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34화 (334/422)

334화 지지하고 지탱하면서 (4)

시즌 초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시작 전에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코인 토스를 거쳐야 했다. 규칙이 그렇기 때문이었다.

뉴캐슬은 절대 후반전에 나이얼 스탠드를 등질 수 없었고, 선덜랜드는 선공을 강하게 희망했기 때문에 사실 코인 토스는 누가 이겨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상대가 더비 라이벌만 아니었다면 그냥 아무렇게나 동전을 던졌겠지만, 하필 오늘 상대는 코인 토스조차 질 수 없는 사이, 숙적 뉴캐슬이다.

“오늘은 안 진다.”

코인 토스 자리에 나타난 뉴캐슬 주장의 얼굴이, 잭에게는 무척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매튜. 뉴캐슬의 로컬 보이로, 유스 시절부터 잭과는 치열하게 마주쳤던 상대이기도 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잭이 기억하는 매튜는 주장은 아니었다. 실제로 2라운드에 뉴캐슬과 붙었을 때는 다른 선수가 코인 토스를 하러 나왔던 기억이 난다.

“너희, 언제 주장 바꿨냐?”

“너희한테 깨지고 나서.”

잭은 반사적으로 씰룩거리기 시작한 입꼬리에 힘을 넣어,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다.

시즌 초에 브라이언이 농담처럼, ‘그 팀 선수 일곱을 2군으로 처박았다.’는 커리어를 자랑한 것처럼, 이제 잭에게도 무용담이 생긴 것이다.

은퇴한 다음 어디 조용한 펍에서 선덜랜드를 응원하다가, 마치 옛 추억을 떠올리는 듯 담담하게 이야기할 권리가 생겼다. ‘예전에 그 팀 주장을 갈아치운 적이 있었지.’라고.

웃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한편으로는 입맛이 썼다. 상대 매튜가 자신과 비슷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유니폼을 걸친 적 없는 순혈의 로컬 보이, 이런 선수를 주장으로 삼을 때, 팀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잭은 이미 알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선공권을 따낸 잭이 천천히 돌아섰다.

내쉬는 숨이 뽀얗고, 뺨에는 눈이 닿아 녹아내렸다. 혹자는, 딱 경기가 취소되지 않을 만큼의 선을 간신히 지킨 만큼의 악천후라고 평가한 날씨다.

그런데도, 어쩐지 조금도 춥지 않았다. 그리고 잭은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언제나처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운 팬들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잭은 천천히 자기 진영을 향해 걸었다.

* * *

우드 일가와 브라더스도 경기장에 향했다. 모처럼 앨리스도 함께였다.

오늘은 단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클럽 월드컵 우승 유니폼 상의를 입은 채 응원했다. 유일한 예외는 아직 어린 크리스였는데, 엄마 수잔이 이런저런 방한복으로 칭칭 싸매 놨기 때문이었다.

원인은 날씨였다. 어른이라면 경기와 응원의 열기, 시트에 깔린 열선으로 별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의 추위도 아이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수잔은 원래 크리스와 함께 집에서 축구를 보려고도 했었지만, 크리스 본인이 직관을 열렬히 희망했다.

“으응워언!”

목소리를 높이는 크리스를 빤히 바라보던 핫도그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이쿠, 그놈 참 기운도 좋다. 나중에 좋은 블랙캣츠가 되겠어.”

크리스는 두꺼운 옷이 불편했는지 오늘따라 자세를 바르게 잡지 못하고 기우뚱거렸고, 버둥거리는 몸짓 또한 둔해 보였지만, 정작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조차 귀엽게 보일 뿐이다.

특히 앨리스는 아주 사진 찍고 난리가 났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브라더스 사이에서, 이번엔 브렌든이 입을 열었다.

“우리야 그렇다 치고 여자들은 추울 텐데···.”

“괜찮아요. 시트에 열선 있으니까요.”

수잔의 쿨한 대답에, 앨리스가 피식 웃었다.

“어, 수잔 씨. 이럴 땐 선수들도 이 차림으로 밑에서 싸우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대답하는 거 아니었어요?”

“우리끼리 뭘 새삼 뭘 그래.”

물론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수잔 또한 선수단과 싸울 생각 만반이었다. 이런 날씨에 굳이 보란 듯 클럽 월드컵 우승 레플리카를 입고 나타났으니.

선덜랜드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뉴캐슬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우리 선수들 표정이 아주 좋아 보이네.”

더비전만 되면 미쳐 날뛰는 잭과 요니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선발 출전한 마르틴과 바스티아노 같은 선수들의 표정 또한 아주 비장하다.

“하긴, 저 선수들도 이제 선덜랜드 사람 다 되었더라고. 바스티아노는 단골 카페도 생겼다던데.”

맥주집 사장의 코멘트에 호기심을 느낀 앨리스가 눈을 빛냈다.

“하긴, 이탈리아 사람은 커피 없이는 하루 시작 못 하죠··· 그래서 어디래요?”

일반 팬이었다면 선덜랜드 축구단의 간판 스트라이커를 보고 싶은 의도였겠지만, 앨리스는 구단 스태프라서 선수의 사생팬 노릇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커피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탈리아인이 단골 삼는 카페에서 내려 주는 커피에 훨씬 관심이 컸다.

마침 그녀는 구단 내에서 분석실, 프레스팀 사람들과 친한 편이었는데, 고쳐 말하면 그녀의 직장 동료들은 죄다 만성 카페인 중독자들이라는 뜻이다.

하다못해 커피라도 맛있는 걸 사다 주고 싶었던 의도였지만, 아쉽게도 맥주집 사장은 순순히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비밀이야. 알려주면 가게 영업에 방해가 되거든.”

“어··· 오히려 장사가 잘되지 않을까요?”

“사장 말로는 자기는 그냥, 아는 사람만 즐기고 가는 조용한 가게를 운영하고 싶다더라고.”

그때 마일즈가 입 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쉿. 시작한다.”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맥주집 사장과 앨리스가 동시에 이야기를 멈췄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정적 속에서 마침내 휘슬이 울렸다. 우드 일가와 브라더스, 앨리스가 일제히 입을 모았다.

We're Black Cats supporters.

* * *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우리 경기가 대부분 그렇듯, 오늘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도 만석이었다.

축구계 최대의 대목 행사인 박싱데이에, 더비 매치라는 특수성이 더해지자 풋볼 스퀘어까지 꽉꽉 들어찼다. 유일한 빈자리는 딱 한 곳, 내 옆자리다. 이 자리를 예매한 사람··· 희주가 지금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쫓겨났기 때문이다.

새삼 쫓아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석은 아무래도 다닥다닥 붙어서 응원하게 되는데, 오늘 펭귄같이 싸맨 여동생이 옆에 따라붙었으면 자리가 좁았을 것 같거든.

그리고 경기는 시작부터 치열하고 뜨거웠다. 진눈깨비가 흩뿌려지는 날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타인위어 더비가 언제나 그랬듯이.

시즌 초, 우리의 ‘유도’에 놀아났던 뉴캐슬은 오늘 경기에서는 섣부른 분석을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의 베스트 일레븐에게 가장 잘하는 역할을 맡겨서 내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아무래도 수읽기나 전술, 분석 싸움에선 우리를 못 이기기 때문일 거야.”

혼잣말을 하자, 옆에서 팬들이 눈을 크게 떴다.

“미안한데, 썬.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들었어.”

되묻는 팬들의 표정이 마치 다음 주 로또 번호를 미리 알려주는 예언을 놓친 사람처럼 보여서, 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한국어입니다. 혼잣말이었고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제길, 축구 보면서 희주에게 해설해주던 버릇이 들어 버렸어.

아무튼, 그 팀도 요즘은 분석실에 돈을 많이 발랐다고 한다. 뉴캐슬 분석팀장 도슨은 무려 월가에서 활약한 데이터 전문가로, 오죽하면 다미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다.

그래도 아직 우리를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내가 돈싸움에서 누구에게 밀릴 일도 없고.

다만, 이번에 뉴캐슬이 택한, 분석과 수 싸움의 영역을 포기한 채 그냥 선수 열한 명을 풀어 놓는 방식은 우리로서는 꽤 뼈아팠다.

오늘, 연전으로 소모된 우리 선덜랜드는 베스트 일레븐을 베스트 컨디션으로 내놓는다는 쉬운 선택을 하지 못하니까.

비록 톰슨의 헌신과 희생으로 미드필더진의 퀄리티는 지켜졌지만, 공격진의 컨디션은 100% 최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불리한 와중에도, 우리는 뉴캐슬 상대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치열하게 치고받는 중이다.

[브로, 축구단에서 비교적 혹사해도 괜찮은 부서가 어딘지 알아?]

오늘 경기를 준비하던, 브라이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 * *

“지금 노동부에 신고하려고 빌드업 까는 건 아니지?”

“설마.”

어깨를 으쓱한 브라이언이, 빠르게 덧붙였다.

“만에 하나 노동부에서 브로 건드리면,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폭동이야. 무려 동상이 세워진 CBE를···.”

“거기까지.”

그놈의 동상, 어떻게 철거 못 하나.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사이, 옆에서 샐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하고 감독님을 갈아 넣으면 충분해요. 코칭스태프의 두뇌는, 연전을 치러도 끄떡없죠.”

“맞아, 브로. 루벤이 그러는데, 두뇌에 쌓인 피로는 일단 72시간 정도면 회복되고도 남는다더라고.”

* * *

두 사람이 장담했던 것처럼 우리 선덜랜드는 오늘, 뉴캐슬 상대로 전술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세심한 고안을 준비했다.

[오늘은, 숏카운터를 자주 쓸 수 없죠. 전방 압박도 의미가 없고요. 체력적으로는 우리가 불리하니까요.]

[그렇다고 챔스, 클월 챔피언이 우리 홈에서 그 팀 상대로 라인 내리고 경기할 수도 없으니까···.]

축구 천재 두 사람이 찾아낸 해답은, 인내심 있는 지공이었다. 상대의 허점을 찾아낼 때까지, 혹은 만들어낼 때까지 끈질기게 공을 돌리며 점유율을 유지하는 축구다.

그 와중에도 단순한 시간 때우기가 되지 않도록, 수시로 로드리게스의 롱 패스가 좌우 측면을 오가며 공세의 방향을 바꿨다. 마치 뉴캐슬의 포메이션을 통째로 뒤집어 버리겠다는 것처럼.

그렇게 몇 번이고 사이드 체인지를 시도한 끝에, 전반 20분에 처음으로 왼쪽 측면에서 찬스가 생겼다. 거듭된 방향 전환에 뉴캐슬 수비가 틈을 내보이자마자, 로드리게스의 패스가 마르틴의 발 앞에 떨어진 것이다.

마르틴이 곧바로 돌격했다.

“잠시만요. 죄송해요. 잠깐 지나갈게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마르틴의 돌파는 평소와 달리 다소 조심스러운 느낌이었다. 컨디션 때문인지, 상대 진영을 강제로 찢어버리는 마르틴 특유의 예리함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턴오버는 절대로 당하지 않는다. 팀원들이 그를 지지하고 지탱했기 때문에.

그가 가로막힐 때는 레프트백 베넷이 뒤를 커버했고, 공을 건넬 사람이 필요할 때에는 잭이 옆에 나타났다.

덕분에 마르틴은 특유의 테크닉을 오로지 섬세하고 세밀한 발재간에 집중했고, 뉴캐슬의 밀집 수비를 피해 바이털 에어리어에 진입할 수 있었다.

비록 마지막 마무리는 골키퍼 선방에 막혔지만.

“그래도 코너킥이니까, 이득인 거지?”

“완전 이득···.”

무심코 대답하려다, 내가 헛걸 들었나 싶어서 멈칫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옆자리에 희주가 와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전에. 위에서 혼자 보고 있자니 더 추운 것 같더라고.”

희주는 다른 팬들처럼, 클럽 월드컵 저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칭칭 싸맸던 코트며 패딩 같은 건 모조리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놔두고 온 모양이다.

펭귄 모드였으면 오는 줄 바로 알았을 텐데 말이지.

“오히려 일반석이 따뜻하네.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경기가 뜨거워서 그럴 거야.”

잠시 후, 코너플래그에 선 요니가 허리에 손을 얹고, 반대쪽 손을 들어 올리며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 * *

베넷은 코너 플래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요니의 수신호 덕분에 패턴 확인도 끝났다.

측면 수비수는 보통 세트피스 공격에 가담하기보다 상대의 역습을 막는 위치에 서는 경우가 많지만, 베넷은 예외였다. 톰슨과 스티븐이 빠진 선덜랜드 스쿼드에서, 그는 센터백 듀오 다음으로 큰 선수였기 때문이다.

경기 초반, 베넷은 비교적 활약 없이 묻혀 있었다. 팀의 에이스, 10번 마르틴을 뒷받침하는 게 선덜랜드 레프트백의 역할이기 때문에.

심지어 오늘 뉴캐슬은 마르틴 때문에 오른쪽 - 선덜랜드의 왼쪽 - 공격을 아예 포기한 상태라, 베넷은 수비 상황에서도 딱히 존재감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지금도 베넷에 대한 마크는 비교적 느슨하다. 베넷은 슬쩍 자신을 마크하는 뉴캐슬 선수를 등지며 요니에게 시선을 맞췄다.

요니의 허리춤에 얹은 손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주장 잭의 목소리가 그라운드 위에 울렸다.

“왜, 자신 없어? 키커 바꿔 줄까?”

곧바로 뉴캐슬 선수들 사이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은 발전이 없냐? 야, 이제 와서 속겠어?”

어슬렁거리며 코너 플래그로 다가가는 잭을 뉴캐슬 수비가 추격하는 순간, 절묘한 타이밍으로 요니의 킥이 박스 안쪽에 날아들었다.

베넷은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며 박스에 파고들었다. 동시에 등 뒤에 느껴지던 압력이 사라졌다.

킥의 목적지는 니어포스트, 높이는 가슴 부근. 미리 알고 있었기에 베넷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허공에 몸을 날릴 수 있었다.

뉴캐슬 골키퍼는 아직 대응하지 못했다. 타이밍도 뺏겼고, 아크 정면에서 뛰어오르는 이고르와 에디에게 시선이 팔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덕분에 뛰어드는 베넷의 눈에 보이는 것은, 텅 빈 골네트와 그 뒤로 비쳐 보이는 나이얼 스탠드뿐이었다.

[선덜랜드 1 - 0 뉴캐슬]

네트가 흔들린 순간, 그 뒤의 나이얼 스탠드가 요동쳤다. 이윽고 그 진동이, 흔들림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전체로 퍼져 나갔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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