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꿈꾸는 자들을 위해 (5)
“크리그, 준비해.”
몸을 풀라는 감독의 지시에 샐리는 차갑게 웃었지만, 옆에서는 루벤과 델랍이 동시에 두 손을 들었다.
“감독님, 혹시 착각하실까봐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1점 앞서고 있습니다.”
“맞아. 이럴 땐 수비수나 미드필더를 넣는 게 정석 아닌가?”
코칭스태프의 의견은 무척 상식적이었기에, 크리그는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혹시 제게 전방압박을 주문하시는 거라면··· 더 적합한 선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도 최선을 다해 뛰겠습니다만.”
메시나 마르틴보다는 크리그의 압박 능력이 낫지만, 그래도 크리그는 전방압박을 하기에 적절한 선수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의 전방압박과 수비가담은, 리그 원 시절부터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샐리가 웃었다.
“물론 크리그 선수에게는 전방에서 상대 빌드업을 끊어줄 역할도 기대하고 있지만, 공격수를 그런 이유만으로 넣지는 않아요.”
잠시 후 브라이언의 지시가 이어졌다.
“한 골 더 만들고 와. 추격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려. 수비수를 넣는 건 그다음이니까.”
크리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결승전에 대비해 몸을 만들고 감각을 유지했지만, 투입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는 챔스 레벨의 공격수는 아니었기에. 하물며 오늘은 결승전이고, 상대는 파리다.
아직 킥 하나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조차 옆에 수비수가 붙으면 여지없었다.
‘내게 요구되는 플레이는···.’
사이드라인에 서서, 크리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잠시 후 걸어 나오는 마르틴과 손을 맞잡고 가볍게 포옹했다.
“공, 오지 않는다. 주도권 없다.”
“응. 그렇더군. 고생이었겠···.”
“찬스 아주 적다. 온더볼 이제 무의미. 따라서 풀백 묶어둔다.”
마르틴의 태도는 진지했고, 목소리에서는 절실함이 느껴졌다. 틀림없이 뭔가를 전하려는 것 같았지만, 쉽게 생각나지는 않았다.
지난 세 시즌간 축구 실력은 일취월장했지만, 영어는 별로 늘지 않은 동료를, 크리그는 아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풀백 묶는다. 역습 온다. 제발, 크리그.”
풀백과 역습이라는 단어, 평소보다 많이 지친 마르틴의 모습에서 크리그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마르틴은 지금까지 줄곧 전방압박에 가세했다. 하지만 공을 빼앗지는 못했다. 그저 파리 풀백이 오버래핑하지 못하도록 위협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지금 파리의 오른쪽 윙어는 풀백의 조력 없이 공격에 나서고 있다는 뜻이다. 의미를 깨달은 크리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넷이 날뛰겠군··· 맡겨 둬.”
“아니면 요나스도.”
크리그는, 마르틴과 엇갈려 사이드라인을 넘었다.
발아래 바스러지는 잔디의 촉감이 친숙하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22번 그라운드와 똑같은 잔디, 그들이 2주일간 훈련했던 바로 그 잔디였다.
잠시 후, 선덜랜드의 22번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파리의 공세가 둔해진 것 같아요!”
다미의 소감을, 희주가 일축했다.
“그래도 안 볼 거예요. 거짓말인 거 다 아니까.”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희주는 완강하게 관전을 거부하며 버텼다. 그래서 슬쩍 끼어들었다.
“진짜인데.”
“흥, 오빠 말은 더 못 믿···.”
“희주 씨.”
다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희주가 급격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오라버님 말씀을 믿어요. 콩으로 메주 쑨다고 해도 믿을게요.”
메주는 원래 콩으로 만들지 않나? 아무튼,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온순해진 희주가 손가락 사이로 눈을 내밀었다.
“어, 진짜네!?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거야? 공격수를 넣었는데 왜 수비가 좋아진 느낌이 들지?”
“크리그는 마르틴보다 수비가 좋은 선수거든. 그리고, 파리 입장에서는 역습이 무서울 테니까 공세를 늦춰야 겠지.”
마크가 붙는 지공 국면에서는 비교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역습 상황의 크리그는 아주 위력적인 공격수로 탈바꿈한다.
크리그는 간결한 움직임과 정확한 킥을 자랑하는 선수고, 우리 포백라인에는 에디가 있다. 파리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에디의 롱패스가 곧바로 크리그에게 전달될 것이다.
파리의 라이트백이 뒤에 남을 수밖에 없었고, 라이트윙 혼자서는 베넷을 뚫어낼 수 없으니 자연히 공세가 둔화될 수밖에 없다.
일시적으로 찾아온 균형에 파리는 곧바로 선수교체로 변화를 꾀했지만, 브라이언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교체 카드를 꺼내 응수했다.
[아웃, 9번 바스티아노. 인, 99번 해리슨]
사이드라인에 모습을 드러낸 해리슨을 본 순간,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한편 선덜랜드 유소년들도 오늘 이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챔스 결승전이라는 빅매치가 유소년의 육성에 큰 힘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물며 팬들에게도 항공편과 숙소를 제공하는 선덜랜드가, 애지중지 키우는 유소년들을 데려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매일 아카데미에서 얼굴을 보는 1군 선수들이 챔스 결승전에서 뛰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유소년들은 감동했고, 바스티아노의 선제골에는 일제히 환호했으며, 팀 전체가 하나 되어 버티는 모습에는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해리슨의 등장은, 유소년 선수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유스 출신의 어린 선수 해리슨이, 마침내 챔스 결승전에서 기회를 받는 모습은 구단 유소년에게는 꿈같은 장면이었던 것이다.
평소 냉정하던 짐조차 보기 드물게 흥분해, 몇 번이나 주먹을 움켜쥐었다. 평소 까불거리는 바르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유소년들 중, 유일하게 조용한 사람은 오직 테오뿐이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경기장을 응시했다. 해리슨이 합류한 순간, 어렴풋하게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꿈결과도 같은 흐릿한 풍경 속에서, 수비를 끌어들인 다음 공을 건네는 해리슨 특유의 패스를 상상하니, 도저히 경기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테오의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기까지는 약 10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후반 81분, 공을 잡은 해리슨에게 파리 미드필더가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포위했다.
해리슨은 곧바로 특유의 빙글빙글 도는 개인기로 파리의 압박을 벗어나려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해리슨은 아직 프로 기준으로는 몸이 덜 만들어진 어린 선수이고, 정당한 몸싸움만으로도 곧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포위당한 해리슨의 발밑에, 공은 없었다.
“패스했어!? 오른쪽이야!”
바르카가 외치기도 전부터, 테오의 시선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스티븐이, 오늘은 메시가 있는 쪽이다.
해리슨의 패스가 워낙 기습적이었기 때문인지, 메시의 트래핑은 평소보다 길었다. 축구의 신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트랩 미스였다.
“어떡해··· 흘렀어!”
10년 만의 결승전이라는 중압감이 작용했거나, 아니면 이제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대라 힘에 부친 것일지도 모른다.
파리 수비진이 곧바로 공을 확보하러 달려 나왔다. 다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는 상황에서, 오직 테오만이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여쭤볼 게 있어요. 수비가 잔뜩 물러난 상태로 거리를 둔 채 뒷공간만 지키면 어떡하죠? 아, 물론 저도 알아요. 그냥 킥하면 되죠. 하지만 때로는 킥을 할 수 없는 상황도 있잖아요? 패스할 곳이 없다거나, 슛을 하긴 너무 멀다거나···.]
‘그때, 저분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챔스 결승전을 보라는 메시의 말을 떠올린 테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충분히 끌어들인 다음에··· 7, 19, 22···!”
테오는 눈을 크게 뜨고, 숨쉬는 것조차 잊은 채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자신을 미친놈처럼 바라보는 동료들도, 옆자리에서 움찔거리는 짐도 개의치 않았다.
잠시 후, 소년의 눈앞에서 축구의 신이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테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 * *
“제발, 제발 넣어주세요.”
해리슨에게서 축구의 신에게 공이 넘어간 순간,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눈만 내민 희주가 기도하듯 속삭였다. 옆에선 다미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중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 모두 눈에 띄게 상심하고 말았다. 메시의 발에 닿은 공이 힘없이 굴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들어가! 지금이다!”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이번에도 뭔가를 확실히 볼 수 있었기에.
“응? 누가··· 어? 어!?”
희주의 의문이 환호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축구의 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핀을 걸어 두었는지, 흘러나온 공은 그리 먼 곳까지 구르지는 않았다. 덕분에 메시는 파리 수비진보다 먼저 공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공을 오래 소유하지는 않았다.
이어진 장면은 차라리 마법과도 같았다. 완벽한 속임수가 줄곧 라인을 유지하던 파리의 최종 수비를 흐트러뜨린 순간, 공이 잔디 위에 하얀 선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공간연주자 요니가 완벽한 타이밍에 침투했다.
필사적으로 달려나와 각을 줄이는 파리의 골키퍼, 돈나룸마의 모습을 흘끗거린 요니는 그대로 공을 옆으로 살짝, 아주 살짝 흘렸다.
그리고 마침내 공 앞에 도착한 선수는···.
“달려! 놓치지 마!”
어느새 희주는 얼굴에서 손을 완전히 뗀 채 날뛰는 중이었고, 그 옆에선 다미도 함께 외치고 있었다.
나 또한 목에 힘을 주었다.
“때려!”
완벽하게 붕괴된 수비, 자세가 무너진 골키퍼, 그리고 공을 잡은 선수는··· 슈팅 솜씨 하나는 끝내주는 스트라이커.
[No 22. 크리그]
그러니 절대로, 실패할 리가 없다.
쇄도한 크리그가 침착하게 공을 인프런트로 마무리한 순간, 우리 팬들의 함성이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I'm Sunderland 'til I die.
종료까지 10분을 남기고, 우리 선덜랜드가 결정적인 승기를 붙잡은 순간이었다.
[선덜랜드 2 - 0 파리]
* * *
득점 직후, 브라이언은 곧바로 톰슨까지 투입해 수비를 굳혔다. 이후, 우리는 파리의 맹공을 끝까지 버텨내며, 경기를 그대로 마무리했다.
구단을 인수한 직후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리그 원에 추락한 선덜랜드가 챔스를 우승할 거라고는.
3부 리그에서 시즌 내내 딱 한 골을 넣은 공격수 크리그가 챔스 결승전에서 득점에 성공할 거라고 말하면, 모두 입을 모아 미쳤다고 답했겠지.
하지만 그런 꿈같은 일이, 때로는 실제로 일어나곤 한다. 그렇기에, 축구는 틀림없이 꿈꾸는 자들을 위한 게임이며, 챔스 결승전은 꿈의 무대라 불린다.
잠시 후,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렸다. 마침내 선덜랜드가 유럽 축구의 정점에 섰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어찌나 감격했는지, 팬들의 함성에 점차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자꾸만 목이 메는 것만 같다. 옆에서 희주는 아예 대놓고 통곡하는 중이다.
“야, 혹시 트레블이라도 했다간 초상 치르겠다.”
희주가 도저히 대답할 상태가 아니었기에, 옆에서 다미가 대신 대답했다.
“사장님, 축하드려요!”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자세히 보니 다미의 눈시울도 조금 붉다.
“고마워.”
대답하면서, 나는 그라운드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환호하는 선수들과, 벤치 밖으로 달려나오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주머니에서 손을 뺀 채 환호하는 브라이언과,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화장이 다 번진 얼굴로 활짝 웃는 샐리를 내려다보며,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장면이라,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다.
옆에서 다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시상대에 오르셔야 할 테니까 양복을 준비할까요?”
“괜찮아. 트로피는 선수들이 먼저 들 테니까. 구단주 차례는 한참 나중이지.”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브로, 어서 내려와!]
“아니 왜.”
말을 이을 틈도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온 사방에서 우리 선수들 목소리가 들려서.
그 악다구니의 틈바구니에서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던 소리를 정리하면, 아무래도 지난 시즌 유로파 트로피와 똑같은 방식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게 우리 선수단의 방침인 모양이다.
즉, 나와 잭이 사이좋게 양쪽에서 들겠다는 의미다.
다미가 웃었다.
“그렇다고 하네요.”
“빅 이어는 그렇게 들면 폼이 안 나는데···.”
하다못해 양복으로 갈아입고 가겠다는 내 통보에, 전화기 너머의 소리는 더 시끄러워졌다.
구단주도 팀의 일원이니까 그냥 유니폼 입은 채로 내려오라는··· 얘들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혹시 나를 수치사시키려는 건가?
그래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직 이 팀이 갈 길이 멀다는 걸 안다. 이뤄야 할 목표도 많이 남았다. 순서가 바뀐 느낌도 들지만, 우리는 리그 우승컵을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트레블도 해내야 한다. 그건 축구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목표이자, 꿈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쯤은.
남은 목표를 잠시 미뤄둔 채, 마냥, 웃기만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