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지지하고 지탱하면서 (2)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함성이,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도 똑같이 번져 나갔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풋볼 스퀘어에서, 그리고 축구 펍, ‘죽어도 맥켐즈’에서도 거친 사내들의 외침이 타인위어의 하늘을 뒤흔든다.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경기 종료 직전에 시작된 열광적인 함성은 휘슬과 함께 더욱 커졌고, 경기장 위에 단상이 설치되고 트로피 앞에 선수단이 도열한 순간 그야말로 정점에 달했다.
“어우, 유니폼 디테일 봐라. 그새 갈아입었네!”
핫도그 사내의 감탄처럼, 선덜랜드 1군 선수단은 어느새 유니폼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새 유니폼 가슴 정중앙에는 황금색의 클럽 월드컵 배지가 붙었다.
즉석에서 붙였을 리는 없으니, 미리 준비한 것이리라. 만에 하나 결승에서 패배해 자격을 채우지 못할 경우 폐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승용 유니폼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게 선덜랜드 스태프의 정신이다.
“저 금배지 참 탐난단 말이지.”
화면을 흘끔거리며 맥주집 사장이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클럽 월드컵 우승 금배지에는 특별한 맛이 있다. 기본적으로 딱 1년만 쓸 수 있는 데다, 참가를 위한 조건부터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다.
“규정상 리그에선 못 단대. 하지만 챔스나, 다른 컵 대회에선 붙이고 나오니까 상관없지.”
“맞아. 그리고 메가스토어에서 판매해도 상관없을 거야.”
안 그래도 선덜랜드 멤버십 앱에 알림이 신나게 쏟아지는 중이었다.
[클럽 월드컵 배지 킷 동시 발매! 세계 최강 선덜랜드의 자긍심. 저지 킷으로 함께하세요. 제로데이 한정 특가!]
브렌든이 미소를 지었다.
“제로데이 한정 특가면, 오늘 안에 다 동나겠네. 마일즈 그 친구, 배 좀 아프겠는데?”
“마일즈가 왜?”
“직관한다고 카타르에 가버렸으니, 돌아왔을 땐 유니폼 전부 동났을 것 아닌가.”
브렌든이 어깨를 으쓱하자, 옆에선 핫도그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갔어? 난 집에서 보는 줄 알았는데.”
“왜 안 가겠나? 그 집 벌이 괜찮아. 수잔하고 둘이 벌잖아. 게다가 마일즈는 VIP 티켓도 가졌고.”
티타늄 티켓을 가진 마일즈는, 이번 클럽 월드컵에도 구단으로부터 항공권과 숙소를 지원받았다. 비록 경기 티켓은 전부 자비로 사야 했지만, 구단에서 여행경비를 지원하는 시점에서 별문제는 아니었다.
같은 조건이라면, 브렌든은 매일이라도 원정 응원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핫도그 사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내 말은, 그래도 직장 안 잘리냐 이거지. 둘이 같은 회사라면서.”
“어··· 그러게?”
* * *
같은 시각, 카타르,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
경기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마침내 주장 잭이 트로피 앞에 섰기 때문이다.
팀마다 응원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선덜랜드 팬들은 보통 트로피를 들기 직전에는 잠시 함성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기다리다가, 트로피가 주장의 머리 위에 올라오는 순간 일제히 환호를 퍼붓는 방식을 선호했다.
물론 선덜랜드 서포터가 대체로 그렇게 한다는 것으로, 무슨 절대적인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축구는 잘 알아도, 아직 블랙캣츠의 응원 문화까지는 모르는 크리스는 벌써부터 좋다고 꺄륵거리는 중이었다.
마일즈는 흐뭇한 얼굴로 크리스와 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 수잔이 팔꿈치로 마일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여보. 얼른 찍어야죠!”
“아, 참 그렇지.”
부부의 스마트폰이 일제히 카메라 어플을 기동했다. 수잔은 트로피 담당이고, 마일즈는 크리스 담당이었다.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주장의 사진은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순간을 바라보며 웃는 아이의 사진은 장차 크리스에게, 그리고 우드 부부에게 정말로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었다.
그때 마일즈의 스마트폰에 알림 창이 떴다.
[팀장님. 괜찮으시면 전자결재 한 건···.]
워낙 절묘한 타이밍이라, 셔터 찬스를 노리던 마일즈의 얼굴이 구겨졌다.
“휴가 중이잖아. 연차 냈다니까.”
마일즈 부부는 해외 원정을 따라다니기 위해 연차를 전부 탕진하는 경향이 있었다.
올해 연차도 알뜰하게 긁어서 클럽월드컵 일정까지 맞췄던 것이었는데, 막상 팀장이라는 지위 때문인지 중간중간 연락이 오곤 했다.
[팀장님 제발···.]
“아니, 축구 좀 보자. 축구 좀! 애 사진 좀 찍자고!”
마일즈가 발끈했다.
독신 시절이었으면 이직도 검토했을 것이다.
마일즈의 업계 경력은 짧지 않고, 혹시 직장을 옮기더라도 어디서든 환영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워라밸을 지킬 수 있는 삶도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연차 쓴 날 정도는 축구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으로. 하지만 지금은 덜컥 옮기기도 그렇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잔과 같은 직장이라는 특성상 마일즈가 그만두면 수잔도 자연스럽게 사표를 내게 될 텐데, 크리스를 생각하면 부모 둘이 동시에 실직 상태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조만간 대책을 세워야겠군.’
조용히 그룹웨어 앱의 알림을 끄며, 마일즈는 스마트폰 화면 너머에 비치는 크리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자, 놀랍게도, 회사 그룹웨어가 던져준 불쾌감은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세상 아버지들 모두가 당연하게 지나온 일처럼.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주장 잭이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그 열광이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 전체에 퍼져 나간 순간, 마일즈는 아무런 걱정도 불만도 없이 그저 함성을 질렀을 뿐이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 * *
우승 다음 날, 우리 선덜랜드 1군 선수단이 잉글랜드에 복귀했다.
즉, 클럽 월드컵 트로피 또한 영국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공항에 ‘스페셜 땡스 투 뉴캐슬 호’를 출동하라고 지시했고, 조엘의 응수는 한술 더 떴다.
[구단주님. 정말 죄송하게도 스페셜 땡스 투 뉴캐슬 호가 출동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유감스럽다는 대사, 하지만 하나도 유감스럽지 않다는 목소리에서 상황이 짐작이 갔다. 조엘의 성격상 혹시라도 우리 카퍼레이드용 버스에 정말로 문제가 생겼다면 이렇게 목소리가 유들유들할 리가 없거든.
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렇군요··· 대체 가능한 다른 버스가 있습니까?”
[스페셜 땡스 투 뉴캐슬 2호를 구단주님께 소개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리미트리스 국제공항 3번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엘은 공항의 이름을 유독 힘주어 발음했다. 옆에서 통화를 들었는지 잭과 요니의 입이 귀에 걸렸고, 희주는 벌써부터 혀를 찼다.
잠시 후, 우리는 3번 주차장으로 향했다.
3번 주차장 옆 철조망에는 현수막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공항도 없는 거지들 운운하는, 뉴캐슬 팬들 특유의 반격 멘트인데, 딱 봐도 제법 낡았다. 붙인 지 몇 달쯤은 지난 모양이다.
하긴, 공항 지분을 내가 인수했으니 저 멘트를 또 써먹긴 좀 그렇겠지 싶다. 옆에서는 희주가 눈살을 찌푸린다.
“어휴, 지저분해. 그냥 이제 좀 떼 버리지.”
굳이 떼지 않고 놔둔 이유는, 좀 더 다가가니 분명해졌다. 현수막에, 붉은 글씨가 덧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누가 공항 없는 거지들이지?]
희주는 별말 안 했지만, 우리 선수들은 하나같이 입이 귀에 걸렸다. 특히 로컬들은··· 혈관에 피 말고 다른 게 흐르는 듯한 표정이다. 탄산이라거나 마약 같은 것. 이러다 도핑 테스트 다시 하게 생겼다.
그리고 우리는, 빅 이어와 슈퍼컵 뒤에 클럽 월드컵 트로피 조형물까지 올려놓은 ‘2호’ 버스에 올라탄 채, 시티 오브 선덜랜드까지의 카퍼레이드를 실시했다.
- 박싱 데이에 두고보자.
ㄴ 네, 다음 패배자.
- 세계 최강 선덜랜드? 그럼 니들 잡으면 우리가 최강 되는 거 맞지?
ㄴ 한 번이라도 이기고 말씀하세요. 조르디 여러분.
다시 말하지만, 더비 라이벌 상대로는 단순한 말싸움조차 질 수 없다. 잭과 요니까지 가세한 SNS 설전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박싱 데이에 이기는 것뿐이다.
아, 물론 리그 우승도 해야겠지.
그 전에 클럽 박물관에 트로피도 넣어야 하고, 생각해보니 할 일 참 많네.
“오빠, 입에서 침 흐르는데.”
어, 그래.
* * *
퍼레이드를 마친 선수단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도착했다. 카퍼레이드 버스에서 내린 1군 선수단이 일제히 클럽 박물관으로 향했다.
“왔어! 스페셜 땡스 투 뉴캐슬 2호!”
누군가의 환호 섞인 목소리에, 월터는 창밖을 확인했다. 소년의 말처럼 퍼레이드를 마친 1군 선수단이 마침내 도착해 있었다.
이제 잠시 후 트로피가 클럽 박물관의 진열대에 놓일 것이다. 선덜랜드 축구단 관계자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실시하는, 참으로 뜻깊은 순간이다.
특히, 이번 기수의 유소년들에게는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클럽 월드컵 트로피 그림은, 네가 그린 거지?”
U-15 주장 월터의 질문에, 수비수 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먼저 가 있겠다’ 며 뽀르르 클럽 박물관을 향해 달렸다.
그동안 구단이 아직 갖지 못한 트로피는 아이들의 크레파스 그림만 걸어 두지만, 이제부터는 그림 앞에 실물 트로피가 놓인다. 선덜랜드 팬이라면 누구나 필을 부러워할 것이다. 필의 그림은 이제 트로피와 함께, 클럽 박물관에 영원히 남을 테니까.
하지만 사실, 이번 기수 유소년 한정으로 필의 경력은 딱히 놀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유소년 선수는, 물론 축구도 잘해야 되겠지만,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인생을 축구에 한번 걸어보기로 결정할 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꿈을 함께 키워나갈 파트너로, 선덜랜드의 유스 아카데미를 고를 만큼 이 팀을 좋아하는 아이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덜랜드 유소년 선수라면 누구나 어릴 때 플레이어 에스코트나 크레파스 그림 이벤트 응모 정도는 다 경험하기 마련이다.
이 분야에서는 U-18 주장 짐이 가장 유명하지만, 월터나 테오도 만만치는 않다. 예외는 오직 리미트리스 유소년 대회를 통해 합류한 바르카 같은 유소년뿐이었다.
그래서 월터는, 다른 유소년들에 비해 비교적 부러움이 덜한 표정으로, 클럽 월드컵 트로피가 필의 그림 앞에 놓이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났고, 풋볼 스퀘어에서는 또다시 함성이 밀려왔다. 잠시 후, 트로피를 내려놓은 구단주 이희성이 차분하게, 하지만 힘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제, 우리 선덜랜드가 갖지 못한 트로피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한 가지 트로피가 더 필요합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들어온 적 없는, 1부 리그 우승컵을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Sun! Sun! Sun!
“···고맙습니다. 그래도 발음은 똑바로 하시고요.”
구단주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지만, 팬들은 그 뒤로도 썬과 선덜랜드를 적당히 얼버무려 발음하며, 이 순간을 즐겼다. 물론, 월터도 마찬가지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외치는 소년의 어깨 위에, 크고 두툼한 손이 올려졌다.
“저건, 네가 그렸다면서?”
바로 등 뒤에서 피터 톰슨의 목소리가 들려서, 월터의 몸이 잠시 굳었다.
“잘 그렸네.”
몇 년 전, 월터가 크레파스로 그렸던 프리미어리그 트로피 그림을 바라보며, 톰슨이 미소를 지었다. 월터는, 긴장과 흥분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져다주실 건가요? 리그 우승컵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요?”
“물론.”
미소 지으며, 톰슨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건, 선덜랜드의 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