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코인 토스조차 질 수 없는 사이 (2)
[프리미어리그 2R, 뉴캐슬 대 선덜랜드]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주장 자리는, 팀의 누군가는 경기 시작 전 동전을 던져야 하는 규칙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라고.
비록 선덜랜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팀이었지만, 그래도 경기 전 코인 토스는 분명 주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 따라서 잭은, 왼팔의 주장 완장을 한 번 쓰다듬은 다음 코인 토스를 준비하러 나섰다.
“역대급으로 의미 없는 코인 토스겠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잭은 무언의 긍정을 보냈다. 축구계에는, 원정팀이 절대 후반전에 등지지 말아야 할 스탠드의 명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필드의 스피언 콥 스탠드, 올드 트래포드의 스트렛포드 엔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나이얼 스탠드··· 그리고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레벨 7도 명단에 들어 있다.
예전에는 레벨 7을 의식하지 않았다. 잭이 선수로 뛴 이래, 선덜랜드와 뉴캐슬 사이에는 서포터의 외침만으로는 뒤집기 힘든 전력이 늘 존재했기 때문이다.
5시즌 전에는 선덜랜드가, 그리고 최근 3시즌간은 줄곧 뉴캐슬이 언더독이었다.
하지만 이제 뉴캐슬은 사우디 자본을 등에 업었다. 자금력이라는 점에서는 이희성의 리미트리스 못지않은 상대를. 그리고 공격적인 투자를 등에 업은 축구팀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누구보다 선덜랜드 선수들이 잘 알고 있었다.
선덜랜드는 이제, 후반에 레벨 7을 등지는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코인 토스의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만일 선덜랜드가 코인 토스에서 이길 경우, 선덜랜드는 전반에 레벨 7을 등지는 진영을 고를 것이며, 대신 선공권은 뉴캐슬에 넘어간다.
그런데 뉴캐슬이 코인 토스를 따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뉴캐슬은 당연히 선공권을 선택할 것이기에. 뉴캐슬로서는, 전반에 레벨 7을 바라보고 공격하는 상황도 나쁘지 않다.
누가 이겨도, 결과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코인 토스. 그런데도 잭은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코인을 노려보았고, 사실 뉴캐슬 주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팀은 서로, 코인 토스 하나라도 질 수 없는 사이였기에.
“아자!”
“제기랄.”
잭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했고, 뉴캐슬 주장은 혀를 찼다. 잠시 후 진영 선택을 끝낸 두 팀의 주장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토스는 졌어도 경기는 안 진다.”
“그런 말씀은.”
잠시 멈춰선 잭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 번이라도 이겨본 다음에 하시는 검다.”
“건방진 새끼. 오늘 너희가 무슨 수작 부릴지 전부 알고 있어. 우리도 분석팀을 강화했거든.”
“아, 축하드림다.”
아마 사실일 것이라고, 잭은 그렇게 생각했다.
분석팀 스태프는, FFP 제한을 의식하지 않고 강화하기 좋은 직종이니까. 영상이나 통계 처리는 외주를 써도 되고, 무엇보다 전통적인 감독처럼 고액의 몸값을 받아 가지도 않는다.
브렌트포드 같은, 머니볼 지향의 스몰 클럽들이 앞다투어 분석팀을 강화하는 이유다. 그리고 선덜랜드도 하부 리그 시절부터 분석팀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하지만···.
‘그저 읽기만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닐 텐데.’
이미 코치진으로부터 전달받은 이야기였기에, 잭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분석팀이 가장 데이터를 뽑기 힘들어하는 시기는, 당연하게도 시즌 초다. 서로 기껏해야 한 경기, 두 경기를 치른 상황이니 판단의 근거로 삼을 자료가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대에 대해 아예 모를 일은 없다. 그래도 명색이 같은 리그에서 뛰는 상대끼리는, 매년 최소 두 번씩은 마주치니까.
그런데 세상에는 항상 예외가 있다. 그리고 지금의 뉴캐슬은 예외에 속하는 사례였다.
베스트 일레븐의 절반이 갈렸고, 감독도 바뀌었다. 심지어 그 감독은 지도자 경력이 극단적으로 짧다. 브라이언처럼 코치로 오래 활동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바뀐 뉴캐슬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신호를 보낸 것이다. 아주 읽기 쉬운 신호를.
프로 분석팀이라면 당연히 선덜랜드는 뉴캐슬전에 다이아 4-4-2를 들고나올 거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근거까지 안겨 줬다. 그렇게 하고 나면···.
[다이아 4-4-2 상대로 측면을 노리는 건 상식이지. 마침 개막전에서 브렌트포드가 깨지는 걸 봤으니, 설마 우리 중원을 상대로 힘 싸움을 벌이지는 않을 거고.]
[그러면 힘 싸움이 아니라 기 싸움 하자는 소리죠. 자, 그럼 뉴캐슬이 가진 측면 자원을 검토하면···.]
상대가 합리적으로 판단한다고 가정하면, 예상 라인업을 추측하기도 간단해진다.
아무튼, 우리 코칭스태프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술 천재들이고, 우리 분석실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곳이다. 리그 원 시절부터 영상 프로덕션 한 곳을 통째로 인수하고, 전용 분석툴을 따로 개발할 정도였으니까.
약간의 단서만 생기면, 전술과 분석 싸움에서 우리가 질 리는 없다. 지금처럼.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뉴캐슬 감독 시어러가 필사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공 돌려! 사이드로 빼!”
그때마다, 우리 선수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패스 루트를 자른다. 그리고 공을 빼앗을 때마다 가차 없는 역습을 가했다.
우리가 준비한 대로의 전개였다.
* * *
모처럼 스타팅으로 출전한 베리는, 감흥에 젖은 표정으로 피치의 감촉을 확인했다.
선덜랜드로 이적한 뒤, 그동안은 주로 로테이션 멤버로 출전했다. 경기 감각을 유지하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단, 그동안에는 주로 윙어로 뛰었고, 최전방에 선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최전방은 기대 안 했는데.’
이 팀에는 베리 자신보다 나은 공격수가 많았다. 전통적인 9번 바스티아노나, 역사상 최고 자리를 다투는 축구의 신 메시, 그리고 천부적인 득점 감각을 자랑하는 크리그까지.
그렇기에 베리는, 자신이 스트라이커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물론 기회를 거절할 생각은 없다. 마침 뉴캐슬전은 무척 고대하던 경기였다.
베리는 슬쩍 시선을 돌려, 자신의 투톱 파트너로 출전한 터너를 바라보았다. 벌써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긴장 풀어.”
“긴장한 거 아닌데요. 그냥 옛날 일이 좀 생각나서.”
“옛날? 아, 그랬지.”
베리와 터너는 게이츠헤드 지역 출신으로, 원래 8부 리그에서 뛰던 선수들이었다. 당시 그들은 FA컵에서 만난 뉴캐슬 선수로부터 지독한 모욕을 당한 적이 있다.
무려 팀의 페넌트를 뒤로 내던지는 방식의 세레머니였다.
그날, 그들 모욕한 뉴캐슬 공격수 앨런이 마침 선발로 뛰는 모습은, 베리와 터너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베리 씨, 벌써 잊어버리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다만, 감독님께서 말씀하셨잖아. 감정적으로 뛰지 말라고. 그러니 분풀이는 휘슬 울리고 하자.”
“그러죠.”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베리와 터너는 달리기 시작했다. 경기를 앞두고, 브라이언과 샐리에게 들은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자, 들어봐. 뉴캐슬은 우리 중원과 맞대결을 피할 거야. 따라서 공은 주로 측면에 전개되겠지?]
[아마 후방에서 공을 돌리며 풀백을 전진시키려 할 거예요. 베리, 터너. 두 사람은 그걸 방해해주세요. 공을 빼앗지 못해도 좋아요. 그저, 뉴캐슬을 아주 힘들게 만들어주세요.]
베리는, ‘뉴캐슬을 아주 힘들게’라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마침 그는 주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선덜랜드 제일의 준족으로 불리는 주장 잭이나, 스티븐, 마르틴 같은 전문 윙어와 비교해도 스피드로 뒤진다는 생각만은 해본 적이 없다.
땅을 박차고 가속해, 공을 따라 달렸다.
“무슨 황소냐? 공만 보면 아주 정신 못 차리고 달려드네!”
트래시 토크를 날리며, 뉴캐슬 수비진이 공을 돌렸다.
베리는 대답 대신 끝까지 공을 추격했다. 비록 공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상대를 퍽 피곤하고 당혹스럽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옆에서는 터너가 똑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잭과 요니가 상대 미드필더를 따라 움직이며 패스 길을 제한했다.
‘됐어!’
잠시 후, 압박을 견디다 못한 뉴캐슬 수비가 공을 길게 걷어찼다.
‘계획대로네.’
처음부터, 뉴캐슬 수비가 부정확한 롱 패스를 차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선덜랜드의 3선 톰슨은 센터백을 볼 수 있는 선수고, 레프트백 베넷 또한 거구다. 반면 뉴캐슬 공격진은 전부 작고 빠른 타입들이라, 공중볼 경합에서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공을 뺏는 건 여러분의 역할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역할은···.]
예상대로 공이 선덜랜드에 넘어온 걸 확인한 베리가, 순간적으로 가속했다.
[최전방의 역할은 언제나 똑같아요. 점수를 뺏는 거죠.]
베리의 격렬한 움직임에 뉴캐슬 수비 사이에서 불만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라인 브레이킹? 이 타이밍에? 아니, 이 자식이 우릴 호구로 아나!”
“8부 리그도 아니고, 프리미어에서 지금 타이밍에 스루 패스가 먹히겠냐?”
뉴캐슬 수비진의 조롱이나 도발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베리는 계속 질주했다. 아무튼 베리는 무척 발 빠른 선수고, 마침 가속까지 붙은 상태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뉴캐슬 수비는 베리를 어쩌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당장 선택해야 한다. 라인을 올려 베리를 완전히 오프사이드 위치로 보내버릴지, 아니면 라인이 흐트러지더라도 한 명을 베리의 마크로 쓸지.
뉴캐슬의 선택은 전자였고, 선덜랜드는 곧바로 그 선택을 응징했다.
베리는 전력으로 달려 들어가다 방향을 틀어 측면으로 빠졌다. 한발 늦은 패스가 베리와 반대쪽 사이드에 날아들었고, 터너가 침투했다.
“속았다! 11번은 미끼야!”
뉴캐슬 수비진이 일제히 터너를 뒤쫓기 시작했다.
“괜찮아! 두 놈 다 세모발이야! 킥은 아주 형편없다고!”
‘그렇겠지.’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베리와 터너는 8부 리그 더스턴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체계적 훈련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했었다. 자연히 발기술이 조악하다.
선덜랜드에 옮긴 이래 계속 기술 지도를 받고 있지만, 출발이 늦었기에 여전히 발재간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도, 그런 발재간으로도 점수를 빼앗는 방법이 있다.
잠시 후, 터너가 침착하게 횡패스를 보냈다. 수비 라인을 모두 따돌린 위치였지만, 그래도 전진 패스가 아니었기에 오프사이드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가장 먼저 공 앞에 나타난 선수는, 미끼 역할을 마치고 재침투한 베리였다.
‘나는 이 상황에서 킥 페인트는 못 해. 그런 건 바스티아노나 할 수 있는 재주지. 크리그 씨처럼 크로스바 아래를 빠듯하게 노릴 자신도 없어. 그래도···.’
둔탁하고 투박하지만 빠른 발놀림으로, 베리는 그대로 공을 몰아 골라인을 향해 돌진했다.
잠시 후 비명과도 같은 탄식이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가득 메웠다. 뉴캐슬 팬들의 절망적인 목소리는, 베리에게, 자신이 득점에 성공했음을 확신시켰다.
[뉴캐슬 0 - 1 선덜랜드]
“나이스 슛! 베리 씨··· 어디 가요?”
“세레머니하러.”
“원정 관중석은 그쪽 아닌데요?”
“나도 알아.”
세레머니 형식을 빌려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뉴캐슬 홈 팬을 도발하게 되겠지만, 사실 베리가 세레머니를 보여주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었다.
바로 뉴캐슬의 77번, 앨런이었다.
유니폼 상의를 벗으며, 베리는 앨런의 곁을 스쳐 스탠드에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유니폼을 자랑스럽게 펼쳐 내밀었다.
* * *
뉴캐슬 감독 시어러는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피치를 응시했다. 선제골에 이어 굴욕적인 유니폼 세레머니까지 당했는데도, 뉴캐슬의 상황은 썩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인을 올리며 공세에 나섰지만, 외려 역습을 허용해 두 골이나 추가골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뉴캐슬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대, 선덜랜드의 유스 출신 주장단 JJ 듀오에게 사이좋게 점수를 뺏겼다.
그리고···.
득점을 성공시킨 JJ 듀오는 스코어보드를 한 번씩 흘끗 올려봤을 뿐, 별다른 세레머니를 하지 않았다. 이기고 있는 상태에서의 노 세레머니. 어떤 의미로는 더비 라이벌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굴욕이었다.
분개한 뉴캐슬 선수들이 필사적인 반격을 펼치며 한 골 따라잡나 싶었지만, 오히려 교체 투입된 크리그에게 쐐기골을 얻어맞으며 참패하고 말았다.
[뉴캐슬 1 - 4 선덜랜드]
대패한 뉴캐슬 감독, 시어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감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분노와 좌절감을 온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표정은 냉정하지만, 얼굴 전체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주먹 쥔 손은 파르르 떨렸다.
현역 시절 수도 없이 싸워온 더비 라이벌에게 홈에서 대패한 굴욕감과, 상대 코칭스태프와의 전술 싸움에서 완패했다는 부끄러움이 그를 거세게 몰아붙인 것이다.
하지만, 그를 가장 분노하게 만든 것은 양 팀 선수들의 얼굴이었다.
“와, 드디어 선덜랜드 상대로 한 골 넣어보는구나!”
“그렇지. 저놈들도 무적은 아니라니까?”
홈에서 대패했음에도 그저 한 골을 넣었다는 사실에 희희낙락하는 뉴캐슬 선수들과 대조적으로, 선덜랜드 선수들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비록 별 이야기는 없었지만,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압승했지만, 그래도 뉴캐슬에 한 골을 내줬다는 사실이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만다, 이따가 회장에게 면담 좀 하자고 전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