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Say we are (2)
번리전이 끝난 직후, 하퍼는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경기가 끝났는데도 아직도 관중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특히 그의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나이얼 스탠드의 외침이 가장 격렬했다.
[복귀 축하해! 클린시트도!]
팬들의 목소리, 곳곳에서 애절하게 흔들리는 플래카드가, 비로소 그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컨디션은··· 그럭저럭인가.’
통증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체력도 집중력도 부상 전과 거의 같았다. 그러니 의학적인 견해에서 말하자면, 그는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선수로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반응이 조금 느렸지.’
경기를 천천히 복기하며, 하퍼는 스스로를 돌이켰다.
허용하지 않아도 될 찬스를 몇 번이나 내줬다. 게다가 에디가 이끄는 포백라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한 골은 내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경기 감각이 온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늘 나오기 잘했다고, 하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번리전에서 뛰고 싶습니다.”
경기를 하루 앞뒀던 날, 하퍼는 감독 브라이언의 집무실을 따로 찾아갔다.
“원래 어필은 훈련장에서 하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부득이하게 말씀드립니다. 왜냐면···.”
목에 힘을 넣으려는 찰나, 브라이언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대충 알아, 왜냐면 리델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거든.”
“네?”
뜻밖의 답변에 어리둥절해진 하퍼를 바라보며, 브라이언이 낮게 웃었다.
“기레기들이 좋아할 소재겠네. 서로 자기를 내보내 달라며 감독을 찾은 골키퍼들의 추한 분쟁.”
“기자들은 환호하겠지만, 저는 그럴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은 리델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알아. 이미 들었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 브라이언이 슬쩍 덧붙였다.
“리델이 그러던데. 네 몸 상태로 이번 번리전과 다음 주 레알전을 둘 다 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러니··· 팀의 퍼스트 키퍼가 챔스에서 뛸 수 있게, 번리전은 자기에게 맡겨 달라더군.”
하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번리전 출전을 요구했다는 리델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그렇다고 감흥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골키퍼답게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하면서, 하퍼는 천천히 대답했다.
“예전에 캡틴··· 아니, 페르난데스 단장님이 똑같은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감독님도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같이 계셨으니까요.”
[지금까지 EFL컵에서 헌신하며, 팀을 결승으로 데려온 선수는 하퍼입니다. 퍼스트 키퍼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자리를 가로채고 싶지는 않네요.]
하퍼는 잠시 페르난데스의 목소리를 상기했다.
아마 브라이언도 똑같이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기억을 더듬듯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기 시작한 감독을 향해, 하퍼는 목에 힘을 주었다.
“챔스 8강에서 유벤투스의 맹공을 막아낸 것도, 베르나베우에서 레알을 셧아웃한 것도 전부 리델의 공입니다. 지금의 폼은 저보다 훨씬 좋고요.”
“퍼스트 키퍼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를 가로채고 싶지는 않다, 그런 거야?”
“네. 선덜랜드의 골키퍼는 그렇게 하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하퍼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로써 챔스 4강전 출전이 불가능해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는 페르난데스에게서 1번 등번호와 주장 완장을 제외한 모든 것을 물려받은 골키퍼였기에.
그러니, 대답 또한 물려받은 긍지와 똑같아야만 했다.
* * *
챔스 4강 2차전을 앞두고, 최다미는 달력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트와 별 스티커, 그리고 정성스러운 손글씨 조합이 눈에 들어왔다.
[챔스 결승전]
축구는 아직 잘 모르는 그녀였지만, 이희성이 ‘결승 보러 오라’고 지시한 이상 그날은 다미에게 있어 축제였다.
결승전 장소는 독일 뮌헨이었다.
“혹시 맥주 축제 기간하고 겹치진 않으려나? 사장님과 같이 들를 만한 관광지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축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그녀였지만, 경기 관람 준비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챔스 결승전 표 판매 개시일부터 곧바로 티켓 확보에 돌입했으며, 심지어 특강까지 들었다··· 티케팅의 고수, 이희주에게.
[다미 언니, 오픈 직후엔 사람이 몰리잖아요? 그러니까 우선 서버가 터졌을 경우의 대책부터···.]
그 모든 노력에 더해, 아르바이트생을 사비로 여럿 고용한 그녀는 꽤 괜찮은 좌석을 여럿 확보해둘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만족하지는 않았다.
“아니, 왜 스카이박스는 안 파는 거야!?”
축구를 보는 이희성은 경기에만 집중하겠지만, 그래도 모처럼이니 하다못해 좌석이라도 조금 더 오붓하기를 원했다··· 예를 들면 익스클루시브 박스, 알리안츠에서는 스카이박스라고 부르는 곳으로.
하지만 지시를 받은 리미트리스 영국 지사장의 목소리는 우울했다.
[그건 이미 시즌 초부터 매진되었기 때문이죠. 106개 모두 깔끔하게 나갔다더군요. 정 그러시면 기존 구매자들에게 프리미엄을 얹어 주시는 방법이···.]
“강 지사장.”
다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사실, 돈이라면 문제는 없었다. 그녀는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이고, 자리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암표에 붙는 프리미엄 몇천만 원은 그녀에게는 돈도 아니었다.
다만···.
“그건 암표죠? 선덜랜드는 암표를 허락하지 않는 구단으로 알고 있는데요.”
[네, 하지만 챔스 결승 경기장은 알리안츠···.]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암표로 구한 자리에 우리 사장님을 모시라고 말하는 건가요?”
[죄, 죄송합니다.]
“그런 짓을 하느니 경기장을 사는 게 낫겠어요. 사장님 재력엔 훨씬 못 미쳐도, 나도 그 정도 돈은 있으니까.”
[어··· 사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장님께선 당연히 부사장님 자리도 준비하실 테니까요. 그리고 사장님은 보통 원정에서도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앉으십니다.]
“알아요.”
전화기 너머에서, 지사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 어이없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미는 낮게 웃었다.
“그냥 헷징이에요. 헷징. 투자회사 관계자라면 상식이죠?”
‘사장님이 내 자리 준비를 까먹었다는 이유로 뵙지 못하면··· 너무 속상할 것 같으니까 말이지.’
다미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희성이 가진 저울에 축구와 자신을 같이 올려두는 것만은. 쉽게 이길 자신도 없었거니와, 진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서웠다.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면 조금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만.]
“뭐죠?”
[그게, 챔스는 유에파가 주관하는 대회입니다. 그리고 유에파는 당연히 스폰서들에게 티켓 배부를···.]
“고마워요. 직접 확보할게요!”
전화를 내동댕이치듯 끊어버린 다음, 다미는 곧바로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준비한 흠잡을 데 없는 정중한 말씨로 점철된 정중한 비즈니스 레터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나, 원한다, 챔스 결승 티켓, 스카이박스 환영]
이후, 이 사건은 이른바 ‘리미트리스의 부름’이라 불리며, 챔스 스폰서들이 스카이박스를 선점하기 위해 유에파를 압박하는 계기가 되지만···.
그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다.
* * *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선덜랜드 대 레알]
경기는 치열했고, 2차전을 맞이한 레알의 반격은 매서웠다.
원정 지옥으로 소문이 자자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함성조차, 레알의 흰 유니폼을 쉽게 옥죄지는 못할 것처럼 보였다.
마일즈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어쩐지, 1차전 끝나자마자 유니폼 바꾸자고 아주 난리더라니.”
좋은 경기였다는 증명이고, 달라진 선덜랜드의 위상을 실감시키는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건 레알의 선전 포고이기도 했던 것이다. 슈퍼컵이 끝난 다음, 선덜랜드 선수들 유벤투스의 유니폼. 단체로 구입했던 것처럼.
앨리스 또한 치를 떨었다.
“하필이면 우리 자리가 나이얼 스탠드라서 더 힘든 것 같은데요.”
골대 뒤에 위치한 특성상, 나이얼 스탠드는 골키퍼와 같은 느낌으로 경기를 바라볼 수 있는 장소였다··· 지금처럼 레알이 맹공을 퍼부을 경우, 사정없이 날아드는 공을 체험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레알 놈들 배짱도 좋네. 전반에 나이얼 스탠드 바라보고 공격하는 원정 팀은 처음 봤다. 무섭지도 않나?”
핫도그 사내의 지적에, 앨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후반에 실점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아니면 나이얼 스탠드에서 날뛰는 정도론 자기네 선수들이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겠죠.”
어느 쪽이든 자신감 과잉이고, 선덜랜드를 우습게 본다는 결론이 된다. 마일즈가 어금니를 악무는 사이, 브렌든이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나는 이 경기장에서 저렇게 잘 뛰는 놈들은 생전 처음 봤어.”
“뭐, 베르나베우에서 뛰고 캄 노우를 라이벌로 삼는 놈들이니까. 새삼 남의 경기장에 위축될 리는 없겠지.”
“하긴,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도 장난 아니잖아. 게다가···.”
핫도그 사내의 대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크리스가 불만스럽게 빼액거렸기 때문이다. 뜻밖에 터져 나온 아기의 울음소리에 어른들이 찔끔한 사이, 수잔이 핀잔을 줬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애 보는 앞에서.”
옆에서 지켜보던 앨리스 또한 눈에 장난기를 가득 떠올렸다.
“베르나베우의 90분은 아주 길다고 하던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90분은 어때야 할까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브라더스의 입이 일제히 움직였다.
“아주 뜨거워야지.”
잠시 후, 우드 일가와 브라더스, 앨리스가 목을 놓아 외치기 시작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가장 열정적인 관중석, 나이얼 스탠드에서도 가장 뜨거운 목소리로.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 * *
나이얼 스탠드에서 시작된 함성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전체로 퍼져나갔을 때, 희주는 난간에 매달려 상체를 반쯤 내민 채였고,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였다.
누군가는 일방적인 경기라고 평가했을 것이다. 역시 챔스의 레알은 강하고, 그래서 우리 홈에서조차 우리를 가둬놓고 팰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경기를 지켜보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간다. 무심코 발을 구를 때도 있다.
조마조마한 흐름, 팬들의 뜨거운 목소리, 심장이 미친 듯 날뛰지만, 그래도 아직 머리는 차갑다.
“한 골도 내주지 않을 거야, 안 준다고!”
희주의 으르렁거림처럼, 오늘은 무실점 경기를 목표로 하는 날이었다. 경기 시작 전, 아예 대놓고 그렇게 주문했다.
1차전의 승리 덕분에 비기기만 해도 올라간다는 실리도 있었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무패 기록을 지키고 싶다는 감상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 무실점을 노리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퍼가 후회하지 않도록. 리델이 자책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던 우리의 두 골키퍼의 이야기가 우연찮게 팀 내부에 퍼졌다. 덕분에 코칭스태프는 물론 선수들의 사기 또한 최고조에 달했다.
동시에 다들 확신했다. 만약 오늘 실점한다면, 두 골키퍼 모두에게 상처로 남을 것임을. 그러니 승패에 관계없이, 골은 절대 내줄 수 없었다. 단 1점이라도.
그렇게 우리 선수들은 하나가 되었다.
수비에서는 에디의 분투가 눈부셨다. 포백라인 전체를 지휘하면서 대인 방어도 완벽하게 해냈다. 아무래도 주말 번리전에서 주장으로 출전해 팀을 능숙하게 이끈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미드필더에서는, 주말에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잭과 요니의 기세가 남다르다. 흔히 팀의 성골이라 불리는 유스 출신답게,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뛰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플레이였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잭’ 이라고 불리며 반쯤 다른 선수로 취급되는 우리 주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실 홈에서의 요니 또한 평소보다 훨씬 무서운 선수가 된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머리는 차갑고 냉정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 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언제나 심장은 뜨겁게-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관중석 전체에 울려 퍼지는 함성을 따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며칠간 목이 쉬어도, 말이 나오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 (1) 선덜랜드 0 - 0 레알 (0) ]
마침내 휘슬이 길게 울렸다. 경기가 끝난다는, 우리가 챔스 결승전에 향한다는 신호가.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했다.
Say we are Sunderland.
Say we 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