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왕의 귀환 (2)
- 선덜랜드 경기력 실화냐. 엄청 살벌하게 팼네.
ㄴ 왕이 돌아왔다! 역시 유럽의 왕!
ㄴ 근데 영국은 이제 유럽 아니지 않음?
이후 SNS에서는 잠시 지리와 정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뒤섞여 큰 혼란이 찾아왔지만, 대체로 선덜랜드의 개막전 경기력에 대해서는 찬사가 쏟아졌다.
- 근데 브렌트포드는 왜 대놓고 중원 싸움을 시도한 거임? 선덜랜드는 다이아 4-4-2였으니까 측면공격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ㄴ 로드리게스를 후벼파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전부 읽혔던 모양임.
SNS 반응을 살피던 선덜랜드 분석팀원, 토마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새 분석팀장 루벤이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이번에는 아주 잘했다. 완벽했어.”
토마스는 브렌트포드 분석팀 출신으로, 상대 분석팀의 입김이 강하다는 것과, 새 분석팀장이 다소 기책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모두를 날카롭게 읽어내며 성과를 올렸다.
정작 토마스 본인은 ‘전력 차이를 생각하면 승리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면서, 오히려 4점이나 뽑아낸 감독 브라이언에게 공을 돌렸다.
“사실 감독님의 심리전도 대단했고요.”
선덜랜드는 이번에 아약스와 아르헨티나의 차기 에이스로 꼽히는 걸출한 미드필더를 영입했다. 그에 더해, 굳이 다이아몬드 4-4-2를 취하며 중원에 머릿수를 늘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면 보통은 중원에 힘을 꽉 주겠다는 시도로 읽히겠지만, 경기가 개막전이고 이적 직후의 선수가 팀에 있다면, 약간 다른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옛 소속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토마스의 분석에 브라이언의 심리전이 더해지자, 브렌트포드는 꽤 멋들어지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로드리게스의 경기력에 아무런 문제도 없음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선제골을 허용한 직후였고, 그때부터 브렌트포드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챔스 디펜딩 챔피언 상대로, 울며 겨자 먹기로 맞불을 놓는 것 이외에는.
- 선덜랜드 분석팀의 판정승이네.
ㄴ 지금 선덜랜드 분석관도 브렌트포드에서 일하다 옮겼다던데?
ㄴ 첫 직장 그만둔 날 곧바로 썬이 줍줍했다고 함.
ㄴ 아직도 구단주 집에 절 안 한 놈들 반성해라.
* * *
구단주실에서, 전화를 받은 희주는 무척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절을 어떻게 하냐고요? 어··· 말로 설명하자면 너무 복잡한데, 이따 시범 보여줄게요!”
당혹스러울 만도 하다. 절이라니.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황당한 시선을 보내자 희주가 곧바로 대답했다.
“에이미 씨가 갑자기 절하는 법 배워야겠다고 하던데?”
“뭔 소리야. 영국 사람이 절하는 법을 왜 배워.”
“음, 영국 사람이니까 배우려는 거 아니까? 한국 사람 같으면 새삼 배우려고 하겠어?”
얼핏 맞는 말 같기도 하면서, 뭔가 아닌데 싶어서 머릿속이 근질근질한 느낌이 들었다.
“에이미 부팀장한테 이상한 바람을 집어넣은 건 아니겠지?”
“갑부 오라버님, 그럴 틈도 없었다는 건 더 잘 아시지 않나요? 나, 요즘 엄청 바쁘잖아?”
희주의 산뜻한 주장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실제로 개막 직후, 희주는 꽤 하드하게 굴렀으니까.
이번 시즌의 슬로건, [왕의 귀환]은 사실 슈퍼컵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슈퍼컵은 유럽대항전 중에선 비교적 낮은 위상에 속한다. 시즌 초에 치러지는 단판 매치라, 일종의 이벤트성 경기 취급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래도 챔스 우승팀과 유로파 우승팀이 만나 진짜 유럽 최강자를 가린다는 대회의 컨셉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맛이 있다. 아직 갖지 못한 트로피라, 우리 클럽박물관에 진열하기도 딱 좋고.
그래서 이번 시즌 초에는, 슈퍼컵 홍보에 힘을 쏟았다. 희주가 시달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매우 바쁘신 구단주 비서님, 섭외는 잘되셨습니까?”
그러자 희주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브이 자를 그려 보였다.
“협의 완료! 슈퍼컵 경기 종료부터 다음 날 정오까지 스타드 루이를 쓸 수 있어. 이 경기장은 이제 우리 겁니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축하 공연은?”
“드림스케이프면 되지? 불러 놨어.”
슈퍼컵 결승 끝나고 트로피 세레머니에, K팝 아이돌 드림스케이프의 축하 공연이 이어진다면, 왕의 귀환을 선언하기 최상의 분위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희주는 뭐가 불만스러운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근데··· 혹시 몰라서 캔슬 조항도 넣을까 했는데, 그 부분 협의가 잘 안 풀리네.”
“캔슬 조항?”
“슈퍼컵 원정 출발도 안 했는데, 벌써 우승 축하 공연을 준비하는 거잖아? 혹시라도 이러고 지면 우리 완전 쪽팔려서 죽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캔슬 조항을 넣는 거지. 위약금을 내더라도.”
희주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는 상황을 이해했다.
희주는 우리가 부른 가수가 상대팀 우승을 축하하는 꼴을 볼 순 없으니, 그 경우엔 차라리 위약금을 내고 취소하겠다는 조항을 넣자는 것인데, 드림스케이프 소속사 입장에서는 꽤 황당하게 들릴 것이다.
‘스케줄 빼서 불러 놓고, 자기들이 우승 못 하면 그냥 돌아가라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고 했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슬쩍 북쪽 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담장 너머로 살짝 정수리만 내민 내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프리시즌 때 부모님께서 살펴보고, 만져도 보고 가셨다는 그놈의 동상 정수리를 노려보며,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선언했다.
“··· 이제 와서 새삼 내가 쪽팔려 죽을 일이 뭐가 있겠어. 캔슬 조항 빼고 진행해.”
“어, 진짜?”
“우리가 이기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이번 슈퍼컵은 질 수 없는 경기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미 한 차례 고배를 마셨기에.
잠시 후 희주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 슈퍼컵 관련 프로모션을 일제히 송출하기 시작했다.
* * *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축구는 계속됩니다. 선덜랜드 대 세비야, 유에파 슈퍼컵에서.]
링크를 클릭하자 초대장이 나타났다. 요즘 유행하는 AR 초대장인 모양이다. 다가가자 모나코의 풍경이 스마트폰 화면을 가득 메웠다.
마일즈도 내심 감탄했지만, 사실 이번 초대장에는 수잔이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예쁘네요! 힘 엄청 줬는데요?”
아무래도 챔스 결승은 무조건 따라가겠다는 팬이 많아 굳이 별도로 홍보할 필요 없이 혜택만 주면 충분했겠지만, 슈퍼컵은 아무래도 위상이나 인기가 낮다 보니 힘을 준 모양이다.
물론 골수팬 입장에서는 슈퍼컵 또한 소중한 트로피다. 우드 일가는 이미 티켓을 예매했고, 교통편과 숙박편도 확보해 두었다.
이제 두 번째 생일이 지난 크리스가 명랑하게 외친다.
“갈 거야!”
“가야지. 일찍 가서 하이킹도 하고, 아빠랑 캐치볼도 하자.”
사실, 크리스의 나이를 고려하면 제대로 된 캐치볼을 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아마 캐치볼이라는 이름의 신종 공놀이가 되겠지만, 상관없다. 아들을 가진 아빠는 야망에 불타는 법이다.
“그쵸. 산책도 하고, 사진도 많이 찍고!”
아들을 가진 엄마 수잔 또한 나름의 야망을 불태웠다. 아무튼 모나코는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국가고, 이번 슈퍼컵이 열리는 스타드 루이 경기장 주변도 뷰가 끝내준다는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크리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축구 볼 거야! 추욱구!”
“어, 그래. 봐야지··· 축구.”
“에휴, 도대체 누구 닮아서 저러는 걸까요?”
축구에 미친 정도를 고려할 때 아빠 닮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수잔의 증언이었지만, 정작 마일즈 본인은 ‘축구 말고 다른 취미가 없다.’는 점에서 엄마 닮았다고 반격했다.
물론 주위의 의견은 엄마아빠를 섞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말도 못 하는 신생아 시절부터 시즌권 티켓부터 만들려 시도한 시점에서 반박할 수 없었다.
그때 둘의 스마트폰이 동시에 울렸다.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가 날아든 것이다.
발신은 브렌든이었다.
[이번 슈퍼컵 티켓 소지자에게는 항공권과 숙소를 제공한다는데!?]
“진짜!? 챔스 결승도 아닌데 항공권과 숙소를 제공한다고?”
[이것도 유럽대항전 결승이니까, 그에 준해서 취급한다는 모양이야.]
브렌든의 메시지에 마일즈의 입이 찢어지려는 찰나, 옆에서 수잔이 냉정하게 문의했다.
“어··· 그런데 우리는 이미 예약을 마쳤는데요.”
[그 경우, 취소 수수료는 선덜랜드에서 부담하겠다고 하던데요.]
“이래서 구단주 집에 절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구나.”
마일즈의 혼잣말에 브렌든이 곧바로 응수했다. 메시지인데도 특유의 이죽거림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직도 안 했음? 나는 했는데.]
잠시 후 브렌든이 영상을 올렸다. 자신과 핫도그 사내가 절하는 모습을 폰으로 찍은 영상이었는데, 앞에 지도며 나침반을 둔 게 정말로 구단주 집을 향해 절하려는 의욕이 느껴졌다. 그런데 딱 보기에도 자세가 엉거주춤하고, 동작이 영 어색했다.
영상을 본 우드 부부가 냉정하게 비판했다.
“절이라기보다는 꼭 요가 같네요.”
“맞아. 그것도 평생 스트레칭 안 해서 몸이 굳은 초보자가 생전 처음으로 요가를 따라 할 때 자세 같아.”
[아니, 그럼 마일즈 자네는 얼마나 잘하는데?]
마일즈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미 CS팀에게 따로 배워 놨다고.”
* * *
최근 SNS에 퍼져 나간, ‘선덜랜드 구단주에게 절하는 챌린지’ 영상에, 나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어···.”
마음은 고마운데, 모양새가 좀 그렇다. 구단주가 팬에게 절을 받는다는 상황도 그렇지만, 일단 절하는 자세가··· 다소 민망한 느낌이다.
이 사달을 낸 장본인, 희주를 노려보자 곧바로 변명이 돌아왔다.
“아니, 나는 그냥 에이미 씨가 가르쳐 달라고 해서 알려준 게 전부인데···.”
“왜, 에이미 부팀장이 새삼 한국 문화 배우려나 보다 싶었어?”
“마침 추석도 가까우니, 팬들에게 한국식 인사 해주려다 보다 싶었지. 한국 팬을 늘리는 건 우리 팀의 숙원이잖아?"
“그건 그렇네.”
거참, 타이밍 한번 공교롭기도 하지.
아무튼, 가르친 사람이 희주고 배운 사람이 에이미라는 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절을 알려달라는 요구에 신이 난 희주는, 모처럼이니 아주 완벽한 한국 절을 전수했다. 심지어 희주치고는 꽤 우아한 동작으로.
그리고 에이미 역시 CS팀의 에이스다운 완벽한 몸가짐과 정확한 자세로 절하는 법을 숙지했다··· 그러니까 여자 절을.
그 에이미는 우리 고객들에게 자기가 배운 절을 똑같이 알려줬기 때문에, 양손을 다소곳하게 무릎 옆에 대는 한국식 여자 절을, 바지 입은 영국 아저씨들이 하는 진풍경이 완성된 것이다.
“어··· 지금이라도 안내할까? 해당 방식은 치마를 입고 하는 절이라고?”
“그러다 더 큰 일 날 것 같은데.”
여기는 영국 북동부다. 다시 말해 스코틀랜드가 가깝다는 뜻인데, 스코틀랜드에는 마침 킬트라는 남성용 치마가 전통 복식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팬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게 팬 서비스의 시작이다··· 결국 내가 시범을 보여야겠지. 무슨 차이인지 알려주려면, 옆에서 여자 절을 보여줄 사람도 하나 필요하겠고.
“빨리 한복 입고 와.”
여동생을 째릿 노려보자, 희주가 터덜터덜 움직였다.
[팬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마침 한국에서는 맞절이라 하여, 절에는 똑같이 절로 답례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담아. @선덜랜드_구단주실]
* * *
모나코, 스타드 루이 경기장.
슈퍼컵 경기를 하루 앞둔 날, 선덜랜드는 미리 경기장에 도착해 현지 적응을 마쳤다. 원정지원팀의 헌신적인 조력은, 언제나 홈팀 같은 경기력을 뽐내는 선덜랜드의 비결이었다.
이제 선수들에게는 다들 익숙한 상황이었으나, 로드리게스에게는 퍽 신선한 모양이었다.
“이 팀은 제가 뛰어본 어느 팀과도 다르군요.”
“음?”
메시가 반응을 보이자, 로드리게스가 스마트폰을 화면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한복 차림으로 팬들에게 절하는 구단주 남매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구단주가 이렇게 직접 바닥에 엎드리는 팀이 어딨겠어요.”
“하긴, 보통은 그냥 직원 시킬 텐데.”
“아니면 팬 서비스라면서 선수들이 할 텐데요.”
그러자 메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선수들 중에 한국식 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잖아.”
“네, 하지만 팬들도 배워서 했으니까 썩 어려운 동작은 아닐 것 같은데요.”
“시즌 중이니까.”
메시의 대답은 단호했다. 순간 말문이 막힌 로드리게스를 향해, 축구의 신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시즌오프에는 우리도 이것저것 이벤트를 해. 지역 병원도 가고, 팬 사인회도 하지. 우리 주장과 부주장은 팬이라면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해.”
“하지만, 시즌 중에는 절대 선수를 건드리지 않는다··· 는 거군요.”
“그렇지.”
메시의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딱딱했고, 살짝 어두웠다. 그래서 로드리게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만델라 컵 출전과 무패 우승을 바꾸신 게, 아직도 한이 되셨습니까?”
“조금은.”
축구의 신이 바르샤에 몸담았을 때의 일이다. 보드진이 만델라 컵 친선 경기를 굳이 시즌 중에 치르기로 결정한 바람에, 당시 바르샤 선수단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야 했다.
지옥길이라는 러시아 원정은 애교로 보여질 장거리 투어에, 무패우승의 대기록이 눈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던 날을, 축구의 신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 동안은 정말 축구만 하고 싶어. 그래서 선덜랜드에 왔어.”
“그렇게 되겠네요.”
로드리게스는 흘끗, 주위의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챔스 디펜딩 챔피언이, 슈퍼컵에 이렇게 목말라 하는 거 처음 봤거든요.”
경기장 곳곳에 붙은 포스터를 노려보는 선덜랜드 선수들의 눈빛은, 마치 원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누가 보면 언제 세비야에게 지고 탈락한 적이 있냐고 생각할 만큼.
대답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그야, 작년에 슈퍼컵을 내줬으니까, 올해는 가져와야죠.”
부주장 요니의 이야기에, 3주장 에디가 곧바로 끼어들었다.
“난 아직도 유베 유니폼 방에 걸어 뒀어. 슈퍼컵 챔피언 마킹 들어간 놈으로.”
“아, 너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축구의 신에게 부드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이 팀이라면, 정말로 축구만 할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