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54화 (354/422)

충성의 가치 (1)

<팀이 이기기만 한다면, 누가 득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 스티븐 제라드>

대기록의 달성 자체도, 이어진 이벤트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찾은 팬들을 대만족 상태로 몰아넣었다.

선덜랜드 시설관리팀은 하늘에 붉은 구름 모양의 폭죽을 띄우는 데 성공했고, 리지는 깔끔한 움직임으로 잔디 위에 멋들어진 글자를 새겼다.

얼마나 철저하게 연습했는지,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동작도 없이 딱 한 번의 움직임으로 글자를 쓰는 미녀 잔디관리인의 모습은, 멀리 런던에서 온 소년 축구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 사람이 영국 최고의 잔디 관리인, 미스 윌리엄슨이지? 하··· 런던에는 안 와주나?”

“정찰 아니면 절대 안 오겠지. 웸블리에서 온 스카웃 제의도 단칼에 거절했다던데? 소문이긴 한데, 대우가 너무 달라서 검토할 가치도 없었다고···.”

제이슨의 카더라 통신에, 아이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 사람 그렇게 많이 받아? 하긴, 실력을 보면 많이 받아도 이상하진 않겠지만.”

그러자 제이슨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연봉도 연봉인데, 구단이 잔디에 투자하는 금액 자체가 다르다나 봐. 이건 비밀인데, 위어강 아래 선덜랜드의 비밀 기지가 있고, 거기서 전 세계 모든 경기장의 잔디를 재배하고 있는 모양이야.”

아이반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 아래 잔디 재배시설을 만들겠냐, 바보야. 차라리 선덜랜드 시의회 건물 지붕 갈라지면서 온실이 나온다고 해라.”

티격태격하는 소년들을, 우드 부부가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실, 제이슨의 말은 온실의 위치 빼고는 전부 사실임을, 우드 부부는 알고 있었다. 선덜랜드는 예전부터 클럽하우스 뒤쪽에 대형 스마트팜을 구축했고, 그곳에서 필요한 잔디를 직접 조달하고 있었다.

굳이 홍보할 거리도 아니라 공공연하게 선전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비밀은 아니었다.

“암튼 부럽다. 우리 잔디는 그놈의 공연 때문에 아주 남아나지 않는데.”

“웸블리도 잔디 컨디션은 썩 안 좋잖아. 거기도 행사 엄청 많으니까.”

웸블리 이야기가 나오자, 소년들의 시선은 우드 부부에게 향했다.

“두 분도 결승 보러 오실 거죠?”

“당연하지. 우리는 이미 팀에서 숙소까지 지원받았거든.”

시즌권 보유자가 FA컵 결승 티켓을 구입하면 교통편과 숙소를 지원받는다. 선덜랜드에서는 늘 있는 서비스다.

“부럽다. 우린 이번에 아무 지원도 못 받았는데!”

한탄하는 제이슨을 아이반이 슬쩍 노려보며 주의를 줬다.

“야, 누가 들으면 숙박비 많이 쓴 줄 알겠다? 우리 이번에 대선배님 댁에서 묵었잖아.”

자칫하면 우드 부부가 모처럼 베풀어준 호의가 불만이었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깨달은 제이슨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런 소년들이 재미있다는 듯, 마일즈가 농담을 했다.

“뭐, 사실 우리 집이 호텔급은 아니지.“

“아뇨,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그러니까··· 그냥 부럽다 이거죠. 선덜랜드는 진짜 여러모로 돈 많이 투자하는 팀이니까요.”

그러자 브렌든이 옆에서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럼 갈아타든가. 생각처럼 그렇게 막 나쁘지는 않아. 무슨 민족의 반역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전직 조르디였다가, 더비 라이벌 팀으로 전향한 브렌든의 이야기라 그런지 설득력 자체는 남달랐다. 다만, 주위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자네는 애들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마일즈 자네는 가만 좀 있어 봐. 얘들아, 어차피 너희는 시즌 내내 딱 두세 경기 빼면 선덜랜드 응원하고 있잖아. 그렇지?”

그러자 아이반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첼시랑 붙을 때 빼고는···.”

“퍼스트 팀과 세컨 팀을 바꾼다는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야. 딱 그 두세 경기의 우선순위만 바꾸면 된다는 뜻이지. 선덜랜드 대 첼시전 이외에는 첼시를 응원하면 돼. 지금하고 똑같지.”

아이반이 거의 설득되려는 찰나였지만, 제이슨은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토트넘 팬 생활로 단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브렌든 아저씨는 타인위어 더비 아닌 날에는 뉴캐슬 응원하시겠네요?”

“어···.”

가불기를 맞은 셈이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아이반 설득에 실패할 것이고, 동의하기엔 주위에 골수 맥켐즈가 너무 많다.

결국 아이반은 지금까지처럼 첼시를 퍼스트, 선덜랜드를 세컨 팀으로 삼게 되었고, 소년들과 블랙캣츠는 FA컵 결승전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언제나 가장 위험하고 힘든 경기는··· 다음 경기죠. 그러니, 여러분의 힘을 모아 주세요. 5관왕을 위한 마지막 관문, ‘그 팀’을 상대하는 FA컵 경기에 함께해 주세요.]

* * *

[FA컵 결승, 선덜랜드 대 뉴캐슬]

도박사들은 4강전 직후부터 선덜랜드의 낙승을 예상했고, 어쩌면 팬들 또한 특별한 긴장감 없이 이번 경기를 바라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선덜랜드는 올 시즌 이미, FA컵 우승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목표를 수도 없이 이루었기 때문이다.

다만, 선덜랜드 선수들에게는 이번 결승전이 훨씬 의미 있는 경기였다.

“오늘만 이기면 정말 5관왕이죠?”

비록 시즌 초반에 목표로 삼은 6관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이지만, 그래도 축구계에 남을 대기록임은 변함이 없다.

톰슨에게는 한 가지 의미가 더 추가되었다. 이번 경기는 그가 선수로 뛰는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엄청 떨릴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톰슨은 놀라우리만큼 차분했다. 이제 곧 은퇴할 베테랑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정말 마지막이기 때문에, 떨릴 겨를도 없을 만큼 집중하고 말았던 걸까.’

그런 톰슨의 눈에, 평소보다 안색이 창백해진 프랭크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늘 프랭크는, 브루노를 대신해서 라이트백으로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떨리냐?”

톰슨이 슬쩍 말을 걸자, 프랭크가 바짝 마른 입술을 몇 번 핥고 나서 대답했다.

“조금··· 아뇨, 사실 많이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 같네요. 톰슨 선수는 엄청 차분하신데···.”

프랭크의 시선에서 희미한 기대가 느껴졌다. 어쩌면 긴장을 가라앉히는 비법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톰슨이 웃었다.

“그야, 축구는 평상심이 중요하니까. 그렇다고 억지로 긴장을 가라앉힐 필요는 없어.”

“그런가요?”

“어차피 상대가 더 많이 긴장하고 있을 테니까. 그 팀은 FA컵에 엄청 오랜만에 오잖아?”

“그렇군요! 그쪽이 훨씬 많이 긴장하고 있겠네요. 생각보다 쉽겠는데요.”

하지만, 축구라는 스포츠는 꼭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터져나온 함성, 그 메아리가 끝나기도 전에 사고가 나고 말았다. 선덜랜드의 패스미스가, 하필이면 뉴캐슬 공격수의 발에 걸리고 만 것이다.

선덜랜드에게는 치명적인 위기, 뉴캐슬에게는 결정적인 찬스였다. 그리고 이번 시즌 초 거액의 이적료로 영입된 뉴캐슬 공격수는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선덜랜드 0 - 1 뉴캐슬]

흔들리는 네트, 실점을 알리는 스코어보드는 언제나 톰슨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팀이 이루려는 5관왕이라는 대업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자신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패배로 얼룩질 가능성도 톰슨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톰슨이 가장 싫었던 것은 상대가 뉴캐슬이라는 점이었다.

‘하필 그 팀이냐.’

톰슨은 런던 태생이지만, 기본적으로 축구계에서 오래 활동한 베테랑이다. 더비 라이벌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는 당연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친구 이희성과 브라이언에게 뉴캐슬에 대한 감정을 전해 듣기도 했다.

뉴캐슬과의 맞대결에서 트로피를 넘겨주는 일만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었기에, 톰슨은 주먹에 꾹 힘을 넣었다.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역습 찬스는 금세 찾아왔다. 주장 잭의 헌신적인 태클이 뉴캐슬의 빌드업을 끊어낸 순간, 선덜랜드 공격진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톰슨 또한 가속했다. 흘러나온 공을 확보해, 전방을 달리는 공격진에게 넘기는 것은 이 팀에서 그가 계속 반복해온 임무였기에.

“들어가! 카운터다!”

수년간 호흡을 맞춘 선덜랜드 공격진에게 패스를 전할 루트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톰슨은 패스를 보내기 위해 크게 발을 휘두르려 했다.

그때, 디딤발 발목에서, 종아리에서, 혹은 그 어딘가에서 둔탁한 느낌이 전해졌다. 잠시 후 그 느낌이 날카로운 통증으로 바뀐 순간, 톰슨은 자신이 잔디 위를 구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공은?’

다음 순간,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사실 오늘 경기는 초반부터 조짐이 썩 좋지 않다고는 생각했었다.

리그에서 무패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다 보니 아무래도 선수들의 긴장이 조금쯤은 풀리고 말았을 것이었고, 5관왕이라는 새로운 업적에 대한 부담과 결승전에서 더비 매치를 치른다는 압박감 또한 선수들의 몸을 무겁게 했을 것이다.

사소한 실수가 이른 시간의 실점으로 이어지자, 우리 선수들은 명백히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자랑스럽게 두 팔을 벌려,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던 뉴캐슬 감독 시어러의 모습도··· 썩 유쾌하진 않다.

그래도 염려하진 않았다. 실점은 늘 불쾌한 일이지만, 우리는 상대보다 훨씬 강한 팀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또한 많이 남아 있었으니, 당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톰슨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어떡해.”

희주가 망연하게 울먹였고, 나 또한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선수의 부상은 언제나 항상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금껏 이토록 마음이 저며진 적은 없었기에.

태클당한 다리를 감싼 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톰슨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다. 방향은··· 사이드라인 쪽이었다.

어떻게든 사이드라인 밖으로 나가려는 그의 모습에,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톰슨이 저렇게 움직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사이드라인 안에 선수가 쓰러져 있으면, 심판이 경기 멈출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을 것 같긴 하다. 동점으로 따라잡을, 그야말로 절호의 역습 찬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휘슬은 이미 울렸고, 심판은 뉴캐슬 미드필더에게 치즈 한 장을 안겼으며, 그라운드 안에는 의료진이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즉, 경기는 이미 멈췄다.

그런데도 고통스러워하는 톰슨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 사이드라인을 향해 몸을 굴리고, 기었다.

어떻게든 경기를 멈추지 않으려던 그의 처절한 몸부림은 이미 실패했다. 그리고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서는, 은퇴 경기를 끝까지 뛰겠다던 포부마저 멈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 선수들에게, 제대로 불이 붙어 버렸어.”

사이드라인 밖으로 실려 나간 톰슨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처럼 덧붙였다.

“네가 붙인 거야.”

잠시 후 교체를 알리는 팻말이 올라왔다.

[아웃, 6번 톰슨 - 인, 22번 크리그]

* * *

구단주의 ‘불이 붙었다’는 표현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선덜랜드 선수단은 잔뜩 격앙된 상태였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교체는, 선수로서의 마지막 공식전에 어울리는 마무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끝까지 뛰거나, 아니면 종료를 몇 분 앞두고 교체되어 박수를 받으며 걸어 나가는 작별이 정석이다.

“개자식들. 이제 곧 은퇴할 선수에게 감히 그따위 태클을.”

바스티아노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눈에서는 당장에라도 상대에게 달려들 것처럼 흉흉한 기운이 뚝뚝 떨어졌다.

주장 잭이 바스티아노의 어깨를 슬쩍 눌렀다.

“일부러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저쪽도 하얗게 질려 있어. 게다가··· 끝까지 뛰지는 못했더라도, 오늘은 톰슨 씨 은퇴 경기다. 그러니까 우리까지 거친 플레이로 개판을 만들지는 말자.”

잭의 이야기에 바스티아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캡틴,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넘길 순 없잖아?”

“누가 그냥 넘긴대?”

잭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옆에선 요니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철저하게 갚아 줘야지. 단, 정당한 플레이로.”

* * *

실려 나온 톰슨은, 치료를 받으며 경기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따낸 프리킥이, 수비를 등지고 선 바스티아노에게 전해지는 중이었다.

가슴으로 공을 받아내 떨어뜨린 바스티아노가 곧바로 왼발로 공을 밟듯이 멈춰세웠고, 발바닥으로 공을 끌듯이 움직였다. 잠시 후 그의 오른쪽 뒤꿈치가 공을 강타했다.

지독하게 우아한 패스가 수비 뒷공간에 떨어졌고, 교체 투입된 크리그가 필사적으로 공을 추격해 걷어찼다.

[선덜랜드 1 - 1 뉴캐슬]

잠시 후 보여진 장면에, 톰슨은 그만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예상과 달리 동료들이 세레머니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을 들고 하프라인으로 달릴 거라 생각했었다. 작년의 챔스 우승팀, 올해의 ‘무패 우승’ 선덜랜드라면 뉴캐슬과 비기고 있다는 지금의 상황조차 썩 기쁘지 않은 일이기에.

그런데도 선수들이 다 같이 세레머니 중이었다. 평소에 세레머니라고는 하지 않던 크리그도, 뉴캐슬이라면 이를 갈 잭과 요니도, 잔뜩 얼어붙은 상태로 경기를 시작했던 프랭크도 일제히 두 팔을 좌우로 벌린 채 달렸다.

동료들의 모습에서, 자신이 현역 내내 애용하던 세레머니 동작을 알아본 톰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메디컬 팀장 버드의 질문에, 톰슨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죠··· 평상심을 유지할 자신이 없습니다.”

어느새 웸블리의 서쪽 스탠드를 배정받은 선덜랜드 팬들이 일어나 있었다. 팬들 역시 톰슨의 세레머니를 알아봤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너무 행복해서요.”

자신을 위해 뛰는 동료가 있고, 기억해주는 팬들이 있다. 그러니 경기 종료 직전, 기립박수를 받으면서 교체되었더라도 이보다 영광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입니다. 팀이 이기면 더욱 완벽하겠군요.”

“이길 겁니다. 당연하게도.”

아직 스코어는 1 - 1, 경기는 팽팽했고, 자세히 따지자면 선덜랜드가 살짝 불리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교체 카드 한 장을 미리 써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팀이 질 거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기에, 톰슨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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