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열두 번째 플레이어 (2)
잭이 득점에 성공한 직후, 희주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만일 숏클립을 찍는다면 ‘봤냐? 다시는 선덜랜드를 무시하지 마라.’ 같은 자막이 붙어야 할 것 같은 느낌으로.
“우리한테 선제골 내줬으면 게임 끝이지. 멀티골각 날카롭죠?”
다시 말하지만 희주가 요즘 축구 보는 눈이 늘기는 했다.
최근 수비 전술이 많이 발전하면서, 멀티골이 터지는 경기가 드물어지긴 했다. 조직적으로 버티기만 하면 약팀도 강팀 상대로 쉽게 멀티골을 내주지 않는 시대다.
유일한 예외는, 선제골을 뺏긴 팀이 어떻게든 동점을 만들려고 무리한 공세를 퍼붓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하는 케이스다.
마침 우리는 강팀 중에선 비교적 역습을 선호하고, 또 잘하는 편이다. 그러니 희주 말처럼 우리 상대로 선제골을 내준 팀은, 많은 경우 멀티골까지 헌납하게 된다.
무지성으로 ‘닥공’에 나선 팀의 뒷공간을 요리하는 패턴은, 우리 선덜랜드가 가장 잘하는 플레이다.
다만, 오늘은 그럴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맨시티는 절대로 오늘, 공수 밸런스를 무너트리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맨시티는 남은 시간 내내 조직적인 반격에 나섰지만, 그렇다고 공격에 올인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멀티골을 기대하며 열을 올리던 희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쟤들, 이대로 져도 된다는 거야?”
“···챔스 8강전은 아직, 에티하드 원정이 남아 있으니까.”
오늘 우리를 잡아내기 위해 모험하다가 점수 차가 더 벌어지는 꼴을 보느니, 그냥 한 골 차이로 경기를 끝내는 게 낫다는 계산일 것이다.
물론, 경기는 이후에도 계속 치열했다. 맨시티는 공격 패턴을 다양하게 바꾸며 변화를 꾀했는데, 덕분에 후반전의 공세는 전반보다 더욱 매서웠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라인 위치를 킥오프 때와 똑같이 유지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공수 밸런스에 변화를 주지는 않았다.
겨우 한 골을 지키기 위해 소극적으로 지키기만 하다가는 도리어 허점을 보일 수도 있고, 이기는 경기에서 멀티골 욕심에 열을 올리다가 다 잡은 경기를 내주는 바보짓을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선덜랜드 1 - 0 맨시티]
경기가 끝날 때까지 스코어보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심판이 휘슬을 세 번 불었고, 장내 아나운서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경기~ 끝났습니다! 우리 선덜랜드가 맨시티를 제압하며, 이번 3연전의 스타트를 기분 좋게 가져갑니다!]
* * *
경기 직후, 프레스 관계자석에는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특별히 시끄러운 기계식 키보드를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타이핑이 전투적이었다는 의미였다.
(전) 타인위어 스포츠 출신 프리랜서 기자, 조지 혼자만이 그 흐름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쳇, 호들갑 떨더니··· 내가 뭐랬어. 시시한 경기가 될 거라고 했잖아. 1-0이라니.”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다들 바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믹스드존으로 이동해, 양 팀 감독과 관계자, 선수와의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
그전에 정리를 끝내야 했다. 생각난 것을 전부 적어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절대로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글을 쓰는 사람들의 상식이다.
한편으로는, 조지의 정신승리가 하도 초라해서 굳이 지적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조지가 ‘명경기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선덜랜드가 이번 1차전에서 제대로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경기는 정작 선덜랜드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의 의미도 그렇지만, 전술적으로도 정상결전 소리 듣기 충분했죠?”
자기 원고를 마무리한 누군가가 그렇게 운을 떼자, 다른 기자가 재빨리 동조했다.
“그렇죠. 솔직히 지긴 했어도, 오늘 펩은 박수받아야 마땅한 경기를 보였습니다. 선덜랜드 쓰리톱이 홈에서 이렇게까지 틀어막힌 건 처음이니까요.”
“막상 중원에서는 브라이언이 준비 잘했죠. 원래 압박 잘하는 잭과 요니에 더해, 오늘은 에디까지 끌어올려 상대 빌드업을 차단했으니까요.”
“포백과 미드필더 사이 공간은 로드리게스가 단단하게 지켰고요.”
쓰리톱의 클래스는 선덜랜드가, 미드필더 퀄리티는 맨시티가 우세하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그만큼 양 팀 감독들이 좋은 전술로 상대의 강점을 억눌렀다는 증거죠.”
비록 경기 내내 딱 한 골만 터진 경기였지만, 축구 관계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눈이 호강하는 명승부였다는 게 프레스석의 분위기였다.
애써 선덜랜드의 승리를 깎아내리려던 조지만 꼴이 우습게 되었다. 잠시 후 조지가 얼굴을 붉히며 짐을 챙겼다.
리타는, 프레스석을 빠져나가는 조지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저 인간도 슬슬 정신 차려야 할 텐데··· 그나저나 엘렌 씨는 아직도 마무리 못 했어요? 슬슬 믹스드존에 내려가야 할 시간인데요.”
“네··· 조금 걸려요. 먼저 가시겠어요?”
입으로는 대답하면서, 엘렌은 마치 신들린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이번 장미전쟁 3연전의 첫 경기를 선덜랜드가 가져가면서, 두 번째 경기의 양상도 변화가 생길 것이 분명하다.]
[맨시티는 분명히, 빅클럽다운 의연함을 보였다. 선제골을 허용한 직후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당당했다. 그 이면에는 에티하드에서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렌은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을 다듬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타이핑할 기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기 때문에, 신중해진 것이다.
[그 이야기는 결국 맨시티는 3연전의 마지막 경기, 챔스 8강 2차전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두 팀 사이에는 아직 또 하나의 경기가 남아 있다. 프리미어리그 트로피를 놓고 벌어지는, 사실상의 결승전이.]
거친 표현이지만, 사실상의 결승이라는 말에는 틀림이 없다.
선덜랜드가 이길 경우 2위 맨시티와의 승점은 12점 차이로 벌어지고, 우승 레이스는 사실상 끝나게 된다. 남은 경기에서 선덜랜드가 전패하지 않는 한, 역전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맨시티가 이기면 승점은 6점으로 좁혀진다. 여전히 선덜랜드가 우세하지만, 남은 다섯 경기에서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수준이다.
선덜랜드는 3연전의 두 번째 경기, 프리미어리그 33라운드 승리를 강렬하게 원할 것이다. 컵 대회 결승전 이상으로, 어쩌면 챔스 결승전 못지않게 중요한 경기다.
‘그리고 그 결승전은.’
[이곳,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열린다.]
* * *
믹스드존에서는, 주장 잭의 인터뷰가 한창이었다. 오늘 경기의 결승골을 뽑아낸 장본인이자 팀의 주장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상황이지만, 다른 계산도 섞여 있었다.
오늘의 승장, 브라이언의 인터뷰를 길게 끌면 끌수록 손해라는 모두의 공통된 인식 덕분이다. 심지어 맨시티조차 최대한 펩의 발언을 길게 가져가며 협조했을 정도다.
“맨시티는 확실히 꽤 신사적인 팀이네. 브라이언 씨 인터뷰가 길어지면 우리도, 신문사도 손해인데 말이지.”
희주의 코멘트에,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맨시티도 손해일 거야. 아무튼 브라이언은 오늘 맨시티에게 이긴 감독이거든.”
“아.”
진 것도 분할 텐데, 인터뷰도 제대로 못 하는 감독에게 완패했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기는 싫었겠지.
덕분에 브라이언의 인터뷰는 ‘이겨서 매우 기쁩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끝났고, 믹스드존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상대적으로, 우리 주장 잭은 훨씬 발전한 인터뷰 스킬을 발휘했다.
[이로써 챔스 4강 진출에 한 발 더 다가가셨는데요. 승리 축하드립니다!]
“감사함··· 니다. 감사합니다.”
발음이 살짝 뭉개지긴 했지만, 잭은 특유의 말투를 고치는 데 성공했다. 인터뷰 자리 한정이고, 평상시에는 도저히 못 고치는 모양이긴 하지만.
‘유소년들이 보고 배운다.’는 이유로 말투며 발음을 신경 쓰는 잭의 모습이, 정말로 팀의 주장답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다.
[오늘 선덜랜드는, 강팀 맨시티를 완벽하게 제압했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시티는 아주 강하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더 강한 팀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잭의 대답에, 기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럼 무슨 의미로 말하는 겁니까?’ 같은 반응이 절반, 나머지는 혹시 믹스드존에 수맥이 흐르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이다.
감독부터 주장까지, 인터뷰가 하나같이 알아듣기 힘들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려는 찰나, 잭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저, 오늘 경기가 열한 명 대 열한 명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는 열두 번째 플레이어가 있으니까요.”
지켜보는 내 입가에는 미소가, 기자들의 얼굴에는 감탄이 떠올랐다.
팀의 열두 번째 플레이어. 어느 팀이나 자기들 서포터를 지칭하는 관용구로 사용하는 명칭이지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
우리 팀의 철저한 팬 서비스 정신은 축구계에서 정평이 나 있고, 팬들의 뜨거운 반응 역시 유명하기 때문이다.
잭이, 목에 힘을 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앞으로도 팬 여러분께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저희 선수들, 그리고 팀 스태프들 모두가 뛰는 이유입니다··· 사랑함다!”
* * *
[프리미어리그 33R. 선덜랜드 대 맨시티]
이번 3연전의 두 번째 경기, 프리미어리그 33라운드 매치데이 당일이 밝았다.
경기장 직관을 위해 차에 짐을 꾸리던 마일즈가 인상을 썼다.
“그게 뭔가?”
브렌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긴 뭐야. 샴페인이지. 오늘 같은 날 안 따면 또 언제 따려고?”
“이봐, 브렌든. 경기장엔 술 못 가져가.”
하물며 샴페인 술병은 절대로 반입 금지다. 혹시라도 취객이 경기장 안에 병을 집어 던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브렌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 내가 축구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그걸 모르겠나? 펍에 맡길 거니까 안심해.”
“···술집에 술을 가져다 맡기겠다고? 아무리 주인하고 친해도 그렇지, 매너가···.”
“그 집은 맥주만 팔잖아. 콜키지 비용도 따로 낼 거고.”
브렌든의 태연한 반응이 못마땅했는지, 마일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벌써부터 샴페인 딸 생각이나 하고, 발상이 글러먹었어.”
“아니, 뭐가 글렀다는 건가? 오늘 이기면 우리 사실상 리그 우승 확정인 거 모르나? 설마, 다섯 경기 12점 차이가 뒤집힐 수 있다는 소리 하려는 건 아니겠지?”
잔여경기 다섯에 승점이 12점 차이라면 산술적으로는 아직 뒤집힐 수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우선 2위 팀이 전승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1위가 전패해야 순위가 뒤집힌다. 1위 팀이 1승만 챙겨도 동률이 확정되고, 1승 1무를 하는 시점에서 리그 레이스는 끝난다.
하물며 선덜랜드의 남은 일정엔 중하위권 팀과의 경기가 다수 포진되어 있기에, 이변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늘 이긴다면 아마 도박사들은 선덜랜드의 우승 확률을 99.8% 정도로 표기할 게 틀림없다.
마일즈가 염려하는 부분은, 조금 달랐다.
“내 말은, 오늘 경기에서 우리가 이긴다는 보장이 어딨냐는 거야.”
“팀을 믿고 싸우는 게 서포터의 본분이라면서?”
“그러니까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응원해야지. 벌써부터 샴페인 딸 생각이나 하고, 해이해졌어.”
“고리타분하기는.”
브렌든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때,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에 찬동한다는 것처럼 크리스가 바둥거리며, 샴페인 병을 향해 불만스럽게 빼액거렸다.
브렌든의 표정이 곧바로 누그러졌다.
“그래. 걱정 마라. 삼촌이 술 두고 갈게. 내 너희 아버지가 뭐라고 했으면 괘씸해서 샴페인을 아주 드럼통에 담아 갔겠지만, 우리 크리스 이야기는 들어야지.”
아직 아이가 없는 사람들 특유의, 전형적인 조카 바보 모드다. 크리스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명랑하게 웃었다.
“으응워언!”
브렌든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열심히 응원해야지. 이미 결정된 경기라지만, 우리는 선덜랜드의 열두 번째 플레이어라는 모양이니까."
마일즈는 여전히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아니, 자네는 자꾸 뭐가 결정되었다는 건데?”
“이봐, 마일즈. 우리가 1차전을 이겼지? 그러니 맨시티는 에티하드에서 열리는 챔스 2차전에 올인해야 해. 그런데 경기 간격이 짧으니, 오늘 맨시티는 로테이션 돌릴 거다 이 말씀이야.”
아마 맨시티는 라인을 내리고 수비적으로 일관할 거라고, 비기기만 해도 좋다는 태도로 이번 경기를 버릴 거라는 게 브렌든의 예상이었다.
“멀티고올! 나안타전!”
“그래그래. 애들은 골 많이 터지는 경기가 재미있겠지. 삼촌이랑 골 많이 넣자고 응원할까?”
브렌든은 크리스를 향해 마냥 귀엽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멀티골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브렌든의 예상은, 경기 시작 7분 만에 무너졌다. 선덜랜드가 시작 직후 선제골을 넣었고, 맨시티가 3분 만에 반격에 성공한 것이다.
[선덜랜드 1 - 1 맨시티]
리그 우승을 확정하기 원하는 선덜랜드는 당연히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맨시티 역시 공격적으로 응수했다. 오히려 지난 챔스 1차전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당황한 브렌든을 흘끗 바라보며, 마일즈가 혀를 찼다.
“크리스만도 못한 축알못 같으니라고. 맨시티는 오늘 골득실 따질 이유가 없잖아. 자네 말대로 로테이션 냈으니 체력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아니, 그러니까···.”
“으응워언!”
하라는 응원은 안 하고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는 어른들이 못마땅한지, 크리스가 빼액거렸다. 그 옆에서는 수잔이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뜨끔해진 마일즈와 브렌든이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자랑하는, 열두 번째 플레이어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We're Black Cats supporters.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 것처럼 선덜랜드 선수들의 발놀림이 한층 더 빨라졌고,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는 브라이언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남은 시간 83분, 선덜랜드가 리그 우승컵을 가져오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