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발을 멈추지 않는 팀 (3)
마침내 휘슬이 세 번 울리고 양 팀 감독이 가벼운 악수를 나눈 순간, 우리 스태프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리 손 데워 놨지? 선수 몸 식지 않게 주의해서 마사지해.”
“온열 시트 더 가져와!”
줄곧 핫팩을 손에 쥐고 있던 메디컬 팀이 일제히 원정 드레싱룸에 진입했고, 시설관리팀은 물론 원래는 해외 원정을 챙기던 원정지원팀까지 나서서 지원했다. 심지어 무슨 건설 장비를 짊어진 것 같은 인원도 보인다.
아마, 축구계에 종종 일어나는 초자연현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리라. 유독 절묘한 타이밍으로 원정 드레싱룸 보일러가 멈추거나, 수도관이 고장 나는 현상 말이지.
아무리 더비 라이벌이라도, 설마 이런 날씨에 온수를 끊어버릴 정도로 악독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온수차 준비 완료!”
그래도 모든 상황에 맞춰 준비는 해 온 모양이라, 무척 든든하다.
덕분에 오늘의 MOM 디아라는 아주 뜨끈뜨끈하게, 김까지 피워 올리는 상태로 믹스드 존에 모습을 드러냈다.
[데뷔골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디아라 선수 생일이 이맘때로 알고 있는데, 멋진 기념이 되겠네요.]
기자의 의도는 아마, 부모님께 이 데뷔골을 바친다는 대답 같은 걸 기대했을 것이다. 생활고를 이기고 프로로 데뷔한 디아라의 사연은 영국 내에서도 제법 유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아라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이럴 때 선덜랜드 선수라면, 팬들께 바치는 골이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제 생일 축하는 이미 구단으로부터 분에 넘치게 받았습니다.”
의젓한 모습이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옆에서 희주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데뷔골 장면은 꽤 위험천만했다는 의견도 나왔는데요. 축구화 스파이크 옆에 머리를 들이밀었던 거니까요. 혹시 무섭지는 않았습니까?”
“아···.”
눈을 깜빡이던 디아라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몰랐습니다.”
[몰랐다고요?]
“공과 골라인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저와 함께 싸우는 분들이 계신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조심스럽게 대답하던 디아라의 얼굴이, 점점 늠름하게 변했다.
“이 악천후를 뚫고 더비 라이벌의 홈까지 와 주신 우리 팬 여러분, 항상 프로페셔널하게 챙겨 주시는 스태프님들, 그리고··· 경기 내내 눈을 맞으며 응원해주신 구단주님.”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도, 또다시 디아라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춥지도,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 * *
- 선덜랜드 구단주가 무슨 눈을 맞아? 그 양반은 원정 경기에서도 항상 익스클루시브 박스만 쓰는 갑부인데.
- 혹시 고도의 돌려 까기 아닐까? 리버사이드 스타디움 익스클루시브 박스는 눈이 샌다는.
ㄴ 멍청아, 중계도 안 봤냐? 오늘은 일반석에 가 있던데.
ㄴ 어··· 그 양반이 익스클루시브 박스 빌릴 돈이 없진 않을 거고, 혹시 보로가 박스 안 내줬나?
ㄴ 그럴 리는 없음. 구단주 비서는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있었거든.
- 그럼 정말로 그냥 같이 눈 맞으러 내려간 것?
ㄴ ㅇㅇ. 심지어 그 와중에 또 자기 비서는 눈 맞지 말라고 놔두고 내려감. 보통 높으신 분들은 반대로 할 텐데.
ㄴ 여동생이래.
ㄴ 왜 우리 오빠는 썬이 아닌 건가요?
“엣헴, 그것은 당신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죠.”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는 희주를 흘끗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서 일이나 해.”
살짝 후회스럽단 말이지. 선수들과, 팬들과 같이 눈을 맞으러 내려간 사실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지만, 희주를 놔두고 내려간 것은 좀 그렇다.
왜냐면, 후폭풍이 상당했거든.
“금지옥엽이네요! 조금 부러운데요.”
눈을 빛내는 리지를 향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부모님한테나 금지옥엽이지, 저한테는 전혀 아닙니다.”
“에이···.”
전혀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리지를 슬슬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희주만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남겨둔 건 사실이니까, 이럴 때 괜히 대꾸해봤자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뿐이다.
다행히 리지는 금방 업무 모드로 돌아갔다.
“그래서 썬, 저를 부르셨다고요?”
“네. 클럽 월드컵 일정 때문에요.”
“맡겨주세요. 카타르의 경기장은 이미 충실하게 모니터링을 마친 상태라···.”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는 리지를 슬쩍 제지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항공편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공항 운영에 조언을 구할까 해서요.”
“공항이요?”
리지의 눈에 가볍게 지진이 일어났다.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 온다.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폭설에도 잔디 위에 눈 안 쌓이게 할 수 있는 관리인이라면, 공항 활주로에 대응할 노하우도 있겠죠.”
그러자 리지는 비로소 내 의도를 눈치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뉴캐슬 국제공항 정도면 꽤 좋은 공항인데요. 이름만 빼면요. 제설 장비도 충분하고···.”
“네, 제설 장비는 충분하겠죠. 그런데 문제는 커퓨타임입니다.”
공항에는 소음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유로 비행기가 뜰 수 없는 시간대가 있다. 그게 커퓨타임이다.
몇 년 전, 클럽 월드컵에 가려다 공항에 붙들린 뮌헨도, 사실은 순전히 폭설 때문에 갇힌 것만은 아니었다. 제설은 어찌 끝냈지만, 결국 커퓨타임에 걸렸던 것이다.
“으음.”
“앞으로 눈이 얼마나 오든, 공항 제설 작업이 즉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러자 리지가 고민에 빠졌다.
“선덜랜드 제설차 군단이 투입되면 금방이겠지만··· 그렇다고 공항 활주로에 우리 제설차를 함부로 밀어 넣기도 좀 그렇죠?”
“급하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만, 협의가 필요하겠군요. 그나저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눈이 쌓일 틈도 없이 녹아내리던데,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라운드 아래에 열선이 깔려 있으니까요. 그걸로 모자라면 잔디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온수도 살포하지만요.”
“그럼 답 나왔네요. 앞으로는 활주로에 열선 깔면 되겠군요.”
“공항 활주로에 열선을요? 비용이 대체 얼···.”
무심코 대답하던 리지가 말을 멈췄다. 그녀가 눈치챈 것처럼, 세상에는 비용이 얼마 드는지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마인지는, 알다시피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네, 문제는 허가를 얻는 거겠죠.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남의 공항 활주로를 뜯어서 열선을 깔려면 협상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건 알아서 하겠습니다.”
“공사 시기를 클럽 월드컵에 맞출 수 있을지, 그리고 열선이 깔린 활주로를 비상시에 우리가 먼저 쓸 수 있을지도 중요하고요.”
비록 이쪽은 그녀의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일단 한번 말문이 트인 리지는 퍽 꼼꼼했다.
물론, 내게는 그리 고민할 사항이 아니었다. 리지가 지적한 문제는 의결권이 있으면 전부 해결되니까. 그리고 기업의 의결권은, 대체로 비매품이 아니다.
기왕이면 명명권도 구매해야겠다. 리지 말처럼, 뉴캐슬 국제공항은 이름만 빼면 모든 면에서 아주 괜찮은 공항이니까.
심지어 위치도 좋다. 국제대회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마다, 합법적으로 뉴캐슬어폰타인 정중앙을 카퍼레이드로 통과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인 곳이다.
여러모로 투자할 가치가 있는 공항이다. 그래서 나는, 다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뉴캐슬 국제공항 운영사가 어디지?]
* * *
뉴캐슬 회장 비서 사만다는 아연한 표정으로, 회장실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침입자를 응시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곧바로 경비를 불러 침입자를 제압하는 유능함을 보였겠지만, 이번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침입자가 그녀의 부친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뉴캐슬 감독, 시어러는 보기 드물게 격분한 상태였고, 무려 15분간 선덜랜드와, 구단주 이희성을 상대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평소에는 가장 먼저 제지했을 회장 나지프도 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같이 아랍어로 같이 떠드는 중이다. 아랍어를 모르는 사만다조차 내용이 짐작이 간다.
원인은 뻔했다. 신문 기사 때문이다.
[뉴캐슬 국제공항이 리미트리스 국제공항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뉴캐슬 팬들이 그간 선덜랜드를 놀려먹을 때 쓰는 단골 레파토리가 몇 개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멘트, ‘넷플릭스 잘 봤다. 질질 짜는 꼴이 일품이더라.‘는 못 쓴 지 좀 되었다.
선덜랜드에 하필이면 넷플릭스 지분을 가진 구단주가 나타났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후 맞대결에서 체면을 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덜랜드가 질질 짜는 팀이라면, 뉴캐슬은 바로 그 팀에 한 번도 못 이겨본 팀이 된다.
그래서 요즘 가장 잘 써먹던 레파토리가 바로 ‘공항도 없는 거지들’이었는데, 그것도 이제 못 쓰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SNS의 반응이 벌써 뜨겁다. 프로필 사진에 선덜랜드 엠블럼이 붙은 계정들이 아주 맹폭격을 퍼부었다.
- 너희 동네 공항 대주주가 누군지 알아?
- 자, 이제 누가 공항 없는 거지들이지?
자신의 스마트폰을 슬쩍 확인한 사만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솔직히 비서라는 신분이 아니었으면, 그리고 사적으로는 아버지 앞만 아니었으면 그녀도 아주 걸쭉한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부친과 직속 상사보다는 좀 더 냉정했다.
“그나저나 썬 리는 왜 공항에 투자한 걸까요? 설마, 우리가 멕켐즈 못 놀리게 하려고 돈을 바르는 건 아닐 텐데요.”
그러자 시어러와 나지프가 눈을 마주쳤다.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야. 우리 회장은 못 그러지만.”
“그야, 저는 월급쟁이 CEO니까, 감정적으로 일 못 하죠··· 하지만, 썬도 놀림받지 않으려는 이유로 투자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 사람은 축구장에선 덕질에 진심인 구단주이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투자의 신이니까요.”
투덜거리며, 나지프는 신문 기사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사만다와 시어러의 눈이 그의 손가락을 따랐다.
“한편··· 리미트리스 국제공항은 이번 같은 폭설에 대비해, 전 활주로에 열선을 매립하기로 결정했다.”
“단, 공사 기간 중 공항 이용에 차질 없도록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이게 뭐 어때서?”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어러에 비해, 사만다의 눈치가 조금 더 빨랐다. 그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클럽 월드컵!”
그러자 나지프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어러의 반응은 달랐다.
“얘, 사만다. 아무리 그자가 돈이 많기로, 며칠 만에 공항에 열선을 깔 수 있겠니?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이번 클럽 월드컵 갈 때는 열선 못 써먹어.”
“아빠··· 아니, 감독님. 중요한 건 공사를 진행한다는 명분이에요. 이제 리미트리스는 아마 그놈의 레드 앤 화이트 우니모크 수십 대를 공사를 돕겠다면서 공항에 밀어 넣을 거고요.”
뒤늦게 시어러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필요하면, 그 우니모크가 전부 제설차로 바뀌겠군.”
“네, 그리고 선덜랜드 전용기가 뜨고 내릴 활주로 눈을 우선적으로 치워버릴 테니, 몇 년 전의 뮌헨이 당한 것처럼, 공항에 갇힐 일은 없겠죠. 아주 좋은 컨디션으로 카타르에 다녀오겠네요.”
그러자 시어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단순히 우릴 놀리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지. 그럼 됐어. 그런데 회장은 왜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나?”
“공항을 내준 게 너무 뼈아파서 그렇습니다. 제가 왜 공항 생각을 못 했을까요?”
반쯤 멘탈이 나가 보이는 나지프를, 시어러가 위로했다.
“너무 자책 말게. 솔직히 우리가 유럽 대회 가려면, 앞으로 2년은 더 필요하지 않겠나? 그 전에 공항을 이용할 일은···.”
그러자 나지프가 슬픈 눈으로 시어러를 응시했다.
“감독님,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뭡니까?”
“자책? 음, 농담이네. 우리 팀에 투자하고 있지. 그리고 우리 지역에도.”
“네, 감독님 말씀처럼 당장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몇 년 안에 뉴캐슬을 빅클럽으로 만들 겁니다. 매년 챔스에 나가는 팀으로요··· 그렇게 되면 타인위어는 어떻게 됩니까?”
“그 빌어먹을 선덜랜드 놈들이 쉽게 무너지진 않을 테니까, 매년 챔스에 나가는 팀이 두 개··· 어?”
“네, 뉴캐슬 국제공항의 수입이 늘겠죠. 해외 원정을 나갈 일도, 상대 팀이 찾아올 일도 두 배로 늘어나니까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시어러가 입술을 깨무는 사이, 나지프의 이야기가 망연하게 이어졌다.
“가장 열받는 건, 앞으로 우리 펀드가 뉴캐슬어폰타인에 투자하면, 그래서 도시가 발전하면··· 썬이 뉴캐슬 공항에서 받는 배당도 늘어날 거라는 점입니다. 관광객이 늘어날 테니까요.”
사만다는, 거울을 보지 않고서도 자신의 얼굴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어러와 나지프의 얼굴이 차례로 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뉴캐슬 보드진이, 사이드라인 밖에서 선덜랜드 구단주를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움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시어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거, 클럽 월드컵 결승까진 올라가라고 빌어야겠군. 차마 내 입으로 우승을 빌어주진 못하겠지만.”
비서라는 업무 특성상, 사만다는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선덜랜드라면 치를 떠는 그녀의 부친이 왜 태세 전환을 했는지를.
이번에는 나지프의 반응이 오히려 조금 느렸다.
“유럽 챔피언이 결승도 못 가고 떨어지는 법은 없죠. 그런데 감독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시어러가 대답하기 전에, 사만다가 조용히 달력을 내밀었다.
클럽 월드컵에서 돌아온 선덜랜드는, 그 직후 EFL컵에 참가한다. 다음은 바로 박싱데이다. 아주 만신창이가 될 일정이었지만, 사실 그건 선덜랜드 보드진의 관심사이지 뉴캐슬 보드진의 관심사는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나지프는 선덜랜드가 클럽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치기를 열렬히 기원하게 되었다.
박싱데이에 열릴, 프리미어리그 20라운드 일정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20R. 선덜랜드 대 뉴캐슬,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