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발을 멈추지 않는 팀 (1)
<힘든가? 오늘 쉬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 카를레스 푸욜>
어린, 그리고 나이 든 선수 위주로 출전한 EFL컵 3라운드에서 가볍게 승리한 우리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SNS상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지난 시즌 챔스 우승팀이고, 올 시즌도 챔스 진출이 유력한 팀이라면 당연히 중하위권 팀 정도는 가볍게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 솔직히 이기는 게 정상 아니냐?
ㄴ 맞지. 이기는 게 기본, 디폴트!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폄하하는 무리들에게, 우리 팬들이 슬쩍 폭탄을 투하했다.
- 근데 니네 팀은 왜 못 이겼음?
“‘중위권 상대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프레임이 아닐까?’라는데, 히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희주가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근데 되게 신기하다. 어떻게 알아낸 걸까? 좀 전까지 멋대로 떠들던 인간들이 어디 팬인지 말야··· 프사 같은 걸로 조사한 걸까?”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희주는 예전에 구매한 홈즈 모자를 손으로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예전에, 로저스 감독님 행방을 찾을 때 사려고 벼르던 모자 같다.
기어이 샀나 보네. 하긴 뭐, 얘도 이제 월급 받으니까.
“가만있어 봐. 내가 추리해볼 테니까.”
아니, 이게 추리할 건덕지나 있는 일인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다른 건 몰라도 희주 얘가 명탐정 되기는 글렀다 싶어서.
하긴, 비서가 스케줄 조절만 잘하면 되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희주가 두 손을 들었고, 나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온라인상의 팬덤이 로컬 팬과 좀 다른 건 알지?”
고개를 끄덕이는 희주에게, 슬쩍 덧붙였다.
“SNS나 커뮤니티에서 떠드는 팬들은 대부분 빅 6 팬이라고 보면 될 거야. 그런데 라운드마다, 빅 6 중 한 팀 정도는 못 이기니까.”
“아, 그러니까 지금··· 대충 떠본 거에 찔려서 조용해진 거야?”
“그런 거지.”
대답을 들은 희주의 표정이 미묘해졌는데, 보아하니 허무함과 자책이 공존하는 얼굴이 되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원정 준비나 잘해.”
“원정 준비? 챔스 6라운드는 우리 홈인데요, 갑부 오라버님.”
“그거 말고··· 클럽 월드컵이 슬슬 임박하잖아.”
“그렇긴 한데, 솔직히 클월 그거 준비할 거나 있어? 유럽 챔피언이 우승 못 하는 경우가 훨씬 드물다면서.”
희주의 반론도 일리가 있다. 사실 나도 동의한다. 우리 선덜랜드 선수단이 클럽 월드컵에서 지고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경기장에 설 수만 있으면 말이지.
문제는 일정이다. 클럽 월드컵이 열리는 12월은 아무튼 이벤트가 많은 시기니까.
우선 챔스 조별리그 6라운드가 열리고, EFL컵 8강도 치르게 한다. 누가 들으면 EFL컵 16강은 통과하셨냐고 물어볼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우리가 떨어지겠어?
클럽 월드컵 일정은 정확히 그맘때와 겹친다. 이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축구팀은 정신 못 차릴 만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게 된다.
덕분에 웃지 못할 사건도 종종 생긴다. 예전에 EFL컵과 클럽 월드컵을 동시에 소화하던 헨도네 팀은, 아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정을 만나 선수단을 둘로 쪼개야 했다.
신성한 EFL컵에 유소년 냈다고 까였고, 졌었지. 그래도 리버풀은 좀 낫다. EFL컵만 날린 거니까.
몇 년 전, 뮌헨은 폭설로 공항에 갇혀서 9시간을 보냈고, 덕분에 완벽하게 망가진 컨디션으로 클럽 월드컵과 리그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클럽 월드컵은 어찌 우승했지만, 리그에서는 후유증이 상당했다고 들었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클럽 월드컵 직후에는, 박싱데이가 찾아오거든.
“솔직히 좀 미친 거 아니야? 세상에 누가 일정을 이따위로 잡아!?”
쟤요. 리그 사무국이요.
··· 라고 하면 유에파 탓을 하겠지. 유에파에서는 리그 사무국 탓을 할 게 뻔하고. 어차피 피해를 보는 건 우린데.
“알아들었으면, 차질 없게 준비해.”
원정지원팀부터 메디컬 팀까지, 구단 전체가 매달려 총력전을 다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야기를 들은 희주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표정이 변한다.
“응. 꼼꼼하게 챙길게.”
* * *
이후에도 선덜랜드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늦가을, EFL컵 4라운드에서는 빌라를 맞대결로 제압하며 다음 라운드에 향했고, 챔스 조별리그에서는 3연승을 달리며 조 1위를 확보했다. 리그에서도 무패행진을 이어 나갔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선덜랜드 팬들은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느낌이었지만, 로컬 팬들의 입장은 또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지난 시즌보다 선수단에 걸리는 부하가 훨씬 커진 것 같아서···.”
“오늘도 마지막에 요니가 살짝 다리 절면서 나갔지?”
축구 펍, ‘죽어도 맥켐즈’에서 원정 경기를 지켜보던 핫도그 사내와 브렌든이 우울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비록 선덜랜드가 선수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팀이라는 건 알지만, 경기 중 일어나는 접촉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미지가 누적되면, 결국 장기부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축구팬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구단에서 곧바로 인터뷰를 했다. 경기 종료 직후,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미모의 수석코치, 샐리 퀸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메디컬 체크를 마쳤습니다. 요나스 뮐러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예스!”
브렌든을 시작으로 핫도그 사내, 그리고 다른 손님들까지 일제히 환호했다. 맥주집 사장은 아무래도 가게 주인이라 그런지 비교적 침착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주먹을 꾹 움켜쥐고 있다.
[요니는 다음 경기에도 뛸 수 있습니다. 아, 그렇다고 지금 다음 경기 라인업 알려드리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신나서 메모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유머러스한 샐리의 인터뷰에 펍 안에는 활기가 가득 퍼졌지만, 핫도그 사내는 다시 우울해했다.
“갑자기 코치가 나오는 거 보니, 혹시 감독이 부상당한 거 아니야?”
“감독이 부상을 왜 당해, 이 친구야.”
조금 전까지 경기 잘 지휘하던 감독이 갑자기 부상당할 리 있겠냐며 핀잔을 주자, 핫도그 사내가 움찔거렸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드레싱룸에서 넘어졌는데, 하필 그 자리에 대리석 테이블 같은 게 놓여 있었다거나.”
“차라리 비 오는 날 축구하다가 벼락 맞았다고 하지?”
브라더스가 그렇게 티격거릴 때, 자택에서 우드 부부는 좀 더 평온하고 차분하게 중계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애 키우는 집이라 알콜 함량이 낮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선수가 다쳤다 안 다쳤다 하는 이야기는, 퀸 수석코치가 대신 나와서 하는 게 낫겠지.”
“하긴, 우리 브라이언 감독님은 알아듣기 힘든 인터뷰로 유명하죠.”
“요즘은 그것도 나름의 전술 아니냐던데?”
인터뷰에 지속적으로 대답하다 보면 아무래도 선호하는 전술의 경향이나 축구관 같은 게 노출되기 마련이고, 상대가 대응 전략을 잡기도 쉬워진다. 유명 감독의 전술이 종종 젊은 신예들에게 카운터를 얻어맞는 이유다.
다만 브라이언의 경우 인터뷰에서 축구관을 알아내려면 분석 이전에 통역이 필요할 것 같다는 게 중론이었다.
다행히 브라이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아직까지 선덜랜드는 분석과 전술 싸움에서 한 번도 리드를 뺏기지 않은 채 우세를 점했다.
“그것도 슬슬 아슬아슬하긴 하지만요.”
요즘 들어 라인업을 읽히는 경기가 늘었다. 여러 대회를 소화하는 팀의 숙명인 것이다. 꾸준한 로테이션을 돌리다 보면, 경기의 라인업이 꽤 높은 확률로 좁혀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코칭스태프의 천재성과 선수들의 헌신으로 버텨내고는 있지만···.
우울해지려는 분위기에, 수잔이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죠?”
“맞아. 응원해야겠지.”
“응원.”
언제 일어났는지, 크리스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잠이 완전히 깬 건 아닌지 살짝 멍해 보였는데, 그 와중에도 ‘응원’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응원!”
크리스의 목소리가 우드 일가의 자택에 퍼져 나갔다.
* * *
“우리가 할 수 있는 응원이라면, 역시 굿즈를 더 열심히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해. 경기 관람은 이미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재닛의 의견에, 클라라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구체적으로는 재닛의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 그것도 굿즈야?”
“하하, 요즘 용돈이 빠듯해서.”
머쓱한 표정을 짓는 재닛의 손에는 ‘재닛 스페셜’ 핫도그가 들려 있었다. 반대쪽 손에도 먹거리가 그득하다.
선덜랜드 스페셜 나초 칩, 붉은 살사 소스에 사워크림이 들어간 화이트소스를 나란히 얹어서 선덜랜드의 유니폼을 형상화한··· 칼로리 폭탄이다.
“먹어서 응원하자, 같은 거지.”
“그러다 살찐다.”
한창때의 여자애라면 반응할 수밖에 없는 키워드였지만, 의외로 재닛의 반응은 담담했다.
“괜찮아. 오히려 1kg 빠졌어.”
“진짜? 비결이 뭐야?”
“그야, 열심히 아르바이트 중이니까.”
선덜랜드 스태프 공채에서 ‘나이 제한’에 걸려 탈락한 이래, 재닛은 나름대로 실력을 키우는 중이었다. 학교 끝나고 동네 가게에서 알바로 일하며 접객 요령을 익히는 한편, 밤에는 외국어 공부도 시작했다.
먹는 것보다 칼로리를 더 쓴다고 단언하는 재닛을 향해, 클라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요즘 재닛이 열심히 살아도, 나초에 얹힌 화이트소스 칼로리는 이기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슬쩍 이야기를 돌렸다.
“요즘 알바도 열심히 한다면서, 용돈이 부족해?”
“그게··· 아무래도 경기를 보다 보니.”
경기를 직관한다는 이야기다. 하긴, 그렇다면 학생 용돈에 알바비를 더해도 빠듯할 것이다. 아무리 선덜랜드가 청소년 상대로 티켓을 싸게 판다지만, 영국은 원래 물가가 비싼 나라다. 당연히 축구 티켓도 만만하지 않다.
하물며 해외 원정 직관은 꿈도 꿀 수 없겠지. 재닛이 살짝 풀죽어 보여서, 클라라는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다행히 선덜랜드에는 이런 일을 도와줄만한 사람이 있었고, 마침 클라라와 사이도 좋은 편이었다.
클라라가 재빨리 메시지를 보냈다.
[리지 관리인님, 혹시 저 같은 여자애도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 없을까요?]
답장이 곧바로 돌아왔다.
[있지. 안 그래도 올겨울은 눈이 많이 온대서 걱정이었거든. 12월 딱 한 달만 우리 일을 도와줄 사람 뽑으려는 중이었어··· 근데, 엄청 힘들 텐데 괜찮겠니?]
요즘 클라라는 퍽 건강해졌지만, 리지 눈에는 마냥 병약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클라라는 리지와 알고 지낸 시절의 상당 기간을 병원에서 보냈으니, 리지가 걱정할 만도 하다.
[아, 제가 하려는 건 아니고··· 친구가 물어봐서요.]
잠시 후, 리지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내용을 확인한 클라라가 미소를 지었다.
“면접은 봐야 하겠지만, 구단 알바 자리 하나 있다던데··· 소개해 줄까?”
그러자 재닛이 환호했다.
“그럼 고맙지! 이야, 클라라 너 이제 축구단 관계자 다 됐구나?”
“내가 무슨 축구단 관계자야.”
쓴웃음을 지으며 클라라가 간단히 설명했고, 재닛은 곧바로 이력서를 준비했다. 예전에 공채 때 한번 만들어둔 내용이 있었기에, 스마트폰으로도 뚝딱뚝딱 정리할 수 있었다.
그때, 둘의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보니까 눈이었다.
“벌써부터 이러면, 올겨울 장난 아니겠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확정이네. 짐하고 데이트라도··· 왜 그래?
실실 웃는 재닛과 대조적으로, 클라라의 표정은 어두웠다.
“축구 관계자들은 원래 눈 안 좋아해. 특히 크리스마스에 눈 오는 게 가장 싫고.”
“얘, 언제는 축구단 관계자 아니라면서?”
재닛의 농담에도 클라라의 얼굴은 줄곧 어두웠다. 짐과 어울려 지내면서, 올 12월에 선덜랜드가 어떤 스케줄을 치러야 할지,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관계자들의 염려처럼, 12월 시작부터 영국 전역에 눈이 퍼부었다. 선덜랜드가 있는 영국 북동부도 거세게 눈이 내렸다.
축구의 신은 하늘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올려다 보았다. 어딘가 구멍이 뚫린 게 아닌가 싶은 시선으로.
무리도 아니다. 원래 그의 고국 아르헨티나는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남반구 국가이고, 이십 년간 살았던 스페인 또한 비교적 날씨가 온화한 편이었으니.
스페인도 눈 정도는 내리지만, 우산도 의미 없다는 영국 날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노스이스트는 비교적 강수량이 적고 맑은 날이 많은 지역이라고 들었는데.”
하늘을 응시하는 메시의 곁에서, 요니가 웃었다.
“아, 혹시 그 앞에 수식어 붙지 않았습니까? 영국치고는.”
“···그랬던 것 같아. 그나저나, 이래서 경기장에 갈 수는 있나?”
안 그래도 미리 연락을 받은 상황이었다. 그의 은사 펩이, 자기도 몇 년 전 눈길에 고립될 뻔했다며 조심하라는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하필 이럴 때 원정이네.”
그러자 옆에서 잭이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뭐, 12월 내내 겨울나라일 검다. 그러니 홈경기도 치를 검다. 공평함다.”
“다 좋은데, 나라가 아니라 왕국 아니야?”
그러자 잭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러면 바지 입은 생쥐하고 상담해야 함다. 무섭슴다.”
“나는 눈이 더 무서운데··· 이러다 경기장에 못 가서 실격되는 건 아니겠지?”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슴다.”
잭이 담담하게 말하며 풋볼 스퀘어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평소 선덜랜드 팬으로 가득했을 공간은, 오늘은 붉고 흰 선이 그어진 제설차로 채워졌다.
대충 수십 대에 달하는 제설차 앞에서, 일장 연설을 퍼붓는 시설관리팀장 조엘의 모습이 보였다.
“알다시피, 내일은 보로 원정이다.”
선덜랜드의 더비 라이벌이라면 역시 뉴캐슬이 으뜸이지만, 보로, 그러니까 미들즈브러 또한 그에 버금가는 앙숙이었다. 오죽하면 과거, 구단주 비서 이희주가 삼국지라 평가했을 정도로.
그 미들즈브러가 프리미어리그에 복귀한 상황에, 선덜랜드 토박이 조엘이 평소보다 더욱 열렬한 목소리로 팀원들을 독려했다.
“이깟 눈에, 우리 선수들 이동에 지장이 생기게 하지 마라. 이제부터 여러분은 리버사이드 스타디움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왕복한다!”
“네!”
“각 호차, 10분 간격으로 출발!”
기분 탓인지, 제설차의 엔진 소리가 꼭 선덜랜드를 외치는 합창처럼 들렸다.
그래서일까.
축구의 신은, 아까보다 더욱 거세진 눈발이 이제,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