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07화 (307/422)

307화 타인위어의 전설 (4)

레전드 매치 전반은, 선덜랜드가 밀리는 느낌이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이유를 눈치채고 있었다. 요약하면 골키퍼 차이라는 것을.

전반에 골문을 지키는 선덜랜드의 골키퍼 쇠렌센은 틀림없는 구단 레전드지만, 이미 은퇴한 지 오래이고 나이 또한 적지 않다. 반면 레알의 골키퍼 페르난데스는 오늘 경기에서 거의 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쇠렌센보다 더 젊고, 불과 세 시즌 전까지는 현역으로 뛰었기에 경기 감각도 몸 관리도 훨씬 나았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현역 시절의 클래스 또한 페르난데스가 쇠렌센보다는 우위였다.

“페르난데스가 저렇게 얄밉게 보인 적은 처음인데요.”

수잔이 발을 굴렀다.

조금 전 멋진 측면 돌파를 선보인 선덜랜드 레전드의 공세가 이번에도 무위로 끝난 것이다. 이희성의 크로스가 나이얼의 머리에 정확히 연결되었지만, 몸을 날린 페르난데스의 펀칭에 막히고 말았다.

“아니, 페르난데스는 공중볼이 약점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긴 한데, 그건 공격 측이 제대로 노릴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

진작에 은퇴한 레전드들 사이에서는 전혀 약점이 아니라는 의미를 알아차린 수잔이 한숨을 쉬었다.

그날, 칠만 명 홈 팬들의 성원을 등에 업은 선덜랜드 레전드는 전반 내내 일방적인 공세를 퍼부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오히려 스코어는 레알에 훨씬 유리했다.

[선덜랜드 L 0-2 레알 L]

날카로운 역습에 두 골을 내준 탓이다.

그런데도 정작 마일즈는 아주 태연했고, 오히려 좋다며 주먹을 불끈 쥐기까지 했다.

“썬의 팬인 건 진작부터 알았지만···.”

수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크리스도 불만스럽게 빼액- 소리를 냈다. 하지만 마일즈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아. 이건 아주 좋은 상황이거든··· 레알 레전드는 지금 골키퍼만 보이잖아?”

골키퍼가 하이라이트를 찍는다는 뜻은, 그만큼 일방적으로 공격당한다는 의미다. 스코어보드의 점수를 논외로 하면, 경기 내용은 선덜랜드 레전드가 훨씬 좋았다.

다만 축구는, 누가 슛을 더 많이 했는지를 겨루는 게임이 아니다. 수잔이 그 사실을 은근슬쩍 지적했다.

“지고 있는데도요?”

“뭐, 사실 페르난데스가 이런 경기에 나오면 반칙이지. 얼마 전까지 현역이던 사람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은퇴하고 벌써 십 년 이상이 지났는데.”

“어··· 그럼 더 안 좋은 거 아닌가요? 그를 뚫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

“후반에는 바로 그 페르난데스가 우리 편이거든.”

즉, 후반에는 선덜랜드의 실점은 없다는 게 마일즈의 계산이었다. 그러자 수잔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하지만 이미 지고 있잖아요? 혹시 이대로 끝나면요?”

순간 마일즈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대답이 궁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또다시 왼쪽 측면을 치고 달리는 붉은 유니폼의 9번을, 그 뒷모습을.

이번에도 득점하긴 힘들 것이다. 마일즈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때 세계적 레전드였던 골키퍼를, 프로조차 되지 못했던 사내가 뚫어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하지만 그 사내는, 지금까지 수많은 기적을 팀에 안겼다.

불가능해 보였던 세 시즌 연속 승격, 유럽 대항전에서의 신들린 연승, 도시 전체를 몇 번이고 붉게 물들인 기적을 기억하는 마일즈가 입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니, 어쩌면 이번에도.’

가속하는 9번 유니폼을 향해, 마일즈는 목에 힘을 주었다.

“달려!”

칠만 관중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 * *

달리라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평소였다면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공을 몰고 달리는 중이었으니.

오늘 뛰는 레전드들은, 나를 빼면 전부 쟁쟁한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대선수들이다. 특히 레알 레전드는,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하던 강자들, 한눈팔면서 상대할 여유는 없다.

내 매치업 상대는, 00년대 갈락티코의 라이트백, 살가도였다. 솔직히 개인기로 제칠 자신은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속도를 올리며 치고 달렸다.

한발 늦게 들어온 태클이 공을 살짝 건드렸다. 흘러나온 공이 사이드라인을 빠져나갔고, 부심은 우리 선덜랜드의 스로인을 선언했다.

일일 볼보이, 잭이 공을 내밀었다.

“구단주님, 이 정도면 현역 뛰셔도 되는 거 아님까?”

“진작에 은퇴한 분들도 못 뚫으면서 무슨 현역.”

조금 벅찬 호흡을 정돈하며 대답하자, 잭이 킬킬 웃었다.

“그건 그렇슴다. 여기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임다. 풀 한 포기조차 선덜랜드의 승리를 위해 심어진 장소임다. 우리 구단주님이 그렇게 만드셨슴다.”

그랬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사이드라인에 놓인 스포츠 드링크를 들이키면서, 나는 숨을 골랐다.

“좀 더 분발하셔야겠슴다. 여기서 지시면 안 됨다. 선덜랜드 유니폼 입고 지면 절대 안 됨다.”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의외로 눈빛은 진지했다. 잭 나름의 응원임을 깨달은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이아이, 캡틴.”

그리고 공을 받아 유니폼 상의로 한 번 닦고, 델랍 코치에게 배운 요령대로 쭉 밀어 던졌다. 무릎은 썩 안 좋지만, 어깨는 아무 지장 없으니까.

이 경기장에서 손꼽히는 장신, 나이얼의 머리를 향해.

레알 레전드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투석기 스로인은, 그들이 뛰던 라 리가에서는 무척 희귀한 플레이일 테니.

“괜찮아! 내가 처리할게!”

페르난데스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기운찼다.

세간의 인상과는 달리, 그의 제공력은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다. 저 철벽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내가 훨씬 잘 안다. 페르난데스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 몇 년을 우리 팀에서 보냈으니까.

다만···.

“우리가 골문을 노린다면 말이겠죠, 페르난데스.”

잠시 후, 나이얼이 헤더로 되돌린 공을 향해, 나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앞을 가로막는 흰 유니폼을 피해, 나는 곧바로 한 박자 접으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개인기, 이른바 윙포워드 매크로다.

“킥 페인트!?”

아크 정면에서 기다리는 나이얼에게 숏패스를 건네고, 다시 달렸다. 더 빠르게.

I’m Sunderland ’til I die.

잠시 후 나이얼이 내게 리턴 패스를 되돌린 순간, 나는 흰 유니폼의 포백라인을 완전히 돌파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을 좁히러 달려나오는 페르난데스를 피해 슬쩍 공을 띄웠다.

[선덜랜드 L 1 - 2 레알 L]

그다음 일은 살짝 기억이 희미하다.

사방에서 내 몸을 붙잡고 흔드는 우리 레전드들, 목이 칼칼해질 정도로 내지른 포효, 고막을 넘어 심장까지 울리는 팬들의 함성.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우리 선수들이 용케 이런 곳에서 매주 뛰는구나 싶을 정도다.

몸을 일으킨 페르난데스가 미소를 지었다.

“멋진 돌파였습니다. 거기서 파고드실 줄은 몰랐는데요.”

“처음엔 그냥 때리려고 했는데, 예전에 단장님과 같이 특훈했던 생각이 나더라고요.”

“특훈이요?”

“예전에 승부차기에 대비해, 페널티 스팟을 1미터 앞으로 옮겼었죠. 하퍼도 함께였습니다만.”

“아, 그때 말씀이시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원래 페널티 스팟에서 차셨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후반부터는 저희 쪽에서 뛰시니까, 유니폼 갈아입으셔야죠? 먼저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내게 답례하며 홈팀 드레싱룸으로 향하는 페르난데스에게, 슬쩍 농담을 던졌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페르난데스.”

그러자 페르난데스가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구단주님, 그건 제가 해야 할 말 같습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썬.”

* * *

드레싱룸으로 돌아가려고 사이드라인을 넘자, 팬들의 함성이 다시 울렸다.

정말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났을 뿐인데도. 오죽하면 통로에서 기다리던 희주가 스마트폰을 내밀며 까불거릴 정도였다.

“프로 데뷔전은 언제 치를 거냐던데?”

희주의 목소리는 명랑했지만, 눈은 온통 빨갛다. 눈병일 리는 없을 거고, 나름의 감회에 젖었던 거겠지.

“너는 왜 여기 와 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는 어쩌고.”

완벽한 서비스를 자랑하는 우리 스태프들이, 다른 고객도 아니고 구단주 부모를 소홀히 대할 것 같진 않지만··· 두 분 다 영어 못 하시잖아?

희주가 곧바로 응수했다.

“거긴 다미 언니가 있으니까. 그리고···.”

희주의 시선이, 내 무릎에 아주 살짝 머물렀다.

무슨 생각인지는 안다. 예전에 루벤에게 들은 적이 있거든. 희주는 나름 재활에 대해서는 수준급의 이론 지식을 갖췄다고 했다. 정작 내게는 비밀로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희주는 줄곧 내 무릎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마음은 갸륵하지만, 아마추어의 손에 무릎을 맡길 이유는 없다. 우리 메디컬 팀은 일류니까.

그래서 분위기를 전환할 겸 스마트폰을 빼앗았다.

“잠깐 줘 봐.”

그리고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SNS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의견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 올해부터 선수로 뛰게 하자. 진지한 의견.

ㄴ 구단주의 현역 복귀는 새로운 영입과도 같다.

- 가만, 썬을 선수로 쓰면 홈그로운 만족하는 거 아님?

ㄴ 홈그로운이 문제임? 팀그로운까지 자동으로 채움.

아니, 이 양반들이 지금 무슨 무서운 소리를 하는 거야.

무엇보다 선덜랜드 구단주로서 허용할 수 없는 소리다. 혹시 축구를 쭉 계속했으면 몰라도, 지금의 이희성은 현역으로 뛰기엔 기량에 손색이 많다.

딱 25자리밖에 없는 우리 스쿼드를 차지하기엔 부족한 선수다. 지금의 선덜랜드는 챔스 디펜딩 챔피언이고, 리그 우승컵과 클럽월드컵, 유에파 슈퍼컵을 모두 노리는 팀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다른 팀에서 뛰고 싶은 것도 아니니, 복귀는 불가능하고, 사실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 팬들은 막무가내였는데, 이제 보니 SNS뿐 아니라 현장에서도 아주 난리다. 당장 복귀하라며.

입을 모아 “복 귀 해”를 외치는 팬들을 올려다보며,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좀 봐주세요. 남들 다 은퇴할 나이에 무슨 선수입니까? 비만 오면 무릎이 시큰거려요.”

그렇게 엄살을 떨자,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아, 슬쩍 못을 박았다.

“저 구단주인 거 기억하시죠? 그래도 저보다는 훨씬 좋은 선수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못 참겠지.

실제로 경기장에 모인 우리 팬들의 반응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중계를 확인한 SNS의 반응 또한 한 템포 늦게 전환되었다.

- 영입 필요 없다니까? 구단주의 복귀는 새로운 영입과도 같잖음?

ㄴ 너 조르디지. 검거 완료.

ㄴ 뉴캐슬 회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썬. 대신 다음 레전드 매치에도 뛰어줄 거지?”

“그러고 싶은데, 조항이 바뀌었습니다. 내년부터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뛰어본 적 있는’ 사람만 선발할 거라서요.”

“진짜지?”

팬들이 환호했다. 마치 경기장이 떠내려갈 것 같은 함성이··· 그러니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웠다.

실수를 알아차린 내가 입술을 깨무는 사이 팬들이 기세 좋게 떠들기 시작했다.

“썬! 지금 뛰는 경기장이 어디지?”

“방금 눈치챘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낚인 것 같군요.”

나는 원망스러운 시선을 익스클루시브 박스 쪽에 보냈다. 비록 다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환하게 웃고 있겠지.

놀랍게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뭐, 팬 서비스에 도움이 되고, 시즌권이 더 잘 팔리기만 한다면야··· 이벤트 매치 정도야, 또 뛰지 뭐.

* * *

결국 그날의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후반, 우리는 나와 나이얼이 각각 한 골씩을 추가했지만, 막판에 레알의 카를로스에게 강렬한 프리킥을 얻어맞으며 따라잡혔다.

혹자는 페르난데스가 반칙이라고 하던데, 사실 내가 보기엔 카를로스가 훨씬 반칙이다. 세트피스 플레이에 요구되는 능력은, 비교적 늦은 나이까지 유지되거든.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레전드 매치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오히려 무승부는 최고의 결과에 가까웠다. 특히 페르난데스처럼 두 팀 모두를 오가며 뛰는 레전드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린 다음에도, 한참 동안 쏟아지는 함성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90분 경기의 흐름이나, 턱밑까지 차오른 숨도 한몫 했을 것이다.

당장에라도 드레싱룸에 대자로 드러눕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챙겨야 할 손님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은 그냥 넘긴다 쳐도, 영국에서 축구단 운영하려면 축협 회장은 직접 배웅해야겠지.

그리고 부모님께도 인사드려야 한다. 경기 전에는 아무래도 오래 이야기하지 못했으니까.

얼른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가야지.

그래서 드레싱룸 라커 앞에 선 나는, 무심코 인상을 쓰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나이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나? 우리 드레싱룸 거울엔 별문제 없을 텐데···?”

“그렇죠.”

원정팀 드레싱룸엔 장난을 좀 쳤다. 샤워기 앞에 설치된, 허리춤에 소실점이 잡힌 오목거울 같은 것··· 다시 말해, 숫자가 바뀌어 보이는 거울 같은 건 어디에도 달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마에는 평소와 다른 숫자가 선명하다.

세 자리다.

조금 전까지 경기를 했기 때문일까? 방금 전까지의 나는, 축구선수였다고 말해 주는 걸까.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입꼬리는 멋대로 치켜 올라간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선수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도 팀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대신해 주는 내 선수들이 있기에, 그 시절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도 오늘의 숫자는 좀 더 특별하다. 어린 시절, 내가 했던 도전은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내 노력의 값어치는, 결코 ‘0원’이 아니었다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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