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14화 (314/422)

314화 왕의 귀환 (3)

경기를 앞두고 팀의 스타팅 멤버를 발표하기 전, 하퍼는 이미 반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리델이 뛸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리델은 지난 시즌 팀을 빅 이어로 이끌었고, 올 시즌의 폼도 하퍼 못지않았다. 즉, 자연스러운 세대교체 수순이 다가온 것이다.

슬프지는 않았다. 크게 서운하지도 않았다. 조금도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 팀에서라면, 다시 세컨 키퍼가 되더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원래 하퍼는, 스스로를 챔피언십에서나 통할 재목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팀은 어느새 챔스 우승팀이 되어, 유럽의 왕을 자처하고 있다.

슬슬, 한 걸음 물러나기 좋은 시기다.

그렇다고 당장 옷을 벗지는 않을 것이다. 팀에는 언제나 세컨 키퍼가 필요하고, 때로는 자신의 노련함이 젊은 리델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 그리고 선덜랜드가 키워야 할 또 다른 키퍼 유망주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감독의 생각은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오늘 선발은 하퍼다.”

“가, 감독님?”

당황하는 하퍼에게, 브라이언이 단호하게 물었다.

“왜, 자신 없나?”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무심코 리델 쪽에 고개를 돌리자, 부드러운 미소가 하퍼를 반겼다. 이윽고 브라이언의 설명이 이어졌다.

“원래는 네게, 유베에게 설욕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대진표는 내 마음대로 정해지는 게 아니더군.”

그러니 하다못해 슈퍼컵 무대에서 다시 한번 뛸 수 있게 하겠다는 마음이 고마워서, 하퍼는 말을 잇기 어렵다고 느꼈다.

“···네.”

“물론 오늘의 상대, 세비야는 정말로 강력한 팀이다. 유로파리그의 최강자 자격으로 와 있는 팀이니, 적어도 슈퍼컵에서는 유베보다도, 바르샤나 뮌헨보다도 강한 적이라고 생각해라.”

브라이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러므로 오늘의 컨셉은, 단단함이다. 인내심 있는 축구를 해라. 승부차기를 가도 좋다는 마음으로 버텨내라. 그렇게, 상대를 조급하게 만들어라. 할 수 있겠나?”

하퍼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찡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골키퍼 장갑에서 열기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지난 슈퍼컵, 선덜랜드는 자랑하던 승부차기에서 무너졌다. 그리고 그날 하퍼는 유베의 킥을 막지 못한 키퍼이자, 마지막으로 실축한 키커였다.

그런데도 팀은 또다시 그에게 선발을 맡겼고, 굳이 ‘승부차기 가도 된다는 마음.’ 으로 버텨내라는 지시까지 덧붙였다.

‘감독님, 그건 이기기 위한 지시가 아니잖아요.’

선덜랜드가 굳이 세비야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끌고 갈 이유는 없으니, 조금 전 지시는 골키퍼를 격려하기 위한 목적에 가깝다.

물론 하퍼는 감독의 격려에, 최선을 다해 부응할 생각이었다.

선수 입장 신호에, 하퍼는 천천히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보다 훨씬 작은, 하지만 아름다움은 크게 뒤지지 않는 보석 같은 경기장올 올려다보았다.

관중석 스탠드는 이미 선덜랜드의 붉은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상태였다. 그들 앞에서, 선덜랜드 선수단이 원진을 짜기 시작했다.

“오늘은 드디어, 벽에 걸어둔 검은 유니폼을 떼는 날이다.”

작년 슈퍼컵의 패배 이후, 걸어 두었던 우승팀의 유니폼을 치워버리는 것, 선덜랜드 선수들이 지난 일 년간 줄곧 기다렸던 꿈이었다.

“누군가는 세비야를 언더독이라 부르겠지. 우리는 챔스 디펜딩 챔피언이고, 그쪽은 유로파 우승팀이니까. 하지만.”

평소 기운차던 주장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차분했다.

“우리는 한 번도 슈퍼컵을 가진 적이 없다. 세비야는 있지. 그러니 오늘은 우리가 도전자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힘이 있었다.

“일 년 전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뛰자. 도전자답게, 마지막까지.”

잠시 후 선덜랜드 선수들이 원진을 풀고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하퍼 역시 마찬가지로, 골마우스를 향해 걸었다.

도전자답게, 이제 첫 슈퍼컵 트로피에 도전할 동료들의 등 뒤를 지키기 위해.

선수들의 머리 위에, 함성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유에파 슈퍼컵, 선덜랜드 대 세비야]

경기는 초반부터, 유럽 최강자를 가린다는 명분에 어울리는 수준 높은 접전이었다.

우리는 잭, 요니, 로드리게스가 중원을 지키고, 마르틴과 바스티아노, 메시를 쓰리톱으로 세웠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스티븐이 라이트백으로 출전했다는 것이었다.

원래 풀백 출신이고, 최근에는 디펜시브 윙어로 활약하는 스티븐은 유사시 풀백을 볼 수 있는 인재다. 특히 오늘 경기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 라이트윙은 축구의 신이니까.

“오빠, 이거 브라이언 씨가 배짱부리는 거 맞지? 세비야 풀백 못 올리는 거 이용해서.”

“그렇지.”

이제 희주도 어디서 축알못 소리는 안 듣겠지 싶어, 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세비야도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건 아니고,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윙어를 안쪽으로 파고들게 지시하면서, 측면에서만 뛰는 스티븐의 약점을 노렸다.

수준 높은 경기, 서로 치열하게 치고받는 두 팀과 서포터의 외침 속에서, 우리가 먼저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했다.

전반 20분. 요니의 패스를 받은 마르틴이 좌측면을 파고들었다. 가속이 붙은 마르틴의 질주는 매서웠고, 수비 한 명 정도는 순식간에 따돌리고 말았다.

따라붙는 커버를 피해, 라인을 따라 질주하던 마르틴이 공을 슬쩍 밟아 누른다.

“잘한다!”

완벽한 급정거. 관성을 이기지 못한 수비를 유유히 따돌린 마르틴은 우리 팬들의 환호를 배경 삼아 바이털 에어리어에 진입했고, 박스 안쪽에서 기다리던 메시에게 짧은 패스를 전달했다.

“나이스 드리블! 나이스 플레이!”

마치 득점에 이미 성공한 것처럼 팔짝팔짝 날뛰기 시작한 희주의 곁에서, 나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아니야.”

내 독백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축구의 신은 그대로 몸을 돌리며 공을 흘렸다.

그 순간 경기장의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메시의 한 동작에 낚인 세비야 수비진의 움직임과 정반대로 굴절된 공은, 파고드는 바스티아노의 앞에 떨어졌다. 완벽한 노마크다.

“그렇지!”

완벽한 찬스에 환호하는 사이, 세비야 골키퍼가 필사적으로 달려 나왔다.

바스티아노는 마지막까지 침착했다. 파고든 기세를 살려 다이렉트 발리를 차는 듯한 자세였지만, 정작 공이 도착했을 때는 트래핑으로 한 박자 접으며 골키퍼를 완전히 피해 네트를 흔들었다.

[선덜랜드 1 - 0 세비야]

* * *

슈퍼컵이라는 큰 무대를 맞아, 선덜랜드 유소년 대부분이 원정에 동행한 상태였다.

숨도 쉬지 않고 경기를 지켜보는 유소년 사이에서, 테오와 바르카의 목소리만 평소처럼 울렸다.

“캡틴, 캡틴! 우리가 선제골 넣었어!

“선제골, 선제골!”

“이제 끝난 거지? 이긴 거지? 이제 잠그면 그만이잖아. 그치, 캡틴?”

짐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쉬우면 얼마나 좋겠니.”

득점은 결국 이기기 위한 수단, 승리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축구는 이기려고 하는 종목이니까. 선덜랜드의 숙적, ‘그 팀’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게다가 끝까지 ‘잠그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수비진과 골키퍼가 받는 부담이 상당하다. 테오나 바르카 같은 공격진은 모르겠지만, 같은 골키퍼인 짐은 잘 알고 있었다.

“아! 대답했다.”

테오와 바르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짐은 문득 그 표정이 무척 친숙하다고 생각했다. 주로 클라라가 그를 놀릴 때 짓던 표정이다.

“캡틴 부른 거 아닌데?”

“캡틴은 이제 우리 캡틴이 아닌걸.”

까불거리는 테오와 바르카의 머리에, 꿀밤 두 방이 내려꽂혔다. 이어서, U-15팀의 새 주장이 된 월터가 짐을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캡틴. 제가 잘 타이를게요.”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는···.”

선덜랜드 U-15의 새 주장 월터는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뛰는 선수로, 체격이 좋고 성실하다. 비록 기준을 테오나 바르카에 잡으면 평범하고 투박한 면이 드러나지만, 그건 동 세대 축구소년 대부분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라 굳이 약점도 아니었다.

“자, 캡틴께 사과해야지.”

그러자 테오는 잠잠해졌지만, 바르카는 여전히 투정을 부렸다.

“피이··· 캡틴이 너무 많아서 헷갈린단 말이야.”

짐은 피식 웃었다.

“헷갈릴 거 없어. 선덜랜드의 캡틴은 언제나 딱 한 사람이거든.”

부드럽게 말하면서, 짐은 그라운드 위에 시선을 돌렸다.

“아직 70분 남았다! 한 골 정도로 만족하지 마. 끝날 때까지 더 뛰어!”

주장 완장을 물려받은 지 이제 네 시즌째를 맞이한 미드필더, 1군 주장 잭이 주위에 쉼 없이 지시를 보내는 중이었다. 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흠뻑 젖은 유니폼을 입은 채.

테오와 바르카의 입이 동시에 헤벌쭉 벌어졌다.

““멋있다.””

자신들과는 플레이스타일이 아주 대조적인데도, 테오와 바르카는 주장 잭의 플레이에 반한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다르기 때문에 더 반한 걸지도 모른다.

번뜩이는 센스와 날카로운 기술, 타고난 천재성을 가진 테크니션으로선, 폭넓은 활동량과 성실함, 열정으로 뒷받침해주는 동료의 고마움이 더욱 절실할 테니.

마침 U-15의 새 주장은 그런 타입의 선수다.

‘괜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네. U-15도, 그리고 우리 1군도.’

그래도 골키퍼답게, 안도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짐은 주먹을 말아쥔 채 경기장을 응시했다.

슈퍼컵의 주인이 정해지기까지, 이제 70분이 남아 있었다.

* * *

앨리스는 숨죽인 채 경기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경기 관람에는 익숙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관중이 아닌 스태프로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은 느낌이 새로웠다. 특히 이번 슈퍼컵은 더욱 각별했다.

그녀가 팀의 경기 준비를 도왔기 때문이다.

‘전술 싸움이라면 우리 선덜랜드가 질 리 없겠지만···.’

선수단의 기량도, 코칭스태프의 능력도, 구단 전체의 힘도 앞서 있다고 자부한다. 이 팀이 질 리 없다는 신념도 있다.

그래도 막상 경기를 보면, 늘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게 스태프의 마음이다.

세비야의 반격은 그만큼 무서웠다.

‘저 팀은 저력이 있으니까.’

세비야는, 축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유로파 3연패 기록을 가진 팀이다. 어떤 의미로는 챔스 3연패보다도 진기록인데, 유로파 우승팀은 다음 시즌 챔스에 출전하기 때문이다.

챔스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유로파로 밀려날 정도의 전력이면서, 정작 유로파에 돌아온 다음에는 전부 이겨나가야 한다. 그 어려운 조건을 몇 번이나 해낸 팀이 바로 세비야다.

즉, 그만큼 역경에 강하다는 뜻이다.

“안 돼!”

옆자리에서 수잔이 그만 비명을 질렀고, 깜짝 놀란 크리스가 빼액거렸다. 앨리스는 재빨리 크리스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괜찮아. 놀랐구나.”

사실,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수세에 몰린 선덜랜드가 그만 프리킥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페널티라인 앞, 아주 위험한 자리에서. 덕분에 우드 부부도, 브라더스도 얼굴이 사색이 되고 만다.

앨리스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괜찮아요. 저 패턴은 알고 있으니까요.”

‘오른쪽 아래로 찰 확률··· 92%’

사실, 이번 슈퍼컵을 맞아 선덜랜드 분석팀은 유례없는 풀가동 상태였다. 원래 야근이 많은 부서였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가혹했다. 새 분석팀장 루벤의 고집 때문이었다.

[수코님은 가서 전술이나 짜세요. PK 분석을 왜 수코님이 하겠다고 그러세요.]

[페널티 킥은 횟수가 적어서 통계분석도 어렵잖아. 버릇을 볼 수밖에 없는데, 분석실엔 선출이 아무도 없잖아? 그러니까 나라도 도와야···.]

[거,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렇게 샐리를 내쫓은 루벤은 세비야 선수들의 세트피스 버릇을 꼼꼼하게 분석했다. 페널티 킥은 물론, 코너킥과 프리킥 상황의 패턴까지.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었기에 분석팀은 매일 야근이었다. 심지어 유소년 육성보좌, 앨리스의 지원까지 요청했을 정도다.

[솔직히 이런 버릇은 저보다는 팀장님··· 아, 죄송합니다. 수석코치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현 분석팀장 앞에서 전임자를 팀장으로 부르는 실수를 저지른 앨리스가 황급히 사과했고, 루벤은 미소로 웃어넘겼다.

[괜찮아. 나도 가끔 그 인간을 팀장이라고 부르거든. 그래도 이건 우리 일이야.]

경기 영상이나 통계 자료를 통해 상대의 전술을 분석하고 라인업을 유추하며,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분석팀과 코치가 협력하는 일이지만, 영상에서 선수의 버릇 같은 디테일을 잡는 것은 원래 분석팀의 일이다.

[팀장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주전 라인업 모두의 세트피스 버릇을 찾아내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세비야와 승부차기까지 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동의해. 챔스 디펜딩 챔피언이, 유로파 우승팀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끌려가면 부끄러운 일이지. 정말 그런 꼴을 당하면, 나는 샐리에게 화를 낼 거야.]

[···감독님이 아니라요?]

[야, 나도 위아래는 있는 사람이야.]

[퀸 수석코치님도 상사인데···.]

[그 인간하고 나는 라이센스 동기니까, 대충 넘어가.]

어깨를 으쓱한 루벤의 표정이 바뀌었다. 미소가 사라지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혹시 정말 승부차기를 가게 되면? 그때 가서 죄송합니다. 설마 승부차기까지 올 줄 몰라서 자료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순 없잖아.]

[···그렇네요.]

그렇게 시작한 분석은 페널티 킥을 넘어, 마침내 세트피스 상황 전반을 모두 다루게 되었다.

한없이 이어진 철야 끝에 분석팀은 완벽하게 경기를 준비했고, 그 자료를 코칭스태프에게 넘겼다.

‘방향은 이미 읽었어요. 그러니까···.’

앨리스는 손을 모은 채 경기를 지켜보았다. 도움닫기를 시작한 세비야의 키커, 타이밍 맞춰 점프하는 선덜랜드의 수비벽, 발밑을 파고드는 슛.

그리고, 미리 읽고 있었다는 것처럼 공을 확보하는 하퍼의 모습까지.

“누나가 그랬지? 괜찮다고 했잖아!”

꺄륵거리는 크리스의 아동용 시트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그녀는 온몸으로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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