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새 시즌은 언제나 (2)
가상의 장바구니에 선수들을 잔뜩 퍼담기 시작한 브라이언과 샐리를 바라보며, 나는 살짝 숨을 골랐다.
이제 이번 프리시즌의 인사개편을 통보할 시간이기에.
“그럼, 우선 우리는 스태프부터 보강합시다. 분석실이 가장 시급합니다. 새 분석팀장 루벤의 부담을 덜어줘야 할 것 같으니까요.”
그러자 브라이언은 샐리를 향해 휘파람을 불었고, 샐리는 고운 눈썹을 엉망으로 찡그렸다.
“네? 그 축알못이 벌써 분석팀장이 된다고요? 구단주님, 루벤을 너무 고평가하시는 것 아닌가요?”
아무래도 샐리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이라, 슬쩍 덧붙였다.
“아뇨. 내가 고평가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네?”
아직도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샐리를 흘끗거리며, 브라이언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올 시즌부터는 널 수석코치로 쓰겠다는 뜻이잖아.”
사실, 지도자로서 샐리의 능력은 오로지 전술에 치중된 편이고, 선수를 통솔하기도 불리할 것이다.
다만 샐리는 팀의 선수들과 오랫동안 함께한 스태프다. 우리 선수들이 새삼 그녀를 무시할 것 같지도 않거니와, 챔스를 차지한 스태프라는 실적까지 더해졌다.
이 정도면 수석코치를 맡기에 관록이 부족하지는 않겠지.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좀 더 나이가 지긋하고 위엄 있는 코치를 수석코치로 삼으시는 게 어떨까 하는 건데요.”
“나이 지긋하고 위엄 있는 사람을 잘못 데려왔다간 브라이언이 잡아먹힐 것 같아서요.”
우리 수석코치 자리에 맞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리더십 있고 경력도 갖췄으면서, 브라이언에게 도움이 될 정도의 코칭 실력까지 있는 사람은 진작에 감독을 하고 있을 테니까.
옆에서 브라이언이 키득거렸다.
“이봐, 처음에 이력서 낼 땐 감독 지망 아니었어? 새삼 수석코치 정도로 무슨.”
“그, 그땐 3부 리그였고 지금은 챔스 우승팀이잖아요?”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샐리를 달랠 겸, 차분하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만 한 인재를 분석팀장으로만 계속 남겨 두기는 너무 아깝다. 그렇게 믿었기에 코치 라이센스도 따게 한 것이다··· 분석실에는 굳이 라이센스가 필요 없거든.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감독님을 잡아먹을 각오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브로, 내 부담은 전혀 해결 안 되는 기분인데?”
“감수해야 할 거야. 올 시즌은 만만치 않을 테니까.”
축구는. 체력소모가 심한 종목이다. 그래서 프로 축구는 기본적으로 매주 한 경기를 표준으로 삼는다. 선수들에게 휴식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시즌을 치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컵 대회 일정이나 국가대표 차출 같은 이벤트가 끼어들기 때문에 선수들의 휴식이 부족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축구팀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어느 경기에 주전을 내야 하는지. 바꿔 말하면, 클럽 축구는 실력보다 위상이 낮으면 유리한 종목이다.
지난 시즌까지는, 그래도 우리를 언더독 취급하는 팀들이 제법 있었다. 리그에서 빅 7로 불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존 빅 6보다 한 수 아래라는 의미의 칭호다.
그리고 챔스에서는, 16강전부터 내내 언더독 포지션을 유지한 채 토너먼트를 치렀다. 뮌헨, 유베, 레알, 그리고 파리까지··· 항상 우리가 역배당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은 다르다.
우리는 챔스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새 시즌을 맞이한다. 그러니 강팀은 우리와의 경기에 맞춰 베스트 일레븐을 내보낼 것이며, 중하위권 팀은 작정하고 내려앉을 것이다.
브라이언이 이를 드러냈다.
"해보자고. 호락호락하게 잡혀줄 생각은 없으니까."
자기 딴에는 샐리에게 한 말이겠지만, 공교롭게도 마침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똑같았다.
"동감이야."
“그래서 분석실에는 누구를 보강하실 계획이세요? 개인적으로는 앨리스가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데요.”
샐리의 의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앨리스는 안 됩니다. 그 친구는 따로 쓸 데가 있거든요.”
* * *
유소년 육성팀에 발령된 앨리스를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은, 바르카와 테오였다.
“인턴 누나다!”
“인턴 누나, 이제 우리 쪽에서 일한다면서요?”
잠시 후 따악-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까불거리던 바르카와 테오가, 짐에게 사이좋게 꿀밤을 얻어맞은 것이다.
‘아프겠다.’
앨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골키퍼라는 포지션 특성상, 짐은 나이치고 손이 참 크다. 확실히, 저런 손에 머리를 얻어맞으면 꽤 아프긴 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보좌관님.”
짐은 어쩐지 더 자란 것처럼 보였다. 원래 나이보다 조숙하고 의젓했던 소년 골키퍼에게, 지난 시즌 U-15 유스컵은 한 걸음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축구 관계자 사이에서도, 짐은 무척이나 평가가 좋았다.
[테오가 잉글랜드 최고 유망주인지는 모르겠지만, 짐은 확실한 당첨 복권이다.]
[한때의 반짝임이라고? 오히려 되묻고 싶다. 재능과 근면함, 심지어 성숙함까지 갖춘 소년 골키퍼가 어떻게 실패할 수 있다는 건지.]
“씨이. 클라라한테 이를 거야. 예쁜 누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고!”
“이를 거야!”
둘이 난동 부리기 시작한 와중에도 침착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짐을 바라보던 앨리스는,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보좌관··· 저 말인가요? 아, 맞구나. 그쵸. 저 이제 보좌관이죠!”
FC 선덜랜드 유소년 육성단장 보좌관. 그녀의 새 직함이다. 처음 발령받았을 때는 텐션이 드라마틱하게 롤러코스터를 탔었다.
[프레스팀에선 말단 막내이던 내가, 유스팀에서는 단장 보좌라고?]
[아닌가··· 내 업무 능력은 딱 유소년 수준이라는 뜻인가···.]
그녀를 처음 맞이한 육성단장 페르난데스의 환영 멘트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앨리스 양은 축구 보는 안목도 좋고, 언론사 업무에도 능숙해서 다방면으로 자질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세요.]
[맡겨주세요! 애보기는 자신 있어요.]
[의외군요. 동생이 있습니까?]
[아뇨, 아는 분 아들이죠. 이제 딱 한 살인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앨리스는 아직도, 그날 페르난데스가 왜 당황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중이다.
‘그야, 애보기인 건 마찬가지잖아?’
테오나 바르카 같은 애들을 보면, 아무래도 육성단장 보좌에게는 베이비시터의 자질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단장님, 제 첫 업무는 무엇인가요?]
[유소년 팀 주장 교체 안내입니다. 짐이 U-18로 올라가니까요.]
유소년 팀은 보통 같은 나이끼리 묶어서 관리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결국 U-18과 U-15로 나뉘곤 한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라면 한두 살 위의 형들과 같이 뛰는 경우가 있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무리하다가는 자칫 선수 생명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유스컵을 비롯한 주요 대회에서는, 15살 이상과 미만으로 나누어 운영하곤 한다.
짐은 이번 시즌부터 U-18팀에서 뛰게 된다. 그곳에서도 짐은 변함없이 주장을 맡겠지만, 남겨진 U-15팀에는 새 주장이 필요하다.
‘테오와 바르카는··· 자기들이 새 주장 후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재능은 확실해도 사이드라인 밖에선 아직 어린 티가 난다. 어쩌면 그게 나이다운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옆에 짐 같은 조숙한 소년이 있으면 자꾸 비교하게 된다.
“테오, 바르카. 보좌관님 말씀 잘 듣고··· 빨리 올라와.”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닌걸?”
“맞아. 나이가 차야 올라가지!”
“다치지 말고 열심히 훈련하라는 뜻이야. 나 없다고 꾀피우지 말고.”
테오와는 딱 한 살 차이, 바르카와는 이제 두 살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분위기가 너무나 다르다. 혹시 유스컵에서 우승한 관록인가 싶지만, 정작 그 대회의 최우수 선수는 지금 까불거리는 테오다.
그래서, 앨리스는 생각했다.
‘도대체 짐은 뭐가 다른 걸까?’
* * *
앨리스의 배치로 페르난데스가 한숨 돌렸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의외로 다미였다.
“꽤 싹싹하고, 일도 열심히 하던데요? 앞으로 로저스 위원장님께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하긴, 리미트리스 유소년 리그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거니까.”
대회 진행 자체는 리미트리스 SM&C에서 하겠지만, 찾아낸 유망주를 우리 유소년으로 데려오는 업무는 구단에서 직접 해야 한다. 올 시즌은 첫 대회이니만큼 다미가 중간에 꼼꼼하게 챙겼지만, 매년 살피긴 힘들겠지.
정작 다미 본인은 구단주 비서 의자가 꽤 마음에 드는지 자꾸만 빙글빙글 돌려 보는 중이었다. 여의도에 있는 리미트리스 부사장실 의자에 비하면 엄청 싸구려일 텐데도.
“새 수석코치님은.”
다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는 거 알고 계실까요?”
“글쎄.”
다미 말대로, 사실 샐리의 업무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분석을 아주 중시하는 팀이니까.
당장 브라이언부터 분석실에서 샐리와 함께 전술을 짜는 게 일과였으니, 샐리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 직함이 바뀌었을 뿐, 지금과 마찬가지로 분석실에 수시로 드나들게 될 거다.
실제로 눈치 빠른 루벤은 팀장이 되었어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도 쭉 샐리에게 들볶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용케 눈치챘네? 샐리 본인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던데.”
“제 직함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하는 일이 달라진 적은 없으니까요.”
“하긴, 그렇지. 너는 내 오른팔이니까.”
“새 수석코치님은요?”
“샐리는 브라이언··· 우리 감독의 오른팔이고.”
다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 진짜 미인이던데요? 얼굴 막 쓰는 게 흠이지만, 그래도 굴욕샷 각은 안 나오더라고요. 진짜 인생 혼자 사는지···.”
샐리와 마찬가지로 진짜 미인이며, 심지어 얼굴을 막 쓰지도 않는 다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슬쩍 한마디를 보탰다.
“밖에선 그러지 마. 남들이 들으면 욕한다.”
“후훗. 말씀만이라도 기분 좋네요. 그래서··· 공사는 언제부터 추진하면 될까요?”
“빠를수록 좋겠지. 그리고 새 시즌 경기 관람에도 차질이 없어야 해.”
“맡겨주세요. 풋볼 스퀘어 주위가,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도록 예쁘게 만들어볼게요.”
물론 공사 기간 내내 다미가 여기 붙어 있을 리는 없다. 따라서 다미의 선언은, 영국에 머무는 동안 업체를 들볶아 설계도부터 공사계획, 일정표까지 모조리 뽑아내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
나는 공사를 맡게 될 파퓰러스의 수석 설계사, 타일러에게 가볍게 묵념했다.
“맞다, 사장님! 선덜랜드 분석실에서는 드링크가 무제한 지급된다면서요? 파퓰러스에도 비슷한 복지를 실시할까요?”
“다미야. 세상은 그걸 복지라고 부르지 않아.”
착취라고 부르지.
* * *
집을 나서기 전, 희주는 선글라스를 썼다. 아버지는 별말 없었지만, 어머니는 가볍게 인상을 썼다.
“얘, 너무 경박해 보이는 거 아니니? 꼭 노는 애 같아.”
“어쩔 수 없어요 엄마. 저는 이 동네에서 너무 유명하거든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어머니를 향해, 희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시면 알아요.”
원래 그녀는 당장 영국 곳곳의 유명 관광지를 헤집고 다닐 생각이었지만, 일정이 조금 바뀌었다. 부모님의 희망 때문이었다.
[모처럼이니 우리 아들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보고 싶구나.]
[너희가 사는 동네를 보고 싶은데.]
덕분에 영국 투어가 시티 오브 선덜랜드 투어로 바뀌게 되었고, 희주는 출발 전부터 몇 번이나 신신당부해야만 했다.
“주의사항은, 절대로 썬의 가족이라는 걸 들키면 안 된다는 건데요.”
“썬?”
“오빠 별명이요.”
“음, 썬더랜드 구단주라서 썬이라고 부르나?”
“아빠는 참. 썬더랜드가 아니라 선덜랜드!”
그러자 의외로 진지한 답변이 돌아왔다.
“하긴, 희성이가 워낙 돈이 많으니, 해외에선 납치 같은 거 주의해야겠다. 리미트리스 사장 가족인 거 들키지 말라는 거지? 희주 너도 평소에 조심해서 다니고.”
“어··· 이 동네에선 제가 아니라 납치범이 조심해야 할 텐데··· 아무튼, 가요!”
그렇게 출발한 ‘구단주 가족의 시티 오브 선덜랜드 투어’는 시작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알 유 코리안? 한쿡 싸람! 화뇽 함미다!”
서툴지만 분명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는 상인들, 상점 곳곳에 붙은 [한국어 가능] [원화 OK] 같은 문구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 여기 한국 사람이 그렇게 많이 오니?”
“그렇지는 않아요. 이런 북동부까지 와줄 사람은 축구 팬인데, 한국에서는 맨유나 리버풀, 첼시, 아스널 같은 곳이 훨씬 유명하거든요. 몇 년 전부터는 토트넘도 잘 나가고요.”
“그러면···.”
호기심을 보이는 부모님을 위해, 희주는 번역기 앱을 켰다. 그리고 유창한 영어로 상인에게 물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드문 것 같은데, 굳이 한국어 안내문을 걸어두는 이유가 있나요?”
그러자 상인의 얼굴에 의심의 빛이 떠올랐다.
“혹시 중국에서 왔습니까? 아니면 일본에서···.”
“아뇨. 코리안. 한국인인데요.”
“오, 코리아! 썬의 나라!”
열렬한 반응에 감사하며, 희주는 상인과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번역기에 떠오른 문장을 부모님께 보여 드렸다.
[한국은 우리 구단주 썬의 나라. 선덜랜드의 혈맹이다. 가장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혹시 관광 도중 문제가 생기면, 선덜랜드 구단 사무실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거기까지 가기도 힘들면 검은 고양이 인형이 놓인 상점을 찾아가라. 구단 제휴 상점이다.]
간신히 상황을 따라잡은 부모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얘, 이런 거 국내에 방송하면 한국 관광객도 많이 늘지 않겠니?”
“소용없더라고요. 이미 유튜브에 올려 봤는데··· 아무도 안 믿어서요. 국뽕 주작 채널로 오해받았거든요.”
“아깝구나. 이렇게 좋은 도시인데···.”
희주는 살짝 시무룩해졌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나란히 피었다.
“네, 정말 좋은 도시죠. 축구를 하는 날에는 세상 어디보다도 뜨거운 도시고요. 전부, 오빠가 만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