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위에서 (5)
브라이튼과의 경기를 지켜보는 선덜랜드 분석팀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스코어는 딱 1점 차이였지만, 경기력은 안정적이었고 위기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분석팀 신입들에게도 잡담을 나눌 여유가 생겼다.
“지난번에 맨시티는 브라이튼 상대로 멀티골 넣었었죠? 스코어가 아마 3-1이었던가.”
“네, 꼭 선언하는 것 같은 경기였죠. 맨시티 아직 안 죽었다. 리그 트로피는 내줬어도 충분히 강한 팀이다.”
선언이라는 표현이 재미있게 들렸는지, 옆에서 토마스가 끼어들었다.
“그럼, 오늘 우리 경기는 어떤 선언이지?”
그러자 신입은 잠시 경기를 지켜보며 말을 골랐다.
“딱 1점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 그러니 불필요한 난타전을 벌일 필요는 없다.”
정곡을 찌른 표현이었다. 실제로 선덜랜드 전술의 주축, 브라이언과 샐리, 루벤이 오늘 경기를 그렇게 준비했다. 토마스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마음속의 점수표에 신입의 점수를 높였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알아? 우리 브라이튼에 파견 나갈 뻔한 거.”
“네, 들었어요. 맨시티와 붙으려는 브라이튼을 전술적으로 도와주려는 목적으로 팀장님께서 파견 자청하셨다고요. 구단주님께서는 자력 우승하면 된다고 기각하셨지만요.”
신입의 깍듯한 태도에 토마스가 다시 가산점을 매기려는 찰나.
“그런데 전술적으로 도우려면 수석코치님이 가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토마스의 마음속에서 신입의 점수가 순식간에 폭락했다. 주식이었으면 시퍼런 장대양봉 하한가다. 재빨리 신입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줬지만, 이미 늦었는지 분석팀장 루벤이 키득거렸다.
“뭐, 그렇기는 해. 솔직히 그 마녀가 나보다 전술을 못 짤 것 같으면 진작에 나하고 보직 바꿨겠지.”
분석팀장은 신입의 이야기에 꼬투리를 잡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루벤의 특기는 스쿼드 관리이며, 전술보다는 선수들의 컨디션을 분석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훨씬 더 잘한다.
올 시즌 선덜랜드가 가혹한 일정에도 장기 부상 하나 없이 시즌 막바지까지 달린 것은, 절반쯤은 루벤의 공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루벤이 정말로 관리 원툴의 인물이었다면 A급 차석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역사상 세 명뿐인 만점자 샐리 바로 다음의 차석이었으니, 만일 다른 기수였으면 루벤은 수석이 되고도 남을 인재였다.
루벤은 경기장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다만 한 가지는 정정하고 싶군.”
“네? 아, 네. 팀장님이 가셔도 충분했을 겁니다.”
“그거 말고.”
루벤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목표는 무패 우승이지? 그러니까 지금 보여주는 중이야. 지지 않는 경기 운영이 뭔지를.”
그날 선덜랜드는 브라이튼의 반격을 모조리 원천봉쇄하는 멋진 경기력을 선보이며, 대기록 달성에 한 걸음 다가갔다.
[선덜랜드, 리그 무패 우승까지 앞으로 단 한 경기!]
* * *
브라이튼 전의 승리로, 우리는 무패 우승까지 딱 한 걸음을 남겨두게 되었다. 마침 마지막 경기인 38라운드는 우리 홈경기다. 그야말로 축제가 될 상황이라, 우리 스태프들이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이미 우승 기념행사까지 치렀지만, 그래도 무패 우승의 대기록은 당연히 홈팬들과 기쁨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은 오만 가지 굿즈를 찍어내는 중이었고, CS팀과 스퀘어관리팀은 소소한 이벤트를 다양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심지어 리지까지 한창 바쁘게 움직였다. 우리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줄 거라는 의욕에 활활 타오르는 중이다.
“썬, 필기체라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고딕체?”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훈련용 그라운드 위에서, 카트에 올라탄 리지가 활달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카트는 우리 홈킷 색상처럼 붉고 흰 줄무늬로 새로 도색한 상태다.
나는 리지를 잠시 바라보다 대답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겁니까? 필기체여야 가능할 것 같았는데요.”
“음, 고딕체를 원하면 쓸 수는 있어요. 획 사이는 그냥 깎지 않고 이동하면 되니까요.”
실제로 리지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훈련용 잔디 몇 군데를 캔버스 삼아 연습했고, 고딕체로도, 필기체로도 멋들어진 글자를 선보였다.
INVINCIBLE. 무적. 축구계에서는 보통 무패 우승 팀을 가리키는 별명으로 주로 쓰인다.
앞으로 딱 한 경기만 무패로 마치면, 우리는 저 칭호를 쓸 수 있다. 그날, 리지는 홈팬들 앞에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에 곧바로 글자를 쓸 예정이었다.
“필기체가 낫겠는데요.”
“어머, 고딕이 더 예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시간 차이가 조금 나서요. 이번에는 현장에서 바로 글자를 새기는 모습도 이벤트의 일부인 거니까요.”
필기체로 잔디를 깎는 리지의 카트는 거의 곡예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일필휘지라는 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처럼. 결과물은 고딕체가 예쁘지만, 카트의 움직임이나 걸리는 시간 때문에 임팩트가 부족하다.
“제가 밤을 새워서라도 더 연습하면···.”
“아뇨, 지금도 충분합니다.”
예전에, 어느 팀에선가 경기장 전체에 원형 파문을 새기는 데 네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 비하면 리지의 ‘글자 쓰기’는 거의 마술이다.
작업량이 다르기는 하지만, 속도도 훨씬 빠르거니와 작업의 섬세함도 다르다. 우리 선덜랜드가 세계 최고의 잔디 관리인을 갖고 있다는 확실한 자랑이 될 것이다.
리지가 배시시 웃었다.
“썬, 그럼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훈련장을 복구해야 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놔두시죠.”
“네? 하지만 내일도 선수들이··· 여기서 훈련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놔두세요. 선수들에게 좋은 동기부여가 될 테니까요.”
* * *
[프리미어리그 최종 라운드, 선덜랜드 대 아스널]
그날, 경기장은 진작부터 미어터졌다. 대기록 수립을 앞둔 선덜랜드 홈 팬은 물론, 중립 팬과 원정 팬까지 잔뜩 몰려왔기 때문이다.
선덜랜드 팬들의 표정엔 여유가 있었다. 이미 우승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팀이 프리미어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세울 수 있는지는 기대감이 컸다.
원정팀에 배정된 티켓도 순식간에 동이 났다. 지금까지 프리미어리그에서 유일하게 무패 우승 기록을 가졌던 아스널로서는, 역시 선덜랜드의 무패를 저지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중립 팬들은···.
“어머, 오늘은 우리보다 목소리가 더 큰 것 같은데?”
수잔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자, 첼시 팬 아이반과 토트넘 팬 제이슨이 눈을 마주쳤다.
수잔의 말처럼, 어떤 의미로 아이반과 제이슨은 홈팬들보다 더 절실하게 선덜랜드의 기록 달성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런던 라이벌 아스널의 자랑거리, ‘프리미어리그 유일의 무패 우승’에 스크래치를 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다.
“뭐, 선덜랜드가 오늘 무패 달성해도, 아스널은 여전히 프리미어리그 최초의 무패 우승이라고 떠들고 다니겠지만요.”
어깨를 으쓱하는 아이반 옆에서, 제이슨이 한숨을 쉬었다.
“영국 최초가 아닌 게 어디야. 나는 요즘 매일 프레스턴에 절하는 중이라니까?”
선덜랜드까지 달려온 두 소년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우드 부부가, 자기들끼리 시선을 맞댔다.
“이 논리대로라면, 오늘 아스널을 가장 열렬히 응원할 사람들은 아스널 팬이 아니라···.”
“조르디겠네요?”
동의를 구하듯, 수잔은 마일즈 너머 브렌든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전직 조르디, 브렌든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원정 스탠드에 얼굴이 낯익은 친구들이 꽤 보입니다.”
옆에서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유니폼은 멀쩡한데?”
“명목상 원정팀 아스널을 응원하러 온 거니까 아스널 킷 입어야지. 하지만 셔츠를 벗기면 틀림없이 검고 흰 뉴캐슬 유니폼이 드러날 거야.”
둘의 이야기에, 수잔이 키득거렸다.
“무슨 옷 아래 마귀 꼬리 감췄다는 이야기 같잖아요. 아무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수잔의 반응에, 아이반과 제이슨이 움찔했다. 사실 그들은 오늘, 선덜랜드 킷 아래에 각각 첼시와 토트넘 유니폼을 받쳐 입었기 때문이었지만···.
“으응워언! 선수들 들어오자나!”
소년들에게는 다행히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의 빼액거림에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경기장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 * *
경기는 시작부터 치열했고, 두 팀 모두 빅 7로 꼽히는 강팀다운 경기력을 보였다. 비록 스코어보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점수 이외의 모든 면에서는 난타전이었다.
덕분에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장은 계속 쫄깃해졌고, 선수들 역시 필사적으로 뛰었다.
사각지대에 절묘하게 날아드는 아스널의 슛을, 하퍼가 몸을 날려 쳐냈다. 비록 코너킥을 내주기는 했지만 선방이었다. 홈팬들의 환호와 동료들의 안도 사이에서, 하퍼가 씩 웃어 보였다.
“그래도 명색이 1군 골키퍼인데, 이걸 못 막으면 나중에 짐 꼬맹이를 어떻게 보냐.”
아스널의 코너킥에는, 평소 세트피스라면 질색하던 에디조차 머리를 들이밀며 버텨냈다.
이후에는 선덜랜드의 역습이었다.
“올라가!”
에디가 길게 걷어찬 공이 아스널 수비 뒷공간에 떨어졌다. 세트피스 공세를 위해 올라왔던 아스널 선수들이 필사적으로 복귀하는 사이, 선덜랜드의 유니폼이 쏘아져 들어갔다.
선덜랜드의 18번과 19번, JJ 듀오였다.
“제발, 제발 막아 줘. 제발··· 제발··· 안 돼!”
아스널 응원석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순식간에 더 큰 함성에 묻히고 말았다. 홈팬들의 환호를 배경음 삼아, 선제골을 뽑은 요니가 곧바로 나이얼 스탠드를 향해 미끄러졌고, 어시스트를 성공한 잭이 뒤를 따랐다.
[선덜랜드 1 - 0 아스널]
“방금 비명, 조르디 억양 같았지?”
“응, 조르디 억양이더라.”
두 사람이 원정 스탠드 쪽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자 기분 탓인지, 일부 원정 팬들의 얼굴이 유독 심하게 구겨졌다. 아마 아스널 유니폼을 입은 조르디가 분명할 것이다.
같은 시각 뉴캐슬 또한 마지막 라운드 경기를 치르는 중이다. 그런데도 일부 조르디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원정을 올 정도로 선덜랜드를 의식하는 이유는, 단순히 두 팀이 전통의 더비 라이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청 벼르고 있겠네. 다음 경기.”
“SNS 보니까 장난 아니긴 하더라··· 무패 우승 하든 말든 상관없다, 천하무적이라고 실컷 떠들어라, 마지막에 FA컵 이기면 그때부턴 뉴캐슬이 천하무적이다.”
센터서클로 돌아가면서, 요니가 SNS 반응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대사가 아주 술술 나오는 걸 보니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음에 틀림없었다.
잭이 피식 웃었다.
“실컷 떠들라고 해. 어차피 우리가 이길 테니까··· 그보다, 아스널이 훨씬 문제인데.”
“어, 그러게. 쟤들 표정 장난 아니다.”
실점 이후, 아스널은 그야말로 총공세를 펼쳤다. 어떻게든 게임을 뒤집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플레이였다.
분석팀이 파악했던, 그리고 브라이언과 샐리가 예상했던 아스널의 모습보다 훨씬 강력한 공세에, 선덜랜드 선수들 역시 의지가 담긴 육탄 방어로 맞서야 했다.
평소 육탄 방어로 잘 알려진 잭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오늘은 요니도 주저 없이 슛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심지어 에디조차 필사적으로 공과 골대 사이에 자신의 몸을 가져다 놓았다.
주장단의 그런 분투가 곧바로 선수단 전체에 퍼졌다. 하퍼가 몇 번이나 몸을 날렸고, 이고르도, 마르틴도, 베넷도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를 과시했다.
승패를 도외시한 아스널의 공세는, 그 육탄 방어에 생채기를 내는 게 고작이었다. 점수를 따라잡았지만, 그래도 게임을 뒤집지는 못했다.
[선덜랜드 1 - 1 아스널]
그날, 선덜랜드는 지지 않았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함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팬들의 벅찬 노랫소리, 박수와 환호, 그리고 감격에 겨운 울음과 팀을 위한 기도까지.
Sun-der-land, Sunderland FC.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the World has ever seen.
하지만 그 다양한 소리는 곧,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졌다. 이 경기장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I’m Sunderland ’til I die.
죽어도 한 팀만 응원하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빛의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가 대기록의 단상이 된 날.
마침내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두 번째로 무패 우승을 달성한 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