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80년이 지난 뒤에도 (2)
35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온 잉글랜드의 관심이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집중되었다.
선덜랜드로서는 80년 만의 우승을 확정할 수 있는 경기고, 그 상대는 전통의 더비 라이벌 미들즈브러다. 그러니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상황은 있을 수 없었다.
- 선덜랜드 우승의 마지막 걸림돌이 미들즈브러라고? 격차가 너무 큰 느낌인데···.
- 사실 전력만 보면 이미 리그 끝났지만, 그래도 더비 라이벌 사이는 모르는 거야.
- 정작 선덜랜드 본인들부터가 3부 리그 시절, 전력이 훨씬 앞서던 뉴캐슬과 혈투를 벌인 적도 있으니, 의외로 발목 잡힐 가능성도 있지.
- 만일 보로에 발목 잡혀도, 맨시티가 오늘 못 이기면 선덜랜드는 즉시 우승 확정이지?
ㄴ 맞아. 시티는 리버풀하고 붙으니까, 쉽지 않을 듯?
ㄴ 그럼 사실상 선덜랜드 우승 확정 아닌가?
그렇게 영국 축구팬들은 미들즈브러가 과연 선덜랜드를 저지할 수 있을지, 더비 라이벌의 우승 확정을 한 라운드 뒤로 미룰 수 있는지에 모든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이번에 우승하면 선덜랜드 구단주가 무슨 짓을 벌일지를 궁금해했다.
- 거기 구단주 엄청 화끈하잖아? 에어쇼, 비행선, 카퍼레이드··· 아주 가지가지 하던데.
ㄴ 보통 이렇게 새로 우승했을 땐 기존에 안 하던 짓을 하던데··· 이번에는 대체 뭘 추가하려나?
오죽하면 도박사들이 내기까지 걸었는데, 현재로서는 로켓을 쏠 것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그때 선덜랜드 주민이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
- 스크린을 새로 올렸던데? 초대형 스크린임.
ㄴ 스크린? 의외네. 선덜랜드가 경기장 앞에 축구 틀어주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음?
ㄴ 풋볼 스퀘어 스크린도 이미 충분히 크던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자 의외의 답변이 올라왔다.
ㄴ 풋볼 스퀘어가 아니야. 주택가 근처의 공원인데···.
풋볼 스퀘어가 아니라는 멘트가, 사람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원칙적으로 영국의 축구 방송은 유료이며, 값도 비싸다. 따라서 허가받은 장소가 아닌 곳에선 틀 수 없다. 선덜랜드는 이미 풋볼 스퀘어에 경기를 틀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있는데, 다른 장소에도 경기를 송출하려면 당연히 추가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주택가 근처라는 것도 문제였다. 며칠 만에 뚝딱 스크린을 세운 것부터가 꽤 무리한 일정이지만, 주택가 근처면 인허가 문제나 민원 문제까지 얽혀 있다.
여러 정황에서, 선덜랜드는 이번에 꽤 무리해서 스크린을 추가로 설치했음을 알 수 있었다.
- 왜 그렇게까지 해서 주택가에 스크린을 하나 더 세운 거지?
그동안 수많은 미스터리를 해결한 인류 최고의 명탐정··· 네티즌 수사대는 이번에도 답을 찾아냈다. SNS에 올라온 스크린 사진을 분석하고, 주소를 찍어 보던 누군가가 결국 답을 찾아낸 것이다.
- 스크린 새로 세운 거기, 로커 파크 부지네!
ㄴ 로커 파크?
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이전에, 선덜랜드의 홈 경기장이었던 곳.
* * *
나는, 옛 로커 파크 부지에 새로 세워진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영국 최대 사이즈를 자랑하는 스크린의 크기도 만족스러웠지만, 스크린 왼쪽에 세워둔 조형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더 큰 트로피 조형물은, 80년 전 선덜랜드가 마지막으로 따냈던 1부 리그 우승컵이었다. 풋볼 리그가 영국의 최상위 리그이던 시절, 바로 그 트로피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제작 과정에서는 신상품개발팀 아드리안이 적극 참여했다. 덕분에 디테일 면에서도 손색없는 결과물이 나왔다.
“몇 년간 피규어 찍어낸 보람이 있는 결과물이네.”
“그렇지.”
스크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텅 빈 트로피 받침대가 보였다. 우승이 확정되면, 프리미어리그 트로피 조형물이 세워질 자리다.
여담으로 돈독 오른 아드리안은, 피규어 사이즈 ‘올드 트로피’ 신상품을 함께 개발하는 중이다. 우리가 우승하면 프리미어리그 트로피 피규어와 함께, 세트로 판매할 계획이라고 한다.
로커 파크 부지에 스크린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만족스럽게 시찰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찰나, 멀리서 린다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여서 잠깐 멈췄다.
“구단주님! 지시하신 건, 준비 끝났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린다의 얼굴은 초췌했다. 하긴, 기본적으로 힘든 업무임은 알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No라고 말하지 않는 린다조차 지시를 받은 직후에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불가능하다고 답변했을 정도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 어딘가에, 80년간 팀의 우승을 기다려온 팬이 계십니다. 마지막 우승 시즌, 경기장에 왔던 팬들을 다시 모시고 싶습니다.]
내 지시에 린다는 곧바로 난색을 표했다. 벌써 80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이고, 요즘처럼 디지털 데이터도 없는 시절, 수기 기록과 한정된 자료에 의지해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쉽지 않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겠지만, 우리 CS팀은 그 작업을 해냈다.
“몇 분이나 계십니까?”
“마흔네 분입니다.”
생각보다 적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지만.
우리의 마지막 1부 리그 우승은 1936년의 일이었다. 이후 세계 2차대전이 벌어졌고, 심지어 로커 파크 중앙에 폭탄이 떨어진 적도 있다.
당시의 생존자가 많을 리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 아는데, 마음이 조금 아프다.
나는 조용히 지시했다.
“전부 모셔와 주세요. 아주 정중하게.”
* * *
올해 91세인 조던 로스는 선덜랜드 토박이였고, 2차 대전을 경험했으며, 중간에 잠깐 군복무를 한 것 이외에는 오랜 시간 광산에서 일했다. 그리고 로커 파크에서의 우승 시즌에 경기장을 찾았던 마흔네 명의 팬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던은 꽤 오랜 시간 축구 경기장을 찾지 않았다. 고향팀 선덜랜드가 몰락했기 때문이었다. 우승 시즌을 기억하는 팬으로서는, 2000년대 중반 프리미어리그에 머물던 선덜랜드의 모습조차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요즘은 선덜랜드 경기가 퍽 볼만해졌지만, 최근에는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기력이 쇠해 혼자서는 몇 걸음 걷기 힘들었고, 외출할 때 휠체어 신세를 진 지도 벌써 몇 년 되었다.
그런 조던의 손녀, 니나 로스 또한 축구를 즐기는 팬은 아니었다.
반쯤은 할아버지의 탓이었다. 어릴 때부터 니나는 FC 선덜랜드가 무너지던 모습밖에 모르는데, 할아버지는 ‘선덜랜드는 원래 근본 있는 명문’이라고 박박 우겼기 때문이다.
[우승하던 모습을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데.]
[그게 벌써 몇십 년 전인데도, 기억이 나신다고요? 그때 할아버지는 꼬마였잖아요!?]
[기억하고 있고말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해.]
반발심에 니나가 선덜랜드를, 그리고 축구를 멀리하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로스 가문에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35라운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초청합니다.]
안에는 티켓이 동봉되어 있었다. 꽤 레트로한 디자인이었는데, 알고 보니 1936년 당시의 티켓 디자인을 똑같이 재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종이 티켓은 아니었고, 재질은 트럼프 카드 같은 데 들어갈 얇은 플라스틱이다.
“할아버지는 좋아하시겠지만··· 조금만 빨랐으면 좋았겠네."
니나는 한숨을 내쉬며,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자신의 조부를 바라보았다. 휠체어 없이 경기장까지 갈 수 없는 것도 문제지만, 축구장 특유의 열기와 소음, 함성이 노인의 건강에 썩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니나는 고심 끝에 티켓을 반납하기로 했다. 어차피 선덜랜드 티켓은 남에게 팔아먹을 수도 없는 물건이다.
“보내주신 티켓은 감사합니다만, 저희 할아버지는 휠체어 없이 가실 수 없어요. 다른 분이 경기 관람할 수 있도록 반납하고 싶은데요.”
[혹시 통화하시는 분은 조던 로스 님의 가족분이신가요?]
“네, 손녀인데요.”
[확인 감사합니다. 이번 경기는 휠체어 타시고도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사오며, 가족 한 분의 동행이 허용됩니다. 괜찮으시다면 꼭 방문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일 가족분께서 바쁘셔서 오실 수 없는 경우, 저희 직원이 직접 조던 로스 님을 모시겠습니다.]
“그, 휠체어라는 단어에서 짐작하셨겠지만 할아버지 건강이 썩 좋은 편이 아니세요. 옆자리에서 젊은 사람들이 막 박수 치고 소리 지르고 그러면···.”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통화하는 직원의 음성에서는 묘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니나는, 속는 셈 치고 할아버지를 축구장에 모셔가기로 했다.
물론 그녀의 할아버지, 조던은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경기장에 도착해 티켓과 신분증을 꺼내 보이자, 곧바로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따라붙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던 로스 고객님. 이제부터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정중한 태도로 조던과 니나를 안내했다. 오랜만에 축구장에 온 조던은 마냥 기쁜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니나는 살짝 인상을 썼다.
“죄송한데, 관중석은 이쪽이 아니지 않나요?”
“전화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조던 로스 고객님께서 일반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시기 불편하실 수 있기 때문에, 별도의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조던과 니나를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안내했다.
조던은 물론, 니나의 눈도 동그랗게 떠졌다. 팬 서비스가 좋다고는 들었지만, 특실까지 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니나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조던이 벽면 구석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눈이 침침해서 그런데··· 저기 저 글씨는 혹시 한글 아닙니까?”
직원이 상냥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문구입니다.”
조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니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할아버지가 한국 글씨를 어떻게 아세요?”
“그냥, 예전에 한국에 갔던 적이 있었단다.”
“언제요?
“젊었을 때··· 네 아빠가 태어나기 전이었지.”
조던 노인은 조금 그립다는 표정으로 글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사이 니나는 조심스럽게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 구단주님이 한국 사람이라고 들었는데요.”
“네··· 실은, 이곳은 평소에 저희 구단주, 썬이 사용하는 방입니다. 썬은 팀의 모든 경기를 함께 보거든요.”
특실을 내준 것만으로도 훌륭한 대접이지만, 평소 구단주 본인이 쓰던 방을 내주었으면 사실상 구단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환대인 셈이었다.
순간적으로 목이 멘 니나의 곁에서, 조던 노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 그러면 구단주님은 오늘은 우리 때문에 경기를 못 보는 게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오늘은 일반석에서 경기를 볼 예정이랍니다.”
* * *
[프리미어리그 35R, 선덜랜드 대 미들즈브러]
그날 킥오프를 앞두고, 풋볼 스퀘어와 로커 파크 스크린에는 경기장 스탠드의 영상이 잡혔다.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앉은, 마흔네 명의 올드 팬의 모습을.
그리고 피치 위에는 구단주 이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모신 마흔네 분은 여러분의 이웃이며,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토박이십니다. 그리고 팀의 오랜 팬이기도 합니다.]
[80년이 지난 뒤에도, 팀과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올드 블랙캣츠 여러분. 여러분은 이번 우승을 경기장에서 직접 지켜보셔야 마땅한 분들이십니다.]
구단주의 멘트에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7만 명 팬들은 물론, 풋볼 스퀘어와 로커 파크에서도 박수 소리가 울렸다.
도시 전체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상황, 홈팀 드레싱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거, 이러다 우리 주장 사기 떨어지는 거 아니야? 주장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박수 받으면 힘이 빠지잖아.”
에디의 농담에, 톰슨이 피식거렸다.
“쟤가 이런 상황에 힘이 빠질 물건이냐? 오히려 더 날뛰면 날뛰지. 올드 팬 앞에서 자력 우승할 찬스인데.”
자력 우승이라는 키워드에, 잭이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만에 하나, 오늘 저분들 모셔 놓고도 자력 우승 못 하면···.”
그 옆에선 요니가 서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만에 하나 정말로 그런 꼴을 당하면, 그땐 에디 네가 주장 해도 괜찮아. 우리는 곧바로 위어강 수온 재러 갈 거니까.”
“우리 구단주님을 웃음거리로 만드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평소 과묵하던 크리그까지 끼어들자, 에디가 불평했다.
“거 농담도 못 하겠네. 나도 오늘 질 생각 없거든?”
항변하는 에디의 어깨에,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이고르였다.
에디를 끌어당겨 어깨동무를 한 이고르의 옆에, 톰슨, 베넷, 스티븐이 차례로 원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홈팀 드레싱룸에는, 1군 선수 전원이 참여한 커다란 원이 생겼다.
“주장, 시작해.”
톰슨의 이야기에, 잭이 표정을 굳혔다.
“오늘은 우리가 우승을 확정해야 하는 날이다.”
잭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단호했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무승부만 해도 우승이라거나 하는 생각은 전부 버리자. 리버풀이 맨시티를 잡아 줄 거라는 기대도 말자. 아니, 오히려 리버풀이 맨시티를 잡을 수도 있기에 우리는 오늘 꼭 이겨야만 한다.”
주장의 목소리에 선수들 또한 하나둘씩 얼굴 표정을 진지하게 고쳤다.
“저분들께 졸전 끝에 어부지리로 우승 차지하는 모습을 보여 드릴 수는 없다. 승리 이외의 결과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가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들어오지 못한 마지막 트로피, 리그 우승컵을 가지러 가자!”
잠시 후, 선수 입장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선수들이 차례차례 경기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음걸이마다 선수들의 심장이 뛰었다. 함성 소리, 팬들의 발 울림 소리를 들으며, 조금 어두운 통로를 지나 마침내 빛이 들어오는 출구에 도착한 순간.
[Be the light]
언제나처럼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맑은 하늘, 초봄의 따스한 햇살 아래, 봄바람이 부드럽게 불어 선수들의 뺨을 간지럽혔다.
정말로, 축구하기 좋은 날이었다.
우승하기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