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위에서 (3)
FA컵 준결승에서 첼시를 꺾고 결승행을 확정하면서, 우리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더블, 5관왕까지 딱 1승을 남겨놓게 되었다. 심지어 FA컵 결승 상대는 맨시티 아니면 ‘그 팀’이니, 더할 나위 없는 성과다.
[오늘은 결승 진출을 확정하신 선덜랜드의 구단주, 썬 리 님을 모셨습니다.]
오늘은 브라이언 대신 내가 인터뷰를 하러 나갔다. 일단 웸블리 믹스드존에는 우리 프롬프터가 없다는 핑계를 댔는데,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썬, 오늘 기자들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꽤 매콤해 보여.]
프레스팀장 애니의 제보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웸블리에서 경기하는 특성상 기자단 통제가 다소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고, 두 가지 대기록을 앞둔 우리 선덜랜드에 대한 온 잉글랜드의 관심이 쏟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패 우승, 그리고 5관왕. 둘 중 하나만으로도 기자들이 배부를 만큼 기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 상황이라 오늘따라 피라냐 떼처럼 달려드는 모양이다.
그러니 내가 나가야지. 조금 전까지 첼시 감독이 자기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믹스드존에서 포화를 얻어맞은 것처럼, 나 또한 구단주로서 팀을 보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설 수 있다.
[당초 목표 6관왕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5관왕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셨습니다. 축하드리고, 혹시 결승 상대 어느 팀을 예상하는지 코멘트 부탁드리겠습니다.]
비꼬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경제지부터 가십지까지 두루 상대해 봤으니까. 솔직히 폭락장에 찾아오는 기자들 보면, 지금 믹스드존에서 경기 취재하며 살짝 비꼬는 정도는 일도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매콤한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의 목적은 뻔하기도 하고··· 아무튼 특종감만 생기면 만족할 것이다. 어느 특종을 줄지는 내 마음이지만.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기다리자, 기자가 재빨리 덧붙인다.
[참고로 뉴캐슬이 엄청 벼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맨시티 잡고 선덜랜드까지 꺾는다고요.]
“아, 그건 저도 봤습니다.”
SNS 내용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문장이 된다.
- 선덜랜드가 자칭 천하무적, 월드 챔피언이라면서? 그럼 월드 챔피언을 이긴 맨시티에게 이기면 우리가 챔피언임?
참고로 축구팬의 반응은 과대망상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다.
- 4강까지 온 것만으로도 잘하긴 했는데, 니들이 누굴 어쩐다고?
뉴캐슬이 맨시티를 이기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게 SNS의 반응인데, 정말로 시티 잡아버리는 기적을 해내면, 뉴캐슬로서는 결승도 충분히 해볼 만할 거라는 의견도 있다.
내 소감은요.
“사실 저희 코치진이 매일 맨시티 노래를 부릅니다. 맨시티에 지고 나면 저렇습니다. 지난 시즌엔 리그에서 졌고, 예전엔 EFL컵에서 그랬죠. 다음 시즌부터는 그만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렇게 운을 뗀 다음,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개인적으로는 그 팀··· 아, 실례했습니다. 뉴캐슬을 결승 상대로 원합니다.”
[의외군요. 선덜랜드 구단주로서 하기 힘든 발언 아닙니까?]
“사실 선덜랜드 구단주라는 입장만 아니라면, 돈을 걸 수도 있습니다. 뉴캐슬이 올라오는 쪽에요.”
[이건 센데요! 투자의 신의 ‘돈을 걸 수도 있다’는 발언! 그래놓고 혹시 역배만 선호한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눈치 빠르네. 뭐, 애초에 맨시티에 걸면 돈은 안 될 건 확실하다. 배당률이 워낙 낮아서.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나는 기자를, 정확히는 기자들 쪽에서 기다리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우리 스태프는 챔스 탈락의 아픔을 갚아주기를 원하고, 팬 여러분은 더비 라이벌을 꺾길 원하죠. 그런데 선덜랜드 구단주의 공식 답변은 일단 우리 팀에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네··· 하지만 구단주님은, 조금 전까지 뉴캐슬을 원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기다리던 질문을 이끌어낸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야 출신지라는 조건 하나를 제외하면, 저 또한 블랙캣츠이고, 맥켐즈니까요.”
* * *
같은 시각, 선덜랜드 선수들은 웸블리의 드레싱룸에서 한창 잡담을 나누며 휴식을 즐기는 참이었다.
믹스드존에서는 구단주가 시간을 벌고 있고, 경기 내용 또한 깔끔했기에, 선수들의 화제는 주로 팬들에 대한 것이었다. 선덜랜드와 첼시 팬 모두의 환영을 받은 톰슨이 주로 거론되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밖에서 이런 열렬한 환영을 받을 만한 사람은, 우리 팀에선 나 아니면 톰슨 씨밖에 없겠지.”
에디의 드립에 주위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요니가 재빨리 반박했다.
“톰슨 씨는 알겠는데, 너는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나, 에디 레이놀드는 피터 톰슨과 함께, 원소속팀과의 대전에서 홈-어웨이 팬의 플래카드가 나란히 걸린 적이 있는 유이한 선수다. 증명 종료.”
주위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시작했고, 요니는 퍽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네가 셰필드 팬에게 받았던 건 환영이 아니라··· 아니, 됐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톰슨은 무심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에디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디는 겉으로는 경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진중한 사내다. 그런 에디가 굳이 셰필드 원정에서 친정팬에게 당했던 도발을 환영이었다며 드립을 치는 이유는 역시 분위기 전환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함께한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는 당연히 분위기가 늘어지는 게 사람 심리라지만, 이긴 팀의 드레싱룸은 좀 더 밝아야 한다.
다행히 에디의 시도가 효과가 있었는지,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심 감사하며, 톰슨은 에디에게 슬쩍 눈인사를 보냈다.
선덜랜드에 처음 왔을 때는, 톰슨 자신이 맡았던 역할이다. 그는 페르난데스와 더불어 단 두 명뿐인 챔스 경험자였기에.
톰슨 역시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주장단이 훨씬 낫네. 내가 하던 시절보다.”
무심코 그렇게 혼잣말하자, 요니는 과분하다는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고, 에디는 입이 아주 귀에 걸렸다. 그리고 잭은 부드러운, 하지만 조금 염려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괜찮으심까? 오늘도 평소보다 많이 뛰셨슴다.”
“네 덕분이지. 고맙다. 모처럼 원 없이 달려 봤군. 그리고 베넷, 너도 커버 고마워.”
톰슨의 인사에, 베넷이 묵묵히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베넷은 오늘 톰슨을 받쳐주기 위해, 오버래핑 대신 중원으로 파고들어 미드필더에 힘을 실어주는 움직임을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일 텐데도, 베넷은 오늘 꽤 무리해서 톰슨을 뒷받침했다. 그런 헌신 덕분에 톰슨은, 옛 친정 팀과 지금의 팬들 앞에서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며 작별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잠시 베넷과 눈을 마주치며 감사를 표하는 사이, 옆에서 브라이언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만족했어?”
“아니라고 대답하면 벌받지 않을까?”
“벌? 벌이라···.”
브라이언의 입술이, 무척 즐겁다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썬과 상담해야겠지만, 적절한 벌이 떠오르긴 했어. 1년 더 뛰는 거야. 최고의 벌이 되겠지? 뭐, 아직 은퇴하긴 기량이 살짝 아깝기도 하고.”
“마음만 받지. 그럴 필요는 없어. 올 시즌이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낼 수 있었던 거야.”
순간적으로 드레싱룸의 분위기가 숙연해져서, 톰슨은 재빨리 덧붙였다.
“뭐, 은퇴한다고 이 팀을 영원히 떠나는 건 아니지만.”
선수의 이별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조금 더 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등을 돌릴 때가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이별한 뒤에는 언제나 다음 역할, 다른 모습이 기다리는 법이다.
브라이언이 톰슨의 옆구리를 찔렀다.
“맞아. 일단 B급 자격증부터 빨리 따라. 내가 팍팍 굴려줄 테니까.”
“네 밑에서 일하느니, 차라리 벤자민 감독님 밑이 낫겠는데.”
무뚝뚝한 목소리로, 하지만 농담처럼 대답하며 톰슨은 문득, U-15팀 주장, 월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유스팀 코칭스태프가 되는 것도 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런던의 한 레스토랑에서는, 우드 부부가 런던의 소년 팬들과 저녁을 함께하는 중이었다.
스테이크를 썰며, 토트넘 팬 소년 제이슨이 상기된 얼굴로 떠들어댔다.
“마지막 쐐기골, 톰슨 미사일 슛 진짜 장난 아니더라! 조금 더 뛰어 주면 안 되나? 선덜랜드가 안 되면 우리 팀에라도 와 주면 좋겠는데.”
옆에서 아이반이 제이슨을 노려보았다.
“톰슨이 거길 왜 가냐? 런던에 올 거면 우리한테 와야지.”
아이반의 반응은 거칠었다. 아무리 선덜랜드를 좋아한다지만, 오랜 첼시 팬 아이반으로서는 역시 팀의 패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한편 제이슨으로는, 응원하는 토트넘이 4강까지 올라오지도 못한 셈이라, 본의 아니게 자꾸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소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수잔과 마일즈가 눈빛을 교환하는 찰나, 크리스가 먼저 끼어든다.
“자아리.”
“응?”
“자아리, 세컨 보올, 시야가 제일 대단해써! 킥보다 훠얼씬!”
두 소년 모두가 조용해졌고, 서로를 향해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이 꼬마가, 지금 자기들이 생각하는 그 이야기 하는 게 맞는지 궁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수잔이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크리스는 어릴 때부터 축구 봐서 그런지, 축구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거나 막 하는 편이야.”
마일즈는 내심 수잔에게 감사를 표했다. 퍽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든 수잔이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팔불출 짓을 할 뻔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어른으로서, 소년들 앞에서 보일 수 없는 추태를 부릴 뻔했다.
잠시 헛기침을 한 다음 마일즈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돌렸다.
“톰슨 선수는 은퇴하고 코치가 될 계획이라는데.”
“우와 정말요?”
“유소년 팀인지, 아니면 성인 팀 코치인지까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코치 라이센스를 따겠다더라고.”
아이반이 불쑥 대답했다.
“유소년이면 좋겠다! 그럼 나, 톰슨 선수에게 배워 보고 싶어.”
그러자 옆에선 제이슨이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시작 못 했으면 글렀어. 재능 없는 거야.”
“하지만 선덜랜드의 디아라는 열일곱까진 카카오 농장에서 일했다고 들었는데?”
“그 선수는 딱 봐도 몸부터 다르잖아, 멍청아.”
제이슨의 지적에 아이반도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사실은 마일즈 또한 동감이었다. 디아라의, 무슨 그리스 조각상 같은 몸뚱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구단으로부터 철저히 관리받는 요즘은 말할 것도 없지만, 디아라는 심지어 선덜랜드에 온 직후부터 몸이 좋았다. 즉, 타고났다는 뜻이다.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몸을 가진 디아라와 달리, 아이반은 적어도 생김새는 아주 평범했다. 그리고 나이로 미루어 볼 때, 선수로서의 재능 또한 뛰어날 것 같지는 않다.
시무룩해진 아이반을 향해, 수잔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 노력으로 바꿀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
“그럴까요?”
옆에서 제이슨의 태클이 사정없이 들어갔다.
“노력하면 조기축구회 에이스는 되겠네. 프로선수가 되는 건 어렵겠지만 말야.”
* * *
런던을 떠나는 리무진 뒷좌석에서, 나는 스크린을 응시했다.
[팀의 일원으로서, 결승 진출이 무척 기쁩니다. 1군 선수들에게도 축하한다고 전하고 싶군요. 저도 마찬가지로,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크린에는 페르난데스가 모습을 비췄는데, 그 옆에는 벤자민과 앨리스, 그리고 유소년 주장 짐도 함께였다.
웸블리에 오지 못한 멤버들, 그들은 지금 세인트 조지 파크에 머무는 중이었다. 이름만 들으면 좀 그렇지만, ‘그 팀’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깨끗한 곳이다.
세인트 조지 파크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훈련 캠프로, 한국으로 치면 파주 트레이닝 센터에 해당하는 장소다. 유소년 경기, 특히 유스컵 4강과 결승은 전부 그곳에서 열린다.
한마디로 유소년계의 웸블리라고 봐도 될 것 같은 장소다. 우리 유소년 관계자들은 내일, 그곳에서 유스컵 결승전을 치른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뇨, 좋은 소식 전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니까요. 경기 전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이번엔 짐이 의젓하게 말했다.
[구단주님께서 와 주시면 다들 기뻐할 것 같지만,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가 걱정됩니다.]
“무리는 무슨, 어차피 올라가는 길인데.”
나하고 희주만 1군 선수단보다 조금 먼저 움직이는 거라, 무리라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꼭, 좋은 모습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화상통화를 마치고, 옆에서 희주가 불쑥 말을 걸었다.
“질 거란 생각은, 전혀 안 들지?”
“전혀.”
내일 있을 유스컵도, FA컵 결승도··· 사실은 리그에서 남은 두 경기도 마찬가지다.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신감이 있는 경기가, 바로 내일 있을 유스컵이다. 지금의 짐을 유소년 대회에 출전시키는 것은 거의 반칙에 가까울 정도, 치트키니까.
옆에선 희주가 뿌듯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잘 컸어. 누가 키웠는지.”
엄마 같은 표정 짓지 마라. 누가 짐을 키웠는지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르겠지만, 일단 희주 너는 아니거든.
그나저나, 정말로 잘 키우긴 했다··· 숫자가 바뀔 정도로.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선수는 못 된다. 단언할 수 있다. 아카데미 시절, 수많은 유소년들이 이마의 숫자를 바꾸지 못한 채 꿈을 접거나··· 혹은 그저 그런 선수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봐 왔던 나로서는.
그렇다면, 짐은 왜 변했을까?
혹시, 또 누군가를 변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