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꿈꾸는 자들을 위해 (4)
선덜랜드 선수 중 처음으로 챔스 결승전에서 득점을 기록한 바스티아노 라파의 세레머니는 심플했다.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하는 무릎 슬라이딩인데, 변화라고는 멈출 때쯤 고개를 끄덕인 게 고작이다.
“미남이라 그런지, 저렇게만 세레머니해도 꽤 멋지네요.”
“꺄륵.”
수잔의 소감에 아들 크리스가 꺄륵거렸고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는 물론 빌리 영감까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남성진 중 유일하게 떨떠름한 사람은 수잔의 남편 마일즈였다. 아무래도 아내가 다른 남자를 두고 미남 운운하는 이야기에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골만 넣어 주면 세레머니는 누가 해도 멋지지. 챔스 결승 첫 골인데.”
“하긴, 그건 그래요.”
순순히 동의하는 수잔의 옆에서 앨리스가 짓궂은 시선을 보냈다.
“아하, 마일즈 아저씨 질투하시는구나!”
“흠, 흠.”
헛기침하며 고개를 살짝 돌린 마일즈의 얼굴에서 살짝 붉은 기를 발견한 수잔은 기분 좋은 듯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올렸다. 그러자 이번엔 크리스가 불만스러운 것처럼 가볍게 빼액거렸다.
잠시 그 모습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앨리스가, 무릎 위에 올려둔 노트북에 손을 뻗었다.
한때 챔스 결승을 참관할 수 있을지 염려하던 그녀는 다행히 결승전에 왔고, 관중들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며 생동감 있는 홍보 기사를 준비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가장 완벽한 선제골이었다. 경기의 흐름을 가져온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주전 대부분이 결승을 처음 경험하는 선덜랜드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지표였다는 점에서.]
습관적으로 엔터를 몇 번 누르며 생각을 가다듬은 앨리스가 계속 글을 써내려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선덜랜드다운 득점이기에 더욱 좋았다. 어떤 선수 한 명의 압도적인 개인 능력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했기 때문에.]
기습적으로 공세에 가담한 에디, 죽도록 달려 공을 운반한 잭, 순간의 허점을 파헤친 요니와, 축구의 신이 보여준 한 순간의 반짝임.
그리고 바스티아노의 결정력까지.
[이제 그 위에, 우리의 목소리를 얹어야 한다. 끝까지 싸우라고. 달리라고.]
그사이 경기는 파리의 킥오프로 재개되었다.
“한 골도 내주지 마!”
조금 전까지 다정하게 머리를 맞대던 신혼부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부응원단으로 돌변했다.
“계속 달려!”
부부의 목소리에 거친 사내들의 함성이, 맥켐즈의 외침이 더해진다.
I know I am. I’m sure I am.
I'm Sunderland 'til I die.
[그러니까 이것은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
Sunderland 'til I die.
[휘슬이 울릴 때까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죽을 때까지 발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타이핑을 마친 앨리스는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멈추지 말아요!”
'til I die.
* * *
이후 펼쳐진 파리의 공세는, 선덜랜드 팬에게는 거의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네이마르가 압도적인 개인기로 선덜랜드 선수를 차례차례 벗겨냈고, 견디다 못해 여럿이 포위하려 시도하면 음바페가 빈 공간을 파고들었다.
이제는 은퇴한, 선덜랜드의 옛 감독과 전직 관리인이 나란히 신음을 흘릴 만큼.
“네이마르가 아주 훨훨 나는데? 브루노에겐 미안하지만, 상대가 안 될 것 같군.”
오늘 네이마르를 주로 상대한 선덜랜드 선수는, 같은 브라질리언 풀백 브루노였다. 브루노 또한 발재간에는 일가견이 있는 선수였지만, 네이마르 앞에 서니 기량이 평범해 보일 정도였다.
한숨짓는 샘 노인의 곁에서, 로저스 감독도 입술을 깨물었다.
“브루노도 힘들겠지. 네이마르는 아직 마르틴보다도 위에 있는 선수니까.”
선수로서의 격을 따지면 선덜랜드에서는 오직 축구의 신 메시만이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 메시의 전성기가 이미 지났음을 고려하면, 지금의 선덜랜드에 혼자서 네이마르에 맞설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네이마르를 앞세운 파리의 공세는 매서웠다. 심지어 파리 감독은 전술의 디테일을 조금씩 바꿔가는 중이었다. 선수들의 배치를 미묘하게 변경하며 네이마르 주위에 사람을 줄였다.
선제골을 내주기 전까지는 선덜랜드의 오른쪽, 파리의 왼쪽에 사람이 쏠려 있었는데, 이제는 반대쪽 측면이 바글거린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선수들의 배치도, 상대 감독의 의도도 아주 선명하게 보여서, 로저스가 그만 탄식하고 말았다.
“브루노를 돕지도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군.”
이제 선덜랜드가 오른쪽 측면을 파고드는 네이마르에게 마크를 추가로 붙이기 위해서는, 반대쪽의 수적 열세를 감수해야만 한다.
‘원래 우리 수비는 왼쪽이 더 좋긴 하지만.’
풀백 치고는 무척 공격적인 라이트백 브루노와 달리, 레프트백 베넷은 공수 양면의 균형이 잡힌 선수다. 따라서 굳이 수비력을 굳이 비교하자면 왼쪽 측면이 훨씬 튼튼하다.
다만 그 차이는, 사람 한 명을 왼쪽에서 빼내서 오른쪽을 지원할 정도로 크지는 않다.
‘브라이언···.’
이제 경기장을 떠난 노장은, 팀의 위기와 자신의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에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옆에서 샘 노인도 혀를 찼다.
“이 영감쟁이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가 많이 힘든 모양이구먼.”
로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선덜랜드의 감독이던 몸이다. 부정적인 단어를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4년간 지도한 선수들에 대한 예우 때문에라도.
대신 로저스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부디 끝까지 버텨내 달라고.
그때, 파리의 플레이메이커 베라티의 패스가 오른쪽 측면으로 향했다. 파리에게는 왼쪽, 네이마르의 자리였다.
트래핑을 방해하기 위해 브루노가 발을 뻗는 순간, 네이마르의 두 다리가 교차했다. 일부러 뒷발로 받아낸 네이마르의 몸이 흔들렸고, 공의 방향이 바뀌었다.
“라보나 컨트롤!?”
“호커스 포커스···.”
두 노인의 경탄과 신음 앞에서, 브루노는 또다시 제대로 저항조차 못 해본 채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커버에 나선 이고르는 솜브레로 플릭 한 방에 벗겨졌다.
박스 안에는 아직 에디가 남아 있었지만, 달려들지는 못했다. 음바페를 견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점수는 내주지 않았다. 미드필더에서 달려 들어온 주장이 필사적인 슬라이딩으로 공의 궤적을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잠시 후 파리의 스로인으로 경기가 재개되려는 순간, 로저스는 눈을 의심했다.
“스티븐이 왜 네이마르 옆에··· 아하!”
그의 늙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선덜랜드는 오른쪽 측면에 선수를 추가로 투입할 여력이 있었다. 스티븐이 평소 뛰던 라이트윙 자리는 오늘, 메시에게 넘어갔고, 그는 미드필더 위치에서 이번 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스티븐은 원래 풀백 출신이고, 디펜시브 윙어로 뛰는 만큼 수비력이 출중하다. 대신 중원이 둘로 줄어들겠지만, 영리한 요니와 헌신적인 잭이라면 어떻게든 커버해줄 것이다.
옆에서 샘 노인이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팀이, 자네 축구를 하는구먼.”
“내 축구?”
눈을 깜빡이는 로저스에게, 샘 노인이 웃으며 덧붙였다.
“자네 입버릇 아니었나? 휘슬이 울릴 때까지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 축구 말일세.”
“아아. 그 이야기였군.”
고개를 끄덕이는 로저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건, 내 축구가 아니야.”
“그러면?”
“우리 축구, 선덜랜드의 축구지.”
단 1분 만에 파리의 노림수를 멋지게 받아친 브라이언과, 한 명 적은 상태로 미드필더를 커버하기 위해 달리는 JJ 듀오를 내려다보는 늙은 감독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 * *
한 차례 위기를 넘긴 다음에도 파리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선덜랜드 팬에게는 여러모로 심장에 안 좋은 국면이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희주는 한 10분 전부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가끔씩 경기장에 우리 팬들의 함성이 들릴 때만 손가락 사이로 눈을 살짝 내미는 식으로.
상대적으로 다미는 훨씬 침착해 보인다. 의자 모델 해도 될 만큼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흔들림 없이 경기장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역시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다운 침착함’ 이라고 평가했겠지만, 내 평가는 조금 다르다. 왜냐면 다미는··· 눈을 감고 있거든.
경기장 위의 국면이 불리한데도,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다미가 곧바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언제 감았냐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사장님, 왜 웃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번 웃었기 때문일까? 경기장의 국면은 사실 내 눈에는 그렇게까지 절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경기 초중반에는 분명히 우리가 우세했다. 점유율과 슈팅 수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했었다. 그리고 선제골도 우리가 뽑았고, 지금 리드를 지키고 있는 팀도 우리다.
비록 지금 파리의 맹공이 매서워 수세에 몰렸다고는 하지만, 우리 선덜랜드는 사실 이런 국면에는 꽤 익숙한 팀이다. 3부 리그에서 시작했으니까.
지금이야 프리미어리그의 빅 7로 꼽히는 강팀이지만, 예전의 우리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언더독이었다. 덕분에 지금처럼 얻어맞으며 버티는 흐름은 내게는 그리 낯선 장면이 아니었다.
브라이언과 샐리에게도, 그리고 우리 선수들에게도 친숙할 것이다. 우리 선수단의 코어는, 리그 원 - 챔피언십 시절 합류한 멤버들이니까.
네이마르를 박스 안에 들여놓은 한 번의 위기를 제외하면, 우리는 바이털 에어리어를 철저하게 틀어막은 상태로 수비하고 있었다.
디펜시브 윙어 스티븐은 물론, 바스티아노 또한 최전방에서 상대를 위협하는 중이었다. 비록 수비는 서툴지만, 마르틴도 적극적으로 전방압박에 가담했다.
그렇게 우리는, 팀 전체가 똘똘 뭉쳐 1점의 리드를 지키는 중이다.
“슬슬 교체 타이밍 같은데.”
내가 아는 브라이언이라면 이런 타이밍에 쐐기를 박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혼잣말했더니, 어느새 얼굴에서 손을 뗀 희주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빨리 바꿔야지. 톰슨 선수를 내서 쓰리백으로 잠그는 게 좋을 것 같아.”
“어? 희주 씨, 선덜랜드는 원래 포백이었죠? 쓰리백으로 줄어드는데도 잠글 수 있는 건가요?”
“다미 언니, 그건요.”
희주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평소에는 브라이언이나 샐리 같은 전술 천재들 덕분에 축알못 취급받고 있지만, 그래도 희주는 어지간한 사람보다는 훨씬 축구를 잘 안다.
문제는 다미가 전혀 평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희주가 설명하기도 전에, 다미의 두뇌는 정답을 찾아냈다.
“아! 알았어요. 쓰리백이라는 건, 수비할 때는 파이브백이 되는 거죠? 측면 수비수까지 합쳐서요.”
“어떻게 알았어요? 축구 잘 모르잖아요? 미리 예습했어요?”
“그야, 이 상황에서 수비수를 줄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주 논리적인 추론이었다. 다미의 말처럼, 톰슨을 낸다면 우리는 아마 파이브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수비수를 줄일 이유는 없다.
하지만···.
“브라이언이라면, 지금 톰슨을 내진 않을 거야.”
경기 중에 쓸 수 있는 교체 카드는 세 장이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뜻밖의 부상에 대비해서 마지막 교체 카드는 남겨두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파리가 전술을 바꿀 경우에도 대비해야 하니, 먼저 쓸 수 있는 교체 카드는 한 장이다.
딱 한 명의 교체로 국면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때 우리 벤치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사이드라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선수를 보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너무나 브라이언과 샐리다운 교체였기에.
[아웃, 10번 마르틴. 인, 22번 크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