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함성의 잔향 (1)
<나는 팬들이 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노랫소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일 그 소리가 멈출까 봐 두려웠다. - 에릭 칸토나>
트로피를 누가 먼저 드느냐로 약간의 소란이 발생했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은 나와 잭이 나란히 드는 그림을 희망했지만, 나는 당연히 주장이 가장 먼저라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 세상에 구단주가 트로피를 제일 먼저 드는 팀이 어딨냐?"
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항변하자, 곧바로 브라이언이 반박했다.
"브로, 애초에 첫 참가 팀이 챔스 우승하는 것부터 선례가 없는 일이야.”
"있을걸."
유러피안 컵 시절 기록들을 뒤져보면 하나쯤은 나올 거다. 틀림없이.
옥신각신하는 나와 브라이언의 옆에서 잭이 가슴을 탕탕 두들기기 시작했다.
"우리 팀을 챔스 결승에 데려온 분은 구단주님 아님까? 왜 고집을 부리시는지 모르겠슴다."
사실은 고집을 부린 이유가 있다. 예전에 헨도가 리버풀로 이적한 다음, 자기네 팀은 챔스 트로피 멋지게 든다고 그렇게 자랑했거든. 뭐, 솔직히 이스탄불에선 엄청 멋지게 들긴 했다. 그리고 몇 시즌 전에 헨도도 꽤 근사하게 들었고.
그게 줄곧 부러웠단 말이지.
마침 우리 팀에는 잭이라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주장이 있다. 트로피를 드는 솜씨도 일품이다. 만일 에디가 주장이었으면 나도 이렇게 우기지는 않았을 텐데.
미안하지만, 에디는 트로피를 이상하게 못 들거든. 아무리 봐도 멋이 없다.
"혹시 이유가 있슴까?"
"트로피를 드는 것도 일종의 팬 서비스니까, 당연히 선수들부터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팬 서비스란 뜻임까? 알겠슴다. 팬은 중요함다.”
곧바로 잭이 스탠드로 달려가 손을 흔든다.
"누가 트로피를 선덜랜드에 가져왔슴까!?”
상황을 눈치챈 우리 팬들이 열정적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썬! 썬! 썬! 썬!"
“무너진 팀을 부활시킨 사람은!?”
"썬! 썬! 썬! 썬!"
“트로피를 누가 가장 먼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심까!?”
"썬! 썬! 썬! 썬!"
잭 쟤는 나중에 사이비 교주 해도 잘하겠네. 선덜랜드 축구교 같은 거.
"눈치 볼 필요 없어! 로저스 감독님도 들고 가셨잖아."
"아니, 그건 은퇴 기념이잖아요. 저 은퇴해요?"
"그건 아니지. 종신해 줘!"
곧바로 Sunderland 'til I die가 울려 퍼져서, 나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로저스 감독님처럼 트로피 들라고요? 은.퇴.하.신. 감독님처럼?"
"그거랑 이건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아 쫌.
결국 촬영을 여러 번 하기로 했고, 그중 한 번은 나와 잭이 사이좋게 양쪽에서 들게 되었다··· 다미가 신나게 사진을 찍어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뭐, 나는 주장 잭이 멋들어지게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영상을 확보했으니 불만은 없었지만.
이후 선수들이 차례로 한 번씩 트로피를 들어 올린 다음, 다미가 나를 향해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이번엔 독사진이네요, 사장님.”
“어, 그래.”
사실 빅 이어를 드는 것은 축구인의 로망이다. 처음을 주장에게 양보하려고 생각했던 거지, 들기 싫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순순히 트로피를 받아 들었고, 위로 치켜들고 흔들었다.
그리고 모처럼이니, 트로피에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런데 트로피에 비친 내 모습이 좀 이상하다.
이마의 숫자가 늘 보던 것과 달랐다. 여덟 자리 몸값이 붙은 투자자가 아닌, 조금 다른 숫자가 붙었다. 유니폼에 씬가드, 축구화까지 신었기 때문일까?
꼭 선수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0이 아니었다. 액수는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대충 두 자리 아니면 세 자리 같다.
“왜 그러세요?”
트로피에 입을 맞추려다 멈칫한 내게, 다미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사장님, 저는 신경 안 써요. 트로피는 카운트하지 않으니까요.”
다미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트로피를 응시했다.
거울처럼 빛나지만 그렇다고 거울은 아닌 빅 이어에 비친 내 모습은 아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마의 숫자는 평소와 같은, 투자자로서의 몸값으로 돌아와 있었다.
“착각이었나.”
* * *
트로피 세레머니까지 끝난 후, 경기장에는 선덜랜드 CS팀의 안내 방송이 울렸다.
[FC 선덜랜드에서 알려드립니다. 귀국하는 비행기 편은 내일 오전 11시에 뉴캐슬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혹시 긴급한 용무로 즉시 귀국을 희망하는 고객님께서는 선덜랜드 CS팀에 별도로 문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하룻밤 더 재워줄 모양이네요. 잘됐어요. 호텔이 너무 근사했죠.”
수잔이 눈을 빛냈고, 마일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서는 브렌든이 뭐라고 이죽거리려 했지만, 곧바로 입을 틀어막히고 말았다.
핫도그 사내가 브렌든을 윽박질렀다.
“옆에 앨리스 양 있다.”
앨리스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는 배려를 선보였다. 그런 앨리스에게 감사의 시선을 보낸 브렌든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술집은 어디가 좋을까?”
브렌든의 질문에, 앨리스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추천하는 가게가 있어요. 어디냐면···.”
[오늘 같이 기쁜 날, 축배가 빠질 수 없죠. 마침 맥주로 이름 높은 독일이니까요.]
[역사적인 결승전에 함께하신 선덜랜드 팬 여러분께 무료 맥주가 제공될 예정입니다. 펍 입구에서 검은 고양이 인형을 확인하세요!]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이번에는 브렌든은 물론, 핫도그 사내와 빌리 노인도 함께 날뛰었다.
“역시 썬이야! 믿고 있었다고!”
상대적으로 우드 부부의 얼굴은 어두웠다. 이유를 짐작한 앨리스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크리스는 신경 쓰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제가···.
마일즈의 표정은 단숨에 밝아졌지만, 수잔은 변함없이 어두웠다.
“아뇨, 괜찮아요. 앨리스 양도 같이 놀고 싶을 텐데 미안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죠.”
앨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CS팀에게 부탁할 건데요.”
“네?”
잠시 후 방송이 이어졌다.
[혹시 미성년자 아동을 동반하신 고객님께서는, 선덜랜드 CS팀에 문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상황을 짐작한 수잔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이렇게 운영해서 뭐가 남긴 하는 걸까요?”
“저도 두 번이나 물어봤는데, 팬이 남는다던데요.”
어깨를 으쓱하며, 앨리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침 CS팀 분들은 조금 괴짜이기도 하고.’
팬에 대한 애정이라면, 주장 잭과 비교해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 사람들이 널려 있는 부서가 바로 선덜랜드 CS팀이다.
“그래도 크리스는 낯가림이 워낙 심한데···.”
수잔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크리스가 활기차게 웃었다.
“꺄륵!”
“어머, 크리스 우드 고객님. 벌써부터 저를 알아보는 건가요? 기쁘네요.”
각종 신생아용 굿즈로 무장한 선덜랜드 CS팀의 에이스, 에이미가 모습을 드러내자 크리스는 눈에 띄게 기뻐하기 시작했고, 수잔은 군소리 없이 크리스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날, 선덜랜드 팬들의 축제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 * *
공항에 도착한 순간, 나는 무심코 숨을 멈췄다.
그만큼 눈앞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뮌헨에서 함께 돌아오는 팬들을 태우기 위한 버스가, 공항 주차장을 가득 메운 것이다.
덕분에 CS팀은 전쟁 중이었다.
“브렌든 고객님? 아, 탑승하셨구나··· 149호 차 준비 완료입니다!”
“15, 16, 17, 18호 차 출발합니다!”
희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오전 열한 시에 뉴캐슬 국제공항에 도착하라고 지시한 거였군. 팬분들이 이동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렇지.”
원래 개선 행진은 태양이 가장 높을 때 하는 게 전통이라고 들었다. 따라서 우리 선수단은 정확히 정오에 뉴캐슬어폰타인을 통과할 것이다. 선덜랜드 팬들을 태운 버스 수백 대를 앞세우고.
이게 더비 라이벌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잭과 요니는 벌써 CS팀 사이에 섞여 팬들을 환송하고 있었다.
“금방 따라가겠슴다!”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잭의 옆에서, 요니는 묵묵히 손을 들어 경례했다. 미필인데도 의외로 꽤 절도 있다··· 정작 표정은 흐물흐물 풀렸지만.
아무래도 혈관에 탄산이 흐르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쟤들 저러다 도핑검사 다시 받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농담처럼 말하자, 희주가 이죽거렸다.
“마약 단속이 아니고? 참고로 오빠 표정도 똑같음.”
“나는 괜찮아. 선수가 아니거든. 그리고 스포츠는 국가가 인정한 합법 마약이야.”
그리고 선덜랜드 구단주에게는 인생 최고의 행복이고.
물론 라이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대체로 선덜랜드의 행복은 ‘그 팀’의 불행과 같은 의미의 단어고, 그 역도 성립한다.
“조엘, 혹시 홍염 방지 대책은 세웠습니까?”
“만전입니다. 경찰은 물론, 소방 당국과도 협의를 마쳤습니다. 비상시에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퍼레이드 경로 근처에 999가 대기할 예정입니다.”
“고생했겠네요. 당국에서는 싫어했을 텐데요.”
그러자 조엘이 키득거렸다.
“이야기는 잘 풀렸습니다. 다행히 구단주님, 아니 구단주 각하께서 훈장까지 받으셨으니까요.”
“조엘.”
“농담입니다. 챔스 우승인데, 이 정도는 애교 아니냐고 했더니 아무 말 않더군요.”
하지만 조엘의 준비는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외로 뉴캐슬의 반응은 선선했기 때문이다. 길에 토마토와 계란이 조금 날아드는 정도였는데, 더비 라이벌 사이에서 이 정도는 사실상 벨벳 깔아준 거나 마찬가지다.
“유로파 우승 때는 꽤 격하게 반응했던 것 같은데··· 혹시 빅 이어는 격이 달라서 그런가? 챔스 우승 정도면 타인위어 전체의 자랑으로 취급한다거나···.”
희주의 혼잣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지.”
내기해도 좋다. 이번 결승전에서, 뉴캐슬 팬들은 전부 파리를 응원했을 것이다.
아니라고? 선덜랜드 응원했다고? 그렇다면 혹시 뉴캐슬에 대한 팬심이 부족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이 신비로운 현상의 원인은 의외로 금방 밝혀졌다. 시계가 정오를 가리킬 때,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르고, 우리가 뉴캐슬어폰타인 도심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순간.
나는, 다수의 뉴캐슬 유니폼을 발견했다. 처음엔 뉴캐슬 서포터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몇몇 얼굴이 낯익었다. 뉴캐슬의 1군 선수단이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이상하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도열한 모습은 마치···.
내가 ‘어떤 단어’를 떠올리는 사이, 옆에선 브라이언이 혀를 찼다.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뉴캐슬 선수단은 놀랍게도, 우리 차량의 통과에 맞춰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정말로 가드 오브 아너다.
“아니, 얘들이 뭘 잘못 먹었나?”
아무리 더비 라이벌이라도, 리그 우승 팀 상대로는 가드 오브 아너를 해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챔스를 우승했고, 이곳은 경기장도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드 오브 아너를 해줄 의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설마 존중일 리는 없을 텐데.
“뉴캐슬 구단주에게 연락 넣어.”
“응. 고맙다고 할까?”
“아니. 혹시 나중에 뉴캐슬이 챔스 우승해도 나는 절대로 우리 선수들에게 이런 짓 안 시킬 테니까, 기브 앤 테이크 같은 소리는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해.”
나 같으면 솔직히 더비 라이벌 상대로 가드 오브 아너 해주느니, 죽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뉴캐슬 선수들의 표정도 심상치는 않았다. 누군가의 얼굴에는 선망이, 누군가는 질투와 분노를, 그리고 누군가는 정말···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옆에서 잭과 요니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됨다. 저라면 이러고 살아서 뭐 하나 고민했을 검다.”
“저라면 어떻게 죽는 게 제일 깔끔할지 고민했을 거고요.”
잭과 요니의 말처럼, 뉴캐슬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우리를 축하할 리는 없다··· 그럼, 도대체 왜?
“옛날 생각이 나네요.”
옆에서 크리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옛날이요?”
“3부 리그에 있을 때, 저희가 정신 못 차릴 때요. 그때 로저스 감독님하고 구단주님이 영상 틀어주셨잖아요? 오열하는 팬들하고, 정신 못 차리는 저희 모습을요.”
“···그랬었죠.”
“그 영상 봤을 때 저희들 표정과 비슷합니다.”
크리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곧바로 희주를 불러 세웠다.
“뉴캐슬 구단주한테 연락은 나중에 보내고··· 혹시 그 팀에 인사 변동은 없어?”
그러자 잠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 희주가 곧바로 대답했다.
“감독이 바뀌었네.”
어렴풋이 예상은 했다. 시즌은 이미 끝났고, 항상 새 시즌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감독을 바꾸기 좋은 시기다.
만일 뉴캐슬의 새 감독이 동기부여를 중시하는 타입이라고 하면, 느닷없이 뉴캐슬 선수들이 우리의 카퍼레이드에 가드 오브 아너를 해준 이유도 설명이 된다.
죽고 싶을 만큼 분한 감정은, 그만큼 강렬한 동기가 되니까.
그리고 이 타이밍에 감독을 바꾼다는 의미는···.
[사우디 국부펀드, 마침내 뉴캐슬 인수]
희주가 내민 신문 기사를 보며,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