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49화 (349/422)

단상 위에서 (1)

<축구에는 오직 단 하나의 승자밖에 없다는 것이다. 2등은 꼴찌 중에 1등일 뿐이다 - 주제 무리뉴>

우승을 확정 지은 날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 선수단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물론 ‘일부’ 언론 한정이지만, 이제 우리가 남은 경기를 대충 할 거라고 말이 많더라··· 어떻게 생각하나?”

감독의 질문에, 에디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조만간 그 유사언론은 우리 프레스팀한테 갈려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선수단의 대응을 말해 주지 않겠어?”

브라이언의 반론에, 에디가 씩 웃었다.

“그야··· 굳이 물어보실 필요나 있습니까? 당연히 박살 내야죠.”

늘 투지에 불타는 잭과 요니는 물론, 이번엔 에디까지도 보기 드물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경기 끝나고 팬분들 앞에서 트로피 들어야 하는데, 혹시 지기라도 해 봐요. 쪽팔려서 행사 어떻게 진행합니까?”

[프리미어리그 36라운드, 선덜랜드 대 본머스]

그날 우리 선덜랜드는 의외로 고전했다.

슬슬 선수단의 체력도 한계에 달했고, 다가올 FA컵에 대비해 로테이션도 돌렸다. 덕분에, 평소와 같은 경기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지고서 트로피를 드는 쪽팔림’을 감수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후반 킥오프 직후 에디의 세트피스로 한 골을 추가한 우리는, 80분경에는 톰슨의 중거리포 한 방을 추가하며 두 골 차이로 달아났다.

[선덜랜드 2 - 0 본머스]

그렇게 경기가 끝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1부 리그 트로피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승 메달도.

* * *

메달 시상은 우리 스태프들이, 그중에서도 베테랑 팀장급들이 맡았다.

[구단주님이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반문하는 스태프도 없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고집을 부렸다.

우리 스태프들에게는 이번 우승을 즐길 자격과 권리가 있다. 평소 팀의 열세 번째 플레이어라고 자부할 만큼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니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나보고 하라길래, 감독 브라이언의 메달은 내가 손수 걸어주기로 타협했다.

부주장 요니, 3주장 에디를 시작으로, 1군 선수들이 차례차례 메달을 목에 걸었다. 주장 잭을 제외한 24명의 선수가 메달을 모두 목에 건 시점에, 나는 슬쩍 페르난데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페르난데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구단주님께서, 다음은 너희 차례라고 하시는구나.”

메달 수여식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우리 유소년들이 움찔했다.

이번에, 유소년을 위해서는 모조품을 준비했다. 1군 것과 같은 디자인, 같은 재질이지만 지름을 1센티 정도 작게 해서, 모조품임을 알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원칙적으로 메달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다섯 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에게만 허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소년들이 서로 고개를 마주 본다.

“저희가 받아도 괜찮나요?”

“너희도 팀의 일원이니까, 당연히 받아야지.”

누군가는 돈지랄이라며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저 아이들은 이 팀의 미래다. 1군 선수단이 우승 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에서 동기부여를 느끼고, 모조품을 나눠 받는 행위에서는 소속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 의미로 치면, 오히려 경제적으로도 훨씬 이득이다.

저들의 이마엔 세 자리 숫자가 즐비하다. 개중에는 선덜랜드에서 뛰었던 선수 모두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숫자를 자랑하는 소년들도 있다.

고작 모조품 메달 정도로 저 소년들의 충성심을 살 수 있다면, 솔직히 헐값 아닌가? 물론 이렇게 말하면 또 희주가 시비 걸겠지만.

[오빠가 경제적 이득을 운운할 때는 보통···.]

머릿속에 쟁쟁 울리는 희주의 목소리를 지워냈을 무렵, 유소년 선수단의 메달 수여가 끝났다. 시설관리팀장 조엘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주장 잭의 이름을 호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주장···.”

잭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조엘 씨, 한 명 빼먹으셨슴다.”

“아, 참···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캡틴.”

조엘이 헛기침을 했다.

“아직 PL에 데뷔하지는 못했지만, 자매 구단에서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스물여섯 번째 선수에게도··· 마음을 담아 메달을 드립니다.”

* * *

선덜랜드의 메달 수여 영상은, 오시예크에 임대 나온 최새벽에게도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실 그도 이미 우승 메달 한 개를 획득하긴 했다. 올 시즌, 오시예크가 우승을 조기 확정했기 때문이다. 오랜 라이벌 자그레보를 맞대결에서 두 번 다 잡아낸 게 결정적이었다.

최새벽 본인은 자그레보 공격진을 홈과 원정 모두에서 셧아웃하며, ‘이고르 이후 프르바리그 최고의 수비수’라는 극찬을 받았다.

심지어 유로파에서도 워낙 맹활약을 펼쳤기에, 이 정도면 워크 퍼밋 발급에도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즉, 돌아오는 시즌부터는 원소속팀 선덜랜드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아직 돌아가지 못한 곳에서, 원소속팀 동료들이 리그 우승 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보니 살짝 마음이 시렸다. 그의 마음을 짐작하는지, 옆에서 시상식을 같이 지켜보던 오시예크 단장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직 PL에 데뷔하지는 못했지만, 자매 구단에서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스물여섯 번째 선수에게도··· 마음을 담아 메달을 드립니다.]

방송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이야기에, 최새벽은 무심코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오시예크 단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덜랜드에서 오늘 오전에 보내왔네.”

최새벽의 앞에 내밀어진 메달은, 유소년이 받은 것과 달리, 1군 선수단과 똑같은 크기를 자랑하는 복제품이었다.

그만 울컥해진 최새벽이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단장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자네는 우리에게 2년간 헌신했지. 다음 시즌, 친정팀 복귀를 미리 축하하네. 돌아갈 때는, 우승 메달 두 개를 목에 걸고 당당하게 귀환하게.”

“···감사합니다.”

“자네는 틀림없이 이고르, 혹은 에디에게 뒤지지 않는 선수가 되리라 믿네.”

“노력하겠습니다.”

간신히 목을 가다듬고 대답하면서도, 최새벽의 시선은 모니터에 못 박혀 있었다.

[끝으로, 선덜랜드의 주장··· 잭 맥그리거.]

조엘의 호출에, 마침내 잭이 천천히 단상 위에 올랐다.

팀을 대표해 우승 트로피를 가장 먼저 들어 올릴 권리를 가진 주장은, 정작 우승 메달은 모든 선수 중 가장 마지막으로 받는다.

팀의 동료들, 심지어 임대 나간 선수와 유소년까지 빠짐없이 메달을 받았는지를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목에 메달을 거는 것이다.

적어도 선덜랜드에서는 그렇게 한다.

최새벽은, 좋은 수비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저 팀에 어울리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잭의 목에 메달이 걸린 순간, 우리 선수 모두가 메달을 빠짐없이 전달받았다. 임무를 마친 조엘이 단상을 내려가는 사이, 잭의 눈이 나와 마주친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잭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선덜랜드의 최선임 스태프, 조엘 하딩.”

조엘의 발이 우뚝 멈췄다. 대체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장년의 시설관리팀장에게, 잭이 환한 미소와 함께 품에서 복제 메달을 꺼내 보였다.

“캡틴. 그게 뭡니···.”

“메달이죠. 복제품이지만요.”

잭의 이야기를 신호로, 1군 선수단 전원이 차례차례 품에서 복제 메달을 꺼내기 시작했다. 상황을 짐작한 스태프들이 내게 당황한 시선을 보냈다.

“구단주님, 이건···.”

나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눈치채지 못하게 메달을 준비한다는 건요.”

제작, 그리고 선덜랜드까지의 반입은 리미트리스에서 맡았다. 그다지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다미의 수완이면, 메달 복제품 오백 개를 조달하는 정도는 시간도 얼마 안 걸린다.

진짜 문제는 스태프들 몰래 메달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가져오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그게 가능한 존재는 우리 선수들뿐이라, 그들의 협조를 받았다.

조엘에 이어 린다, 애니, 페르난데스, 리지가 차례차례 호명되었다. 급기야 희주마저 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에, 수석코치 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구단주님, 대체 메달을 몇 개나 준비하신 건가요?”

“오백 개죠. 우리 스태프 전원에게 줄 거니까요.”

마침 1군 선수 한 명당 스무 개씩 밀반입하면 딱 맞는 숫자다. 우리 선수들이 스태프들의 목에 메달을 걸어 주는 모습을, 나는 마냥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구단주님은···.”

“저는 괜찮습니다.”

딱 잘라 말하자, 톰슨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선덜랜드의 구단주, 썬 리.”

나는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잭이 준비한 멘트를 따라 하는 거 좋은데, 본인 메달 함부로 남에게 넘겨주는 거 아니다. 특히 네 건 진품이라 절대 안 돼. 리그 사무국에서 가만 안 있을 거야.”

“뭔 소리야, 썬. 내 메달은 여기 잘 있는데?”

어, 진짜네?

둘러보자, 선수는 물론 스태프 전원이 보란 듯이 자기 메달을 목에 걸고 있다. 그런데도 톰슨의 손에서는 존재할 리 없는 추가 메달 한 개가 반짝인다.

당황한 나는 선수들을 돌아보고 말았다.

“스무 개씩 나눠 받은 거 맞지?”

옆에서 희주가 키득거렸다.

“갑부 오라버님, ‘리미트리스’에 맡겼으면서··· 정말로 메달이 딱 오백 개만 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501번째 메달은 아무래도 최다미 씨 작품인 모양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메달을 목에 걸었다. 기분 탓인지, 온 사방에서 Sun을 외치는 목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잭이 트로피를 힘차게 들어 올렸다.

* * *

[이제부터 트로피를, 클럽 박물관으로 옮기겠습니다.]

박물관 입구에서 진열대까지, 올드 팬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잠시 후, 우리 스태프에게서 트로피를 넘겨받은 마흔네 명의 올드 팬들이 마치 릴레이라도 하듯 옆에서 옆으로 트로피를 건넸다.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처음에는 기력이 없는 노인분들이 트로피를 전달할 수 있을지 조금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우리 CS팀이 보조로 붙었는데, 의외로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는 다들 기운차다.

마침내 휠체어에 앉은 조던 로스를 마지막으로 리그 트로피가 우리 진열대에 놓인 순간, 도시 전체를 뜨거운 함성이 뒤덮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트로피 진열을 마치고 이동하려고 몸을 돌릴 때, 울음소리가 났다. 처음엔 희주가 우나 싶어서 돌아보니, 아니었다.

U-15 주장 월터가 오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옆에서는 U-18 주장 짐이 우는 후배를 열심히 다독이는 모습이 보인다.

톰슨이 그 모습을 무척, 무척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런 표정 짓고 있어. 애는 또 왜 울렸고.”

“울리긴 무슨··· 우리 리그 트로피 그림 있지? 그거 저 아이가 그린 거래.”

“그랬구나.”

대답 직후, 슬며시 덧붙인다.

“그럼, 네가 울린 거 맞네.”

“시끄러워.”

투덜거리면서도, 톰슨의 얼굴은 아련하면서도 후련해 보였다. 흔히 시원섭섭하다고 표현하는, 은퇴 직전의 선수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짓는 표정이다.

그래서 덧붙였다.

“아직 안 끝났어. 리그도, FA 컵도 남았으니까.”

톰슨이 냉큼 대답했다.

“그러게, 많이 남았지.”

누군가는, 올 시즌 선덜랜드의 리그는 이미 끝났다고 말할 것이다. 우승을 확정했고,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아직 도전해야 할 기록이 남아 있다.

“무패 우승 성공하면, 비록 챔스는 못 먹었어도 전설적인 시즌이 될 거야.”

“그렇겠지··· 그리고 사실 나는, FA컵이 아주, 아주 갖고 싶어졌어.”

그러자 톰슨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컵이야 다다익선이지만, 우리 구단주는 갑자기 왜 또 FA컵에 꽂히셨을까?”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차마 맨시티가 FA컵까지 가져가는 꼴은 못 보겠고, ‘그 팀’이 설치는 건 절대로 안 되지. 첼시가 가져가는 경우는 좀 낫겠지만, 그랬다간 커뮤니티 실드가 아쉬울 것 같아서.”

“하긴, 다음 시즌 커뮤니티 실드 상대를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브라이언은 또 시티를 고를 테니까.”

리그 우승을 확정했기에, 우리는 다음 시즌 커뮤니티 실드 출전도 확정했다. 그리고 리그 우승팀과 FA컵 챔피언이 붙는 대회 규정상, FA컵 4강까지 오른 우리는 커뮤니티 실드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결정권이 있는 셈이었다.

만일 우리가 FA컵까지 차지하면, 커뮤니티 실드에서는 리그 2위를 상대하게 된다. 즉, 높은 확률로 맨시티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톰슨이 말한, ‘고를 수 있다’는 건 그런 의미다.

“뭐, 정말로 누군가 선택권을 준다면, ‘그 팀’도 나쁘지는 않아. 새 시즌 시작부터 더비 라이벌 패고 시작하면 소화도 잘되겠지. 근데 그러려면 ‘그 팀’에게 FA컵을 넘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그렇더라고.”

내 답변에, 톰슨이 투덜거렸다.

“결국, 올 시즌 끝까지 싹 다 이기란 소리 아니야. 첼시도, 맨시티 또는 뉴캐슬도.”

“맞아. 왜··· 혹시 자신 없냐?”

내 가벼운 도발에, 톰슨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도 월터처럼 그림 그려서 가져오든가.”

“그리는 건 상관없지만, 대신 요구사항이 좀 빡셀 텐데.”

“하긴, 네가 그림까지 그려서 요구할 소원이면 시즌 무패 트레블 정도겠다.”

“시즌 전승 트레블인데.”

“양심 좀. 그리고 시즌 전승이면 트레블이 아니라 전관왕 아니냐?”

“그것도 좋지.”

그렇게 나하고 잠시 티격태격하던 톰슨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번졌다.

“썬, 트레블은 다음 시즌에 잭하고 요니에게 해달라고 해. 나는 그냥, 이번에 FA컵 추가하는 정도로 만족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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