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할 수 있으면 (2)
레스터 킬러 크리그가 이번에도 한 건 했다는 언론 반응에, 우리 관계자들이 나란히 쓴웃음을 지었다.
“이쯤 되면 수식어는 떼도 될 텐데요.”
샐리의 의견에 루벤이 피식 웃기 시작했다.
“왜, 레스터 킬러가 아니라 그냥 킬러라고?”
“그렇지. 차라리 득점력 말고 다른 능력을 까는 거라면 인정하겠지만.”
“크리그가 득점 원툴이긴 하니까.”
연계 능력은 1부 리그 기준에서는 아쉽고, 수비가담이나 전방압박도 좋지 않다. 덕분에 전술적으로도 단조로워지고, 멀티골도 거의 넣지 못한다.
그래도 확실한 건, 크리그는 출전한 경기 대부분에서 어떻게든 득점한다는 것이다.
한편 SNS의 반응은 조금 더 수위가 높았는데, 요약하면 이런 식이 된다.
“크리그 같은 로또형 공격수한테 결승골 맞고 탈락하는 거 보면, 레스터도 알 만하다는데? 어··· 오빠, 얘들 지금 제정신인가?”
입술을 삐죽거리는 희주를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아마 노팅엄이나 코번트리 팬들일 거야.”
“걔들이 왜?”
희주에게는 꽤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두 팀 모두 하부 리그 팀이기에. 그래서 친절하게 부연했다.
“레스터 라이벌이거든.”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약간의 인지부조화도 겹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부 리그에 머물던 시절, 크리그는 분명히 극심한 부진에 빠졌던 적이 있다. 그리고 노팅엄이나 코번트리 팬들이라면, 그 시절의 우리를 직접 상대했을 것이다.
3부 리그에서 자기들 상대로 득점에 번번이 실패하던 크리그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지금 크리그가 1부 리그 팀 상대로 어떻게든 꾸역꾸역 득점을 해내는 선수임을 인정하기 쉽지 않겠지.
“코번트리나 노팅엄 팬은 이해했어. 그런데··· 왓포드 팬들은 또 왜 이러는데?”
“왓포드가 왜.”
대답 대신, 희주가 잠시 후 분개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밀어 보였다.
- 크리그는 복권형 공격수, 내보내 주면 오히려 감사.
아래는 쓰다 만 댓글이 매달려 있다.
ㄴ 감사는요. 오히려 우리가 고맙죠. 덕분에 FA컵 3라운드가 편하겠네요.
희주의 눈동자가 애타게 물어본다. 이대로 댓글 올려도 되냐는 의미일 것이다··· 로그인한 계정이 ‘@선덜랜드_구단주실’만 아니었으면 바로 허락했을 텐데.
희주에게 살짝 고개를 저어 보인 다음, 나는 재빨리 메시지를 보냈다.
[아벨, 이번 건은 마음대로 대응해도 됩니다.]
원조 키보드 워리어, 아벨이라면 수위를 가릴 줄 알겠지 싶어서 지시했더니, 잠시 후 ‘@축잘알’ 명의로 게시물이 올라왔다.
- 그야 당연히 감사해야지. 챔스 디펜딩 챔피언한테 축구 레슨 받는 거니까.
웬일로 개인 계정을 썼나 싶었더니, 확실히 ‘@선덜랜드_오피셜’로 올리기는 수위가 좀 있다. 게시물을 확인한 희주가 휘파람을 불었고, 브라이언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왓포드에 지면 분위기 장난 아니겠는데. 아, 어렵다.”
“자신 없어? 2부 리그로 강등된 왓포드인데?”
“설마.”
브라이언의 입매가 일그러졌고, 옆에서는 샐리가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소리를 들었으면, 크리그가 득점하는 형태로 이겨야 하잖아요? 셧아웃도 시켜야 하고요. 로테이션 멤버만으로 그렇게까지 압살하기는 조금 어렵겠죠··· 우리 감독님한테는.”
그러자 브라이언이 발끈했다.
“야, 꼭 너는 자신 있는 것처럼 말한다?”
“저는 98% 자신 있는데요.”
“나도 99% 자신 있어. 1%도 허용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여느 때처럼 옥신각신하기 시작한 브라이언과 샐리를 남겨둔 채, 나는 감독 집무실을 떠났다. 그러자 희주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분위기 괜찮네. FA컵도 이기겠다.”
“그렇겠지.”
FA컵 3라운드는 애초에 문제가 아니었다. 브라이언이 말한 것처럼 특정 선수가 반드시 득점해야 한다거나, 상대에게 한 골도 내주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으면 조금쯤은 피곤하겠지만.
최대 난관이던 박싱데이는 순조롭게 넘겼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일정은 기껏해야 EFL컵 결승, 아니면 챔스 16강전 정도다.
그게 지나고 나면 리그에서 맨시티를 우리 홈으로 불러들이는 일정이 기다린다. 리그 우승을 위한 최대 분수령이 될 경기다.
그때까지는,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유지하고 체력을 관리하면서 계속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아벨, 기왕이면 선덜랜드 오피셜로도 좀 때리시죠. 수위만 좀 조절해서요.]
장작도 계속 집어넣으면서.
* * *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아침 자율 연습’에서, 선덜랜드의 젊은 공격진도 마찬가지의 불만을 표출했다.
“원래 SNS가 인생 낭비인 건 저도 아는데. 그래도 이건 도가 좀 지나친데요.”
지난밤, 크리그를 가리켜 복권형 공격수라는 멸칭을 확인한 베리와 터너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신경 쓰지 마.”
무덤덤하게 대답한 크리그가, 몇 초쯤 지난 다음 덧붙인다.
“사실이기도 하고.”
바스티아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고, 베리와 터너의 얼굴도 가관이었다. 가만있자니 열받아서 미칠 것 같은데, 본인이 이리 태연하니 옆에서 화를 내기도 모양새가 우스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는 해리슨 본인의 감상으로는···.
“얼굴 펴, 해리슨.”
크리그의 거친 손이 해리슨의 머리에 살짝 닿는다. 해리슨은 웃으려 노력했지만, 뺨에 전해지는 경직된 감각을 보면 아무래도 잘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해리슨은 슬쩍 되묻기로 했다.
“플레이로 갚아주면 된다. 그렇게 말씀하실 거죠?”
“잘 알고 있네.”
크리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내가 화낼 필요는 별로 없지. 진짜 남자는 원래 남을 위해서 화내는 법이거든. 그런데 너희가 이렇게 화내 주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크리그를 바라보는 아침 연습 멤버들이 일제히 고민에 빠졌다.
“공격수에게는 냉정함이 필요하다고 들은 적이 있긴 한데···.”
“크리그 씨가 냉정하긴 하지. 평소에 세레머니도 제대로 안 하잖아.”
득점 직후의 크리그는, 기껏해야 관중석을 올려다보며 왼쪽 가슴의 엠블럼에 주먹을 올려놓는 정도다. 만일 그게 세레머니라면, 바스티아노의 돌려차기 세레머니는 곡예단 공연이고 베리의 무릎 슬라이딩은 행위예술급이다.
“아니, 그 냉정함은 저 냉정함과는 다르지 않을까?”
“아무튼 크리그 씨 득점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
스트라이커들이 서로 쑥덕거리는 사이, 해리슨은 혼자 고민에 빠졌다.
‘혹시 크리그 씨는 정말로 감정이 없는 건가?’
비록 계기는 사소했지만, 어린 해리슨에게는 꽤 중요한 고민거리였다.
공격수에게 냉정함이 필요하다는 세간의 속설과 별개로, 감정이 힘이 되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마침 선덜랜드에는 투쟁심과 충성의 화신이 여럿 존재하기에.
반대로 축구는 감정이 아닌 머리로 하는 거라는 이야기도 적잖게 들린다.
해리슨의 호기심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해소되었다.
[FA컵 3라운드. 왓포드 대 선덜랜드]
킥오프를 준비하던 중, 왓포드 선수 누군가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트래시 토크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6관왕은 너무 과대망상 아니냐?”
“뭐?”
크리그의 반응은 거의 반사적이었다. 꽤 의외의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상대의 트래시 토크에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옳다구나 싶었는지 왓포드 공격수의 입이 재빨리 움직인다.
“너희 구단주 말야.”
그 뒤로도 왓포드 공격수는 뭐라뭐라 떠들었다. 미리부터 6관왕 운운하는 사례는 선덜랜드 구단주가 처음이라는 둥, 망상벽이 심하고 관종 기질이 있다는 둥···.
크리그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던 해리슨은 알 수 있었다.
‘화났구나.’
그것도, 그냥 화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제대로 빡이 쳤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에서 목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눈에선 불꽃이 튄다.
등을 돌려 킥오프를 준비하는 크리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저것들 박살 못 내면 축구 접는다.”
그날, 크리그는 평소 보기 드문 모습을 여럿 보였다. 하프타임에는 부디 교체 없이 끝까지 뛰게 해 달라고 어필했으며, 동료들에게는 패스를 강하게 요구했다.
보기 드물게 멀티골을 기록한 그는, 득점 이후엔 골 세레머니까지 시원하게 때려 박았다. 첫 득점 직후엔 관자놀이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빙빙 돌려 보이더니, 두 번째 득점 직후엔 유니폼 상의를 벗어 코너플래그에 내걸었다.
상의 탈의로 경고를 받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크리그에게, 선덜랜드 원정 팬들의 뜨거운 환호가 쏟아졌다.
[왓포드 0 - 2 선덜랜드]
- 다시는 크리그를 무시하지 마라.
- 맨시티나 첼시쯤 되는 팀이면 또 모를까. 왓포드가 크리그 무시하는 건 선 세게 넘었죠? 레스터도 까닥하면 털리는 마당에.
크리그가 겨우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침 훈련 멤버들이 대부분이 기뻐했지만, 크리그 본인은 무덤덤했다.
그리고 해리슨은, 새로운 고민에 빠져야 했다.
‘정정해야 하는 거 아닐까? 다시는 우리 구단주님 험담하지 말라고.’
* * *
이후에도 선덜랜드는 계속 이겨 나갔다.
챔스 16강전에서는 나폴리를 홈 - 어웨이 모두에서 제압하며 8강 진출을 확정했고, EFL컵 결승전에서는 토트넘을 웸블리에서 승부차기 끝에 잡아내며 인수 이후 두 번째 EFL컵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가져왔다.
당연하게도 팬들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우드 부부와 브라더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 이걸로 3관왕이지? 이러다 진짜 6관왕 해버리는 거 아님?
ㄴ 기세로 보면 6관왕은 몰라도 4관왕쯤은 무난하게 하겠는데.
ㄴ 블랙캣츠 여러분 큰일 났습니다! 우리 퍼레이드 버스에 이제 트로피 조형물 올릴 자리가 없어요! 대책이 시급합니다!
정말로 자리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껏 새롭게 버스를 개조까지 했을 정도인데. 다만, 이번에 EFL컵 결승을 앞두고서는 ‘그 팀’에서 미리 공사판을 벌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뉴캐슬어폰타인 한복판에서 공사판을 벌인 이유는 간단하다. 선덜랜드 퍼레이드 버스를 못 지나가게 하려는 속셈이다.
물론 공사를 결승 당일 바로 시작하진 않았기 때문에, 선덜랜드 보드진도 이미 상대의 속셈을 눈치채고 대응한 상태였다. 덕분에 SNS 반응을 체크하는 브렌든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대신 귀여운 비행선을 띄워드렸는데.”
“트로피 모양 비행선이었죠? EFL컵 형태를 본뜬.”
이번에도 구단주가 사비로 비행선을 주문했는데, 하필이면 암스테르담에서 사들이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미들즈브러 상공을 통과하고 말았다.
맥켐즈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짜릿한 순간이었지만,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이후 시티 오브 선덜랜드로 향하는 과정에서 ‘예상 밖의 강풍’을 만난 비행선의 침로가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뉴캐슬어폰타인 상공을 선회할 땐 내가 다 후련하더라고.”
“꼼꼼하게 카메라도 달았었죠? 아래쪽이 내려다보이게.”
덕분에 풋볼 스퀘어 스크린에는, 분개하는 조르디부터 환호하는 선덜랜드 시민들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찍혔다. 우드 부부는 물론, 브라더스도 기뻐 날뛰었다. 특히 맥주집 사장이 가장 신이 났었는데, 그날 축배를 들러 몰려온 팬들 덕분에 가게가 그야말로 미어터졌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압권은 비행선이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를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카메라에 잡힌 연습용 잔디에 멋지게 쓰여진 문구들이 선덜랜드 팬들의 눈길을 잡아 끌었다.
[앞으로 3개]
[천하무적]
[슈퍼컵, 클럽 월드컵, 그리고 EFL컵 챔피언]
꽤 노골적인 문구였고, 당연히 다른 팀의 반발이 뒤따랐다. 하지만 선덜랜드 구단에서는 공식적으로 아카데미는 비공개 시설이라며 선을 그었다.
[비행선이 그 위로 지나간 것은 방송사고일 뿐이고, 원래 외부에 공개하려고 작성한 멘트가 아닙니다. @선덜랜드_시설관리팀]
[해당 문구는 전부 어린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위한 것입니다. 축구 유망주라면 누구나 미래의 발롱도르 수상자, 월드컵에 나가겠다거나 하는 꿈을 꾸는 것처럼요. @선덜랜드_오피셜]
살짝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느낌은 들었지만, 아카데미가 원래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는 시설인 것도 엄연한 사실이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제 남은 일정 중 가장 중요한 경기는··· 역시 챔스 8강전이겠죠?”
수잔의 질문에, 마일즈가 눈을 빛냈다.
“FA컵 4라운드보다는 챔스 8강이 중요하긴 하지. 왜?”
“만만한 팀이 걸렸으면 좋겠으니까요.”
대답하면서, 수잔은 장식장에서 선덜랜드 피규어를 꺼냈다. 결혼 전에 사들인 구단주 비서 피규어였다.
“듣자니 이 피규어 앞에 먹을 걸 놔두고 기원하면 좋은 대진이 잡힌다고 하더라고요.”
“음, 그러면 정어리 파이를 놓으면 되려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우드 부부를 바라보던 브라더스의 눈에 미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브랜든은 대놓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조금 덜 친한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은 신중하게 표현을 고르기 시작했다.
핫도그 사내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 ···둘 다 한국인이니까, 정어리 파이는 안 통할 겁니다.”
“하지만 썬은 선덜랜드 토종 식성이라고 들었는데요.”
수잔의 항변에, 맥주집 사장까지 가세했다.
“잠깐, 인터넷 보니까 비서 피규어에 기원할 때는 반대로 해야 한대. 소원도 반대로 빌고.”
“그럼 음식도 이상한 걸 놓아야겠네요. 정어리 파이는 안 되겠어요. 이건 너무 맛있으니까요.”
그런 미신을 떠들며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떠드는 친구들을 바라보던 브렌든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인지, 크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저렇게 되지 말렴. 삼촌이 이렇게 부탁한다.”
브렌든에게 화답하듯, 크리스가 불만스럽게 빼액거렸다. 그사이에도 우드 부부, 그리고 브라더스의 합창은 계속 이어졌다.
“빡센 팀 만나게 해 주세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기원은 시전자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선덜랜드의 챔스 8강 상대는 맨시티로 결정되었고···.
“어? 이거 경기 일정이 왜 이래요!? 혹시 음식을 너무 맛있는 걸로 놨나?”
“그야 최고급 장어 젤리니까 맛있긴 하겠지.”
···공교롭게도, 챔스 8강 1차전과 2차전 사이의 리그 경기 상대 또한, 맨시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