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가장 고전적인 (2)
메시의 선제골로 승기를 잡은 순간, 우리 벤치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홈 팬들의 박수가 채 그치기도 전의 일이었다.
[아웃, 7번 메시 - 인, 26번 스티븐]
두 가지 의미가 담긴 교체였다. 우선, 축구의 신에 대한 배려였다. 그에게 있어 캄 노우 못지않게 깊은 의미가 담긴 경기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박수받는 모습 그대로 떠나갈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선제골을 그대로 지키며 승리를 따내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대선수는 은퇴를 앞둔 지금도 변함없이 마술적인 장면을 만들어내지만, 수비 상황에서는 썩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비를 굳힐 의도라면 스티븐이 훨씬 낫다.
그는 원래 풀백 출신이고, 요즘은 디펜시브 윙어로 활약한다. 최근에는 부족했던 축구 지능을 보완하며, 공수 양면에서 아주 출중한 선수가 되었다.
옆에서 희주가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버티는 거구나.”
“그렇지.”
대답하면서, 나는 경기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수비 축구에는 자신이 있었다.
시작부터 잠근 것도 아니고, 원정에서 득점 후 잠그며 버티는 일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축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고전적인 전법이니까.
게다가 우리 감독 브라이언은, 다른 젊은 감독들과 달리 낡은 전술도 꽤 잘 다루는 편이었다. 첨단 전술에도 능통하지만, 가장 고전적이고 영국적인 롱 볼 축구도 완벽하게 해낸다.
로저스 감독이 만들어 둔 수비와 역습 전술은, 우리가 하부 리그 시절 몇 년간 무기로 삼았던 팀 컬러이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 팀에는, 그 시절부터 활약하던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수비 축구는 익숙하고, 또 자신이 있다. 그런데도 못내 불안한 이유는, 아마 이곳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베르나베우의 90분은 아주 길다] 는 격언이 있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빅클럽 레알의 홈 경기장은 축구계에서 손꼽히는 원정팀의 지옥이고, 챔스 최다우승에 빛나는 레알의 저력은 이 경기장에서 수없는 역전승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러니 이제부터 펼쳐질 장면은 정말로 가혹하겠지.
그래도 눈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이곳에, 선수들과 같이 싸우러 온 거니까.
Hala Madrid y nada más!
어느새 베르나베우를 가득 메운 홈 팬들의 함성에 맞서, 배에 힘을 주었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들리지 않더라도, 외쳐야 하는 날이기에.
* * *
친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잭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온통 하얀색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로스 블랑코스의 홈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레드 앤 화이트 유니폼을 입은 선덜랜드 원정 팬은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다들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겠지만, 그래도 피치까지 들릴 리는 없다.
이곳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다.
“왜 그래?”
옆에서 의아한 표정을 짓는 요니를 향해, 잭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착각했어.”
고개를 흔들어 경기에 집중하려 노력하면서, 잭은 짧게 덧붙였다.
“몇 년 전 일이 떠올랐던 모양이야.”
요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제대로 미쳤었던 그날 말이지.”
벌써 5년 전 프리시즌 때의 일이다. 당시 3부 리그이던 선덜랜드는 천하의 레알을 맞상대한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었고, 둘은 좀 더 무모한··· 만용에 가까운 목표를 준비했다.
[바이털 에어리어를 내주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로스 블랑코스의 중거리슛은 없다.]
둘의 얼굴에 동시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땐 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특별히 마약 같은 건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러게. 솔직히 다시 해보래도 못 할 짓 같긴 한데··· 그래도 이번에도 해내야겠지?”
잠시 후, 나란히 선 두 사람의 주먹이 가볍게 마주쳤다. 이제부터 벌어질 경기의 흐름을 예상했기 때문에.
가끔씩 시도할 역습을 제외하면, 이제 선덜랜드의 공격은 없다. 그 대신 축구계 최대의 빅클럽이 퍼붓는 일방적인 공세를 막아내야 할 것이다.
휘슬이 세 번 울릴 때까지.
“마침 그날도 레알전이잖아. 로저스 감독님이 처음 말씀하신 날.”
“그랬지. 휘슬이 세 번 울릴 때까지, 아무것도 멈추지 말라고 하셨지.”
이윽고 둘의 발이 동시에 땅을 박차고, 잔디를 밀어냈다. 그렇게 달려나가는 주장단의 뒤를, 여덟 개의 유니폼이 따랐다.
[발을 멈추지 말고, 집중력을 잃지 말고,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라. 그게 선덜랜드의 축구다.]
* * *
마일즈는 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눈앞에 펼쳐진 경기 양상이, 5년 전을 연상하게 했기 때문에.
그때도 레알은 일방적인 공세를 퍼부었고 선덜랜드는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차이점이라면, 기껏해야 경기장 정도였다.
‘그때는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지금도 거실에 모여 애타게 외치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 아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쭉 몰려와 목소리를 모으는 중이다.
We're Black Cats supporters.
하지만 이 함성은 절대로 스페인 마드리드까지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걸, 마일즈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도할 수밖에···.’
눈을 감으려는 찰나, 옆구리에 가벼운 충격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수잔이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보, 크리스가 보고 있어요.”
“그랬지.”
마일즈는 무심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사실, 수잔에게 응원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사람은 마일즈 본인이었다. 선수들과 함께 싸우러 온 거니까, 불리해도 절대로 기죽지 말아야 한다고.
얼핏 보니 불리한 전황에도 수잔은 별로 기죽은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는···.
축구 경기 흐름을 이해하긴 하는지 미심쩍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는 축구 자체에는 무척 몰입한 상태였다.
어쩌면 조금쯤은 경기를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덜랜드가 위험한 국면에서는 숨을 죽이다가, 비교적 안전한 상황이 되면 꺄륵거리며 손에 든 티타늄 시즌권을 열렬히 흔드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화면을 자세히 보니, 선덜랜드 선수들 또한 별로 기가 죽은 것 같지 않았다. 덕분에 마일즈는, 이 거실에서 브렌든과 자신만이 유일하게 기죽은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나이스 요니!”
핫도그 사내의 환호가 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요니가 활발하게 경기장을 누볐다. 특유의 위치선정 능력을 발휘해, 공이 올 길목을 요령 좋게 선점하며 레알의 공세를 지연시켰다.
“최고다, 리델!”
몇 차례나 선방 쇼를 선보인 리델의 플레이에 맥주집 사내와 빌리 노인이 동시에 함성을 질렀다. 하퍼에게 골마우스를 넘겨받은 젊은 골키퍼는, 지금까지 선덜랜드의 골문을 지켰던 모든 이들처럼 당당하게 모두의 등을 지켜냈다.
새로 투입된 스티븐도, 원래부터 뛰던 마르틴도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며 힘을 보탰다.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 그 분투의 중심에는, 당연히 선덜랜드의 주장을 뺄 수 없었다. 손을 제외한 모든 부위로 공을 막아내면서, 잭은 그야말로 ‘걸레수비’가 무엇인지를 톡톡히 보여주는 중이었으니.
거실에 걸린 잭의 유니폼을 흘끗 바라본 다음, 마일즈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 * *
마침내 공이 하늘로 길게 떠오른 순간, 휘슬이 세 번 울렸다. 잭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평소 어깨로 숨을 쉬지 않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던 것이다.
유니폼 상의는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었고, 군데군데 피가 묻기까지 했다. 그가 오늘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 증명하는 것처럼.
마침 옆에서는 요니가 잔디 위에 큰 대 자로 누웠다. 일어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살아 있냐, 파트너.”
대답이 없다. 죽은 것 같다.
요니를 부축해서 일으킬지, 아니면 그냥 들것을 호출할지 가벼운 고민에 빠진 잭의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이게 뭠까?”
“악수는 만국 공통이라고 생각하는데··· 타인위어의 풍습은 조금 다른가?”
레알의 크로스였다. 잠시 망설이던 잭이, 크로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서 선덜랜드 유니폼은 오늘도 비매품인가?”
“어···.”
자랑은 아니지만, 잭은 아직 유니폼 교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유니폼을 원하는 상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번쯤 교환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때마다 잭은, 자신은 그럴 만한 대단한 선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불결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중히 거절했다.
실제로는 선덜랜드 유니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팬들에게도, 실착 유니폼은 내준 적이 거의 없으니까.
그래서 잭이 핑계를 고민하는 사이, 옆에서 카세미루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18번 유니폼은 내 건데? 너는 19번이나 받아가지.”
“물론 그럴 생각이야. 19번이 살아나면.”
아쉽게도 정신을 차릴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는 오랜 친구 요니를 흘끗 바라보며, 잭은 다음부턴 자기도 ‘죽은 척’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다음에 만족스러운 경기 한 다음에 유니폼 바꾸자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설마 베르나베우에서 이겨 놓고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카세미루의 지적에, 잭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천벌 받을 검다.”
잭은 천천히 자신의 유니폼 상의를 벗어서 내밀었다··· 그리고 자기만 유니폼을 내주면 억울하다는 이유로, 아직도 반쯤 인사불성인 요니의 상의를 벗겼다.
* * *
유니폼을 교환하는 우리 선수들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에선 희주도 감개무량한 얼굴로 콧잔등을 문질렀다.
한때, 친선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르샤 선수들의 유니폼을 얻기 위해 줄을 서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다. 불과 5년 전 프리시즌의 일이었으니.
그러던 팀이, 이제 천하의 레알 상대로 당당하게 유니폼을 교환하고 있다. 특히 강력한 레알의 중원을 상징하던 두 대선수가 선덜랜드의 주장과 부주장의 유니폼을 원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상징적이었다.
그만큼 팀의 위상이 높아진 거겠지.
뿌듯함과 승리의 기쁨이 어우러져 자꾸만 심장이 날뛰고, 자꾸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직 우리에게 2차전이 남아 있음을 알기에.
* * *
경기 종료 직후, 앨리스는 재빨리 자신의 원고를 마무리했다. 기사 초안을 애니에게 전송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초안이라고 해도 대충 쓴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사의 컨펌을 받겠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리그에서의 패배로, 선덜랜드가 상처받았을 거라 생각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코앞에서 날아간 리그 무패에, 그 아쉬움에 발목을 잡힐 거라고. 실제로 대기록 수립에 실패한 팀들이 종종 겪는 후유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앨리스 또한 조금은 걱정했던 일이었다. 혹시 1차전이 홈이었다면 일방적인 응원을 퍼부으며 무너지려는 선수들을 일으켰겠지만, 선덜랜드는 선수단을 스페인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팬들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으로.
[하지만 선덜랜드는 또다시 입증했다. 가장 고전적인 방식으로. 입 대신 발로, 피와 땀으로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경기장에서 귀중한 승리를 따왔다.]
그곳에서 선덜랜드 선수단은 주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고, 사투 끝에 승리를 지켜냈다.
“이제 챔스 결승에 향하기 위해서는 딱 한 경기만이 남았다. 그리고 2차전을 치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원정팀에게 어떤 장소인지는···.”
기사 마지막 문단을 입으로 읽으며 검토하던 앨리스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수잔의 메시지가 도착한 상태였다.
[앨리스, 혹시 2차전은 구단 관계자석에서 경기 봐야 하니? 빌리 아저씨가 궁금하다고 하셔서···.]
앨리스는 곧바로 답장했다.
[자리는 고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이얼 스탠드를 신청할까요?]
[그래. 크리스가 좋아하겠네. 그날 보자!]
앨리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축구에 진심인 사람들은 유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갓난아이부터 은퇴를 앞둔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팬으로 만드는 구단은, 찾기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2차전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절대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열기에 뒤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면서, 앨리스는 자신의 원고를 마무리했다.
[이 경기장에 대해서는, 굳이 더 이상 증명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