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타인위어의 전설 (2)
선수들이 없는 그라운드에서 평소보다 느긋하게 연습을 마치고, 나는 언제나처럼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보통 내 앞자리는 비어 있는 편이었다. 다시 말해, 아침밥은 보통 혼자 먹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나름대로 우리 스태프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구단주다. 아무래도 고용주와 사이좋게 마주 앉아 식사할 만큼 넉살 좋은 스태프는 세상에 무척 드문 존재다.
기껏해야 브라이언이나 희주 정도인데, 보통 아침은 같이 안 먹는다. 둘 다 늦잠이 심한 편이라 기다리다간 내가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사실 내 식욕에도 좋은 일이다. 아침부터 여동생 얼굴 마주 보고 먹거나, 장어 젤리 놓고 식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혼자 밥 먹는 게 훨씬 낫거든.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조금 특수하다. 내 앞자리를, 리지가 서슴없이 점거한 것이다.
그녀의 접시에는 초록색 시리얼이 수북했다.
“그거 혹시··· 말로만 듣던 파맛 시리얼입니까?”
슬쩍 물어보자 리지가 환하게 웃었다.
“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음식인데요.”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리지도 괴식가인 모양이다··· 식성 별로인 인간은 브라이언 하나로 족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리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뼈 있는 말을 꺼냈다.
“썬, 사실 이 시리얼에는 아주 슬픈 전설이 있어요. 신제품 투표에서 정당하게 승리했지만, 주최 측의 농간으로 한참 동안 출시되지 않았던 비운의 제품이거든요. 다행히 올바른 길을 가게 된 것 같지만···.”
슬슬 리지가 왜 파맛 시리얼을 가득 담아왔는지, 그리고 왜 굳이 내 앞에 앉았는지 눈치챈 나는 슬쩍 이야기를 돌리려 시도했다.
“파맛은 아무래도 올바르지 않은 것 같은데···.”
리지는 단호했다.
“선덜랜드 또한 올바른 길을 가는 구단이라고 믿어요. 팬 서비스가 우리의 경영 신조 맞죠?”
마침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농간이 아니라, 나는 애초에 선수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사전에 공지한 후보 요건에는 들어맞는걸요.”
잠시 후 리지가 폰에 미리 캡쳐해둔 투표 페이지를 내밀었다.
[팀에서 뛴 적이 있으며, 현재는 현역 프로가 아닌 선수를 적어 주세요!]
저놈의 후보 요건! 돌이켜 보면, 애초에 조건을 저렇게 잡은 게 문제긴 하다.
“썬, 지금 현역 프로 아니죠?”
“···네.”
애초에 한 번도 프로였던 적이 없으니 말이지.
“그리고 우리 팀에서 뛴 적 있죠?”
“어··· 네.”
리지가 뭘 의도하는지 알면서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건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팀의 유소년으로 뛰었다는 것은, 내 자랑이자 긍지니까.
이번 투표에서 [희성 ‘썬’ 리]는 이십칠만 표를 받으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우리 멤버십 회원, 혹은 메가스토어 골드 등급 이상에게만 투표권을 줬으니··· 이십칠만 표는 사실상 거의 몰표에 가까운 득표다.
사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 팬들이 나를 사랑해 준다는 뜻이기에.
부두술사 보고 있나? 나보다 피규어 몇 개 더 팔았다고 으스대지 말라고. 네 피규어는 솔직히 제사용품 같은 거니까.
그저, 나는 조금 낯부끄러울 뿐이었다. 프로 무대에서 단 1초도 뛰지 못했던 내가, 팀의 레전드 매치에 출전한다는 것이.
그런 내 속내를 귀신같이 눈치챈 리지는 곧바로 다른 화면을 내보인다.
[우리 팬들은 나를 이 팀의 레전드로 칭한다.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 이유는 사실 내가 대선수라서가 아니라, 은퇴한 다음 구단주로서 팀에 헌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샐리 아버님··· 그러니까 나이얼 어르신의 코멘트다.
[그렇다면 썬 또한 마땅히 팀의 레전드로 취급받아야 옳다. 그것도, 팀의 모든 전설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참고로, 다른 레전드 분들도 전부 썬을 지지한다는데요. 혹시 해외 팬 반응도 전해 드리기 원하는 거라면···.”
“···아뇨. 안 봐도 알 것 같으니 넘어갑시다.”
특히 한국 반응은 필요 없다. 눈치 빠른 다미는 틀림없이 이 사태를 파악했을 테니까. 마침 다미는 구단주실에 끄나풀도 하나 심어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뛰어주실 건가요?”
“···팬 서비스가 우리 경영 신조니까요. 뛰어야죠.”
이제 와서 ‘사실은 후보 요건이 잘못된 것’이라는 핑계를 댈 수는 없다. 이번엔 일단 뛰고, 다음부턴 좀 더 신중하게 룰을 짜야지.
“정말요!? 그럼 매치데이 잔디에는, 특별히 더 쿠션에 신경 쓸게요!”
리지의 얼굴에 무척이나 환한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그녀는, ‘아침을 먹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무래도 파맛 시리얼은 내가 팬 투표를 뒤집지 못하게 하려는 시위용으로, 사실 리지의 식성은 평범한 모양이다.
그래서 낮게 덧붙였다. 나를 기어이 출전시키는 작은 복수를 겸해서.
“리지,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리지가 울상이 되어 파맛 시리얼을 알뜰하게 비우는 사이, 나는 사소한 고민에 빠졌다.
원래는 이번 레전드 매치 상대로 레알을 섭외할 생각이었다. 레알은 예전에도 친선경기를 왔을 정도로 우리와 사이가 나쁘지 않고, 일단 세계에서 가장 전통 있는 구단이라는 특성상 레전드 매치를 벌이기 가장 좋은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아무래도 내가 직접 뛰게 될 것 같으니, 상대를 조금 만만한 팀으로 골라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이 자꾸만 든단 말이지.
* * *
[무패우승 대 최다우승, 선덜랜드와 레알의 레전드 매치를 기대해주세요!]
도시에 가득한 포스터에, 뉴캐슬의 새 회장 나지프가 한숨을 쉬었다.
“아픈 데를 찔렸습니다. 이건··· 우리는 따라 할 수 없는 이벤트입니다.”
차라리 현재의 레알 선수단이라면 어찌어찌 불러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5년 전의 선덜랜드가 그랬던 것처럼, 거절하기 힘든 돈을 쌓으면 그만이다.
그에 비해 레알의 레전드를 부르는 건 훨씬 어렵다. 특히, 지금의 뉴캐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만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지만.
“회장님, 그런데 레전드 매치에서 뛸 만한 선수의 네임밸류는 우리가 선덜랜드보다 훨씬 낫지 않나요?”
“동의합니다만, 문제는 명분입니다. 선덜랜드는 챔스 디펜딩 챔피언 아닙니까?”
“하긴, 레알은 빅 이어를 무시하기 힘들겠죠. 챔스 최다우승팀임을 자랑으로 삼는 곳이니까요.”
“게다가 교섭이 별로 어렵지도 않았을 겁니다. 페르난데스 단장이 나서면 금방이었겠죠.”
선덜랜드의 유스팀 단장, 페르난데스는 과거 레알에서 손꼽히는 레전드 골키퍼였다.
“하긴, 그 사람이 있으면 레알과의 레전드 매치도 훨씬 흥행하겠군요. 전후반 각각 레알과 선덜랜드에서 나눠 뛰는 식으로 하면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거 우리도 오언을 써볼까···.”
나지프의 이야기에 사만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네? 누구요?”
그 스트라이커의 이름은 뉴캐슬에서는 일종의 금지어에 해당한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나지프가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둘의 시선이 선수 명단에 쏠렸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일단 이건 절대로 못 따라 합니다.”
선덜랜드 최고의 레전드라는 [9. 나이얼 퀸] 아래에 쓰여진 또 하나의 9번, [9. 희성 ‘썬’ 리]를 가리키며, 나지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 어느 레전드를 데려와도 구단주가 직접 친선 경기에 뛰는 퍼포먼스에는 비교가 안 되죠. 심지어 그 구단주 본인이, 데뷔에 실패했던 구단 유소년 출신이라면.”
나지프는 자신의 노림수가 시작부터 봉쇄당했음을 직감했다. 구단 레전드 시어러를 감독으로 내세워 200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려던 그의 시도에, 선덜랜드는 훨씬 더 강렬한 카드로 응수한 셈이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옛 팬들은, 과거 자신들이 아끼던 유망주가 마침내 잔디 위에 서는 모습을··· 절대로 잊지 못할 테니까.’
나이얼과 시어러의 시대를 거친 이후, 타인위어에서 9번은 다소 특별한 의미의 번호가 되었다.
투자의 신은, 유소년 시절 바로 그 9번을 달았던 선수다. 그리고 무릎이 망가지기 직전까지, 단 하루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비록 비공식 경기라지만 잔디 위에서 뛴다는 것은··· 솔직히 뉴캐슬 회장으로서는 끔찍한 악몽이나 마찬가지다. 선덜랜드 팬들을 결속시키고, 타인위어의 중립팬을 상당히 끌어갈 빅 이벤트니까.
하지만,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는 응원하는 심정도 들었다.
나지프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뉴캐슬 회장으로 돌아왔다.
“다른 방향의 마케팅을 고민해 봅시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당분간은 계속, 선덜랜드의 방식을 따라 할 거니까요.”
* * *
[레전드 매치, 선덜랜드 대 레알]
티켓 칠만 석은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경기 당일에는 온 사방에서 관중이 몰려들었다. 역대급 대흥행에 CS팀은 아주 입이 귀에 걸렸다.
구단주로서도 무척 기쁜 일이다. 이제 곧 이들 앞에서 직접 뛰지만 않았으면, 훨씬 기뻤을 텐데.
개중에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얼굴도 있었다.
“우리 선수단은 휴가 중인 줄 알았는데···?”
살짝 인상을 쓰자, 잭이 능청스럽게 받아친다.
“괜찮슴다. 저희 집, 바로 요 앞임다.”
“···너는 그렇다 치고, 요니는?”
“쟤는 더 가깝슴다. 클럽하우스에서 살잖슴까?”
“저는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아들이니까요.”
사이좋게 등장한 우리 주장단, 잭과 요니는 심지어 보란 듯 유니폼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마킹이 조금 이상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요니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저희는 볼보이로 뛸 거라서요.”
우리 팀 현역 선수 중, 로컬 팬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유스 출신 주장단이 볼보이로 뛴다? 거참, 팬들 좋아할 서비스겠다.
다만 다음 시즌에 대비하려면, 휴가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게 더 나을 텐데.
“···거참 늙은 볼보이들이네.”
슬쩍 투덜거리자, 요니가 퍽 능숙하게 받아쳤다.
“구단주님 빼면 전부 나이 드신 분들이 모이시는 거잖아요? 그러니 볼보이도 나이 좀 먹어도 괜찮겠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몸값 비싼 볼보이들은 경기장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외에도 선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예를 들면 톰슨이라거나, 헨도 같은 놈들··· 헨도?
“아니, 너희는 휴가 안 가? 가정도 있는 것들이.”
그러자 톰슨과 헨도의 얼굴에 차례로 미소가 번졌다.
“이건 못 참지. 솔직히 너, 그동안 구단주랍시고 경기 보면서 우리 플레이에 잘하네 못하네 훈수 뒀지? 이젠 우리 차례다 이 말씀이야.”
의기양양하게 떠드는 톰슨의 옆에서, 헨도가 낮게 키득거렸다.
“벌써 레전드야? 부럽네.”
“···그럼 너님도 은퇴하세요.”
한편, 구단 VIP 주차장 쪽에는 시설관리팀을 긴장시킬 만한 초대형 리무진이 몇 대나 들어왔다. 덕분에 나도 구단주로서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주차장에 향해야 했다.
“소문이 자자한 썬의 축구 실력을 보고 싶어서요.”
영국 왕세손, 그러니까 축협 회장은 물론··· 어이쿠, 유에파 회장도 찾아왔네. 그 옆에는 축구판보다는 다른 곳··· 그러니까 월가에서 자주 마주치던 인물도 보이고.
“콜라 회사 사장님은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다미가 압박한 게 아닌가 조심스레 물어봤더니, 짓궂은 미소가 돌아왔다.
“실은 저희 내부에서 기획이 나왔습니다. 사장님을 광고 모델로 쓰자는 이야기가요. 마침 썬 리 사장님은 유명한 콜라 애호가 아니십니까?”
“그렇긴 하죠.”
제로콜라 한정이지만.
“저희 광고료 정도야 썬 리 사장님께는 푼돈이겠지만, 선덜랜드 구단주로서의 입장은 조금 다르시겠죠. 아, 물론 사장님께 광고 모델로 뛸 만한 축구 실력이 있을 경우 의뢰할 생각입니다만···.”
“죄송하지만 아마 CF 찍을 정도의 실력은 아닐 겁니다.”
어쩌다 레전드 매치 뛰는 것도 낯뜨거운데, 광고를 찍으라고? 그것도 요즘처럼 인터넷에 영상 박제되기 딱 좋은 시대에?
조용히 거절하고 싶다.
그리고 잠시 후, 리미트리스 SM&C 영국 지사가 운영하는 팬텀 EWB가 주차장에 들어왔다. 기본적으로 나 아니면 다미를 송영할 때만 사용하는 차량인데, 나는 여기 있으니 다미가 영국에 날아온 모양이다··· 따로 부르진 않았지만,
뭐, 다미라면 만사 제쳐두고 날아올 거라 생각했으니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실제로 차량이 멈추고 다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미는 영 엉뚱한 자리에서 내렸다.
그러니까, 조수석에서.
그리고 평소였다면 사장님을 외치며 곧바로 달려왔을 다미는, 어째서인지 내게는 살짝 눈인사만 보낸 다음, 정중히 뒷좌석 문을 열었다.
다미가 이 정도로 극진하게 모실 만한 사람은, 나 아니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구나. 네가 뛴다길래, 그만.”
뒷좌석에서 천천히 내리시는 부모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째서인지 시야가 뿌옇게 변해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