다. 다음 순간 그는 경기장의 우측면을 질주했고, 고작 몇 초 만에 레알의 골네트를 사거리에 두었다.
그리고 절묘한 감아차기로 네트를 흔들었다.
전 세계 축구팬을 열광시키는 플레이지만, 이곳에서 박수를 받은 기억은 한 번도 없다.
[레알 0 - 1 선덜랜드]
하지만 축구의 신이 천천히 몸을 돌린 순간, 이어진 반응은 그의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한숨도, 욕설도, 탄식도 아닌 그 소리는, 작지만 또렷한 갈채였다.
마드리디스타가 일어나 있다. 자신들의 가장 강대했던 적수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것처럼. 수없이 싸웠지만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경험하지 못한 풍경이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블라우그라나 이외의 유니폼을 입은 채 이 경기장에서 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바르샤를 떠난 순간, 이 경기장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챔스에서 딱 마주치는 기적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걸 알았기에.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오랜 라이벌의 팬 앞에 다시 설 기회를 허락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아마도 마지막일 재회를 맞아, 레알의 팬들은 그를 라이벌 팀의 에이스가 아닌, 은퇴를 앞둔 축구계의 레전드로 대우하고 있다.
관중석을 응시하던 메시가 낮게 속삭였다.
“주장, 혹시 괜찮으면···.”
메시의 의도를 짐작한 잭이 피범벅이 된 얼굴로 빙긋 미소를 지었다.
“괜찮슴다. 아무 문제 없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잭은 반대 못 할 겁니다. 마음껏 하시죠··· 그리고 너는 피부터 좀 닦고.”
주장은 물론, 부주장 요니의 동의까지 떨어지자 거칠 것이 없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축구의 신은 몸에 걸친 선덜랜드 셔츠를 천천히 벗어 관중석을 향해 내밀었다.
[메시, 7, 선덜랜드]
예전과 달리 도발의 목적은 없었기에 세레머니는 아주 짧았다. 그저 기억해주길 원할 뿐이었다. 예전과 다른 등번호, 다른 유니폼, 하지만 똑같은 이름을.
잠시 후 축구의 신은 피치를 향해 돌아서며 유니폼 상의를 몸에 되돌렸다.
그 뒷모습은 마치, 필생의 적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보여서 마드리디스타를 침묵시켰다.
축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