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할 수 있으면 (4)
“앨리스와···.”
“클라라의, 축구 알려드립니다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와아아아!”
클라라의 텐션을 조금도 따라가지 못하는, 어설픈 박수 소리가 앨리스를 조금 슬프게 만들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딱 봐도 억지로 끌려온 게 뻔한 게스트 짐은 아무리 봐도 조금도 열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히 짐을 나무랄 일도 아닌 게, 열정적이지 않기로는 앨리스 본인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신난 사람은 클라라 혼자였다.
정식 방송을 앞둔 연습인데도, 클라라의 태도는 꽤 본격적이었다. 장래 희망이 리포터라 그런 모양인데, 어떻게 구해 왔는지 방송용 마이크까지 척척 앨리스의 앞에 내민다.
‘장비 출처는 영상제작팀이네···.’
비록 클라라는 아직 축구를 잘 모르는 탓에 질문이 썩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일단 태도 하나는 확실히 전문적이었다.
“이번 3연전을 맞아, 우리 선덜랜드 선수들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시는 팬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혹시 선덜랜드 관계자가 생각하는 경기의 핵심 포인트가 있을까요?”
“이번 3연전의 최대 포인트는, 일단 전승은 안 나올 거라는 부분이겠네요. 그건 안 되는 거라서요.”
“어? 안 되나요?”
“똑같은 상대에게 세 번 당하면 절대 안 되거든요.”
이유는 잘 모르지만, 앨리스는 예전에 구단주 비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쪽이 세 번 연속으로 당하면 박제되어 향후 십 년 이상을 조롱당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클라라는 그 부분을 추궁하지는 않았다. 클라라가 주목한 건, 조금 다른 포인트였다.
“앨리스 언니··· 방송 나갈 마음은 있는 거 맞아요?”
“아니.”
즉답하면서 앨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냥 거절하고 싶어. 사실 말도 안 되잖아? 내가 방송에 나가서 축구 이야기를 떠들고 온다고?”
하물며, 이번 방송에서 염두에 두는 경쟁 상대가 맨시티의 펩이라면, 이게 말이 되는 짓인가 싶었다.
하지만 클라라의 입장은 단호했다.
“어···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애초에 본인을 염두에 둔 기획 아니었나 싶을 정도인데요. 축구를 잘 아는 미인, 하지만 수석코치는 출연 불가. 그럼 선덜랜드에선 앨리스 언니밖에 안 남잖아요?”
“리지 관리인님은···.”
“어떤 의미로는 샐리 수석코치님보다도 훨씬 전문적이지만, 대신 방송 느낌이 좀 바뀌지 않을까요? 스포츠 채널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로요.”
“30년 전통 윌리엄슨 가문의, 잔디 관리 특집 방송 같은 제목으로?”
“가드닝에 관심 있는 영국인이라면 필히 시청해야 할 영상이 될 것 같은 느낌이죠··· 그래서, 그만두실 건가요?”
클라라의 질문에, 앨리스는 체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나도 스태프야. 구단에서 시키면 해야지. 방송 나가는 정도면, 피규어가 만들어지는 것보다는 낫기도 하고.”
그러자 클라라와 짐이 눈을 마주쳤다. 뭔가 자기들끼리 눈짓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는데, 클라라의 성격으로 보면 ‘앨리스 언니는 정말 피규어 안 나와?’라든가, ‘신상품기획팀에 건의할까?’ 같은 이야기가 유력하지만···.
현실 도피 중인 앨리스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좋습니다. 그럼 팬들의 질문 코너로 넘어갈게요. ‘미래의 10번’님의 질문입니다. 어··· 혹시 연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데요?”
흥미진진하다는 클라라의 표정과 달리, 앨리스의 반응은 냉담했다.
“자꾸 까불면 훈련을 세 배로 늘려야겠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다음은 ‘타도 샐리’님의 질문입니다. 혹시 보직 변경에 대해서 검토해 본 적 없냐는데요. 분석실에 자리 많다고요.”
“페르난데스 단장님과 상의해주세요··· 잠깐만, 클라라. 이런 게 정말 도움이 되기는 해?”
그러자 클라라가 정색을 했다.
“네, 저도 한 번 방송을 해 봐서 아는데, 예상 밖의 상황에 대처하는 임기응변 능력이 필요하더라고요.”
선덜랜드 유소년 홍보 영상에 출연했던 클라라의 말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특히 앨리스는 전혀 반박할 수 없었는데, 클라라를 영상에 내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무조건 발리슛’님께서 보낸 질문입니다. 기껏 소개해 준 소중한 카페에서 구정물을 사들고 가던데, 해명해달라고 하는데요.”
“네?”
“질문지 들어온 대로 하는 거라 잘은 모르겠지만, 카페에서 구정물 시켰다는 거 보니까 왜 아메리카노를 시켰냐는 이야기 같은데요?”
이탈리아 사람 중에서는 아메리카노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부류가 상당한데, 아무래도 바스티아노도 그런 타입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말을 더듬기 시작한 앨리스를 바라보며, 클라라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아이참, 그렇게 당황하면 안 된다니까요? 방송은 순발력! 임기응변!”
“그치만 나는 아메리카노 산 적 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탈리아인이 소개해 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지는 않는다며 앨리스가 웃자, 클라라가 곧바로 추궁했다.
“질문지에 보면, 자기가 두 눈으로 분명히 봤다고 하던데요. 톨 사이즈 컵에 가득 담긴 검은 액체. 그 빛깔은 분명 카페라떼도, 마끼아또도 아니었다고요. 따라서···.”
“···그거 에스프레소였어.”
“···속 괜찮아요?”
“나 말고 프레스팀.”
“아···.”
잠시 슬픈 표정을 지었던 클라라는, 이내 씩씩하게 표정을 고쳤다.
“이 정도면 방송 나가도 괜찮겠는걸요? 잘하고 오세요!”
“아닌 것 같은데···.”
앨리스는 힘없이 대답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연습은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방송 촬영 당일에는, 페르난데스가 손수 차를 몰아 스튜디오까지 앨리스를 데려다주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해.”
“그렇지만··· 제가 펩처럼 능숙하게 말하고 올 수 있을까요?”
그러자 페르난데스가 낮게 웃었다.
“아니. 그건 브라이언 감독님도 못 하는 거잖아. 애초에 정말로 그런 기획이었으면, 구단주님이 허락했을 리 없지.”
“하긴, 이런 기획이 용케 구단주님한테 오케이 받았다 싶긴 했어요.”
오너가 허락했다는 문장은 원래부터 샐러리맨의 기운을 북돋기 좋은 멘트지만, 선덜랜드 스태프에게는 효과가 남달랐다.
아무튼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투자의 신이 허락한 프로젝트니까, 나가서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와도 망하지는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든다.
앨리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는 걸 확인한 페르난데스가 말을 이었다.
“펩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보여주고 와. 우리 선덜랜드에서는, 스무 살짜리 스태프도 이 정도로는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걸.”
순간, 앨리스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의 말처럼, 그녀가 펩과 대등하게 축구를 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능력도 없지만, 애초에 이번 3연전에서 펩의 카운터파트는 브라이언이지 앨리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히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선덜랜드는, 스무 살짜리 스태프조차 최신 전술 트렌드를 논할 수 있는 팀이라는 걸.
앨리스가 딱 그렇게만 하고 오면, 선덜랜드가 펩에게 보내는 답장은 완성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덜랜드 감독과 수석코치는 앨리스보다 훨씬 전술적으로 뛰어나니까.
“잘하고 와.”
“···네!”
차에서 내리며, 앨리스는 가슴을 폈다. 브라이언이나 샐리, 루벤만큼 축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방송국 입구에는, 먼저 도착한 선덜랜드 프레스팀, 그리고 분석팀 멤버들이 플래카드를 펼친 채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선수와 함께 싸우는, 13번째 플레이어다.]
선덜랜드 스태프를 상징하는 구호로, CS팀에서 만들었다. 앨리스 또한 신입사원 시절에 거의 세뇌에 가깝게 달달 외운 문구였다.
참고로 12번째는 팬이라는 게 CS팀의 방침이다.
어느새 아벨은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를 꺼내 들었다. 잠시 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녹음한, 팬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그날, 앨리스는 방송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펀딧이 묻는 이야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막힘도 없이 전부 반사적으로 대답했을 뿐이다.
축구계의 트렌드부터, 맨시티와 선덜랜드가 선호하는 전술에 대해서도.
[···따라서, 이번 3연전은 승패를 떠나 축구팬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명경기가 될 것입니다.]
* * *
[저희 선덜랜드는, 이번 3연전을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온 방송을 흘끗거리며, 맨시티의 감독 펩은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선전포고를 당했군.”
선전포고를 당했다는 표현과는 달리, 펩의 기분은 퍽 좋아 보였다. 스태프들의 의아한 시선이 쏟아지자, 펩이 부연했다.
“젊은 재능의 등장은 항상 기분 좋은 법이지. 그래야 축구계라는 산업 자체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 아닌가? 아, 실례했군. 계속 진행하지.”
그러자 맨시티 분석관이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네, 그럼 계속 보시겠습니다. 선덜랜드 주장 잭인데요. 화면 왼쪽에 보시는 그래프는 선수의 10초당 활동거리를, 오른쪽은··· 선덜랜드 관중석의 소음을 측정한 것입니다.”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추세만 보면 똑같은 자료를 이용한 그래프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펩의 눈이 빛났다.
“선덜랜드 팬들이 소리를 높이면 잭이 더 많이 뛰는 것인지, 아니면 잭이 많이 뛰면 팬들의 함성이 커지는 것인지는 확인했나?”
“이 데이터로 보면 전자이지만, 저는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잭이 공을 가질 때 더 시끄럽다는 데이터도 있거든요.”
“알겠네.”
고개를 주억거린 다음, 펩이 슬쩍 덧붙였다.
“그래서 팬들이 넘치는 홈경기장에서는 아무런 기복조차 없이 매 경기 월드클래스급 활약을 펼치지만, 원정에서는 그냥 평범한 미드필더가 되는 거였군. 아, 잭은 중립 경기장에서도 날뛴다고 했었나?”
“그렇습니다. 예외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와 리버사이드 스타디움인데, 둘 다 선덜랜드의 더비 라이벌입니다.”
의미를 파악한 펩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잭은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좀 더 날뛰겠군. 선덜랜드에게는 미들즈브러보다 뉴캐슬이 더 싫은 상대니까.”
“정확하십니다. 선덜랜드 팬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죠. 선덜랜드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무패를 유지하는 데에는, 잭의 지분이 최소 3할은 넘어갈 겁니다.”
옆에서 다른 스태프가 끼어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선덜랜드에서 가장 갖고 싶은 선수입니다. 메시는 전성기가 지났으니까요.”
펩이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네? 아··· 물론 감독님은 과거 메시를 직접 지도하신 적이 있으니···.”
“그게 아니야. 분석대로라면 선덜랜드의 잭은 다른 팀에선 절대로 지금 실력이 안 나온다는 이야기잖아. 그러니 데려올 필요가 없지. 선덜랜드 구단주의 성격상, 절대 내주지도 않겠지만.”
“아···.”
수긍하는 스태프들을 응시하며, 펩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뭐, 지금은 경기를 대비하는 거지 선수 영입 명단을 짜는 게 아니니까, 계속 브리핑하게.”
“네··· 상술한 이유에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잭을 성공적으로 틀어막은 팀은 아직 없습니다. 따라서 에티하드에서 잡아야 할 텐데, 아시다시피 이번 3연전은 두 번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치르게 됩니다.”
“두 번이란 말이지.”
스태프의 보고에, 펩은 자신의 턱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쥐며 생각에 잠겼다.
* * *
3연전 경기 날짜가 점차 다가오면서, 우리 스태프들에게는 일감의 태풍이 몰아쳤다.
이번에는 영국 축구의 패권 경쟁이라는 슬로건이 붙었기에 세간의 관심이 온통 쏠렸다. 특히 챔스 8강 1차전은 우리에게 배정된 티켓은 물론, 중립 티켓까지 순식간에 동이 났다는 보고가 이어졌을 정도다.
덕분에 CS팀, 시설관리팀은 손님맞이 준비에 정신 못 차리기 시작했고, 스퀘어관리팀도 비상이 켜졌다.
“축구 펍 상황은?”
그러자 희주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피었다.
“린다 씨 건의인데, 조만간 펍 지원팀을 신설해야 할 것 같다는데?”
대박 확정이라는 뜻이다. 뭐, 구단주로서는 경기의 흥행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
희주도 기분이 좋은지 키득거리기 시작한다.
“아, 팝콘 마렵네.”
자리에 앉아 까불거리는 희주가 영 괘씸하다. 아무래도 구단주 비서라는 보직 특성상, 이런 상황에서 다른 스태프들보다 비교적 덜 바쁘다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데.
“그래서 비서님, 팝콘 먹기 전에 내 스케줄은 혹시 확인했고?”
“어··· 30분 후 주장단 면담이 있고, 그 직후에는 크리그 선수 면담 잡혔네? 다음 타임은 디아라고···.”
“확인 고맙다. 그럼, 준비해 줘.”
다과는 팝콘 말고 다른 거 놓고.
“오빠, 설마 선수단 전원을 면담하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희주의 표정이 사색이 된다. 팀 훈련과 역할별 훈련, 개인 훈련과 전술 세션을 피해서 면담을 잡아야 하는데, 사실 내 스케줄도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으니 고도의 일정 테트리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단주 비서도 이제 죽어 나가겠지··· 이참에 도로 팝콘 준비시킬까?
잠시 후, 황급히 달려 나가는 희주를 바라보며, 역시 여동생은 부려먹는 게 제맛임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 * *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선덜랜드 대 맨시티]
킥오프를 앞두고 선덜랜드 선수들이 원진을 짰다.
“다들 구단주님하고 면담 끝냈지?”
주장 잭의 질문에, 마르틴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면담 종료. 만족한다.”
“표정이 좋네. 보아하니, 수당 올랐나 봐?”
“계약 내용 비밀, 제 3자 발설 금지. 그렇지만···.”
잠시 후 마르틴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만족스러움과 투지가 적당히 섞인 무언가가.
“받았다. 수당보다, 주급보다 훨씬 더 좋은 것.”
“···너도?”
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공교롭게도, 잭 또한 비슷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왼팔엔 평소와 조금 다른 디자인의 주장 완장이 붙어 있었다. 벌써 백 년에 가까운 과거, 선덜랜드의 마지막 리그 우승 당시와 똑같은 디자인으로 고쳐 만든 완장이다.
리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연습 상대를 받았습니다··· 레전드 매치 때문에 폼을 올리셔서 그런지 슛이 참 매섭더라고요.”
표정을 보아하니, 1군 스쿼드 모두는 이번 3연전을 앞두고 구단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온 것 같았다. 주급이나 수당이 아닌, 어쩌면 그보다 훨씬 좋은 것을.
늘 함께 싸우고 있다는, 신뢰를.
그들의 어깨 위에 팬들의 함성이 덮인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자랑하는 열두 번째 플레이어의 외침이.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팬들의 목소리에 대답하듯, 잭이 또렷하게 선언했다.
“우리들은 선덜랜드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