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80년이 지난 뒤에도 (3)
자리에 앉을 때, 일반석에 앉을 때마다 늘 그런 것처럼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Sun! Sun! Sun!
“환영은 감사한데, 발음 똑바로 해달라니까요. 뒤에 덜랜드는 왜 자꾸 빼십니까.”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들어오는 길에 앉은 팬들과 차례로 하이파이브하며 들어왔다.
뜨거운 환영은 정말 고맙지만 손바닥이 살짝 따갑다.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 일부러 나를 스탠드 정가운데 자리에 배정하는 것 같은데···.
가장 유력한 용의자, 희주가 키득거렸다.
“혹시 핸드크림 필요해?”
“됐어.”
쿠션 붙은 장갑은 살짝 끌리지만.
“아 맞다. 오빠 내려간 사이에 메시지 왔더라? 헨도 씨한테.”
“헨도가?”
자리에 앉은 다음, 희주에게 맡겨둔 스마트폰을 받아 든다. 그리고 헨도가 보냈다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후회 안 하지? 경기 끝나고 나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나 보자.]
나는 피식 웃으며 폰을 곧바로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발단은 오늘 오전, 오랜만에 헨도가 메시지를 보내며 시작되었다.
[우승 미리 축하한다.]
[축하면 축하지, 미리는 또 뭔데?]
[그야 우리가 오늘 시티를 잡을 거니까. 옛 친정팀을 위해서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줄 수 있지.]
[필요 없어. 서비스는 너희 팬들한테나 많이 해라.]
그 이후 답이 안 와서 그러려니 했더니, 내가 경기 오프닝 멘트 하러 내려갔던 사이 메시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자기 딴에는 경기 나가기 직전에 보낸 것 같다.
“끝나고 나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겠냐고?”
헨도의 메시지에, 굳이 회신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헨도네 팀도 지금 경기 중이라서 메시지를 받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대답은 오직 행동으로, 경기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
대신 시선을 돌려, 피치 위에서 킥오프를 준비하는 선수들을 응시했다.
선수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일부 언론에서 멋대로 떠드는 것처럼 챔스 탈락의 충격이 엿보이지도 않았고, 반대로 미들즈브러가 우리보다 약팀이라는 사실 또한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뭐래도 우리 축구를 하겠다는 태도가 정말로 믿음직스러웠다. 이런 선수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굳이 맨시티가 미끄러지기를 기대할 이유는 없다고 확신할 정도로.
오늘, 우리는 자력으로 우승할 것이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어느새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함성 속에서 마침내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고, 붉은 유니폼의 선수들이 동시에 쇄도해 들어갔다.
* * *
경기장을 메운 선덜랜드 팬들의 목소리는, 80년 전의 함성과 똑같았다. 적어도 조던 노인은 그렇게 믿었다.
어렵지 않게 응원 구호를 따라 하는 조던을, 손녀 니나가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할아버지, 전부 기억하세요?”
조던은 대답 대신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팬들의 함성이 마치 터질 듯 밀려든다.
[고오오오올! 선덜랜드, 선제골입니다!]
선제골을 뽑아낸 잭은 곧바로 홈 팬들이 기다리는 스탠드로 질주했다. 유니폼 셔츠를 벗어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더웨어에 적힌, ‘80년 만의 꿈’이라는 문구를 팬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다.
[우승으로 가는 첫걸음, 오늘의 첫 득점은 우리의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주장-!]
“사냥개! 사냥개! 선덜랜드의 사냥개!”
장내 아나운서의 외침에, 팬들이 열렬히 호응한다. 합창을 따라가지 못한 조던 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 이런 건 처음 듣는구나.”
“잠깐만요. 검색해볼게요.”
스마트폰을 붙잡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손녀 니나를 조던 노인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어.’
손녀가 종일 붙들고 있는, 조그마한 전화기 화면에 무슨 놈의 정보가 그렇게 많이 들어 있다는 건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거니와, 오랜만에 보는 축구 경기도 예전과는 퍽 달랐다.
우승을 다투는 경기에서, 중요한 선제골을 넣은 주장이, 왜 경고를 받아야 하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웃통 좀 벗었다고 카드를 받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사람을 때린 것도 아닌데··· 혹시 너무 빨리 우승을 확정하면 경고를 받는 건가?”
“어··· 찾아보니 스폰서 때문이라는데요.”
스마트폰을 검색한 손녀 니나의 대답에, 조던 노인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했다.
“스폰서와 반칙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이후에도 처음 보는 장면투성이였는데,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역시 오프사이드 상황이었다. 수비수가 공을 걷어낼 생각 대신, 손을 들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이, 조던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했다.
30년대, 40년대의 축구만을 기억하는 노인의 한계인 셈이었다.
그래도, 열기만은 그가 기억하는 풍경과 똑같았다.
‘전부 기억하느냐고? 암, 똑똑히 기억하고말고.’
조던은 10대 초반이던 소년 시절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축구장을 찾았다.
그 시절의 선덜랜드는 명실상부한 북동부의 왕이었다. 풋볼 리그에서 우승했고, 그 직후 곧바로 채리티 실드를 차지했다. 같은 해 FA컵도 들었으니, 정말로 자랑스러운 시절이었다.
노인은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가장 좋았던 시절이니까.’
근심도 걱정도,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생계 문제도, 전쟁 같은 것도 잘 모르던 천진난만한 시절. 그때의 어린 조던에게 축구는 너무나도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지금은 흑백 필름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은 풍경, 자료 사진에는 절대 들리지 않는 함성과 경기장을 메운 팬들의 열기··· 그 모든 기억이 80년이 지난 뒤에도 선명하다.
그렇기에 조던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선덜랜드는, 영국에서 가장 강하고, 다들 열심히 뛰고, 그리고···.”
옆에서 손녀 니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지금하고 똑같네요.”
“암, 그렇지. 80년이 지난 뒤에도 똑같을 거야.”
“그러면, 그때는 제가 손주 데리고 보러 올게요.”
4월의 햇살처럼 웃는 손녀의 웃음소리에, 또다시 아나운서의 외침과 팬들의 함성이 덮인다.
[추가골입니다! 선덜랜드, 두 골 차로 달아납니다! 선덜랜드의 보물, 요니가 우승을 향해 팀을 한 걸음 더 전진시켰습니다!]
니나가 웃었고, 조던 노인은, 천천히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외쳤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다시 80년이 지난 뒤에도 이어질 함성을.
* * *
전반, 선덜랜드는 두 골 차로 앞서갔고 풋볼 스퀘어는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이번에 새로 설치한 홀로그램 스크린엔 벌써부터 사람 키만 한 우승 트로피가 떠오르며 분위기를 한껏 달궜다.
“트로피 홀로그램? 벌써 틀어도 되나?”
“규정상 문제없으니까 만든 거 아닐까 싶긴 한데··· 아직은 확정 아니잖아?”
현실적으로 뒤집힐 가능성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우승을 확정하기까지는 아직 45분이라는 시간이 더 남아 있다.
구단에서 어련히 알아서 했으려니 생각하면서도, 괜히 미리 김칫국 마시다가 나중에 리그 사무국에 철퇴 맞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쁨과 불안이 섞인 시선으로 홀로그램을 응시하는 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디자인이 조금 다른데!?”
“그러게, 옛날 트로피네.”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트로피는, 80년 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로커 파크 부지에 설치한 조형물과 같은 디자인이라, 자세히 보자 비교적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안심한 팬들은, 이번엔 다른 경기장 상황에 시선을 돌렸다.
“안필드 상황은?”
“그쪽도 리버풀이 이기고 있대. 한 골 차이로!”
환호가 터졌다. 이제 선덜랜드의 우승 확률은 더 높아졌다. 두 경기가 동시에 뒤집히지만 않는다면, 선덜랜드는 오늘 우승을 확정할 수 있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일침을 가했다.
“안필드 상황은 볼 필요 없어요. 선덜랜드는 자력으로 우승할 거니까요.”
“맞아요. 썬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썬은 항상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고요.”
어른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 소년 소녀는, 지미와 주디 남매였다. 수년 전, 암표 근절 캠페인에 출연했던 어린 남매는, 이제 청소년이라 불릴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사실 지미와 주디는 이제, 원한다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안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도 있었다. 자라면서 용돈도 올랐고,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덜랜드는 원래, 미성년자 팬에게는 티켓을 매우 저렴하게 판매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남매는 아직도 풋볼 스퀘어를 훨씬 선호했다.
‘썬이, 구단주님이 우리가 축구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만들어 주신 공간이니까.’
본의 아니게 풋볼 스퀘어의 탄생에 관여하게 된 남매는, 이곳에서는 터줏대감 비슷한 존재로 통한다. 게다가 애초에 맞는 말이기도 했기 때문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른들이 하나둘씩 머쓱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보며, 주디가 배시시 웃었다.
“자, 그럼 다 같이 선덜랜드 응원해요! 선수들 나오는 중이니까요!”
주디의 선창이, 점차 풋볼 스퀘어의 함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We're Black Cats supporters.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후반, 선덜랜드의 경기력은 전반 이상으로 매서웠다.
개시 직후 크리그가 득점에 성공하며 3-0으로 달아났고, 후반 70분경에는 요니가 추가골을 뽑으며 네 골 차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선덜랜드는 우승을 향해 달렸다. 누가 봐도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최강의 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주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선덜랜드 4 - 0 미들즈브러]
마침내 사이드라인에 인저리 타임 2분을 알리는 팻말이 올라온 순간, 풋볼 스퀘어의 환호는 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선수들은 조금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리기 전까지는.
그리고 마침내.
[FC 선덜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기장 쪽에서 먼저 함성이 울렸고, 뒤이어 스크린에 자막이 떠올랐다. 풋볼 스퀘어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에 빠지려는 순간.
“잠깐, 트로피가··· 이상한데?”
누군가의 혼잣말이 풋볼 스퀘어의 모두를 잠시 멈칫하게 만들었다.
트로피 홀로그램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80년 전의 트로피가 희미해지고, 그 위에 새로운 트로피의 형상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변화였지만, 마치 영원처럼 이어지는 것만 같았다. 풋볼 스퀘어의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풋볼 스퀘어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컵 홀로그램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순간.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the World has ever seen
잠시 멈췄던 열광이 풋볼 스퀘어 전체에 퍼져 나갔다.
* * *
경기장을 뒤덮은 함성보다, 풋볼 스퀘어의 목소리가 몇 초 늦게 들렸다. 이유를 알고 있는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온 사방에서 울리는 선덜랜드 콜이, 우리가 정말로 우승했음을 실감시킨다. 굳이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 주변의 함성만 조금 달랐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이 덜랜드를 자꾸 빼먹는다.
Sun! Sun! Sun!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저 잠깐 그라운드에 내려가야 하는데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다들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걸 어째야 하나 싶었는데, 몸이 쑥-하고 허공에 끌려 올라갔다.
Sun! Sun! Sun!
어··· 덕분에 헹가래로 스탠드 맨 아래까지 이동하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바닥에 내려섰을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자 헨도의 메시지였다.
[우승 축하한다. 감사 인사는 생략해도 괜찮지만.]
[감사 인사?]
[맨시티 잡아 줬잖아.]
[뭔 소리야, 우리가 보로 이기고 자력으로 우승했는데.]
그러자 잠시 후, 헨도가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경기 시간을 봐. 우리가 먼저 끝났거든? 그럴 수밖에 없지. 우리는 총 91분짜리 경기인데, 너희는 92분이잖아?]
어?
[따라서, 우리가 이긴 순간, 이미 선덜랜드의 우승은 확정된 거지. 친정팀을 위한 배려니까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그거 차아암 고맙네.
[경기 끝난 시간이 언제인지 다시 잘 확인해 봐.]
꼼꼼하게 확인한 결과, 우리가 1분 빨리 끝냈다. 전반전에 인저리 타임이 거의 없었던 덕분에 하프타임이 빨랐고, 따라서 후반전 시작도 더 빨랐기 때문이다.
[어? 그럴 리 없는데?]
이후 헨도는 졸렬하게도 ‘지구는 둥그니까, 같은 시간대라도 정밀하게 측정하면 1분쯤은 뒤집힐 수도 있다’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아무래도 지리 공부 다시 시켜야 할 모양이다.
노스 ‘이스트’에서 태어나, 지금은 노스 ‘웨스트’ 팀에서 뛰는 헨도 씨? 그렇게 재면 차이는 더 벌어질 뿐인데요. 시계로는 똑같은 시간에 시작했어도, 실제로는 우리 킥오프가 더 빨랐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뭐, 자기 딴에는 어릴 때 떠나야 했던 친정팀을 위해 뭐라도 하나 얹어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 심정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주머니에 폰을 집어넣었다. 그 뒤로도 몇 번쯤 진동이 울렸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제부터는 진짜 바쁘니까 말이지.
에이미의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렸다.
[지금부터 FC 선덜랜드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기념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신 팬 여러분, 끝까지 자리를 빛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부터 화끈하게 지를 거다. 8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