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꿈꾸는 자들을 위해 (3)
오른쪽 하프스페이스로 이동한 잭은,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파리가 자신들의 왼쪽 측면 - 선덜랜드의 오른쪽에 사람을 몰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곳은 일종의 밀집 지대가 되었고, 잭의 주위에서는 크고 작은 신경전이 쉼 없이 벌어졌다.
씬가드가 서로 닿고, 서로가 서로의 발을 밟는 상황이 끊이지 않았다.
잭이 선호하는 조건은 아니었다.
그는 풍부한 활동량과 빠른 발, 그리고 투쟁심을 무기로 삼는 선수이고, 상대 수비를 코앞에서 따돌릴 기술은 갖고 있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천하의 파리 중원이라고 하면 더욱.
잭은, 피치 전체를 넓게 누빌 때 가장 힘을 발휘하는 선수다. 다시 말해, 지금과 같은 밀집 지대는 그의 진가를 발휘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하지만 감독 브라이언은, 잭을 굳이 이 위치로 이동시켰다. 자기 선수의 역량을 모를 리 없는데도.
‘소거법이겠지.’
결국 선덜랜드의 누군가는 파리에 맞서 이 밀집 지대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톰슨이 결장한 오늘, 이 역할에 가장 적합한 선수는 잭이었다. 그의 친구 요니는 몸싸움을 버텨낼 체격이 아니고, 스티븐은 잭보다도 더 투박한 선수였다.
무엇보다 이런 신경전은, 선수의 체력과 집중력을 급격히 소모시킨다는 걸, 잭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해야지. 체력 말고는 장점이 없으니까.’
이윽고, 플레이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노련한 파리 미드필더는 파울이 불리지 않는 아슬아슬한 선에서 끝없이 잭을 자극하려 노력했고, 심판의 눈을 피해 유니폼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의도를 대충 짐작한 잭은, 입술을 깨물며 버텨냈다.
“감정적인 선수라고 들었는데.”
잭은, 턱을 아주 살짝 치켜들며 대답했다.
“그랬슴다. 하지만 이젠 아님다. 전, 선덜랜드 주장임다.”
자신이 선덜랜드에서 가장 카드를 잘 받는 선수임을, 잭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구단주가 바뀐 이후 처음 퇴장당한 선수도, 가장 많이 치즈를 먹은 선수도 잭이었다. 구단주 이희성은 ‘열정으로 팀을 이끌어 달라’고 주문했지만, 잔디 위에서 열정은 언제나 흥분으로 바뀔 수 있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잭은 최대한 냉정하려고 노력했고, 승부욕 이외의 다른 어떤 감정도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그때였다. 옆에서 요니가 보낸 패스가 날아든 것은.
절묘한 타이밍의 패스였지만, 잭의 돌파는 한 템포 늦고 말았다. 덕분에 수비에게 대응할 기회를 허용한 잭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걸린 발에 힘을 주긴 했다. 공이 사이드라인을 벗어나도록.
루즈볼이 파리의 역습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감정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선덜랜드 주장이 별 실력 없다는 건 확실히 알겠네.”
내밀어진 손을 잡고 일어나며, 잭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관없슴다. 팀에서 가장 좋은 선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애초에 없었슴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났다.
“챔스 결승전에서 뛰는 선수의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네.”
도발 같지는 않았다. 상대는 아마 진심으로 놀랐을 것이다. 파리는 갈락티코 정책을 내세워, 전 세계의 스타 선수를 쓸어모으는 팀이고, 그곳의 주전으로 뛰는 선수라면 대체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스타들이다.
향상심과 자존심이 남다른 파리의 스타플레이어로서는, 잭의 이야기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입씨름을 하러 온 건 아니었으니.
오늘, 그는 싸우러 왔다.
잭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유니폼을 내려다보았고, 가슴팍에 달라붙은 잔디를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이봐. 경기는 길어.”
앞으로도 넘어질 일이 많을 테니 굳이 유니폼의 잔디를 떼어낼 필요 없다는 도발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경기 내내 냉정하려 노력했던 선덜랜드 주장이 끝내 지우지 못한 감정, 팀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은 결코 도발 따위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꼼꼼하게 엠블럼 위의 잔디를 털어낸 잭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 *
“라인을 무작정 올리지는 않는군요.”
“그렇겠지. 우리 앞에서 라인 함부로 올릴 수 있는 팀이 세상에 얼마나 있다고.”
코치의 말에 무심히 대답하면서, 파리 감독 포체티노는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선덜랜드의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열렬히 지휘하는 브라이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군.’
브라이언은 오롯이 경기장만을 응시한 채 선수들을 지휘했고, 단 한 번의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선덜랜드가 오늘을 위해 얼마나 칼을 갈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감독의 지시에 따라 척척 움직이는 선수들의 모습 또한, 이 팀이 결승전을 참 잘 준비해왔다는 증거였다.
마치 측면 윙어인 것처럼, 오른쪽 날개까지 이동한 선덜랜드 주장 잭과, 그런 잭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활발히 움직이는 요니, 다시 요니의 빈틈을 커버하는 에디···.
마치 도미노, 아니면 매스게임처럼 체계적인 움직임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멋진 축구였다. 자신의 입장이 적장이 아니었다면 갈채를 보냈을 정도로.
‘축구판은 이래서 재밌다니까.’
시즌 초, 챔스 조추첨까지만 해도 선덜랜드는 1포트 최약체로 꼽히는 팀이었고, 브라이언은 재능은 있어도 실력은 부족한 어린 감독으로 통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는 지금, 1포트 최약이라던 선덜랜드는 뮌헨과 유베, 레알까지 꺾으며 결승에 올라왔고 브라이언은 마술과 같은 묘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선덜랜드 구단주는, 천하의 알리안츠 아레나를 어나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로 바꿔 버렸다. 오늘 파리는 팬들의 함성에서도 압도당했고, 경기장 곳곳에 내걸린 플래카드의 수와 질에서 모두 밀렸다.
덕분에 반쯤은 원정 느낌으로 경기하는 중이었다. 파리 감독을 맡은 이래, 사이드라인 밖에서 오늘처럼 밀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작에 프랑스를 지배한 파리가, 여전히 거액을 들여 빅 사이닝을 거듭하는 이유는 챔스를 확실히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 결과, 선수단의 네임밸류에서는 파리가 확실히 앞서 있었다. 그리고 네임밸류를 쌓기 위한 실적에서도.
큰 무대에서의 경험은 틀림없이 선덜랜드가 갖지 못한 것이고, 파리의 무기였다.
“슬슬 어린 친구들을··· 압박해 볼까.”
포체티노는 조용히, 하지만 힘 있게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신호에 맞춰, 파리의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 * *
에디는 전방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고전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작부터 힘들긴 했지만, 조금 전부턴 더 빡세진 것 같은데.’
파리 감독, 포체티노의 지시가 내려진 이후부터 상대의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덕분에 오늘, 선덜랜드의 중원은 파리의 압박을 쉽게 돌파하지 못한 상태였다.
선덜랜드의 사냥개라 불리던 주장 잭은 오른쪽 측면에서 반고립된 상태였고, 요니 또한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지 못했다.
그에 비해 에디는 상대적으로 한가했고, 사실 그 이유 또한 알고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드레싱 룸에서 이미 읽어낸 흐름이기 때문이다.
[파리는 아마, 우리가 하프라인 아래쪽에 있는 동안은 방해하지 않을 거야. 하프라인을 넘을 때 압박을 시작하겠지. 그 팀은 굳이 상대 수비라인을 뒤로 밀어낼 이유가 없는 팀이거든.]
[하긴, 뒷공간은 음바페나 네이마르를 가진 팀에겐 무기가 될 테니까요.]
[대신 중원에서의 빌드업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의도일 거야. 우리 전방엔 축구의 신이 있으니까.]
축구의 신은 전성기를 훌쩍 넘긴 선수이고, 떨어진 체력 탓에 비교적 좁은 활동 범위에 묶여 있다. 하지만 일단 공을 넘겨받으면 신들린 활약을 보인다.
어떻게든 중원의 빌드업을 거쳐 좋은 형태로 공을 전달할 수 있으면, 선덜랜드의 공격은 순도 높은 득점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파리는 절대로 선덜랜드를 중원에서 편하게 빌드업하게 놔둘 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감독의 노골적인 질문에, 에디는 미소로 대답했었다.
[제가 해결하는 거죠.]
에디는 선덜랜드에 오기 전부터 공격적인 센터백으로 명성을 떨쳤고, 미드필더 못지않은 킥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그런데도 이 팀에서는 빌드업 리더를 맡은 적이 거의 없다. 그 역할은 주로 톰슨, 가끔은 해리슨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느 시점에서 파리 미드필더가 한쪽 측면에 무게를 실을 거야. 그때, 네가 올라가서 공을 전진시켜.]
그렇게 지시했던 감독 브라이언은, 지금 사이드라인 밖에서 핏대를 올리는 중이었다.
“베넷! 더 올라가! 더!
그것이 사실은 자신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을, 에디는 민감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레프트백 베넷을 전진시켜 주도권 싸움에 가담시키는 의미는, 파리가 측면에 힘을 실었다는 뜻이다.
잠시 후 에디는 경쾌하게 전진했다. 파리 공격진이 곧바로 눈을 빛내며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였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다지 압박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내가 하프라인을 넘기 전까지는.”
접근하는 파리 선수들을,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무시하면서, 에디는 숨을 멈추고 힘차게 왼발을 내디뎠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패스를 향해서.
그 동작은, 매일 밤 자율 연습에서 지켜봤던 해리슨의 킥과 똑같았다. 장차 역대급 패서가 될 어린 선수의 패싱 센스를, 에디는 매일 밤 충실히 모방하려 노력했기에.
‘그렇다고 해리슨처럼 빙글빙글 돌진 않겠지만.’
에디에게는 압박을 벗겨낼 발재간도, 상대 진영을 부숴버릴 돌파력도 없다. 해리슨이 종종 보는 풍경도,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생각보다 훨씬 더 천재가 많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천재는··· 내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알지.’
그래도 괜찮다고, 에디는 생각했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기에, 그가 파리의 음바페나 네이마르보다 위대한 선수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선덜랜드가 더 위대한 팀이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다이나믹하게 펼쳐 균형을 잡는 양팔, 힘차게 공을 걷어차는 오른발, 차는 순간까지 수비가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위치로 날려보내는 공.
에디 특유의 롱패스를 경계한 파리의 수비가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패스는 유유히 우측 측면의 잭에게 향했다.
“몇 초 뒤에 생겨날 찬스를 미리 읽어낼 능력은 없어. 그런 건 할 수 있는 선수에게 맡기면 돼. 축구는 열한 명이 팀으로 하는 게임이니까··· 그렇지, 캡틴?”
공을 건네받은 선덜랜드의 주장이 무섭게 질주하는 모습을 보며, 에디는 히죽 웃었다.
* * *
마침내 잭이 빠져나온 순간, 다미가 환호했다.
“전진했어요! 저 선수, 저 선수가 주장이었죠?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했었던!”
예전에 잭은, 수비의 축구화 앞에 그대로 몸을 던지고 머리를 내밀어 헤더를 꽂아넣은 적이 있었다. 그 투혼이 당시 경기를 지켜보던 다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달려, 달려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다미가 발을 동동 굴렀고, 옆에선 희주가 펄쩍펄쩍 뛰었다.
그때마다 잭이 무서운 속도로 잔디를 뒤로 밀어냈다.
선덜랜드 최고의 준족인 잭의 돌파는 그만큼 매서웠고, 순간적으로 흐트러진 파리의 수비진은 그를 쉽게 붙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 돌파가 언젠가 한계를 맞이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빠른 발과 압도적인 지구력을 가진 우리 주장은, 아쉽게도 발재간을 갖추진 못했기 때문에.
하물며 잭을 가로막은 파리 수비진은, 훈련에서 현세대 최고의 드리블러, 네이마르를 상대하는 자들이다.
결국 어태킹 써드에 진입한 시점에서 잭의 발은 멈추고 말았다. 어느새 수비에 가로막힌 우리 주장을 내려다보던 다미가 울상을 지었다.
“아, 어떡해!”
희주도 옆에서 이를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딱 한 명만 돌파하면 될 것 같았는데!”
나는 아직 침착했다.
“괜찮아, 아직은.”
우리가 전반 내내, 집요하리만큼 오른쪽 돌파를 시도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측면 프리롤 자리에는, 축구의 신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리고 굳이 스티븐 대신 잭이 돌파를 시도했던 이유도.
수비에 가로막힌 잭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공을 피치 안쪽으로 밀었다. 그 순순한 태도는, 자신에게 상대를 돌파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파리 수비진도 안심했을 것이다··· 우리 주장의 옆에서, 요니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한발 늦게 침투한 요니가 그대로 공을 다이렉트로 걷어차는 모습을 보며,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지!”
딱 한 순간이지만, 루트가 보인 것만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보였다. 골로 이어지는 딱 하나의 길이. 잭에게서 요니에게, 줄곧 기다리던 축구의 신에게.
요니의 발을 떠난 공이 잔디 위에 그려진 루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축구의 신이 가속했다. 잠시 후, 메시는 자신의 성명절기와 같은 개인기, 라 크로케타를 연속으로 선보이며 단단해 보이던 파리의 수비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때려.”
메시의 발이 공을 찍어찬 순간, 공은 파리 최종 수비수의 머리 위를 넘어 푸른 하늘로 떠올랐다.
그 공을 따라 바스티아노가 뛰어올랐다.
““때려!””
축구를 잘 모른다던 다미도, 희주도 합창처럼 외친 순간, 솟구쳐오른 바스티아노의 머리가 그대로 공을 강타했다.
[선덜랜드 1 - 0 파리]
흔들리는 골네트를 바라본 순간, 벅찬 감격이 흘러서 넘칠 것만 같았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지고, 입에선 자꾸만 언어조차 아닌 소리가 나왔다.
[고오오오올! 선덜랜드가 선제골을 뽑아냅니다! 창단 이래 첫 챔스 결승전 득점에 성공한 선수는! 바-스티아-노 라파!]
장내 아나운서의 우렁찬 외침에 팬들의 목소리가 덮였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