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97화 (297/422)

297화 꿈꾸는 자들을 위해 (2)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선덜랜드 대 파리]

선덜랜드 경기를 볼 때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나는 유니폼 차림으로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향했다.

보통은 상의만 입는데, 오늘은 하의도 유니폼으로 맞춰야 했다. 심지어 씬가드는 물론, 축구화까지 신었다. 희주가 우긴 탓이다.

축구화는 아스팔트 바닥에서 신으면 관절 건강에 좋지 않다고 받아쳐도 막무가내였다. 뭐, 희주는 나름대로 풋살용 스터드를 구해온 것 같긴 하지만.

“싸우는 거니까 선수들과 똑같은 복장을 해야지!”

“그러는 너님은 왜 밑에 청바지 입으셨어요?”

그러자 희주가 뻔뻔하게 버틴다.

“유니폼 바지 라인이 태가 안 나서.”

“어 그래.”

희주가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건 눈치챘지만, 챔스 결승이라는 일생일대의 행사에, 괜히 아침부터 여동생과 힘 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넘어갔던 나는, 알리안츠의 스카이박스에 도착한 순간 이유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다미가 먼저 와 있었다. 우리 유니폼 차림으로. 나와 똑같이 씬가드는 물론, 축구화까지 하고 왔다. 그런 다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보기 드물게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커, 커, 커ㅍ···.”

나는 침착했다.

“이희주, 가서 커피 좀 가져와. 우리 부사장님 목마르시단다. 다미 넌 아아 좋아하지?”

“아뇨. 커피는필요없어요.”

아아 이야기에, 다미는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평소보다 1.5배쯤 빠른 느낌이다. 이러다 숨넘어가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다미는 살짝 웃으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사장님, 독일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팔지 않을 것 같은데요.”

간신히 여유를 되찾은 다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찮아. 잘 어울려. 신선하고 괜찮네.”

사실 다미 얘는 전에도 사무실에 유니폼 상의를 입고 출근한 적이 있으니, 아마 문제는 하의 쪽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씬가드와 축구화가. 한때 축구선수였던 나도 이런 차림이 어색한데, 공 한 번 차본 적 없는 다미는 당연히 부끄러울 만도 하다.

물론 이런 수작을 부린 희주는 나중에 다미에게 혼쭐이 날 게 뻔하다. 그래서 나는, 잠시 희주를 위해 묵념했다.

정작 희주는 좋다고 다미에게 바짝 붙어 앉아서 속닥거리기 시작했지만.

“다미 언니, 더 좋은 자리 구한 거 아니었어요?”

“여기보다 좋은 자리가 있나요?”

“알리안츠는 77번 스카이박스가 제일 좋다던데요? 거긴 저도 티케팅해보려다가 실패하긴 했지만요.”

그랬다면 다미는 아마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을 리미트리스 부사장이 못 구할 리는 없겠지만, 희주가 티케팅에 실패했다면 그건 애초에 비매품이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다미는 77번이라는 이야기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구했지만, 여기보다 별로던데요.”

“어? 어떻게 구했어요!?”

“미안해요. 비밀이에요.”

“아깝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만나자고 하지··· 거기가 훨씬 좋은 자리인데.”

희주가 안타깝다는 듯 발을 굴렀다. 나는 그놈의 77번 박스가 더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희주의 의견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하긴 희주는 원래 아이돌 팬클럽 출신이라 좌석 배치에 나보다 훨씬 민감하다.

그리고 다미는 어째서인지 얼굴을 예쁘게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거긴··· 안 계시잖아요.”

사실은 나도 여기가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자리는 우리 팬들이 앉은 스탠드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니까.

잠시 후, 카드섹션으로 유명한 알리안츠 아레나에, 붉고 흰 글자가 피어났다.

[Red & White]

이어서 함성이 터졌다. 타인위어에서 매일같이 듣던 목소리가, 이곳 뮌헨의 하늘 아래 울렸다.

이곳이 마치 우리 홈인 것처럼.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함성은 선수 입장 통로까지 울렸다.

평소 홈에서 들리던 외침과 비슷한 노랫소리에, 선덜랜드 선수들이 차례로 미소를 지었다.

“구단주님이 장담하신 대로 어나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같은 느낌이네.”

“그렇긴 한데··· 파리 팬들도 놀고 있진 않을 텐데. 여긴 중립 구장이잖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우리가 비행기도 더 많이 동원했고, 숙소까지 제공하니까.”

즉, 선덜랜드 팬들은 그저 경기 티켓만 사면 된다는 뜻이니, 아무래도 부담이 훨씬 적은 상태였다. 덕분에, 가뜩이나 열정적이기로 유명한 블랙캣츠들이 잔뜩 몰려와 알리안츠 아레나를 점령해버린 모양이었다.

“이제 이기기만 하면 되겠네. 이곳을 진짜 어나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로 만들려면.”

힘차게 선언하며 주장 잭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다른 선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축구의 신은, 잭의 등을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참 오랜만인데.’

지난 시즌까지, 그는 클럽과 대표팀의 주장이었다. 경기장에는 항상 맨 앞에서 들어갔고, 지금처럼 누군가의 뒤를 걷는 경험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챔스 결승전도.

결승전을 누구 못지않게 경험해본 메시였지만, 최근 몇 년간은 챔스에서 줄곧 부진했었다. 88848 비밀번호를 찍으며 조롱받기도 했다. 같은 시기, 그의 라이벌이 무려 챔스 3연패를 달성하며 더욱 비교당했다.

하지만 이제, 그도 챔스 결승전에 돌아왔다.

“빅 이어를 들고 싶어서 바르샤를 떠나 선덜랜드로 왔다고 했으면···.”

무심코 혼잣말을 했더니, 앞쪽에서 에디의 농담이 돌아왔다.

“···솔직히 잠깐 미치신 줄 알았는데요.”

“이해해. 처음엔 나도 내가 미친 줄 알았으니까.”

누군가는 그의 이적을 도피로 간주했고, 누군가는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노후 자금 마련으로 취급했다. 갑부 구단주 때문이면 맨시티나 파리가 낫지 않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왜 하필 선덜랜드냐고 묻는 목소리는 가끔, 그의 내면에서도 울렸다.

하지만 지금은···.

축구의 신은 문득 눈이 부시다고 느꼈다. 통로 끝에 다다른 것이다. 어스름한 통로를 지나, 피치를 앞두고 시야가 확 밝아지는 느낌을 메시는 아주 좋아했다.

[Be the light]

그들의 홈에 붙은 것과 똑같은 팬들의 플래카드를 메시가 올려다보는 사이, 앞에서는 동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어나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맞네.”

“근데 저기 별은 왜 붙인 건데?”

“그게 한국식이래.”

누군가의 손짓을 따라 축구의 신은 천천히 시선을 옮겼고, 그곳에서 재미있는 플래카드를 발견했다.

[Dreams ★ come true]

‘꿈이라···.’

선수로서 이루지 못한 꿈도, 미련도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축구의 신은, 이제 모든 경기를 누군가를 위해서 뛰겠다고 결심했었다.

팀을 위해, 팬을 위해, 그를 롤모델로 삼는 수많은 축구 소년들을 위해. 혹은, 어릴 적 자신을 꼭 닮은 또 다른 나를 위해···.

하지만 오늘은, 적어도 이 90분 동안은.

“마침 잘됐군. 오늘은 나도 꿈을 꾸러 왔거든.”

10년 만에 챔스 결승에 돌아온 축구의 신, 메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었다.

* * *

선덜랜드의 전직 잔디 관리인, 샘 윌리엄슨이 무심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말았다.

“꽤 호화롭군. 이 정도면 알리안츠에서 가장 좋은 박스 아닌가?”

좌석은 축구 경기장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푹신하고, 내부 인테리어 또한 화사했다. 축구단 관계자 출신인 샘은, 이곳이 스카이박스 중에서도 손꼽히게 화려한 장소임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원래 뮌헨이 구단 관계자에게 제공하는 용도로 마련된 77번 스카이박스는, 유에파를 통해 챔스 스폰서에게 제공되었다. 그리고 콜라 회사는 소중한 대주주, 리미트리스 관계자를 접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방을 꾸몄다.

덕분에 제로콜라까지 가득 비치된 스카이박스가 완성되었지만, 정작 이 방을 빌린 최다미는 다른 곳에서 경기를 보고 있다. 유에파에서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을 위해 제공한 박스에 합류한 것이다.

모처럼 스카이박스를 하나 더 확보한 최다미는, 이 장소를 ’사장님의 은사’를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덕분에 지금, 이 박스는 로저스와 샘이 차지하게 되었다. 로저스는 비교적 태연했지만, 샘은 그만 어깨를 움츠러트리고 말았다.

“부담스러운데. 나는 그냥 구단 관계자석이 좋아. 저쪽 일반석.”

“동감이네만, 남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뭐하잖나. 다미 씨가 그러는데, 한국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하는 문화가 있다더군. 거절하면 썬은 물론이거니와 다미 씨를 예의 없는 사람 만드는 거라던데?”

“으음, 그럼 참고 봐야겠군.”

그렇게 못 이기는 척 자리를 차지한 샘은, 정작 휘슬이 울린 다음에는 아주 신이 났다.

“잭! 더 달려! 네 발은 훨씬 빠르잖아! 옆에 요니가 들어가고 있어!”

목이 터져라 외치더니, 비치된 제로콜라를 기세 좋게 따서 마신다. 그런 샘을 로저스가 살짝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궁색한 변명이 돌아왔다.

“이러지 않으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서.”

“하긴. 꿈만 같군.”

로저스는 경기를 내려다보았다. 유럽에서 축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의 무대에 올라온 선덜랜드의 붉은 유니폼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샘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팀이 챔스에 오길 늘 바랐지만, 이렇게 빨리 올라올 줄은 몰랐는데··· 안 그런가, 로저스?”

“그러게. 진작에 은퇴할 걸 그랬어. 그랬으면 더 빨리 왔을 것 아닌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이야기가 로저스의 입을 빠져나오자, 옆에서 샘이 인상을 썼다.

“그랬으면 준비가 덜 된 브라이언을 감독 자리에 앉히게 되었을 거야. 지금처럼 호성적을 내지 못했을 거고, 새 감독에게 상처가 남았겠지.”

“브라이언은 한 시즌 말아먹는 정도로 흔들릴 재목이 아니야. 그리고 썬도.”

“물론 썬은 쉽게 흔들리는 구단주가 아니지만, 그래도 브라이언이 선수단을 장악하긴 힘들어지지 않았겠나?”

“···그랬을지도.”

로저스는 고개를 돌려, 테크니컬 에어리어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그의 제자 브라이언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챔스 결승이라는 큰 무대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채.

감독의 열성적인 지휘에, 팀 또한 호응했다. 오늘의 선덜랜드는, 전술가라면 누구나 쾌감을 느낄 만큼 예술적인 라인 컨트롤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가 있을 때의 선덜랜드가 하지 못했던 플레이를 바라본 늙은 감독의 얼굴에, 후련한 미소가 번졌다.

* * *

브라이언은 천천히 주먹에 힘을 넣었다.

‘계획대로 되고 있어.’

오늘 경기를 준비하며, 코칭스태프 전원이 머리를 맞대고 고심했었다.

[파리를 상대로 라인 올리자고? 음바페를 가진 팀인데?]

파리와 프랑스가 자랑하는 스타, 음바페는 스피드를 살려 뒷공간을 터는 플레이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였다. 따라서 라인을 낮추자는 델랍의 의견에도 설득력이 있었지만···.

[델랍 코치님? 그렇다고 라인 내리면 주도권을 내주게 되는데요.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경기가 되면, 기세가 넘어가겠죠.]

[잭과 요니를 앞세워 미드필더에서만 개싸움을 벌이면 어떨까? 퀸 분석팀장.]

[그러면 수비와 미드필더의 간격이 벌어지죠. 아시다시피, 현대 축구에선 그게 훨씬 위험한데요.]

[으음, 라인을 내리면 미드필더도 내줘야 한다는 뜻인가.]

델랍이 머리를 벅벅 긁었고, 샐리가 인상을 썼다. 그리고 브라이언 또한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물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다.

섬세하게 조율한 포백라인과 미드필더의 간격, 예술적인 라인 컨트롤, 경기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으면서도 뒷공간 또한 쉽게 허락하지 않는 절묘한 움직임으로.

덕분에 지금, 경기의 주도권은 선덜랜드의 것이었다. 팬들 또한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팬들의 함성에 섞여, 문득 친숙한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음성이었기에.

하지만, 들릴 리 없는 소리이기도 했다. 양 팀을 합쳐 칠만 명 축구팬이 자리한 이곳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피치에 닿을 리는 없으니.

그래도 틀림없이, 그의 스승은 오늘 이 경기장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결승에 왔습니다. 우리가, 파리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발을 멈추지 마! 베넷! 올라가!”

환청처럼 울리는 은사의 목소리에 대답하듯, 브라이언은 목에 힘을 넣었다. 비록 주도권은 잡았지만, 아직 득점을 가져오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파리는 이대로 주저앉을 상대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주도권을 찾아가려 할 것이다.

그 수법은 아마···.

“파리 6번이 아까보다 측면에 치우쳤어요. 슬슬 반격을 준비하는 모양인데요?”

샐리가 슬쩍 주의를 주자, 브라이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럼 그 전에 선제골을 가져와야겠네··· 잭! 좀 더 옆으로!”

그의 지시에, 잭이 곧바로 움직였고 요니가 동시에 그 빈틈을 메웠다.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선수들의 모습에, 브라이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브로, 보고 있지?’

지시를 마친 다음에야 브라이언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경기장이 하늘과 맞닿은 곳, 알리안츠 아레나의 스카이박스 어딘가에서 그의 친구가 경기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기에.

‘이게 브로가 만든, 우리 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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