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06화 (306/422)

306화 타인위어의 전설 (3)

부모님을 평소 내가 쓰던 구단주용 익스클루시브 박스로 모신 직후, 다미는 곧바로 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사장님께 여쭤보지도 않고··· 그래도 오늘 모습은 꼭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미안하긴, 내가 고맙지. 그나저나 그냥 누구 시키지, 뭐 하러 힘들게 직접 모셔왔어.”

“그야, 저도 경기를 보러 오는 길이니까요.”

다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사실 다미 성격상 우리 부모님 모셔오는 업무를 남에게 맡겼을 리 없긴 하다. 본인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면 아마, 희주가 한국에 불려갔겠지.

“유니폼이 잘 어울리시는데요? 현역 선수라고 해도 믿겠어요.”

위아래로 훑듯이 나를 살펴본 다미는, 조금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아직 무릎 안 좋으시잖아요.”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러니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피치 위에서 뛰는 날··· 아주 작은 미련까지 전부 떠나보내고 와야지. 단 1분이라도 좋으니, 피치 위에서 모든 감정과 미련을 떨어내 버린 다음, 다시 구단주로 돌아갈 것이다.

“올해만 뛰시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뭐.”

그러자 다미의 눈이 반짝거렸다. 오래 알고 지낸 특성상, 이런 눈빛의 최다미에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경우가 많던데.

“그러시면 사장님, 내년 레전드 매치 투표 요건은 신중하게 정하셔야겠네요.”

“그러게. 좋은 아이디어 있어?”

내 기우였는지, 다미의 눈동자는 다시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았다. 잠시 후, 회계는 물론 세계 각국의 법률에도 빠삭한 다미가 순식간에 해법을 만들었다.

“사장님이 바라시는 취지는, 프로였던 선수 한정인 거죠? 그렇다면 내년부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뛰어본 선수로 제한하세요.”

“괜찮겠네. 그럼, 경기 재밌게 봐.”

“네! 응원할게요!”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홈팀 드레싱 룸에 향했다.

* * *

드레싱 룸에는 어쩌다 보니 가장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내빈 맞이라는, 구단주 특유의 업무 때문이다.

먼저 도착한 레전드들에게 양해를 구하자, 곧바로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나이얼 퀸과 케빈 필립스, 선덜랜드를 대표하는 투톱 공격수가 사이좋게 선언했다.

“괜찮아. 내가 이해하니까. 구단주도 안 해본 이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나이얼 어르신이 이해하신다면, 나야 조용히 해야지. 그나저나 매일 정장 모습만 보다가, 유니폼 보니까 신선한데?”

“사실 경기 관람도 유니폼 입고 하는데요.”

“그래도 레전드 유니폼은 조금 다르니까.”

레전드 매치라는 특성상, 오늘은 클래식 유니폼을 착용했다. 이들이 현역으로 뛰던 00년 유니폼 디자인을 재현한 것이다.

신상품기획팀의 제안이었다.

처음에는 챔스 우승을 차지한 올해 유니폼 이야기도 나왔지만, ‘팬들에게 다양한 유니폼을 보여주자’는 이유 때문에 옛 유니폼을 복각하게 되었다.

내 귀에는 꼭, ‘다양한 유니폼을 팔아먹자’로 들리는 이유긴 한데···.

“그나저나 등번호가 의외인걸?”

내 유니폼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나이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 성격이라면, 틀림없이 9번을 받지 못하겠다며 날뛸 줄 알았는데.”

아무튼 9번은 타인위어에서는 전설적인 번호다. 심지어 나이얼은 자신의 유니폼에 [9. 선덜랜드의 전설]로 마킹했을 정도로. 물론 구단 최고 레전드인 나이얼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당연하게도, 나는 [9. Lee]로 마킹했다.

“겸손은 제가 자란 동양 문화에서는 미덕이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죠. 그리고 이런 레전드 매치에서는 여러 선수가 같은 번호를 쓰는 것도 흔한 일이니까요.”

미리 준비한 대답을 차분하게 늘어놓으며, 나는 슬쩍 덧붙였다.

“다만 팬들을 위해서라면 같은 번호 선수가 동시에 올라가는 건 자제하는 게 좋겠죠. 헷갈릴 테니까요.”

레전드 매치에서는 보통 그런 규칙은 적당히 넘어가곤 하지만, 내게는 일단 팬 서비스라는 확고한 명분이 있다. 레알에게 같은 규칙을 요구하진 않더라도, 우리 선덜랜드는 철저히 지킬 생각이다.

선덜랜드 최고의 골잡이, 케빈 필립스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이봐, 나이얼 어르신과 자네가 헷갈릴 리 있겠나? 높이 차이가 얼마인데.”

“그도 그렇고, 머리 색도 다르지. 나야 희끗희끗하니까.”

나이얼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러고 보니, 축구는 머리로 하는 거라는 말이 떠오르는데.”

“하필 나이얼 어르신이 그 말씀을 하니까 묘하네.”

케빈의 농담처럼, 나이얼은 2미터에 가까운 장신의 타겟 스트라이커로, 현역 시절에는 당연히 머리로 축구를 했던 선수다. 수많은 헤더를 꽂아 넣었지.

잠시 우리 드레싱룸에는 레전드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샐리에게 썬, 자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자네가 얼마나 영리한 사람인지를. 만일 축구 전술을 제대로 배웠으면 자기보다 훨씬 나았을 거라더군.”

“그건 과찬입니다.”

샐리의 자기평가는 무척 높다. ‘전술’이라는 면으로 국한한다면, 그녀는 펩이나 투헬, 나겔스만보다도 자기 자신을 윗줄에 놓는 타입이다··· 내가 축구 전술을 제대로 팠어도, 그들보다 나았을 리는 없을 텐데.

“아무튼 날 방패 삼아 벤치에서 꽤 오래 버텨볼 계획인가 본데, 뭐, 나쁜 생각은 아니야. 다만,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보게.”

그사이, 옆에서는 모처럼 복귀한 로저스 감독이 힘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러고 보니, 선수 선발은 감독의 권한이라고 했었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고 이러세요, 여러분.

* * *

관중석에서, 선발 명단을 바라보던 수잔이 한탄했다.

“어머, 썬은 선발로 안 나오는 건가요? 인기투표 결과는 썬이 압도적이던데.”

투표권자에게 표가 세 개 주어지는 특성상, 이희성은 거의 몰표를 받았다. 만일 한 표씩이었으면 그래도 다른 레전드들과 표를 나눠 먹었겠지만, ‘세 표나 있으니 일단 부담 없이 썬부터 찍고’ 나머지를 고민한다는 식이었다.

예외는, 이희성도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브렌든 정도였다.

덕분에 경기장에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구단 레전드로만 가득한 경기장에서, 아직 출전하지 않은 후보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

“썬! 썬! 썬! 썬!”

마일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한 노림수지. 일부러 스타팅 대신 교체로 넣었을 거야. 은퇴하는 선수가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게, 일부러 끝나기 전에 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침 오늘은 공식전이 아니므로, 교체 카드는 아주 넉넉하다. 따라서 선덜랜드는 경기 도중에 이희성을 교체 투입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칠만 명 팬들 사이에서 홀로 박수받으며 입장할 수 있도록.

마일즈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경기 시작 5분 만에, 로저스가 교체를 지시한 것이다.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한 썬을 바라보던 수잔이 환호했다.

“나왔어요! 썬이에요!”

“꺄륵.”

경기장이 뜨거운 함성으로 뒤덮이고, 아들 크리스도 기쁜지 꺄륵거리기 시작한 와중, 오직 마일즈만이 말이 없었다.

“어머, 당신··· 울어요?”

마일즈는 대답하지 못했다.

‘울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까.’

그가 줄곧 응원해온 소년이, 이제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어 마침내 피치 위에 오르는 것이다.

‘아주, 아주 오래 걸렸어. 그렇지, 썬?’

“썬! 썬! 썬! 썬!”

“기다리고 있었어! 블랙캣츠는, 줄곧 너를 기다렸다고!”

We're Black Cats supporters.

Loyal through and through.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그 뜨거운 함성 속에서, 이제 더 이상 유소년이 아닌 청년 이희성이 마침내 사이드라인 앞에 섰다.

* * *

발아래 느껴지는 감촉이 묘하게 친숙했다.

내가 알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 세팅과 미묘하게 다르게 세팅했을 텐데도.

평소보다 훨씬 푹신하게 세팅한 이 잔디의 촉감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훈련하는 아카데미 2번 그라운드와 똑같은 감촉이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경기장 구석에서 카트에 걸터앉은 리지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마치 잘 뛰라고 격려해주는 것만 같아서,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사이드라인 앞에서, 나는 현역 시절 결국 넘지 못했던 흰색 선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내 곁에서 교체 팻말 두 장이 올라갔다.

[아웃, 10번 필립스. 인, 9번 리]

[아웃, 9번 퀸. 인, 17번 퀸]

“어?”

처음 교체는 그렇다 쳐도, 두 번째 팻말은 예상 밖이었다. 내가 잠시 눈을 깜빡이는 사이, 경기장을 빠져나온 필립스가 나와 가볍게 포옹했다.

그리고 나이얼은, 사이드라인 안쪽에서 나를 마주보고 선 채, 자신의 9번 셔츠를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는 미리 준비한 17번 클래식 유니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핫, 사실 나는 17번도 나쁘지 않아. 선덜랜드 데뷔 시즌에 썼었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때 썼던 번호니까. 마침 마지막 국대 경기를 치른 장소도 자네 나라였지.”

나이얼의 17번 유니폼은 정식 마킹이 박혀 있었다. 즉, 우리 CS팀도 이미 협력했다는 뜻이다.

“미리 준비하신 거군요.”

“축구는 머리로 하는 거라고 했었잖나.”

검지를 세워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들겨 보인 나이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받아주겠나?”

대답하기 전, 나는 잠시 시선을 레알 진영에 돌렸다. 아무리 규칙에 느슨한 레전드 매치라지만, 등번호를 바꾸는 것은 상대에게 다소 무례한 행동이 될 수 있기에.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레알 레전드의 반응은 평온했다. 그저, 따스한 시선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그가 내민 유니폼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입기엔 조금 큰, 그의 9번 유니폼 셔츠를 내 유니폼 위에 걸쳤다.

경기장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리그 매치데이보다도 더 크게, 챔스 결승만큼 뜨겁게.

그 함성 속에서, 나는 마침내 사이드라인을 넘었다.

선수를 그만둔 지 십칠 년 만의 일이었다.

* * *

[9. Lee]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 보관한 유니폼과 똑같은 마킹을, 리지는 감개무량한 눈으로 응시했다.

‘억지를 쓴 보람이 있었네.’

사실 잔디 세팅은 진작에 끝났고, 설령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경기 중 그라운드를 고칠 수는 없다. 그러니 카트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지만, 그녀는 오늘 고집을 부렸다.

이희성이 사이드라인을 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중석보다는 피치 위를 희망했다. 그와 처음 만났던 같은 눈높이에서.

잠시 후 나이얼이 이희성에게 자신의 유니폼을 넘겼고, [9. Lee]의 마킹은 가려지고 말았다. 하지만, 리지의 눈에는 여전히 선명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마킹도, 과거의 추억까지도.

리지가 처음으로 한국인 축구 소년과 만난 장소는, 바로 이곳,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 위였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직접 선덜랜드의 잔디를 관리하던 시절에.

한국에서 온 소년은 축구선수치고는 썩 크지 않았다. 같은 또래 브라이언이나 헨도보다 작았고, 첼시의 피터 톰슨이나 맨유의 리오 수네스와 비교하면 차라리 왜소할 정도였다.

어쩌면 인종의 차이도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곳은 영국이고 그는 동양인이기에. 어떤 혹독한 훈련으로도, 타고난 체격 차이까지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 왜소한 소년은, 유소년 경기에서는 틀림없이 선덜랜드 유스의 간판 공격수였다.

‘지금처럼.’

땅을 박차는 이희성의 모습을, 그녀는 조금 촉촉해진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쓸 수 있는 개인기는 딱 하나뿐이고, 발이 아주 빠르지도 않은 윙포워드는 지금처럼 특유의 영리함을 살려 수비의 빈틈을 파고들곤 했다.

그리고 가로막는 수비는 언제나 간결한 동작으로 벗겨낸다. 순간적으로 안으로 접고 들어오는, 윙포워드들의 매크로라 불리는 개인기로.

다음은 슛이다.

“나이스 슛!”

리지의 외침에 페르난데스의 목소리가 겹쳤다. 전반전에는 레알 유니폼을 입고 출전하는 페르난데스가 미소를 짓자, 이희성은 조금 멋쩍은 듯 웃었다.

“완벽하게 막아낸 분이 그러시니 놀리는 것 같은데요.”

“아뇨, 하마터면 먹힐 뻔했습니다.”

잠시 페르난데스와 서로 마주 보던 이희성이 몸을 돌려 수비에 복귀했다.

걸음마다 조금 헐렁한 유니폼이 마구 펄럭거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오늘의 이희성은, 2미터에 가까운 장신 나이얼의 유니폼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 헐렁한 유니폼조차 리지에게는 오랜 추억이었다.

‘그거 알아요, 썬? 제가 헐렁한 티셔츠를 즐겨 입게 된 계기요. 예전에 썬은 제가 여자인 걸 숨기려 했다고 추측했지만, 사실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어요.’

소년 시절의 이희성은 항상 크고 헐렁한 유니폼을 걸쳤었다. 자기 딴에는 ‘금방 자랄 거니까’ 큰 유니폼을 주문했겠지만, 오히려 몸에 맞지 않는 유니폼 때문에, 더 왜소해 보일 때도 있었다.

‘저는 정말로, 당신의 팬이었던 거네요.’

사이드라인을 넘기 전까지, 단 한 순간도 발을 멈추지 않았던 소년을 떠올리며 리지는 목에 힘을 넣었다.

“힘내, 힘내요!”

‘오늘이 지나면 다시 구단주로 돌아가겠죠. 이제 선수로 뛰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아직은, 조금만 더 꿈을 꾸게 해 주세요.’

이희성의 등을, 리지는 아련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모습은 십칠 년 전과 완벽히 똑같았다. 작은 버릇들도, 발을 멈추지 않고 달리는 모습도, 조금 헐렁한 유니폼까지도.

오직 마킹 이외에는 완벽하게 똑같은 뒷모습, 그 등에서 구단 최고 레전드로 불리던 사내에게 물려받은 유니폼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9. 선덜랜드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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