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할 수 있으면 (3)
맨시티와의 3연전 일정이 성립된 직후, 우리 관계자들 표정은 대체로 썩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특히 희주가 압권이다. 마치 ‘정어리 파이를 장어 젤리에 비벼서 드셔보세요’ 같은 걸 당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다 브라이언 씨랑 샐리 씨 때문이야.”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트집을 잡으려고 이러나 싶어서,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왜, 장어 젤리가 맛있다고 꼬시디?”
혹시 정말로 그런 걸 당했다면, 그건 희주의 지능 문제다. 서로 알고 지낸 지 몇 년인데 여태 브라이언의 식성을 몰랐다고 하면 말이지.
“작년부터 시티 시티 노래를 불렀잖아?”
그러긴 했다. 두 사람은 EFL컵 조추첨에서도 시티 시티, FA컵 조추첨에서도 시티 시티를 외쳤으니까.
작년, 리그 맞대결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의욕에 아주 몸이 바짝 달아 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이번 8강 조추첨에서도 열렬하게 시티 시티를 외쳤다.
에이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티즌 VIP 회원이라도, 매치데이 아닌 날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맨시티를 외치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같은 느낌이다.
브라이언과 샐리, 선덜랜드 중심에서 시티를 외치다.
[저··· 의욕은 좋은데 혹시 달력은 보신 거죠? 8강에서 만나게 되면 3연전이 성립되는데요.]
루벤의 그런 의문에도 샐리와 브라이언은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좋잖아?]
[그렇지. 오히려 좋아.]
두 사람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첨식에선 정말로 맨시티가 뽑혔다. 순간 샐리와 브라이언은 동시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지만, 나머지 스태프들은 이마를 손으로 짚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빠만 무표정했었지.”
“뭐, 이미 결정된 일에 난리 친다고 바꿔줄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8강 상대로 시티는 좀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3연전은 우리에게도, 시티에게도 서로 리스크가 너무 큰 일정이다. 내심을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도, 시티도 서로를 대전 상대로 만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긴, 세계적인 투자자니까 이 정도 담력은 있겠지. 다미 언니가 그러는데, 오빠는 폭락장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더라고.”
아니, 그건 담력이 아니라 숫자가 보이기 때문인데. 나중에 어디까지 오를지 알 수 있다면, 다들 나처럼 대범해질 거야.
그나저나 자꾸 희주가 남 탓을 하길래,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그래서 너는 추첨할 때 뭐라고 빌었는데?”
“그야 맨시티만 안 만나게 해 달라고··· 어라?”
전적으로 네 탓이네.
* * *
3연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는데, 언론에서는 벌써부터 화제가 되었다.
‘EPL 정상결전’이라는, 누구나 예상한 표현부터 ‘리얼 부 결정전’이라는 다소 원색적인 표현까지 다양하게 튀어나왔다.
“이거 누구냐. 진짜 잔인하네.”
“왜 오빠, 뭐라고 써놨길래?”
희주의 질문에, 나는 ‘리얼 부 결정전’ 기사 밑에 달린 베댓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없는 곳에서의 넘버원 다툼은 하지 마라 - 조르디 일동]
당연하게도 그 아래에는 ‘니들이 못 올라왔잖아ㅋㅋㅋ’로 도배되었다. ‘그 팀’ 싫어하기로는 나 못지않은 희주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다.
“이야, 비아냥 수준··· 사탄도 실직하겠네.”
한편 희주는, 과거 영국의 왕위 계승전을 빗댄, ‘21세기 장미전쟁’이라는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리그와 챔스, 두 대회 모두를 노리는 강팀 맨시티와 선덜랜드가 리그와 챔스에서 연속으로 격돌한다.]
[두 팀 모두 올 시즌, 리그와 챔스 모두를 석권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며, 단순한 빈말로 넘기기 어려운 수준의 강력한 전력을 함께 갖췄다.]
[맨시티는 프리미어리그 디펜딩 챔피언이고, 선덜랜드는 챔피언스리그 디펜딩 챔피언이다. 따라서 두 팀 모두 왕이자, 동시에 서로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겨루는 찬탈자다.]
그래서 장미전쟁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은데, 기자 본인으로서는 나름대로 센스 있는 문구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비록 영국 역사는 잘 모르지만, 예전 유소년 시절 잠깐 배운 기억을 떠올리면 끼워넣지 못할 것도 아니다. 맨체스터는 장미전쟁 당시 랭커스터 영지였고, 우리 선덜랜드는 요크 왕조 쪽으로 묶을 수 있으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타인위어는 요크셔 바로 윗동네라 요크 소속은 아니긴 했겠지만··· 그렇다고 틀린 표현은 아니겠지.
희주의 관심사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그래서 장미전쟁은 결국 누가 이긴 거야? 랭커스터? 아니면 요크?”
우리 선덜랜드가 이번에 요크 포지션이니, 희주는 당연히 요크가 이겼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겠지만···.
“···튜더가 이겼을 거야. 아마도.”
“에이, 그게 뭐야.”
허무한 결말에 허탈한 표정을 짓는 희주를 바라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름의 교훈이겠지. 치열하게 싸우다가 공멸해서 남 좋은 일만 해줄지도 모른다는.”
만일 우리와 맨시티가 이번 3연전에서 같이 퍼져 버리면, 올 시즌 리그에서 우리와 시티 다음에 위치한 팀들은 아주 축제일 거다. 특히 리버풀과 첼시는 아주 좋아 죽겠지.
그리고 챔스에서 4강에 올라올 팀들도 신이 날 테고··· 뭐, 그런 결말을 만들 생각은 없지만.
“그나저나, 정상결전, 장미전쟁이란 말이지.”
기사의 모든 논조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감회가 새롭다.
내가 구단을 인수했을 때, 맨시티는 이미 완성된 팀이었다. 구름 위의 존재였고, 목표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동안 나는 우리 선덜랜드를 첼시나 맨시티처럼 만들기 위해 돈을 들이부었다고 표현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번에 언론에서는 우리를 바로 그 맨시티와 나란히 놓고 ‘정상’을 다투는 팀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우리 위상이 높아졌음을 나타낸 것이니··· 어떤 의미로 나는, 구단주로서의 목표를 이미 이룬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제 남는 건···.
“오빠, 3연전을 전부 다 가져오는 건 힘들겠지?”
“그건 욕심이지.”
두 팀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보면 1승 1패 1무, 살짝 욕심을 내자면 1승 2무나 2승 1패 정도를 희망한다.
그래도 만일 딱 하나만 가져올 수 있다면 절대, 무조건 이겨야 할 경기는 프리미어리그 33라운드겠지.
브라이언에게는 이미 우선순위를 정해 두었다. 리그 우승 이외의 나머지 모든 경기를 덤으로 취급해도 된다고.
덤이라는 표현을 쓴 건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올 시즌엔 리그가 최우선이라는 이야기는 진심이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브라이언과 샐리는 피치 위에서 최선의 그림을 피워낼 것이다. 그게 두 사람의 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언제나처럼, 라인 밖에서 두 사람을 도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 * *
앨리스의 걸음걸이는 경쾌했다.
맨시티라는 거물과 3연전을 펼치게 된 중압감에, 선덜랜드 스태프 대부분이 위장병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내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음료 캐리어에 커피를 가득 채웠기에 양손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드디어 선덜랜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바스티아노의 단골 카페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실, 의외로 쉽게 찾아냈다. 앨리스가 맛있는 커피를 찾아 헤맨다는 이야기에, 바스티아노 본인이 곧바로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소문내지 말아 주세요. 시뇨리나 앨리스.]
[네, 그냥 저는 테이크아웃만 할게요.]
그런 그녀의 목적지는, 프레스팀 사무실이었다.
“커피 보급 왔습니다!”
프레스팀은, 분석실과 함께 야근 많기로는 선덜랜드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서다. 자연히 카페인에 대한 애착도 남다른 수준이었다. 마침 야근 경쟁자 분석실 사람들이 에너지 드링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프레스팀의 커피 섭취량은 누구보다 높았다.
덕분에 앨리스는, 입구에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아벨의 시선은 마치 현세에 강림한 여신을 보는 듯했고, 애니의 눈동자에도 다정함과 상냥함이 가득했다.
프레스팀 부팀장 클라크가 신사다운 손길로, 아주 자연스럽게 커피 캐리어를 받아드는 것이 신호였다. 잠시 후 앨리스는 푹신한 리클라이너에 인도되었고, 스툴에 발을 올려놓은 채 TV 시청을 즐기게 되었다.
“어··· 환대 감사합니다만, 이러면 커피가 식는데요?”
앨리스의 의문에, 애니가 1회용 커피 컵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에이, 식긴 뭘. 괜찮아. 아직 따뜻한데.”
“그게, 캐리어 하나는 분석실 거···.”
곧바로 프레스팀의 거센 반발이 쏟아졌다.
“카페인을 갖고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이 커피는 이제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겁니다.”
“분석실? 걔들이 커피 맛을 알기나 해? 걔들 원래 에너지 드링크나 먹잖아.”
프레스팀 식구들은 덕분에 인당 두 잔씩의 커피를 만끽하며 즐겼다. 심지어 애니는 유소년육성단에 따로 감사 메시지까지 보내며, 커피와 앨리스를 자연스럽게 확보했다.
“페르난데스 단장님이, 오늘은 천천히 와도 된다고 하시네. 푹 쉬다 가.”
프레스팀의 환대에, 앨리스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그런 의미에서 채널 선택권은···.”
“있을 리가 없잖아? 뭐, 그래도 스페인 문어 특집 정도는 재밌지 않아?”
“···팀장님, 나중에 펩 감독님에게 사과하세요.”
TV에서는 펩이 특유의 현란한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이번 선덜랜드와의 3연전을 앞둔, 맨체스터 지역의 특집 방송이었다.
[선덜랜드의 브라이언을 젊은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요. 제 생각에는 굳이 필요 없는 수식어 같습니다. 브라이언은 그냥 천재죠. 그가 1년 사이에 차지한 트로피 때문만은 아니고··· 경기를 보면 압니다.]
앨리스가 보기에, 굳이 1년 사이에 차지했다는 표현을 쓰는 의도는 무척 명백했다. 올 시즌 차지한 슈퍼컵과 클럽 월드컵, EFL컵 위에 지난 시즌에 들어 올린 챔스 우승컵까지 얹으려는 뜻이다.
‘칭찬은 고맙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우리를 올려치는 속셈이 따로 있을 텐데.’
[피치 위에서 브라이언을 상대하는 건 아주 보람 있는 일입니다만, 그의 축구는 사실 사이드라인 밖에서 지켜볼 때 가장 즐겁습니다. 상대하긴 너무 힘들거든요.]
맨시티 감독이 방송에서 너스레를 떠는 사이, 무대에는 꽤 잘 만든 모형 트로피 두 개가 차례로 놓였다.
[저는 저거, 빅 이어를 원하죠. 모든 시티즌의 소망이니까요. 하지만 브라이언은 분명 리그 트로피를 원하겠죠? 바꿀 수 있으면 서로 행복하겠지만··· 정말로 평화적으로 나눠 갖자고 말하면 유에파와 축협이 저흴 가만두지 않겠죠.]
방송에 나온 펩의 얼굴에 신사적인 미소가 번졌다.
[뭐, 그러니까 누가 어느 트로피를 가져가는지 봅시다. 올 시즌 선덜랜드는 두 트로피 모두를 탐낼 만큼의 강팀이거든요. 실제로 6관왕에 도전하는 중이고요.]
리클라이너에 반강제로 몸을 기댄 채 방송을 지켜보던 앨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말은 잘하네요. 저거 다 엄살이죠?”
애니가 재빨리 대답했다.
“맞아.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저건, 사실상 선전포고지.”
“그럼, 혹시 우리는 뭔가 대응 안 하나요?”
“대응?”
이상한 단어를 들었다는 것처럼 따라 하는 애니에게 시선을 보내며, 앨리스는 슬쩍 고쳐 설명했다.
“예를 들면, 우리도 브라이언 감독님을 TV에 내보낸다거나···.”
“···누구를, 어디 내보낸다고?”
선덜랜드 프레스팀의 얼굴이 일제히 엉망으로 구겨졌다. 순간 앨리스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축구 전술만 따지면 브라이언은 펩의 좋은 맞수가 되겠지만, 마이크워크로는 참패할 것이다. 코치로 4년, 감독으로 1년 반의 경험이 쌓이는 와중에도 브라이언의 인터뷰 스킬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말을 더듬거나, 통역이 절실히 필요한 괴문장을 잔뜩 토해내고 돌아오는 미래가 그려진 앨리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샐리 코치님은 어떨까요?”
“샐리 수석코치?”
입담으로 따지면, 일단 브라이언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다. 심지어 축구 전술 지식만 따지면 브라이언과 거의 동급으로 평가받으니, 저런 자리에 내보내기엔 딱 좋은 인재라는 게 앨리스의 평가였다.
“샐리 코치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녀잖아요. 축구는 대표적인 남성향 컨텐츠고요. 축구를 잘 아는 미녀라면 먹히지 않을까요? 심지어 타인위어 지역 아저씨들한테는 반쯤 아이돌 취급이고···.”
설득력이 느껴졌는지 프레스팀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팀장 애니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샐리는 관록에서 너무 밀려. 상대가 감독 앞세워 언플하는데, 우리가 수석코치를 내보내면 모양이 안 살지.”
“아···.”
“차라리 구단주나, 일반 스태프를 앞세워 방송하는 건 괜찮을 거야··· 또 썬에게 부담을 지워야 하나?”
애니의 혼잣말에, 프레스팀 부팀장 프랭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팀장님 그게··· 리미트리스에서 공문 왔는데요. 구단주님의 방송 출연에 관해서.”
“왜, 자기네 사장 얼굴 너무 팔지 말래?”
“아뇨. 방송국과 협의해서 녹화 영상을 전부 확보해 달라는데요.”
애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방송분도 아니고, 녹화 영상을 확보하라고? 그게 자기 사장 함부로 방송 내보내지 말란 소리지 뭐야.”
최다미의 의도는 문자 그대로 아주 투명했지만, 아쉽게도 애니에게는 조금 다르게 전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어디, 썬 말고 좋은 인재 또 없나? 방송에 나가서 떠들 수 있을 정도로 축구 잘 알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을 정도로 화제성이 있는···.”
“그러고 보니 앨리스가 그랬죠? 축구는 남성향 컨텐츠니까 예쁜 아가씨들 내보내면 화제성은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모처럼 선덜랜드 사대 미녀를 출동시키면···.”
“화제성은 있겠지만, 에이미나 비서님은 축구 잘 모르잖아. 리지도 잔디 말고는 평범하고.”
순간, 오한을 느낀 앨리스가 재빨리 프레스팀 사무실을 빠져나가려 시도했지만, 한발 늦었다.
“아, 여기 있네요. 인재.”
아벨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