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02화 (302/422)

302화 함성의 잔향 (2)

예상보다 훨씬 조용했던 뉴캐슬어폰타인과, 언제나처럼 뜨거운 게이츠헤드를 지난 다음, 카퍼레이드 행렬은 마침내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도착했다.

도시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우리 시설관리팀이 준비한 정식 플래카드는 물론, 팬들의 손글씨 현수막이 도로 곳곳에 내걸렸다.

[북동부의 왕, 프리시즌의 왕··· 이제는 유럽의 왕!]

웃으며 손을 흔들면서도, 한편으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의 카퍼레이드는 우리 팬들과 함께하는 중이었으니.

해외 원정을 기꺼이 따라올 코어 팬이 무려 삼만 명 넘게 우리와 함께하는 상황이니만큼, 우리 도시는 상대적으로 조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와 똑같이 생각했는지, 희주가 옆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현수막을 써줄 정성은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아니었다. 코어 팬이 원정에 동행했는데도, 우리 도시는 변함없이 뜨겁다.

누군가 말했던 적이 있다. 팬들의 함성이, 내일이라도 그칠까 두려웠다고 하는. 아마 칸토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팬서비스를 끊임없이 준비하며 함성이 그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노력의 성과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던 걸까?

도로 주위엔 사람들이 한가득 몰려나왔다. 색종이 꽃가루를 뿌리고 비눗방울을 부는 아이들, 차량을 따라 달리는 소년들.

잭과 요니는 벌써 손을 내밀어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시작했다. 저러다 손이 퉁퉁 부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그들다웠다.

원래는 사건사고에 대비해 출동한 경찰들도, 시티 오브 선덜랜드 구역에서는 은근슬쩍 같이 퍼레이드를 벌이기 시작했다.

응원가 가사에 맞춘 경적, 팬들의 함성, 에어쇼 전투기의 굉음, 하늘에 수놓아진 붉고 흰 연기, 아··· 이 우승의 냄새!

온통 붉은 도시를 두리번거리던 희주도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당분간은 장어 젤리만 먹어도 빅 이어의 맛이 날 것 같아.”

“아니. 그건 아니야.”

왜 빅 이어에 장어 젤리 묻는 소리를 하고 그래.

그래도 마냥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구단주가 된 이래 가장 기쁜 날이니까.

“아 맞다. 감독님한테 사진 보내드려야겠다!”

호들갑을 떠는 희주를, 나는 흘끗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 팀 감독은 브라이언이지만, 그 경우 희주는 ‘브라이언 씨’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희주가 감독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무슨 사진?”

내 질문에, 희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빠가 유니폼 입고 트로피 드는 사진. 분명히 좋아하실 거야.”

* * *

구단주 비서의 예상대로, 유니폼을 입은 채 빅 이어를 드는 이희성의 사진은 로저스의 눈시울을 젖게 만들기 충분했다. 덤으로, 옆에서 지켜보던 샘 또한 눈물을 닦았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오늘 같은 기쁜 날, 울지는 말아야 할 게 아닌가?’

마침 로저스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화제를 돌릴 만한 좋은 소재가 있었다. 샘이 짐짓 인상을 썼다.

“아니, 메일이 그게 뭔가.”

얼마나 방치했는지, 아이콘 옆 배지의 숫자가 한가득이다. 원래 로저스가 디지털에 약한 편임은 진작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었다.

그래서 샘은 가벼운 의심에 빠졌다.

‘이 영감쟁이, 혹시 배지 알림 숫자가 붉은색과 흰색의 조합이라서 지우지 않고 놔둔 거 아닌가?’

영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선덜랜드 구단 관계자라면 누구나 붉고 흰 조합에 가슴이 뜨거워지곤 하니까.

정작 로저스는 멋쩍은 듯 시선을 피했지만.

“스팸이 많이 와서 잘 안 읽네.”

“아, 그래서 내가 그렇게 연락해도 답이 없었군.”

“메일 보냈었나? 아니, 그냥 전화를 하지.”

“자네가 리미트리스 유소년 리그 한다고 나가 있을 때 이야기야. 좋은 낚시터를 찾았거든.”

“로밍인가 뭔가 된다고 하던데···.”

툴툴거리며, 로저스는 조용히 손을 움직여 메일을 열었다.

“거 봐. 다 스팸이잖나.”

로저스의 메일함은 성인 광고부터 대출까지 아주 다양한 스팸으로 채워졌는데, 심지어 그 사이에는 피싱 메일도 섞여 있었다. 먼 친척 할머니가 유산을 상속시켜주려고 한다는 제목의.

덕분에 두 노인이 함께 유쾌하게 웃었다.

그 이외에는, ‘팀을 맡기고 싶다’는 메일이 한가득 와 있었다. 시기적으로는 그가 은퇴를 선언한, 선덜랜드 감독 자리를 브라이언에게 넘겨줬던 시즌 초의 메일이 가장 많았지만, 올 시즌 말에도 종종 연락이 와 있었다.

“그래도 자네가 감독 노릇을 썩 잘하긴 했나 봐. 감독으로 모시고 싶다는 연락이 아직도 올 정도면.”

“은퇴한 사람 붙잡고 이러면 실례지. 그나저나 이건 사칭인가?”

“뭔데?”

“어··· ‘그 팀’이, 아니 뉴캐슬이 나를 감독으로 원한다는데?”

로저스의 의문에, 옆자리의 샘 노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칭이겠지. 선덜랜드 감독이 뉴캐슬로 옮기겠어?”

“근데 메일 보낸 사람이 브루스야.”

브루스는 올 시즌까지 뉴캐슬을 지휘한 감독으로, 수년 전에는 선덜랜드 감독을 맡은 적이 있었다. 이른바 중하위권 팀들의 ‘공공재 감독’으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브루스가 연락한 거라면 선덜랜드 감독이 뉴캐슬로 옮기겠냐는 소린 못 하겠군··· 가만, 그럼 더 이상한데? 세상에 어느 감독이 자기 후임이 될 사람한테 직접 메일을 보내?”

“뭐 어차피 한 달 지났으니, 의미 없는 이야기지.”

한 달 넘게 읽지도 않고 방치했던 메일을 정리하며, 로저스가 웃었다.

“오늘은 그냥 즐기자고.”

머리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를 올려다보며 로저스가 먼저 미소를 지었고, 샘 노인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샘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지금 뉴캐슬 감독은 대체 누구지?’

* * *

한국인 축구 소년 최새벽은 그때, 선수 차량에 탑승한 채였다. 원래는 오시예크에 임대 중인 신분이었지만, 두 구단의 배려로 이번 퍼레이드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소속팀이 챔스에서 우승했으니, 당연히 함께 즐겨야지. 어차피 리그 마지막 경기도 끝나서 시즌오프니까, 조금 먼저 출국해도 좋아.]

오시예크 단장의 배려에, 최새벽을 지원하러 파견 나온 선덜랜드 원정지원팀 스태프가 곧바로 항공편을 확보했다.

오시예크의 배려에, 선덜랜드는 최새벽을 잠시 곧바로 공항에 대기시켰다가, 퍼레이드에 합류하게 하는 방식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선덜랜드 선수들은···.

“뭐 해, 빨리 안 들고?”

“괜찮아. 우린 이미 경기장에서 다 만져봤거든.”

주장 잭과 부주장 요니를 필두로 한 선덜랜드 선수단은, 자꾸만 최새벽에게 챔스 트로피를 들어 보라고 강권했다. 아무래도 이 한국인 축구 소년이 빅 이어에 보내는 선망의 시선을 눈치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새벽은 표정을 고쳤다.

“저는 선덜랜드의 우승에는 기여한 바가 없고, 지금 오시예크 선수라서요. 원래는 카퍼레이드에 합류하는 것도 민망한 짓인데···.”

“괜찮아. 경기장에서 드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비공식이니까. 게다가··· 빅 이어를 볼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잖아.”

확실히 잭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최새벽은 조심스럽게 빅 이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뛰는 모든 축구인이 동경하는 대상, 꿈의 결정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트로피의 감촉을 기억하겠다는 것처럼.

하지만 최새벽은 끝내 트로피를 들지는 않았다.

에디가 최새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양할 필요 없다니까? 평소에 미리미리 연습해야 나중에 트로피 들 때 폼이 나지.”

“맞아. 안 그러면 나중에 에디처럼 된다?”

“요나스, 내가 뭘 어쨌다는 거지?”

“나중에 네 트로피 세레머니 영상 직접 봐.”

옥신각신하는 에디와 요니를 향해, 최새벽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아요. 지금 빅 이어를 들어 버리면 나태해질 것 같아서요.”

“나태해진다고?”

잭의 질문에, 최새벽은 트로피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오시예크에서 주전을 따내고, 워크퍼밋 기준을 채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이곳에 돌아왔을 때, 그때는 팀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빅 이어를 들겠습니다.”

에디가 휘파람을 불었고, 이고르가 엄지를 세우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오시예크야. 센터백을 강하게 키우는 곳이지.”

“그냥 한국인 멘탈이 강한 게 아닐까? 구단주님도 유소년 때 장난 아니었다잖아.”

동료들의 수군거림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최새벽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려 애썼다. 그리고 고개를 똑바로 들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 풋볼 스퀘어를 응시했다.

선덜랜드 축구단의 상징과도 같은 두 건축물은 이미 팬들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팬으로 가득한 풋볼 스퀘어에서, 선덜랜드 스퀘어관리팀 직원 니콜라스와 도로시는 언제나처럼 업무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니콜라스만 업무에 몰두했던 모양이다. 저 멀리서 다가오기 시작한 팀 버스를 발견한 도로시가 곧바로 잡담을 늘어놓기 시작했으니.

“그러고 보니 니콜라스 씨.”

“네, 도로시 씨.”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니콜라스와 달리, 도로시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넘쳤다.

“우리가 우승하면 고백한다고 했었잖아요?”

“···그랬죠.”

니콜라스의 대답에 섞인 가벼운 경계심을, 도로시는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웃었다.

“솔직히 그때는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어요. 플래그도 아니고. 영화 같은 거 보면 꼭 그러고 전쟁터 나가면 죽잖아요?”

“전쟁 나가는 건 아니었잖아요.”

니콜라스의 항변에, 도로시가 키득거렸다.

“축구는 전쟁인데요. 뭐, 다행히 우리 팀이 이겼지만··· 아무튼,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도 괜찮아요? 빨리 고백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때가 되면 할 겁니다.”

“그 타이밍이 지금이라니까요? 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렇게 운을 뗀 도로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왜, 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막 4강 가고, 생각보다 성적이 좋아서 난리 났었잖아요?”

“그랬었죠.”

“그 직후 출산율이 늘었대요. 사람들이 축구의 열기, 축제에 취한 결과죠! 자, 마음에 둔 사람을 꼬시려면 바로 지금이라니까요?”

도로시의 분석은 변함없이 논리적이었고, 설득력도 있었다. 약간 추리 뇌 성향인 게 아쉽지만, 아무튼 도로시의 말대로 우승 직후가 고백하기 좋은 타이밍이긴 하다.

다만 니콜라스에게도 고백을 꺼리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두 가지나. 그 중 첫 번째 이유를, 니콜라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조금 나중에 할 겁니다. 이제 곧 카퍼레이드 차량이 풋볼 스퀘어에 들어올 타이밍이거든요.”

스퀘어관리팀 스태프로서는 가장 바쁜 타이밍이고, 한가하게 연애질이나 하고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몰려드는 팬들과 구단 관계자들 앞에서 공개 고백은 아무래도 여러모로 부담스럽다.

‘그랬다가 차이기라도 하면 직장 그만둬야지.’

그런데도 도로시는 막무가내였다.

“무슨 소리예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차량 도착에 맞추죠.”

“네?”

“차에 타고 있는 거 아닌가요? 니콜라스 씨 주위에 여자라고는 우리 팬 아니면 구단 관계자밖에 없잖아요?”

“···이럴 때 보면 도로시 씨는 예리한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어머, 저는 충분히 예리하죠.”

도로시가 웃었다. 그리고는, 판을 깔아주겠다며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스퀘어관리팀 동료 여러분!? 우리 리더 니콜라스 씨가 마음에 둔 상대에게 고백한다고 하는데요. 모두 협조 좀 부탁드릴게요.”

“도로시 씨!?”

니콜라스의 절규는 통하지 않았다.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리며, 스퀘어관리팀 멤버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중에는 이미 니콜라스의 마음을 눈치챈 동료들이 딱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흥미 위주로 움직였다.

폭죽을 쏘아 올리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시작한 동료들 한가운데서, 니콜라스는 잠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언젠가 봤던 풍경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선덜랜드 다큐멘터리와 챌린지 영상에 전설처럼 남아 있는, 마일즈의 프러포즈 장면을.

“도로시 씨. 저는···.”

* * *

버스가 풋볼 스퀘어에 도착했을 때, 브렌든이 창밖을 가리켰다.

“어! 마일즈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창밖에 향했다. 그곳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청년과,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힌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마일즈와 수잔의 얼굴이 동시에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일행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네요. 저도 다큐멘터리에서 봤어요. 선덜랜드 팬이면 다 아는 명장면이죠.”

“나는 그날 경기장에 있었거든. 마일즈 이 친구는 그날 웸블리 대형 스크린에 생중계되는 줄도 모르고···.”

“흠, 흠!”

마일즈는 헛기침으로 침묵을 요구했고, 수잔은 빨갛게 변한 얼굴로 이야기를 돌리려 시도했다.

“저분들은 선덜랜드 직원 유니폼 입었네요? 혹시 앨리스 양과 아는 분들 아닌가요?”

수잔의 시도에, 다행히 앨리스의 시선이 밖으로 쏠렸다.

“니콜라스 씨와 도로시 씨군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잘된 것 같아요. 오늘은 여러 의미로 선덜랜드의 축제인데요? 특종감을 건졌어요.“

현재 프레스팀 소속인 앨리스는 특종이라는 단어에 눈을 빛냈다.

“앨리스 양, 선덜랜드는 가십 같은 거 취급 안 하지 않나요? 언론에 저런 내용을 싣진 않을 것 같은데···.”

“네. 하지만 프레스팀에서는 사보도 만드니까요.”

앨리스가 자랑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가 이번에 쓴 챔스 결승 참관 기사, [발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꽤 큰 반향을 불렀기 때문이다.

댓글이 무수하게 달렸을 정도로.

- 챔스 출전 첫해에 곧바로 우승 실화냐?

- 이게 진정한 도장깨기 아님? 뮌헨, 유베, 레알, 파리 잡고 우승했잖음.

ㄴ 일단 대진운 이야기는 영원히 안 나올 라인업이네.

ㄴ 그러네. 심지어 EPL팀은 하나도 안 만났음. 진정한 애국클럽.

ㄴ 제발 영국인이면 선덜랜드 응원합시다.

SNS를 바라보던 앨리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날은 여러 의미에서 선덜랜드의 축제였던 것이다.

I’m Sunderland ’til I die.

풋볼 스퀘어에, 팬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남을 잔향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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