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위에서 (4)
“선덜랜드 구단주는···.”
웸블리의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나지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후 사만다가 빠르게 덧붙였다.
“우릴 엿 먹이기 위해 구단주가 된 것 같아요.”
그들로서는 하소연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은 환희에 가득 찬 상태였다. 방금 전, 뉴캐슬이 기어이 맨시티를 FA컵 4강에서 잡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마침내 기적의 업셋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챔스를 중시한 맨시티가 그냥 피한 느낌이 든다’는 비아냥도 따랐지만, 뉴캐슬로서는 훌륭한 성과였다. SNS에서는 뉴캐슬 팬들이 뜨겁게 환호했고, 구단 역시 호응했다.
- 갑부 구단주가 팀을 부흥시키는 수순? 컵 대회 우승!
[마침내 뉴캐슬이 FA컵 트로피를 향해 달려갑니다! 웸블리를 검게 물들입시다! @뉴캐슬_회장실]
당연하게도 나지프와 사만다는 곧바로 결승전 중립 좌석 확보에 나섰다. 아직 선덜랜드보다 전력이 한 수 아래임은 명백하니, 적어도 경기장 분위기에서는 우세를 점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적 때문이었다.
물론, 그 중립석은 이미 4강전을 치르기도 전에 선덜랜드 응원석으로 대체되었다. 축구계 관계자용 좌석은 물론, 대회 스폰서 쪽에 풀리는 티켓까지 전부.
덕분에 모처럼의 FA컵 결승 진출이라는 호재에도, 나지프와 사만다는 나란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과연 투자의 신··· 4강전을 치르기도 전에 결승 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단 말이군요.”
“그쪽 구단주 비서도 상당하던데요. 아주 꼼꼼하게 티켓을 쓸어갔더라고요.”
푸념을 늘어놓는 두 사람이 추가타를 얻어맞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외로 이번 뉴캐슬 결승 진출 소식이 화제가 되지 않았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한편, 이번 FA컵 4강전 결과로, 선덜랜드 구단주 썬 리의 훌륭한 안목이 다시 한번 화제다. 어제 첼시전 이후, 그는 인터뷰에서 ‘구단주라는 입장만 아니면, 뉴캐슬 진출에 배팅했을 것’이라고 밝히며···.]
“축구는 우리가 했는데··· 무려 맨시티씩이나 잡았는데.”
“왜··· 주목은 그 인간이 받는 거죠?”
* * *
U-18 유스컵 결승이 열리는 세인트 조지 파크의 관계자석에서, 나는 다소 느긋한 심정으로 경기장을 응시했다.
경기 직전, 핸드폰 진동이 일제히 울렸다. 나는 곧바로 무음으로 돌렸지만, 희주의 시선은 자기 폰에 향했다.
“오빠, 그 팀이 이겼다는데? 덤으로 오빠 어제 인터뷰도 활활 불타는 중이고, 뉴캐슬은 중립 티켓 확보에 나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대··· 몇 장이나 구하려나?”
몇 장 정도 남겨 두긴 했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나는 그래도 이럴 때 대여섯 장 정도 남겨 줄 의향이 있지만, 희주는 아주 철저하다.
“좋은 소식이네.”
담담하게 응수했지만,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자 희주가 살짝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정도는 내다볼 수 있어야 투자의 신이 되는 건가. 그래서 오늘 경기는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가 이기겠지.”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마침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U-18 유스컵 결승, 리버풀 U 대 선덜랜드 U]
경기를 앞두고, 리버풀 유스의 에이스 스트라이커 마이클이 이를 드러냈다.
“너희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테오빨은 내년부터잖아.”
마이클은 한때 테오와 함께 북부 최고의 유망주로 꼽히던 선수인데, 요즘에는 테오보다는 오히려 짐과 라이벌이라는 느낌이 되었다. 스트라이커 대 골키퍼라는 포지션 특성도 있고, 이미 U-15 시절 두 번이나 붙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엔 짐이 완벽하게 셧아웃했지만, 이후에는 4-3으로 난타전을 벌였다. 경기 자체는 두 번 다 선덜랜드의 승리였지만, 골키퍼인 짐은 아마 1승 1패라고 카운트하고 있을 것이다.
마이클의 도발이 이어졌다.
“테오빨 없이 여기까지 올라온 거 보면 운이 좋은 거는 같은데··· 결국 날 만났으니 운이 없는 거고. 참 헷갈린단 말이지.”
짐은 대답 대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밖에서 보니 투지를 불태우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장갑이 꾹 쥐어졌기 때문에.
잠시 후 휘슬이 울렸고, 리버풀 유스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 초반에는 우리 선수들이 살짝 밀리긴 했다. 우리 유소년 황금 세대는 지금 뛰는 아이들보다 한두 살 어려서, 15세 이상만 참가할 수 있는 U-18 유스컵에는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의 총전력 차이가 상당한 만큼, 리버풀 유스에 밀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축구는 골키퍼가 실점하지 않으면 일단 절대로 지지 않는 종류의 스포츠다.
“올라가!”
언제나처럼 동료를 독려하는 짐을 비웃듯, 마이클이 강력한 전방 압박을 시도했다. 우리 수비수가 위험한 위치에서 공을 내줬고, 리버풀은 곧바로 강력한 슛을 때렸다.
희주의 숨죽인 비명이나 앨리스의 탄식이 내 귀에 똑똑히 들린 순간.
동시에 짐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두 손 펀칭으로, 공을 골라인 아웃시킨 짐이 그대로 잔디에 넘어진다. 코너킥이다.
“슈퍼 세이브···.”
만일 중계팀이 붙는 프로 경기였다면 기적적인 선방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명장면이었고, 실제로 주위도 웅성거렸다. 선덜랜드 스탠드는 물론, 리버풀 스탠드와 경기장까지.
유일하게 차분한 짐은, 오히려 그 와중에 동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까딱거릴 정도였다.
이어진 코너킥에서, 리버풀은 파포스트로 공을 흘렸다. 빠져나온 공, 몸을 날리는 리버풀 공격수. 그리고 또다시 공을 밖으로 걷어내는 짐.
“괜찮으니까, 다들 자신감 있게 해.”
리버풀 유소년팀 에이스, 마이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괜찮지 않을 텐데?”
세 번째 코너킥은 페널티 스팟쯤에 날아들었다. 골키퍼에게 각을 줄이지 못하게 하려고 선택한 위치일 것이다. 그곳에서 날아든 헤더를, 짐은 이번엔 캐칭으로 잡아낸다.
첫 맞대결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대를 완벽하게 읽었다는 듯한 플레이다.
“삼 연속 선방!? 단장님, 구단주님, 이거 실환가요?
앨리스가 환호했고, 클라라는 미소를 되찾았다. 희주 역시 ‘삼 연속 선방이니까 삼연방인가?’ 같은 헛소리를 할 정도로는 여유를 되찾았다.
그 시점에서 경기의 승패는 이미 갈린 셈이다. 아무리 뛰어도 득점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선수에게서 과감성을 빼앗기 때문이다. 잠시 후, 경기의 흐름부터 기세까지, 전부 우리에게 넘어왔다.
이후에도 짐은 실점하지 않았고, 스코어보드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89분, 우리 애들이 세트피스 득점을 성공할 때까지.
[리버풀 U 0 - 1 선덜랜드 U]
휘슬이 세 번 울린 다음, 짐은 넋이 나간 마이클의 곁을 지나며 슬쩍 도발을 갚아 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너 이제 어쩌냐? 내년부턴 테오빨도 받을 텐데.”
완벽한 승리를 거둔 짐은, 단상 위에서도, 인터뷰 룸에서도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우승 축하합니다. 짐 선수는 이로써 U-15 유스컵과 U-18 유스컵을 연속으로 획득하는 진기록을 세웠는데요. 혹시 기록을 의식하고 계셨나요?]
“제 기록보다는, 더 힘든 업적을 위해 싸우는 선덜랜드 1군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뛰었습니다.”
[그러셨군요.]
“1군 팀의 시즌 종료까지, 이제 딱 세 경기가 남았습니다. 저도 오늘부터는 한 사람의 팬으로서 응원하겠습니다. 구단주님께서 어제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블랙캣츠니까요.”
차분하게, 하지만 어른스럽게 대답한 짐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마이크에 외쳤다.
Sunderland ’til I die.
세인트 조지 파크에 찾아온 선덜랜드 관계자들의 얼굴에 일제히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특히, 앨리스가 가장 환호했다.
“이거 보여주면 우리 1군 선수들도, 기운이 좀 나려나요?”
“좋아 죽겠죠.”
희주가 냉큼 대답했는데, 사실은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좋아 죽을 게 뻔하다. 특히 잭이나 요니는 약효가 너무 세서 오히려 부작용을 걱정해야 할 정도겠지. 의외로 애 보기에 소질에 충만한 톰슨도 꽤 힘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그 외에는···.
* * *
웸블리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선덜랜드 선수들은 대부분 클럽하우스에 머물기를 선택했다.
톰슨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주말의 리그 경기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굳이 원정의 피로가 남은 몸으로 귀가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마침 클럽하우스에는 메디컬 팀 스태프가 상주하기 때문에 몸 관리를 받기도 좋은 편이었다.
잠자리도 어느 호텔 못지않게 편안하다. 선덜랜드 클럽하우스는 평소 선수들이 집에서 쓰던 침구와 똑같은 제품을 갖춰줄 정도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아마 그 꼬맹이 인터뷰를 봤기 때문이겠지.’
선덜랜드에 처음 이적했을 때는, 이렇게 심장이 미쳐 날뛰는 밤이 거의 없었다. 당시 그의 심장은 스탬포드 브릿지에 있었기에.
심장을 되찾아온 이후에는, 바 블랙캣츠에서 술 한잔 털어넣고 잠드는 쪽을 선호하게 되었다. 비록 블랙캣츠 칵테일은 무알콜이라 실제로는 수면에 아무 영향도 없겠지만, 이런 건 항상 기분의 문제다.
하지만 이제 은퇴를 딱 세 경기 남겨둔 톰슨은, 평소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을 골랐다.
“땀 좀 흘리면 잠도 잘 오겠지.”
그렇게 클럽하우스에 딸린 트레이닝 룸에 향한 톰슨과 베넷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다들 잘 시간인데요.”
“그러는 너는?”
베넷이 담담하게 응수했다.
“이대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짐 인터뷰 때문에 자꾸만 피가 끓어서.”
아무래도 베넷의 증상은, 톰슨 자신의 것과 완벽하게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톰슨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래. 제길, 마냥 꼬맹인 줄 알았는데, 언제 그렇게 자라가지고는.”
“다른 선수는 원래 항상 빨리 자라죠. 스스로의 성장은 지독하게 오래 걸리는 느낌인데.”
“그럴지도.”
대답하면서, 톰슨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한번 전성기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면 쇠퇴는 또 지독하게 빠르지.’
은퇴를 앞둔 그의 입으로 꺼내기엔 너무 무거운 주제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전성기의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베넷이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이야기다.
다행히 베넷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눈인사를 보낸 다음, 잠시 멈췄던 개인 훈련을 재개했다.
웨이트를 하는 베넷의 동작은 옆에서 보기에도 절도가 있어 보였다. 흔히 선덜랜드 최고의 피지컬로는 스티븐과 잭, 에디, 바스티아노, 디아라가 거론되곤 하는데, 톰슨이 보기엔 베넷도 만만치 않다.
거대한 체격과 재빠른 움직임, 힘과 스피드의 총합이라는 점에서 보면 베넷은 팀에서 가장 우수한 운동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그리고 보통 저런 우수한 신체조건을 가진 선수는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지.’
체격이나 운동 능력은, 기술이나 축구 지능보다 훨씬 일찍 발견되곤 한다. 베넷과 비슷한 사이즈인 톰슨 자신이, 유소년 시절 첼시 유스팀 최고의 재능으로 불렸던 것처럼.
그런데도 한때 베넷은 월드컵 출전에 한이 맺힐 정도로 처절한 저평가를 받았었다. 지금은 전부 극복한 모양이지만.
가볍게 러닝머신 위에서 몸을 푸는 톰슨을 향해, 베넷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번엔 말리시더니, 이젠 별말씀 안 하시네요.”
“이제 옆에서 말리고 그럴 시기는 지났지.”
베넷도 이제 스물여덟, 선수로서의 기량이 정점에 달할 시기다. 빅 이어를 들었고, 오랜 라이벌과의 앙금도 씻어내 염원하던 국가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예전, 월드컵 승선 여부에 밤잠을 설치던 모습은, 이제 흔적도 없다.
“예전에, 심장을 찾으시면 다음은 뭘 할 건지 여쭤본 적이 있었죠?”
“그랬었지. 본의 아니게 대답을 미루게 되었지만··· 찾지 못한 건 아니었어.”
“알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대답이 필요한가?”
“아뇨.”
베넷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저도 이미 찾은 것 같아서요.”
* * *
[프리미어리그 37라운드, 브라이튼 대 선덜랜드]
주중에 치러진 FA컵 4강전에 이어, 주말에 곧바로 원정길에 오르는 일정 탓에, 선수단의 얼굴엔 미처 지우지 못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우리는 올 시즌 여섯 개 대회를 소화했고, 챔스를 제외한 모든 대회에서 결승까지 갔다. 끔찍할 정도로 가혹한 일정에 심신이 소모되었을 텐데, 눈빛만은 하나같이 맑고 기운찼다.
아마 유스컵의 영향도 상당했을 것이다. 팀의 미래라고 불리는 유소년 주장이, 우승 직후 인터뷰로 1군 선수들을 응원하는 상황은, 선수들의 마음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톰슨을 흘끗 바라보았다.
어떤 의미로, 선수단에서 가장 피곤할 사람은 톰슨이었다. 나이만 따져도 메시 바로 다음의 노장인데, 경기 중 활동량은 훨씬 많다. 심지어 올 시즌엔 팀의 리그 우승을 위해, 스스로 출전 경기를 늘리며 헌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톰슨의 얼굴은, 선덜랜드에 옮겨온 이래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해 보인다.
37라운드 원정에서, 우리는 주장 잭을 벤치에 앉힌 상태로 스타트했다. FA컵 4강전의 피로 때문이기도 했고, 올 시즌의 마지막 경기에 잭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더비 라이벌을 상대하는 경기이기도 하고, 결승전이라는 특성상 주장은 그날 반드시 출전해야만 한다.
그 빈자리를 메꾼 선수는, 오늘도 톰슨이었다.
피로 탓에 확실히 몸은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지만, 활동량이 줄었을 뿐 폼에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덜 뛰는 만큼, 평소보다 영리하고 노련한 축구를 보였다.
누군가는 아마 그의 분투를 ‘마지막 불꽃’이라고 표현하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사람은 자기 외의 무언가를 위해 뛸 때 가장 강해지는 법이며, 그게 축구라는 스포츠에 열한 명이 필요한 이유라고.
[브라이튼 0 - 1 선덜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