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91화 (291/422)

291화 가장 고전적인 (3)

기사를 다 쓴 다음에도 앨리스는 멈추지 않았다. 모처럼 분석실에서 경기를 본 거니까, 경기 주요 장면을 돌려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분석실 장비는 어느 정도 다룰 줄 안다. 입사 직후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앨리스는 경쾌한 손길로 프로그램을 다루기 시작했다.

“요나스 선수를 쓰는 방식이 묘수였네.”

안첼로티 레알의 중원을 고립시키기 위해, 브라이언이 얼마나 다양한 고안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라이브로 중계를 볼 때는 쉽게 보이지 않던 장면이었지만, 결과를 알고 나서 돌려보니 선명하다.

“역시 전술 천재···.”

비록 전술 천재 티셔츠 디자인은 좀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오늘의 경기력은 전술 천재를 자처하기 부끄럽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앨리스는 흥미진진하게 경기 주요 장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귓가에 뭔가 잡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앨리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짐, 그리고 테오와 함께였으니. 그리고 예의 바른 짐은 그녀의 집중을 방해하는 대신 분석실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뒤늦게 소년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앨리스가 깊이 반성했다.

“미안,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내가 살게.”

수잔이 추천한 푸드트럭 핫도그가 괜찮다. 오늘 같은 빅매치 날에는 순식간에 동이 나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세 개쯤은 살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코리안 프라이드치킨도 괜찮다. 대부분의 서양인은 매운 음식을 질색하지만, 앨리스는 칠리페퍼가 잔뜩 들어간 버전을 좋아한다.

‘아무튼 영국 음식과 비교하면 매콤함조차 천상의 맛이니까.’

정작 소년들은 앨리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잔뜩 상기된 테오의 표정에 미소를 지었다. 먹을 게 그렇게 좋은가 싶어서. 아니면 혹시 자신도 소년들에게 그렇게 인기라는 밥 사주는 예쁜 누나가 된 것인가 싶은 마음에 흐뭇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왜 그러니?”

테오를 꼭 붙들고 있는 짐에게 묻자, 짐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테오 이 녀석, 가만 놔두면 날뛰거든요.”

“날뛴다고? 여기서?”

앨리스는 문득 이 방 주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같은 여자도 반할 만한 아름다운 미녀 분석팀장은, 사실 선덜랜드의 모든 팀장들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성깔의 소유자다.

“테오, 혹시 일부러 혼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분석실에서 날뛰는 건 썩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 같은데?”

“안 날뛰어요. 그냥 플레이를 확인해보고 싶어서··· 축구의 신이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 알고 싶어서 그런 건데요.”

결국 메시의 플레이에 자극을 받았다는 뜻이다. 천재라고 불리는 소년의 눈에는 남들과 다른 장면도 보일 테니, 한 번쯤 따라 하고 싶은 충동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분석실 안에서는 참아줬으면 싶었지만.

바둥거리는 테오와 그를 억누르는 짐을 번갈아 보던 앨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럼 훈련장에서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 간식 사들고 가자. 어때?”

“지금은 개방 안 될 텐데요.”

평소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선덜랜드 잔디 관리인은 선수의 연습에 무척이나 관대한 편이었기에. 오히려 아스팔트에서 연습하다 걸리면 혼쭐을 낼 테니, 공 차고 싶으면 훈련장에 나오라고 선언했을 정도다.

하지만 오늘, 그 리지는 마드리드 원정에 동행한 상태였다. 그리고 임시로 훈련장 관리를 위임받은 시설관리팀 직원은, 리지가 없는 사이 잔디가 망가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복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테오는 움직임이 격해서, 피치에서 뛰고 나면 흔적이 남거든요.”

하지만 앨리스는 태연했다.

“즉, 훈련장을 쓸 수 없는 게 문제라는 거지? 연습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네···.”

짐의 대답에, 앨리스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그럼 괜찮아. 맡겨 두렴. 나도 명색이 스태프란 말이지.”

“인턴 누나는 임시직··· 아얏!”

테오가 짐에게 꽤 세게 쥐어박히는 사이, 앨리스는 경쾌한 걸음으로 분석실을 빠져 나갔다.

“하루쯤은 잔디를 헤집어도 괜찮을 거야. 오늘은 틀림없이 선덜랜드의 축제니까!”

* * *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틀림없이 축제 분위기였다.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영상팀이 보내준 화면 덕분이었다.

히죽거리는 브라이언을 흘끗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희주에게 지시했다.

“이 영상, 선수들 쪽에도 틀어.”

분투한 우리 선수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희주가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나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잠시 후 뒤쪽에서 격한 환호성이 울렸다. 즉, 선덜랜드 전용기 에어버스 350 또한 축제 분위기였던 것이다.

다만, 코칭스태프는 브라이언을 빼면 대체로 냉정했다. 주위의 분위기를 파악한 브라이언이 혀를 찼다.

“이런 심장도 없는 것들 같으니.”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브라이언을 향해, 루벤이 진지하게 답했다.

“고전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스위치를 바꿔 넣은 겁니다. 우리에게는 주말 경기가 있으니까요.”

리그 이야기다.

“사실상 판세가 굳어지긴 했죠. 남은 경기를 전승하면 2위를 사수할 수 있고, 한두 번 승점을 놓쳐도 3위는 안전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혹시라도 전패하면 산술적으로···.”

루벤이 손을 꼽는 사이, 옆자리에 돌아온 희주가 몸을 떨었다.

“5위까지 가능해요. 생각하기도 싫지만요.”

덕분에 나는 요 녀석이 뭘 상상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챔스 우승에 실패하고, 리그에서는 5위까지 밀려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렸던 모양이다··· 제길, 나도 상상해버렸어.

희주의 설명을 들은 코칭스태프들의 표정이 일제히 썩어들어갔다.

“뭐, 유로파의 왕이 유로파에 돌아가는 거지. 정작 유로파에 돌아갈 때는 왕이 아니겠지만.”

“그 꼴 안 당하려면 리그에도 끝까지 힘써야겠네요. 어느 분께선 진작에 챔스에만 흥미진진하신 것 같지만.”

샐리의 지적에 브라이언이 찔끔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아니, 나도 돌아가면 리그 경기에 집중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비행기 안이고, 챔스 원정 중이니까···.”

비행기라서 업무를 못 보는 고충이 있는 모양이라, 나는 곧바로 최신식 태블릿을 제공했다. 이처럼 선덜랜드는 감독의 착취··· 아니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최근에는 로테이션 멤버도 무척 풍부해졌어요. 공격진은 특히요. 메시, 바스티아노, 마르틴까지 전부 빼도 골을 노릴 수 있죠.”

“그렇죠. 그 조건으로도 스티븐, 베리, 터너, 크리그가 남으니까요.”

챔스급 공격진이라기엔 약간 중량감이 부족한 느낌도 들지만, 그래도 프리미어리그 팀 상대로 한 골 따내긴 충분하다.

문제는 중원이다. 주전 미드필더에게 휴식을 주게 되면, 우리 중원의 무게감이 확 줄어 버린다.

지난 시즌부터 재능을 본격적으로 개화했지만, 아직은 어린 해리슨과 여전히 프로 선수다운 면모를 갖췄지만, 슬슬 나이티가 나기 시작한 톰슨만 남기에.

그래서 우리는, 로테이션을 돌리는 날에도 잭과 요니 중 한 명은 꼭 출전시키는 중이었다.

덕분에 잭과 요니에게 피로가 적지 않게 쌓였다. 그나마 철강왕 속성이 있는 잭은 조금 나은 편이지만, 요니는 레알전을 치르고 몸을 못 가눌 정도였다.

“우리 주장단은 조금 쉬게 해 주고 싶은데요.”

루벤의 의견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그는 선수의 컨디션을 관리하고, 데이터로 나타낼 수 있는 스태프기 때문에.

이야기를 꺼내며, 루벤이 태블릿에 그래프 같은 걸 잔뜩 띄웠다. 보니까 메디컬 팀과 공조해서 만든 컨디션 데이터라는 모양이다.

보아하니 확실히 잭과 요니의 체력이 지속적으로 우하향 중이다. 특히 요니는 버블 빠질 때의 주가 그래프를 찍었다.

하다못해 4강 2차전까지는 푹 쉬게 해 줘야지.

“그런데 그래프가 조금 튀는 구간이 있는데···.”

“···홈경기를 앞둔 주장입니다.”

“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잭’이군요. 그럼 이건···.”

“그건 ‘더비 라이벌을 상대하는 요니’고요.”

루벤의 설명에 나는 입맛을 다셨고, 옆에선 희주가 못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샐리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렇다면 소거법이네요. 디아라의 데뷔전을 준비하죠.”

브라이언이 인상을 섰다.

“디아라는 너무 어리잖아. 데뷔 시즌의 해리슨보다도 이른데.”

“상관없잖아요? 디아라는 당시의 해리슨과 달리, 어느 정도 몸이 만들어진 선수라고요.”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당시의 해리슨보다 훨씬 못하잖아.”

옥신각신하는 둘에게서 시선을 떼며,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브라이언과 샐리가 저러는 건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다. 지금까지의 패턴을 고려하면, 둘은 디아라를 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표현만 다르고 실상은 똑같은 보완책을 내놓겠지.

주전 대부분에게 휴식을 줘야 하는 경기에 신인을 내보낼 경우, 팀에서 취할 수 있는 보완책은 정해져 있다.

베테랑에게 뒤를 맡긴다는, 아주 고전적인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내리면, 블랙캣츠에서.]

* * *

바 블랙캣츠를 찾는 톰슨의 표정은 미묘했다. 자꾸만 시선이 다른 곳에 향했는데, 구체적으로는 다른 손님들의 얼굴 쪽이었다.

“누가 보면 빚쟁이에게 쫓기는 줄 알겠다. 왜 그러는데.”

핀잔을 주자, 톰슨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바 테이블 쪽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 톰슨은 주문을 마치자마자, 자기 딴에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국어책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장은 자주 오나?”

톰슨의 질문에, 블랙캣츠 바텐더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쪽으로 아주 살짝 시선을 돌렸다.

허가를 구하는 시선이다.

아마도 바텐더는, 바에 자주 오는지 여부 또한 일종의 개인적인 정보이자 프라이버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없는 자리에서 톰슨이 물었다면 그는 절대로 대답하지 않았겠지.

나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바텐더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뇨, 톰슨 선수와 같이 오신 그날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래··· 뭐, 사실 나도 안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

마치 한숨처럼 대답하면서, 톰슨은 자신의 앞에 놓인 칵테일을 입에 가져갔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분위기를 돌릴 겸, 일부러 농담을 꺼냈다.

“다음부터 술 상대가 필요하면 선수 대신 나를 불러.”

“그것도 괜찮겠지만··· 너한텐 그다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잭에게도 필요 없을 거야.”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잭은 아직 도전이 훨씬 어울리는 나이니까.”

사실, 톰슨이 술을 찾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습관까지는 아니었다. 선수로서 정점을 지나, 기량이 완만한 내리막을 걷게 된 다음부터 생긴 버릇이었고, 그나마도 평소엔 무알콜 칵테일 한 잔이 고작이다.

예전의 톰슨은, 굳이 술로 자신을 달랠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아무튼 그는 유스 시절 또래들 중 최고의 재능으로 꼽히던 선수였기에.

사람의 가치를 보는 나는 헨도가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톰슨의 재능을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로 불렀냐? 썬, 네 성격에 벌써 샴페인 딸 리는 없을 텐데···.”

“아, 실은 리그 경기에서 잭과 요니 둘 다 쉬게 할 생각이라서.”

그렇게 운을 떼자, 톰슨이 빙긋 웃었다.

“이해했어. 그럼 나는 베이비시터가 되겠군. 해리슨이냐, 디아라냐?”

“최종적으론 브라이언이 정하겠지만, 현재 유력한 후보는··· 둘 다야.”

“천벌 받을 놈. 이러니까 너하고 바에 오는 게 질색인 거야. 차라리 우리 주장이 훨씬 낫지.”

“걔 술버릇을 알면 그런 소리는 못 할 텐데.”

농담으로 받아치면서도, 나는 어렴풋하게 톰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 진지한 사내가, 어째서 자꾸만 잭을 떠올리는 건지를.

무언가를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용도 짐작할 수 있었다. 원클럽맨이고 싶었던 사내가, 원클럽맨의 길을 걷고 있는 사내에게 해줄 이야기는, 결국 딱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

다만 그런 이야기는, 이제 선수가 아닌 내가 입에 담을 말은 아니다.

잠깐 동안의 정적을 깨며, 톰슨이 빙긋 웃었다.

“주말에 작정하고 유치원을 차리려는 걸 보니··· 다음주 2차전 한번 제대로 해 보려는 모양이다?”

“그야 레알이 작정하고 덤빌 테니까.”

많은 게 걸린 경기가 될 것이다. 창단 이래 첫 챔스 결승 진출이 걸렸다. 그리고 작게는··· 아니, 어쩌면 결승 진출보다 더 큰 것도 걸려 있다.

5시즌간 계속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무패 기록이.

“그 말인 즉슨··· 주말에 아무리 고전해도, 절대로 교체 안 해준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챔스를 위해 최대한 전력을 온존해야 할 테니까."

대답 대신 미소를 짓자, 톰슨이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다가올 경기에 대한 기대와 고양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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