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누구보다 빠르게 (1)
<가장 빠른 선수는 빨리 달릴 수 있는 선수가 아니라 경기의 문제를 가장 빨리 풀어나갈 수 있는 선수이다 -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프리미어리그 3라운드, 브라이튼전을 앞두고 우리 선덜랜드가 발표한 라인업에 사람들이 발칵 뒤집혔다.
- 또 다이아 4-4-2임? 아무리 봐도 선덜랜드에서 쓰기 좋은 포메이션은 아닌 것 같은데?
- 브라이언이 드디어 명장병이 도진 게 아닐까?
첫 출전한 챔스에서 우승했을 정도인데도, 막상 브라이언에 대한 SNS상의 여론은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다.
내 짐작이지만, 원인은 아마 인터뷰일 것이다. 사람이 알아듣기도 힘든 지리멸렬한 멘트를 특기로 삼는 브라이언은, 얼핏 보기엔 정신세계가 굉장히 특이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브라이언이 특이한 건 식성밖에 없고, 정신은 아주 멀쩡한 편인데···.
비서 의자 쪽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포모어 징크스 이야기도 나오던데요?”
어··· 축구계에서는 이미 무리뉴가 그 징크스 깨지 않았나?
“다른 의견은?”
“체력을 안배할 필요성도 이해하고, 언더독 상대로 메시나 마르틴을 내기는 너무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리그 세 경기 연속 결장은 너무한 거 아니냐는데요?”
“그게 다야?”
“솔직히 메시 선수 정도 위상이면, 벤치행에 불만을 표출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어요. 또 궁금하신 건요?”
슬슬 다른 게 궁금하던 참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최다미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희주가 쓰던 비서 의자를 점거한 다미가, 햇살 같은 미소를 내게 보냈다.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꽤 중요한 건데요.”
“보고?”
물어보면서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 능력 때문에, 리미트리스는 투자 손실을 볼 일 없는 회사가 되었으니까. 심지어 다미가 법률부터 회계 장부까지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으니, 사고 날 일도 없다.
그러니 다미가 영국까지 직접 날아와 보고할만한 일은 거의 없을 텐데···?
그런데 다미의 표정은 의외로 진지했다.
“업계에 인력이동 현상이 빈번해서요.”
“누가 리미트리스 인력을 빼간단 말이야?”
“설마요. 그랬으면 보고가 아니라, 시말서부터 드렸겠죠. 하지만 우리 회사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이동이 활발해요. 마치··· 어느 분이 유도하셨던 미드필더 연쇄이동처럼요.”
“그래서, 진원지는 어디지?”
물으면서도 나는, 이미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잠시 후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사우디죠. 사우디 국부펀드요.”
“이동한 인력들은 데이터 전문가들이고?”
분야는 다르지만, 분석실에 쓸 수 있는 종류의 인재다. 이번 타인위어 더비 패배로, 그 팀이 분석실을 싹 물갈이한다는 소식은 들었다.
“네! 그래서 구단주실에서 보고드리려고 했던 거죠. 축구단 일이니까요.”
명분 하나 끝내주네.
“진짜 목적은?”
그러자 다미가 배시시 웃기 시작한다.
“음, 실은 리미트리스 SM&C 통해서 들어온 콜라 광고 건이 있는데요.”
“안 해.”
그러고 보니 아마 레전드 매치 때였을 거다. 내빈으로 찾아온 콜라 회사에서, 광고를 찍자는 드립을 쳤다. 그냥 지나가는 말 내지 인사치레로 받아들였는데, 의외로 진지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다미가 직접 날아온 거겠지.
“그래서 나보고 지금 콜라 광고 모델을 하라고? 안 해. 못 해. 구단주 죽었어.”
프리시즌 때도 한번 말했던 것처럼, 사인은 수치사다.
“안타깝네요. 사실 편집도 대충 끝나서 컨펌만 하시면 되는데.”
촬영한 기억이 없는데? 밑장빼기야? 도촬이냐?
“너 같으면 하겠냐.”
“아뇨.”
내 푸념을 깔끔하게 부정한 다미는, 전략을 살짝 바꿨다.
“그래도 선덜랜드 구단주로서는 필요하신 일 아니신가요?”
“그렇긴 해.”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정말로 별세하셨다면, 미ㅁ··· 흠흠, 대리인으로서 제가···.”
“기다려.”
사실 구단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미는 분명 믿음직스러운 업무 파트너지만, 가끔 내 영상이나 사진 같은 것에 이상한 집착을 보일 때가 있다.
직접 확인해야겠지.
“아, 그리고 사장님. 3라운드 관람 말인데요.”
“당연히 할 건데··· 왜?”
“혹시 저도 보고 가도 되나요?”
다미의 눈이 반짝거렸다.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가 자리를 오래 비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왕에 왔으니 경기 한번 보고 가는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
“그래.”
“네!”
다미는 퍽 행복해 보였다.
뭐, 행복하면 좋은 거지. 그래서 나도, 기분 좋게 웃었다.
* * *
우드 일가의 장남, 크리스는 퍽 불행해 보였다. 뭘 잘못 먹었는지 살짝 체한 탓에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축구장에 데려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마일즈 또한 불행해졌다.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보기로 한 약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부부 동반이라는 점이었다. ‘아빠가 있으면 괜찮겠지.’라며 의리 없게 혼자 축구를 보러 가려던 수잔을 크리스가 붙잡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드 일가는 사이좋게 티비 앞에 모여 경기를 지켜보는 처지가 되었다.
[프리미어리그 3R. 선덜랜드 대 브라이튼]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긴 하네.”
“그러게요. 옛날 생각이 나네요.”
부부의 이야기에, 크리스가 반응을 보였다.
“옛날?”
“너 태어났을 때는, 너무 어려서 경기장에 안 데려갔거든.”
“왜애? 나 얌전한데에?”
“얌전하긴 했지. 축구 볼 때는.”
잠든 아기를 깨우지 않기 위해, 슈슈나 양말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중계를 지켜보던 시절을 떠올린 우드 부부가 키득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선발 라인업을 본 우드 부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나저나 요즘 커뮤니티가 시끄럽던데···.”
“네, 둥둥이 엄청 많던데요.”
“둥둥이?”
별 뜻 없이 물어본 마일즈와 달리, 수잔의 얼굴은 아주 볼만해졌다.
“마르틴은 체력 문제가 있다는 둥, 메시도 이제 끝났다는 둥, 팀을 옮기라는 둥···.”
“딱 봐도 악성 어그로네. 팬들 분열시키려는.”
“여기에 또 낚여서, 팀보다 위대한 선수가 어딨냐는 둥···.”
덕분에, SNS 분위기는 겨우 개막 3라운드 만에 꽤 시끄러워지고 말았던 것이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분위기는 어때?”
“로컬 팬이야 항상 든든하죠. 오늘 뛰는 크리그는 팀에서 오래 뛰던 선수고, 베리도 게이츠헤드 출신이잖아요?”
“하긴, 베리도 거의 로컬이나 마찬가지지. 우리 유스가 아니라 그렇지.”
“리그 2연승에 슈퍼컵까지 들었는데도 이렇게 시끄러우니, 지기라도 하면 대체 어떨지 너무 끔찍하네요.”
“그런 온라인 어글 종자는 무시가 답인데··· 선수들이 영향 안 받으면 좋겠군.”
부부의 그런 이야기를 알아듣기에는, 아직 크리스는 너무 어렸는지 아까부터 티비만 보는 중이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이럴 때 보면 크리스는 집중력이 참 좋은 아이였다.
그리고 경기는,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선덜랜드와 잔뜩 물러선 브라이튼의 대결로 흘렀다.
“절대 맞불 놓을 생각 없어 보이네요?”
“이미 보여준 게 있으니까.”
중원 싸움을 시도하던 브렌트포드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았고, 측면을 노리려던 뉴캐슬 또한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본 브라이튼은 당연히 노골적인 무승부, 텐백 전법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선덜랜드가 준비한 해법은 세트피스였다.
프리킥 상황에서는 크리그가 날카로운 킥으로 직접 골문을 노렸고, 코너킥마다 에디와 이고르, 톰슨, 바스티아노를 비롯한 장신 선수들이 헤더를 뻥뻥 시도했다.
그런 노력의 성과로, 경기 시작 25분 만에 바스티아노의 머리가 선제골을 만들었다. 스크린 안에서 포효하는 바스티아노를 바라보며, 마일즈도, 수잔도 일제히 포효했다.
“그렇지!”
“나이스 골!”
[선덜랜드 1 - 0 브라이튼]
크리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기뻐하긴 했는데, 어째 조급해 보인다.
“역습! 여억스읍!”
수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습? 우리가 이기고 있는데?
“그러니까아! 여억스읍!”
순간적으로 마일즈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수잔은, 한발 늦게 의미를 파악했다. 사이드라인 너머에 올라온 교체 팻말을 본 순간이었다.
9번 바스티아노 아웃, 10번 마르틴 인.
덕분에 선덜랜드의 공격진은 온전히 발 빠른 선수 위주로 재편되었다. 지고 있는 브라이튼은 이제 득점을 노리려 올라와야 할 테니, 그 뒷공간을 무자비하게 파헤치겠다는 계산일 것이다.
선덜랜드 감독 브라이언이라면 당연히 할 만한 생각이지만, 이제 겨우 두 살 좀 넘은 크리스가 곧바로 그런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라웠다.
“너무··· 빠른 것 아니에요?”
“···우리 애는 아무래도 축구 신동인 것 같아.”
이제 겨우 걸어다니는 나이라, 공을 얼마나 잘 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축구 보는 눈은 일단 어린아이 수준을 훨씬 넘긴 것 같았다.
그날, 선덜랜드는 브라이튼을 2-0으로 제압하며, 3연승을 달렸다.
* * *
“3연승이라니, 조짐이 참 좋은데요.”
아벨의 평가에, 프레스팀장 애니가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그런 애매한 표현은, 프레스팀이라면 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어···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기사 쓰는 것도 아니잖아요. 특히 저는요.”
같은 프레스팀 소속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벨은 프레스팀 하위 조직, SNS대응팀의 리더였다. 어차피 SNS에 떡밥을 던지고 화력을 끌어내는 업무이니만큼 미려한 문장이나 빼어난 축구 지식이 요구되는 자리는 아니긴 하다.
다만, 아벨의 논리는 애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애니는 오랜 기자 생활을 거쳐 언론사 편집장까지 지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문장을 예쁘게 다듬으란 뜻은 아냐. 그래도 개념은 알아야지. 안 그래?”
“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술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게 다야?”
“으음···.”
SNS상에서 ‘@축잘알’로 통하던 시절에는 나름의 안목을 자랑하던 아벨이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인 중에서 낫다는 것이지, 전문 분석가나 칼럼니스트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망설이는 아벨을 바라보던 애니가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공부 좀 해. 공부! 앨리스만큼도 공부를 안 하니?”
“그럼 앨리스한테 시키시죠.”
견디다 못한 아벨이 그렇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비교는 원래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 법이다.
“걔는 이제 육성단장 보좌잖아. 솔직히 분석팀에 갔으면 되찾아올 자신 있었는데.”
육성단장 페르난데스는 선덜랜드를 넘어, 축구계 전체에서 레전드로 꼽히는 대선수 출신이다. 당연히 구단에서의 입김도 강한 편이라, 애니가 페르난데스의 부하 직원을 빼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분석팀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적어도 선덜랜드 축구단 내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서로 평가되며, 프레스팀보다도 입김이 훨씬 세다.
그래서 아벨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샐리 씨 상대로요? 아무리 팀장님이라도 그건 좀···.”
“무슨 소리야. 샐리는 이제 수석코치고, 분석팀장은 루벤이잖니.”
“그 수석코치님은 아직도 자기 사무실보다 분석실에 더 자주 가신다던데···.”
“아무튼, 앨리스를 뺏겼으니 아쉬운 대로 아벨 너라도 써먹어야겠지··· 아, 어디 축구 천재들 없나?”
그러자 아벨이 한숨을 내뱉었다.
“소문에 따르면 우드 씨네 아이가 축구 천재라는데요.”
“그 소문은 나도 들었는데··· 걔는 두 살이잖아.”
투덜거리며, 애니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은 축구를 잘 몰라도 좋아. 똑똑하고, 일 처리가 빠르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가르칠 수 있으니까.”
“그거 딱 앨리스 이야기네요. 그렇게 앨리스가 좋으시면···.”
“아벨 너도 더 열심히 하라는 소리야··· 우리는 사람 데려오기도 쉽지 않으니까 말이지.”
대우는 후하지만, 구단주의 눈에 맞는 인재가 무척 드문 탓이다. 덕분에 창의력이 요구되는 분석팀, 프레스팀은 만성 인력난 상태였다.
“아, 어디 괜찮은 사람 없나!?”
* * *
브라이튼과의 경기를 치른 후, 다미에게 사흘간 일을 떠넘기고 짧은 휴가를 즐기던 희주가 복귀했다.
“다미 언니, 축구는 재밌었어요?”
희주의 질문에, 다미가 배시시 웃었다.
“네. 완벽한 패턴화의 예시던데요?”
“패턴화요?”
다미는 잠시 웃기만 했고, 희주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브라이언과 샐리가 준비한 우리 플레이를, 설명도 듣지 않고 눈치챈 사람은 아주 드물다. 심지어 다미는 축구를 잘 모르는 편인데도.
얼마간 키득거리던 다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의 두 경기는, 그러니까 일종의 셋업이죠. 앞으로 선덜랜드 상대로는 얌전히 수비나 하라는 선전포고 같은 거요.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눈 깔아. 처신 똑바로 해. 같은 느낌이려나요?”
다미는 불량배 흉내까지 내며 건들거렸지만, 그다지 위협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냥 예뻐 보이기만 했다. 아무래도 연기력은 그저 그런 모양이다.
하긴, 다미 얘 얼굴에 연기력까지 좋았으면 진작에 배우를 하고 있었겠지.
“맞아요. 그 악당들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요?”
“그렇게 수비적인 경기가 되면, 미리 준비한 패턴대로 진행되고 변수가 없어지죠. 그리고 변수가 없으면 더 강한 팀이 무난하게 이기니까요··· 제 생각이 맞나요?”
나는 순순히 시인했다.
“맞아.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었어. 올해 목표는 리그 우승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