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92화 (292/422)

292화 Say we are (1)

<그딴 것보다도 너를 믿기로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강인함이 필요하기 때문에 - 아르센 벵거>

“톰슨을 빡세게 굴려 달라고?”

브라이언이 침착하게 되묻자, 눈앞의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나는 그저 토요일 경기에서 톰슨이 선수로서 좀 더 많은 역할을··· 그러니까 팀의 중심 베테랑으로서의 무게감을 갖게 해 달라는 뜻이었는데.”

“브로, 그걸 줄이면 빡세게 굴리라는 소리가 되는데?”

구단주 이희성을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가락을 꼽았다.

“들어봐, 브로. 톰슨이 원래 하던 포백보호 역할에, 이적 초에 맡았던 빌드업 리더를 더하고, 가끔은 전진해서 중거리 슛으로 상대를 응징하는 역할을 한다 치면···.”

“음, 그 정도 되면 경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

“맞아. 중심이지. 그리고 대충 히트맵만 미리 찍어봐도 빡세게 굴린다는 표현에 틀림이 없을 테고··· 브로,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그의 친구,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은 원래 선수 보호에 철저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농담으로도 선수 굴리라는 소리를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저 스태프를 갈아 넣는 고약한 취미가 있을 뿐.

게다가 따지고 보면 사실 반쯤은 스태프들 스스로 자처해서 자신들을 갈아 넣었던 셈이라, 브라이언으로서는 딱히 원망은 들지 않았다.

‘뭐, 내 이마에는 틀림없이 워커홀릭이라고 써 있을 테니까.’

누구도 알지 못했던 진실을 절묘하게 비껴간 브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하는 사이, 이희성이 차분하게 말했다.

“톰슨이 고민하는 것 같아서 그래··· 은퇴를.”

“뭐?”

뜻밖의 이야기에 브라이언의 몸이 움찔했고, 이희성이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생뚱맞은 이야긴가 싶었는데,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이희성이 설명한 증상을, 브라이언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둔 사람들은 대체로 그랬다. 말이 많아지고, 평소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이야기를 했다. 페르난데스도, 그리고 로저스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축구를 계속할 이들에게, 마치 무언가를 남겨주려는 것처럼.

톰슨의 경우 그 상대는 아마 잭이었던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고 이번 시즌 끝나고 당장 은퇴를 선언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여서.”

“신경 쓰이지.”

지금은 길이 달라졌지만, 톰슨과는 한때 같은 유소년 축구선수로 마주하던 동갑내기 선수 사이다. 은퇴라는 단어에는 남다른 무게가 있었다.

“다행히 토요일 경기를 언급하니까 톰슨의 눈에 생기가 돌더라고. 아직은 좀 더 싸우고 싶다는 의욕이 더 큰 것 같아. 그래서 알려주고 싶어.”

“이해했어. 톰슨은 아직 충분히 현역에서 통하는 선수라는 걸 보여주라는 주문이구나?”

“그도 그렇지만, 경기를 뛰는 즐거움을 떠올려주면 좋겠거든.”

이희성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브라이언은 가슴 한 구석이 시큰거림을 느꼈다. 눈앞의 사내에게 ‘경기를 뛴다’는 말이 차지하는 의미를 알기 때문에.

무릎 부상으로 꿈을 접은 친구에게서 시선을 떼며, 브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했어, 브로. 토요일에는 피터 톰슨이라는 선수의 진가를 보여주는 전술을 준비할게.”

“땡큐.”

“아니··· 내가 고맙지. 아무튼 토요일에 이겨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

대답하면서, 브라이언은 곧바로 전술 보드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샐리가 그랬지? 브로는 감독들의 워너비라고.’

구단주, 혹은 단장 때문에 기껏 갖춘 스쿼드가 꼬이는 감독은 축구계에 너무나 흔하다.

필요한 선수를 팔아치우거나, 불필요한 선수를 안겨 주는 일은 흔하고, 때로는 주급 관리에 실패해 선수단이 붕괴하기도 한다··· 감독의 통제 밖에서 팀이 망가지는 케이스는 대부분 그런 식이다.

선덜랜드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브라이언은, 오직 잔디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있었다··· 경기와 훈련에 대해서만.

‘게다가··· 선수의 멘탈까지 직접 챙기고 있을 정도니까.’

정말로, 이 팀의 감독은 축구만 신경 쓰면 되는 자리였다. 이런 조건에서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로테이션을 돌린다는 것도, 챔스 일정을 병행한다는 것도··· 변명이 되지는 않으리라.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다짐하며, 브라이언은 전술 보드에 온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 * *

선덜랜드에 돌아온 직후, 리지는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어머, 앨리스 양? 왜 그래요?”

“저, 관리인님··· 실은요···.”

리지의 방에 찾아온 앨리스가 머뭇거리며 시말서를 내밀었다.

레알과의 1차전을 치른 직후, 앨리스는 기세 좋게 짐과 테오를 위해 그라운드를 열었지만, 뒷감당을 할 능력은 없었다. 일단 궤멸적인 손재주 때문에라도 원상 복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시말서를 들고 찾아온 앨리스를, 리지는 미소로 반겼다. 그리고 앨리스의 시말서를 곧바로 파쇄기에 넣어 버렸다.

“다, 다시 쓰라는 뜻인가요?”

“에이, 무슨 만화 원고도 아니고··· 안 그래요. 시말서 같은 거 필요 없다는 뜻이었어요.”

“그런가요? 하지만 테오가 생각보다 심하게 잔디를 파헤쳤던데···.”

확실히 리지가 보기에도 좀 심하긴 했다. 마법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려면, 그만큼 땅을 단단히 박차야 했을 테니.

게다가 앨리스는 하필이면 3번 그라운드를 열어줬다. 원래 수중전 세팅을 하던 곳이라 지반이 무르고, 아직 작업이 끝나지 않은 그라운드를.

덕분에 리지는 구단에 출근하자마자 보수 작업부터 해야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앨리스에게 그라운드를 구분할 능력까지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주문임을 알기 때문에.

게다가 이번 일에서, 앨리스의 처신 자체는 옳았다. 적어도 리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네, 그래서 다행이었죠.”

“다행이라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앨리스를 향해, 리지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이는 애가, 만일 아스팔트 위에서 뛰었으면 어땠겠어요? 축구화 신었으면 무릎이나 발목이 나갔을 거고, 일반 운동화였으면 미끄러졌겠죠.”

“아···.”

그제야 리지가 무엇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눈치챈 앨리스가 입을 쩍 벌렸다.

“앨리스 양이 열어 주지 않았으면, 애들은 밖에서 뛰다가 다쳤을지도 몰라요··· 오히려 감사할 일이죠. 그러니 시말서는 필요 없어요··· 다른 쪽에선 받아야 할 것 같지만요.”

리지의 얼굴에는 제법 박력이 넘쳤다. 그 표정만 보더라도, 훈련장을 열어주지 않은 시설관리팀 직원은 제법 곤욕을 치를 게 분명했다.

구단에 처음 채용되던 당시엔 공사 인부들을 다루지 못해 쩔쩔매기도 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관리인이고,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에 대해 모든 전권을 위임받은 인물이다.

“이번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그때도 꼭! 열어주세요.”

“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서는 앨리스를 배웅한 다음, 리지는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 보니 2번 그라운드도 세팅을 바꿔야겠지?”

아직 주말 경기의 스타팅 멤버가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리지는 대충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가 관리인으로 일한 지도 벌써 5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덜랜드는 챔스에 전력을 다해야 하니, 토요일에는 로테이션을 돌려야 한다. 아마 크리그와 해리슨, 베리에게 출전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공교롭게도 새벽 자율연습 동료들이기도 하다. 오늘은 해외 원정의 여독이 빠지지 않았지만, 내일부터는 새벽에 2번 그라운드를 사용하려 들 것이다.

“크리그 선수는 오늘 저녁부터 뛰려나? 해리슨은··· 저녁에는 에디 선수 따라 외부 훈련장을 쓸 거고.”

혼잣말하며, 리지는 달력을 흘끗 확인했다. 혹시라도 더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달력에서, [하퍼 선수 훈련 복귀 예정일]이라는 손글씨를 발견한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푹신하게 세팅을 고쳐야겠다.”

아주 약간일지라도, 선수의 컨디션에 도움이 된다면 번거로운 작업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더 이상 선덜랜드 선수가 다치는 일을, 그녀는 절대로 원치 않기 때문에.

* * *

[프리미어리그, 선덜랜드 대 번리]

경기를 앞둔 드레싱룸에서, 톰슨은 오른쪽 무릎을 까딱거렸다.

이물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른이 지나면 곧 망가질 줄 알았던 무릎은 이제, 몇 년 전보다도 좋다.

메디컬 팀의 체계적인 관리는 물론, 루벤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다. 체중을 줄이자 무릎에 걸리는 부담 또한 줄어든 것이다. 비록 파워는 떨어졌지만, 대신 활동량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큰 손해는 아니었다.

피터 톰슨은 스스로를, 아직 경쟁력 있는 선수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즘은 자꾸만, 말이 많아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요즘은 아마, 분하지 않기 때문일 거야.’

패서로서 자신 이상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해리슨이 마냥 흐뭇하게 느껴진다. 중원을 철통같이 장악하는 주장 잭의 활동량에도, 누구보다 탁월한 요니의 공간 지능에도 질투 대신 웃음이 나온다.

자신의 마인드가 선수라기보다는 지도자에 가까워졌음을 톰슨은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이 팀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는 팀의 최고참 라인이기에.

톰슨보다 이 팀에 오래 머문 선수는 딱 네 명뿐이고, 보다 경력이 긴 선수는 오로지 메시뿐이다. 따라서 오늘, 팀을 이끌어야 하는 의무는 오로지 톰슨의 것이었다.

그래서 톰슨은, 표정 관리를 조금 실패하고 말았다. 엄격하고 또 비장하게. 덕분에 팔에 주장 완장을 차려던 에디가 톰슨을 흘끗거리기 시작했다.

“어··· 완장 드릴까요? 저보다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원조 부주장이시기도 하고요.”

“무슨 소리야. 이제 네가 주장단이잖아.”

선덜랜드의 3주장, 에디는 기본적으로 경박하다는 이미지이지만, 톰슨은 알고 있다. 사실 에디의 본모습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그리고 톰슨은, 에디가 잭과 요니에 이어 3주장이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안다.

“네가 차. 나는 이제 주장단이 아니거든. 그보다···.”

톰슨은 고개를 돌려 공격진 쪽에 시선을 보냈다.

메시의 합류로 예년보다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선발을 맞이한 공격진의 얼굴엔 가벼운 긴장이 떠올라 있었다.

“감독님 말씀 들었지? 약속된 패턴대로 경기하면, 반드시 찬스를 만들어 줄 거야. 내가 만들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농담처럼 덧붙이자, 크리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리, 터너. CS팀이 그러는데 오늘은 게이츠헤드 팬들. 평소보다 많이 왔다더라.”

게이츠헤드에서 온 두 젊은 공격수를 독려한 이후, 톰슨은 마지막으로 디아라의 볼을 꼬집었다.

“앗, 왜흐허헤혀?”

“정신 차리라고. 뭘 그리 넋 놓고 있어?”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톰슨은 디아라의 볼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 정도면,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평생 잊지 못할 데뷔전이 되겠지.’

그렇게 톰슨이 선수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소통을 마칠 무렵, 선수 입장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그라운드로 향하는 통로에 서자, 저 멀리서 팬들의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경기장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가자. 우리는 선덜랜드다.”

* * *

그날은 오랜만에 복귀한 하퍼가 골마우스를 지켰다.

아직 감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런지, 위험천만한 순간도 몇 번쯤 있었다. 그중 두 번은 하퍼 본인의 동물적인 선방으로, 한 번은 포백라인의 커버로 무사히 넘어갔다.

대체로 그렇지만, 오늘도 우리 수비진의 분투는 눈부실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 선덜랜드의 중원은.

미드필더 라인업은 경기 전부터 가장 말이 많이 나온 자리였다. 희주의 SNS 중계에 따르면, 대체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었다.

“이해한다, 챔스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 라는 썰이 절반이고, 지려고 작정한 라인업이라는 소리가 나머지 반이야··· 이것들이 진짜!”

희주는 둘로 요약했지만, 내가 보기엔 결국 같은 이야기였다. 스케줄상 불가항력이지만, 승리를 기대할 수 없는 라인업이라는 뜻이니까.

그런 반응도 이해는 된다. 이제 겨우 스무 살짜리 미드필더와, 몇 달 전에 프로 계약을 마친 십 대 선수를 선발로 뽑았으니까.

심지어 그들을 뒷받침하는 역할은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서른 중반의 선수에게 맡긴 셈이다··· 이렇게 써 놓으니, 내가 보기에도 좀 던진 경기 같다.

실제로 디아라는 초반부터 어리버리한 모습을 자주 보였고, 해리슨 또한 턴오버 머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처럼 몇 번이나 공을 상대에게 헌납했다.

그때마다 톰슨의 목소리가 경기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디아라, 커버해. 앞에 보면서··· 그렇지!”

“해리슨, 더 자신 있게 해! 패스미스가 무서우면 축구를 어떻게 하겠냐!”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지만, 톰슨은 틀림없이 오늘 경기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톰슨의 독려가 효과를 발휘했는지, 어린 선수들의 플레이도 점차 활발해졌다.

해리슨의 절묘한 스루 패스를 받은 베리가 선제골을 기록했고, 측면을 파고든 디아라의 크로스가 크리그에게 연결되며 추가골을 뽑았다.

그리고 세 골째는···.

[쐐기골입니다! 피터 톰슨, 직접 마무리합니다!]

톰슨 특유의 다이나믹한 중거리슛이다. 사거리가 조금 줄긴 했지만, 바이털 에어리어까지 진출하기만 하면 위력에는 손색이 없다.

그날, 우리는 또다시 번리를 세 골 차이로 대파하며 리그 2위 수성에 한 발 다가섰고, 주중의 레알전에 대비해 주전 대부분을 지켜내는 성과를 확보했다.

[누가 브라이언을 로테이션에 약한 단기결전형 감독이라고 했는가?]

[역시 이 팀은 지나치게 강력하다··· 로테이션조차도.]

이길 생각이 있느냐는 비판은 당연히 쏙 들어갔고, 오로지 칭찬과 찬양만이 남았다. 결과가 좋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고 오늘의 완승을 이끈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피터 톰슨이 보여준 베테랑의 품격!]

KOTM을 차지한 톰슨을 바라보며,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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