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타인위어의 전설 (1)
<축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다 - 요한 크루이프>
선덜랜드 클럽하우스, 시설관리팀장실.
보고를 마친 직원은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며 상사의 얼굴을 살폈다.
중년을 지나 장년을 향해가는 시설관리팀장, 조엘의 얼굴에는 불만이 덕지덕지 매달린 상태였다. 그리고 직원은 불만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부득이하게 보고에서 뉴캐슬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선덜랜드 스태프 중 뉴캐슬에 호의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개인차를 따지자면 조엘이 가장 심한 편이었다. 오죽하면 [신성한 선덜랜드 시설 안에서 ‘그 저주받을 단어’를 입에 담지 말라]는 말을 팀의 방침으로 삼았을 정도로.
덕분에 선덜랜드 시설관리팀은 공식적으로 뉴캐슬을 ‘그 팀’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비공식적인 호칭은···.
“그 지옥불에 튀길 마귀 놈들 우두머리가 찾아왔다고?”
조엘의 냉소에 시설관리팀 직원이 재빨리 대답했다.
“자기들 딴에는 나름 눈에 안 띄게 한답시고 선글라스 같은 걸 쓰고 찾아오긴 했는데··· 입구에서 들켰답니다.”
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에이미 부팀장 눈을 속이긴 힘들겠군.”
“에이미 부팀장님 정도면, 그 팀 관계자 얼굴 정도는 간단히 알아보겠죠.”
“구분하기 쉬울 거야. 그 마귀 놈들은 엉덩이에 꼬리가 달렸을 테니까··· 그래서, 스타디움 투어를 신청했다고?”
“네. 에이미 씨 혼자서는 판단이 어렵다고 보고가 들어와서요.”
조엘의 입가에 잠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에이미 부팀장이 판단 못 할 문제였으면, 내가 아니라 린다 팀장에게 들고 갔겠지. 아니면 구단주님이나.’
사실, 접객에 대한 업무는 전적으로 CS팀의 담당으로, 린다와 에이미는 이미 구단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상태다. 굳이 조엘의 판단을 구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 이번 연락은 어디까지나 정보 공유다.
반쯤은 양해와 협조를 구하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조엘은 원래 뉴캐슬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발작하는 인물이지만, 일단 상대의 ‘스타디움 투어 신청’을 받아주고 나면, 고객으로 대해야 한다.
조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전하게.”
“네?”
“예전에 우리가 그놈들 경기장에 투어 다녀온 적이 있었지. 그러니 우리 경기장에도 들여보내야 옳겠지. 구단주님도 아마 똑같이 말씀하실 걸세.”
게다가, 스타디움 투어를 운영하는 이상, 투어에서 공개하는 구역은 어차피 정찰을 피할 수 없다.
“이번엔 저쪽 수뇌부가 왔지만, 돌려보내면 다음엔 일반 관광객으로 위장한 사람을 보낼 거야. 그러니 자존심이라도 세워야지. 선덜랜드가 그 마귀 놈들 무서워서 투어 신청을 거부했다는 소리를 듣느니, 혀 깨물고 죽을 거야.”
“알겠습니다.”
팀원이 즉시 팀장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한 조엘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스타디움 투어를 왔단 말이지.”
5년 전에는 서로의 입장이 반대였다. 그때는 선덜랜드가 뉴캐슬을 정찰하는 처지였다. 그때는 3부 리그에서 뛰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시의 선덜랜드는 1부 리그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설비를 갖추는 게 목표였고, 뉴캐슬은 당당한 프리미어리그 팀이었다. 성적은 중하위권을 맴돌았지만, 시설과 설비는 어디 내놔도 부족함 없는 호화로움을 자랑했었다.
조엘은 피눈물을 쏟는 심정으로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견학했고, 그들의 설비와 비품을 확인해 벤치마킹하기 급급했다··· 리지가 뉴캐슬의 잔디를 베끼는 사이에.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모든 게 바뀌었다.
선덜랜드는 지난 시즌의 유럽 챔피언이고, 세계 각지의 축구팬이 메가스토어를 찾는다. 선덜랜드의 잔디를 벤치마킹하려는 팀도 늘어났다.
지금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캄 노우, 알리안츠 아레나, 산 시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카테고리 4 경기장이 되었다.
“똑똑히 보고 가라고 해. 유럽 챔피언의 경기장을.”
* * *
‘그 팀’의 행보는 무척 신속했다.
신임 회장이 우리 경기장에 스타디움 투어를 찾아오더니, 그다음 날에는 드디어 새 감독 선임을 발표했다.
“발표는 꽤 늦네. 결정 자체는 진작에 끝났을 거면서.”
기사가 나온 신문지를 검지로 튕기며 브라이언이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이제 같은 감독으로 맞대결할 사이다 보니,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축구인으로서의 모든 커리어를 선덜랜드에서만 보낸 브라이언에게, 뉴캐슬의 레전드 출신 감독은 그 이력만으로도 숙적이 되기 충분하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어떻게 구했는지, 시어러의 코치 라이센스 수료 논문을 구해 읽는 중이었다.
“시어러란 말이지.”
시어러는 타인위어 지역에서, 9번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에 속한다. 현역 시절, 시어러는 공교롭게도 우리 팀의 나이얼 어르신과 똑같이 9번을 썼다.
다만, 두 팀의 레전드가 해낸 업적은 조금 다르다.
우리 레전드 나이얼은 은퇴 이후 단장과 구단주를 두루 역임하며 위기에 빠진 팀을 구해낸 업적을 평가받았다면, ‘그 팀’ 레전드 시어러는 선수 시절의 활약으로 레전드가 된 케이스다.
시어러는 프리미어리그 통산 최다득점 기록을 보유한, 영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니까.
다만 시어러는 현역 시절 남다른 전술관을 자랑하는 타입은 아니었고,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 족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감독으로서는 검증 안 된 카드인 셈이다.
시어러의 코치 라이센스 논문을 눈으로 훑은 브라이언이 코웃음 쳤다.
“돈 쓸 줄 몰라서 다행이네. 사우디 펀드 정도 자본력이면 어지간한 명장은 다 데려올 수 있었을 텐데.”
정말 그럴까?
일단 브라이언의 반응을 보면, 시어러는 전술 싸움에 썩 뛰어난 감독은 확실히 아니다. 애초에 브라이언과 전술 싸움을 벌일 수 있는 감독이 아주 소수긴 하지만.
우리 리그 안에서 꼽자면 펩과 클롭, 투헬 정도는 되어야 브라이언의 상대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전술만이 감독 역량의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투자자로서 장담할 수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돈을 굴리는 펀드는, 절대로 근거 없는 픽을 하지 않는다는 걸. 하다못해 종목 하나를 골라도 나름의 근거를 남기는 게 이쪽 업계의 생리이다.
왜 굳이 시어러였을까, 그들의 근거는 뭐였을까?
문득 내 눈에, 어떤 풍경이 떠올랐다. 우리가 빅 이어를 가져오던 날, 길에서 가드 오브 아너를 실시하던 그 팀 선수들의 모습이.
이번에 사우디 자본이 그들 중 몇 명을 갈아치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지금 뉴캐슬 스쿼드에는 현역 시절의 시어러보다 대단한 선수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정도 레전드가 나가서 박수 치라고 지시하면, 입 다물고 따라야겠지.
“그런 노림수였구나.”
“응?”
“예전의 우리하고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하네.”
선수단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고, 선수들의 멘탈을 휘어잡을 수 있는 감독을 우선적으로 선임한다. 몇 년간 쌓인 선수단의 패배주의를 걷어내야 하니까. 그리고 감독에게 부족한 전술 안목은 좋은 보좌를 붙여서 해결하려 들겠지.
내가 로저스 감독을 선임했을 때와 똑같은 발상이다.
그리고, 뉴캐슬이라는 구단이 지금보다 훨씬 화려하던 시절에 활약하던 레전드를 감독으로 데려와,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결속력을 다지려는 의도도 다분할 것이다.
“···생각보다 좋은 보드진을 얻은 모양인데.”
물론 순순히 감탄만 해줄 생각은 없다. 선덜랜드의 행복은 ‘그 팀’의 불행이고, 역도 항상 성립하니까.
더비 라이벌이라는 감정적인 이유도 있고, 구단주로서는 타인위어라는 한정된 지역의 로컬 팬을 서로 나눠먹는다는 실리 문제도 있다.
나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감독님. 혹시 친선 경기 한번 감독해주실 의향 없으십니까?”
[친선 경기? 유소년 애들 이야기인가?]
“아뇨. 레전드 매치입니다.”
그러니까, 레전드는 레전드로 맞불 놓고 시작해야지.
* * *
타인위어, 게이츠헤드.
마일즈의 집에선, 브렌든이 불평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기껏 프리시즌이 시작했는데, 왜 이리 조용해?”
“이봐, 시즌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프리시즌 타령이야.”
마일즈의 말에 동의하듯, 크리스가 기운 좋게 빼액거렸다.
사실 프리시즌의 시작이라기엔 너무 이른 시기이긴 했다. 대부분의 선수단이 아직 휴가에서 돌아오지도 않았을 타이밍이고, 챔스 결승전의 열기가 채 식지도 않았다.
사실은 브렌든도 알고 있었다. 선덜랜드에 대한 팬심은 마일즈가 더 크겠지만, 브렌든은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마일즈보다 훨씬 오래 즐겼기 때문이다.
“평소였다면 나도 챔스 결승 바로 다음 주부터 프리시즌 운운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이번에는 ‘그 팀’의 행보가 빨라서···.”
브렌든은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에 신문 기사를 띄웠다.
[뉴캐슬 새 회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정찰? ‘배울 점이 많은 장소’라 밝혀]
- 근데 딱 걸렸네.
ㄴ 비서하고 같이 왔다는데, 하필 비서한테 아바야를 입혔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ㄴ 나름 얼굴 가리려고 시도한 거 아님?
ㄴ 얼굴 가리면 뭐 함. 더 눈에 띌 텐데.
댓글 반응을 손으로 가리키며 브렌든이 짜증을 냈다.
“이런 멍청이들. 그 팀 비서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아나. 한심하던 그 팀 보드진 사이에서 유일하게 사람 구실 하던 게 사만다야. 아무리 그 팀이 꼴 보기 싫어도 그렇지··· 아니, 자네는 왜 웃나?”
“아니. 아무것도.”
마일즈가 슬쩍 얼버무렸다. 몇 년 전까지 분명히 뉴캐슬 팬이던 브렌든이, 뉴캐슬을 ‘그 팀’이라고 부르는 모습은 마일즈로서는 아직도 조금 신선한 충격이다.
마일즈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브렌든이 피식 웃었다.
“뭐,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위어 강도 건넜어. 나는 이제 맥켐즈야.”
“하긴, 뉴캐슬 유니폼의 검은 부분에 붉은 칠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놓고 이제 와서 조르디라고 해 봤자 괜히 뭇매 맞겠지.”
“맞아. 나는 그렇지··· 그래도 이런 식이면 흔들리는 사람도 꽤 많겠는걸? 요즘이야 타인위어가 온통 선덜랜드 거라지만, 아무래도 근 20년 정도는 줄곧 그 팀이 우위였잖나?”
“타인위어의 중립팬들 중 도로 넘어가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소리군.”
“맞아. 마침 그 팀의 새 감독도 꽤··· 향수를 자극하는 인물이고.”
[뉴캐슬의 새로운 감독, ‘레전드’ 시어러 선임!]
“이런 거 보면, 그 팀 보드진도 실력이 꽤 늘었어. 시어러라니, 뉴캐슬이 한창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레전드 아닌가?”
탄식하는 브렌든의 표정에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만일 시어러가 뉴캐슬 감독으로 몇 년만 일찍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식의.
“이봐, 브렌든.”
“알아, 알아. 마일즈 자네야 죽을 때까지 선덜랜드지.”
“그게 아니라···.”
마일즈가 수잔의 메시지 링크를 스마트폰에 띄워 내밀었다.
[선덜랜드, 레전드 매치 개최]
“상대는 미정이지만, 챔스 무패우승팀의 격에 맞는 팀을 섭외하겠다더군. 예상으로는 아마 레알이 유력하다던데.”
기사를 찬찬히 읽는 마일즈를 바라보며, 브렌든이 눈을 깜빡거렸다.
“레전드 매치라고? 그럼··· 누가 나오는 거지?”
그러자 마일즈가 브렌든에게 기사를 내밀었다.
[한편, 구단에서는 누가 선덜랜드 레전드이고 누가 아닌지는 오직 팬들이 정할 문제라며, 팬 투표로 선발된 인원을 섭외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하긴, 선덜랜드 일 처리가 그 팀보다 느릴 리는 없지. 빨리 투표해야겠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단 걱정에 정신이 없던 브렌든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듯 신나게 선덜랜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투표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민한 손놀림으로 페르난데스와 나이얼, 쇠렌센을 차례로 찍은 브렌든이 마일즈를 흘끗거렸다.
“마일즈 자네는 누구 찍나?”
“글쎄.”
마일즈는 사실, 누가 선덜랜드 레전드인지를 고르기 어렵다고 느꼈다.
십수 년간 팀을 응원했기에 팀의 역사에 대해 잘 알았다. 레전드로 불리는 대선수들의 이름 또한 모두 외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플레이를 직접 본 적은 없다. 그가 선덜랜드 팬이 되었을 때, 선덜랜드는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레전드들은 진작에 팀을 떠나 은퇴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일즈는, 처음으로 선덜랜드를 응원하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한국에서 왔다는 유소년 선수의 모습을. 그 발을 멈추지 않던 노력을.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달리던 소년을 응원하다 보니 선덜랜드 팬이 되었다.
결국 그 소년의 무릎이 망가졌다는 것도, 프로가 되지 못한 채 쓸쓸히 영국을 떠났다는 것도 조금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마일즈는 한번 정한 것을 쉽게 바꾸는 타입의 사내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났고, 과거의 축구 소년은 이제 구단주가 되었다. 그리고 예전의 자신과 똑같이, 발을 멈추지 않는 팀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팀에서 뛴 적이 있으며, 현재는 현역 프로가 아닌 선수를 적어 주세요!]
투표 조건을 확인한 마일즈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번졌다.
“일단 썬에게 투표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